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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와 만물의 내력(2)
창 2:1-7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 설 교 >
생기 넘치는 인생
조학환목사 / 창 2:4~7
1. 생기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생기가 넘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이나 행동에 활력이 있고, 생동감이 있고, 얼굴이 밝아야 하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걸어 갈 때에도 활기가 넘쳐야 하고, 찬송도 좀 힘차게 기쁨에 넘친 모습으로 부르고, 예배를 드릴 때도 감격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할 사람들입니다. 계22:5절을 보십시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보세요. 우리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왕노릇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만 왕노릇하고 지금 여기서는 거지 노릇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만 왕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벧전2: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보세요. 우리가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왕같은 제사장이 뭡니까? 제사장은 제사장인데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겁니다. 왜 제사장입니까? 세상과 분리되어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특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며 거룩한 모습으로 세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제사장이기도 합니다.
그럼 왜 왕입니까? 일단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왕인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인 우리는 왕자이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이길 수 없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로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를 비롯한 모든 어둠의 세력들과 상황과 환경과 사람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왕같은 제사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생명의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혹시 삶의 현실 속에서 우리를 좀 힘들게 하는 일들이 있더라도 성령의 능력으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무엇이냐, 너의 쏘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넉넉히 이기느니라하면서 큰소리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빌4:13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보십시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힘센 장수라도 내가 힘이 없어 못 당하면 그 장수보다 힘이 열배나 강한 장수를 데려오면 이길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그러니 하나님이 내 편이시면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왕성한 생명력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활기차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힘차게 감사하며 기뻐하며 씩씩하게 용감하게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까? 좀 힘들어도 까짓것 힘들면 얼마나 힘들겠느냐하면서 당당히 맞서 싸우며 나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어느 부모가 자녀가 조금 힘들다고 죽을상을 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근심 걱정 탄식하며 세상 다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한숨이나 푹푹 내쉬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자녀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그러나 자녀가 좀 힘들어도 당당히 맞서 싸우며 활기차게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놓이고 대견스럽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로써 하나님의 백성,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시민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더욱 활기차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뭔가 마음과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있어도 모든 어둠의 권세를 이미 이겼고, 또 이후로 다가올 모든 어둠의 세력들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의지하며 활기차고 용감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생기를 충만하게 공급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활기찬 삶을 살려면 생명의 에너지를 충만하게 공급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뭔가를 이기려면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뭔가를 힘차게 움직이게 하려면 그것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우리 앞에 있는 벽을 무너뜨리려면 그 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 있든지 장비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또 자동차가 힘차게 움직이려면 기계적 성능도 좋아야 하지만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는 기름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인생도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장벽을 무너뜨리고 더 나아가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힘차게 달려가려면 그렇게 달려가게 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허우대만 좋다고 벽을 무너뜨리고 힘차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벽을 무너뜨리고 힘차게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육체에 힘을 주는 양질의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체에 필요한 영양소들이 육체에 공급이 되고 일부는 산소와 만나 산화작용을 일으키면서 신체 각 부분에 에너지를 공급함으로 비로소 몸에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앞에 놓여져 있는 벽을 무너뜨리고 힘차게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올바르게 깨끗하게 아름답게 진실하게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올바르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정신적인 양식을 충분하게 계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윤리적 도덕적 철학적 교육도 받아야 합니다. 올바르고 진실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것들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계속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올바른 인격형성에 필요한 에너지를 계속 공급받아야 비로소 올바른 인격을 갖추어 어려움도 이겨내고 선과 진리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태를 보면 이런 올바른 인격에 필요한 에너지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죽어라고 부자 되고 높아지고 편하게 쉽게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기술만 공급합니다.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맨 날 공부 잘해라. 1등해라. 높아져라. 돈 많이 벌어라. 이런 따위 들입니다. 그래서 고작 한다는 인사가 부자 되라는 것입니다. 그게 최고의 축복의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라고 컴퓨터나 스마트 폰을 가지고 노는데 게임들이 대부분 싸우고 죽이고 빼앗고 정복하고 높아지고 폭력적이고 선정적이고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것들입니다. 그렇게 늘 폭력적 선정적 이기적 배타적 물질적 에너지만 공급되니까 사람들이 결국 폭력적 선정적 이기적 배타적 물질적 성향이 강한 인생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며칠 전 뉴스에 보니까 열일곱살배기 소년이 스물한살날 친누나를 칼로 수차례 찔러 중상을 입혔는데 이 소년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폭력적인 컴퓨터 게임을 주로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그날도 4시간동안 폭력적 게임을 한 후에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 폭력적 에너지만 잔뜩 공급받으니까 인성이 마비되고 아름답게 사랑하며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게 하는 에너지는 점점 줄어들고 폭력적 부정적 반항적 에너지가 자꾸 축적되고 그런 부정적 에너지를 조절할 수 있는 자율신경이 제 기능을 잘 못하게 되니까 그런 끔찍한 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우리 생명을 아름답게 하고 깨끗하게 하고 참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귀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그렇고 영적으로는 더더구나 그렇습니다. 자연인은 그러지 않아도 죄로 말미암아 영성이 거의 죽어있기 때문에 영혼에게 생명을 주고 올바르고 진실하게 아름답게 거룩하게 감사와 기쁨으로 생명력이 넘치게 하는 에너지를 듬뿍 공급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에너지가 뭡니까? 그게 바로 오늘 7절에서 말씀하는 생기입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람을 만들 때에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물론 흙으로 만든 육체는 생명도 기쁨도 감격도 능력도 없는 그냥 흙덩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생명력 없는 흙덩이가 어떻게 살아 움직이게 되었습니까?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생령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생기가 뭡니까? 영적 육체적 정신적 생명력을 가지고 살게 하는 생명의 기운입니다. 그러면 생령은 뭡니까? 살아있는 영혼, 즉 생명과 기쁨과 감격과 은혜와 사랑 속에서 뭔가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영혼인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 즉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축복과 희망과 소망을 마음껏 누리며 살게 하는 그 생명의 기운이 우리가 가운데 들어올 때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고 그 생기가 충만해 지면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생들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이 생명의 에너지를 거의 상실함으로 하나님께서 본래 주셨던 생명의 은총이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끝내 이것을 회복하지 못하는 인생은 영원한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과를 도말하시고 나아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사기(死氣) 즉 죽음의 기운을 제거하고 생기(生氣) 즉 생명의 기운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고 따르는 자들은 생기가 다시금 우리 영혼 속에 들어옴으로 진정하고 영원한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믿고 그 생기를 받았다고 하는 우리들조차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도리어 축 처져서 살 때가 많습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살지 못하고 도리어 근심 걱정 원망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지 못하고 도리어 미워할 때가 많습니다.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여 가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에 질질 끌려 다니며 심지어 악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거룩하고 의롭고 고귀한 삶을 살지 못하고 도리어 추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를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충만하게 공급받아야 하는데 겨우 목숨을 부지할 만큼만 받아 그나마 다행으로 죽지는 않았는데 생명의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육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육신이 계속해서 왕성하게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밥을 먹어야 하는데 한번 먹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육신을 힘 있게 움직이게 하는 생명의 에너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영양가 높은 음식을 공급해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또 식물도 잘 자라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하려면 식물이 자라고 열매를 맺는데 필요한 수분과 영양분이 떨어지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영혼도 그런 것입니다. 영혼이 생명을 유지하고 왕성하게 움직여서 풍성한 영적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시는 생기를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충만하게 공급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혼에 생기가 있고 힘차게 움직이고 그래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생기를 계속해서 공급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 나와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예배생활에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신앙적 행위가 먼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요, 나아가서는 우리 영혼이 정말 생기 있게 풍성하게 아름답게 힘차게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는 영적인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일이요, 생명의 산소를 공급해 주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시1:1,2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래서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하신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 영혼에 양질의 양식을 공급할 때에 죽어있는 영혼들이 살아나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 영혼 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기로 가득차고 그러면 그 생명의 에너지가 우리 속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솟아나게 하여 생명력이 넘치게 나아가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게 힘차게 나아가게 함으로 생명의 풍성하게 맺게 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 심령 속에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데 어찌 그 삶이 힘차게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우리 심령가운데 생명과 기쁨과 감사와 평강과 소망의 기운이 넘치는데 어찌 그 삶이 활기차지 않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생명과 진리와 선의 에너지가 넘치는데 어찌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지 않겠으며,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갈 때에 어찌 생명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그러한 생명의 에너지를 풍성하게 공급받을 수 있는 교회에 열심히 나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쓸 때에 생기가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생기의 통로를 막고 있는 찌꺼기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우리는 생기가 충만한 곳을 가까이해야 하는데 그때에 한가지 더 유념해야 할 것은 생기가 흘러들어오는 통로를 활짝 열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기를 받는데 방해가 되는 찌꺼기 같은 것들을 제거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생기가 넘치는 곳을 찾아와도 그 생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가 좁아져 있거나 막혀 있으면 어떻게 생기를 충만하게 받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심장이 아무리 힘차게 펌프질을 해서 피를 내보내도 혈관에 진득진득한 것이 달라붙어 있어서 혈관이 좁아졌거나 막혀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수지에 아무리 물이 가득해도 수로가 막혀 있으면 어떻게 논에 물을 대겠습니까?
영적으로도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아무리 생기가 가득해도, 그래서 그 하나님 안에 있는 생기를 공급해 주는 교회를 아무리 열심히 찾아도 우리 영혼에 생기를 공급하는 통로가 좁아져 있거나 막혀 있으면 생기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거나 두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가 조금 밖에 들어오지 못하면 근근이 생명을 유지한다해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이요, 만약 완전히 막혀 있다면 그 영혼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가 우리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찌꺼기들을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찌꺼기가 뭡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이 죄와 무지와 어둠 속에 있는 세상에 살면서 굳어진 왜곡되고 잘못된 생각들과 가치관과 경험과 지식과 인본주의와 물질주의와 이기주의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왜곡된 가치관으로 말미암아 우리 심령 속에 자리잡고 있는 시기나 질투나 거짓이나 분노나 염려나 이기심이나 이런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생기의 통로를 막아버리는 찌꺼기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생기가 영혼 속으로 들어오는 통로를 좁게 만들거나 막아버림으로 생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생기를 충만하게 받으려면 그 생기를 받을 수 있는 교회를 열심히 찾는 것과 더불어 그러한 모든 왜곡된 경험과 지식과 이성과 욕심과 악과 미움과 그 밖의 모든 왜곡된 가치관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6:24절에서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고, 엡4:22절에서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얼마나 죄와 무지와 어둠과 한계 속에 있는 존재인지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존전에 열심히 찾아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찾아 나오되 내 생각 이성 경험 지식 다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주님의 생기가 충만하게 영혼 속에 흘러들어옴으로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은혜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기고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생기 넘치는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 도 )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이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게 하심에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이다.
그러하오나 주님이시여, 저희가 아직도 믿음이 부족하여 주님께서 주신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을 온전히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나이다. 오, 주님이시여,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진실로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주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생기의 통로를 막고 있는 모든 인간중심적인 생각들, 물질만능주의적인 사고들, 그로 인한 모든 욕심과 시기와 질투와 모든 어두운 모습들을 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섬김과 겸손의 삶으로 생명의 통로가 활짝 열려 하나님의 생기를 충만하게 덧입어 온전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며 이 땅 모든 이들에게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소망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교회, 하나님의 계획
창 2장 4~17절 / 권오서감독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1.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이 아닌 생명나무를 함께 두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인간은 전적으로 피조물이라는 관계를 분명히 밝히기 위함입니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은 우리를 통치하시는 분이시며, 피조물인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춰볼 때, 교회는 하나님 한분만을 인정하고 그분이 우리를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 교회가 교회다워집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교회는 인정받으셔야 할 하나님은 안 계시고,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셔야 하는데, 사람들이 높임을 받으려고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시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일단 교회에 왔다면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습니다.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11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12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2.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에덴동산에는 네 개의 강이 있었습니다. 사실 강이 몇 개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강의 특성입니다. 물이 있다고 해서 강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강을 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굽이 쳐 흐르기 때문입니다. 강에는 물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풀이 있고, 나무가 있고, 박힌 돌이 있습니다. 하지만, 물은 계속해서 흐릅니다. 흘러 흘러 바다를 이룹니다. 우리는 이러한 강물을 보면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봅니다. 아무리 깨끗한 물도 고인물이 되면 점점 탁해져 결국에는 생명을 빼앗아 가지만, 계속해서 흐르는 한 곳곳에 있는 생명을 살리는 고귀한 물이 됩니다.
머리로만 하나님을 믿으려했던 최갑홍 씨는 이런 간증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후 나는 이적을 구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그러한 믿음으로 나는 네 차례나 수술을 받았던 축농증이 성령의 능력으로 완쾌됐을 뿐 아니라 방언의 은사도 받게 됐다.”
에스겔서 47:9~12절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보다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성도들을 뜻합니다.
누가 이 세상을 살릴 수 있습니까? 죄로 물든 이 세상을 누가 살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세상을 살릴 수 있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성도들로써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교회에 나아와 은혜 받고 그 은혜를 흘려보낼 수 있는 성도들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교회에 나올 때에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실 은혜가 무엇인지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나오세요. 그리고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를 가지고 가정으로, 일터로, 직장으로, 샘터로 흘러 들어가야 합니다.
말씀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우리 교회가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3.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독처하는 아담을 위해 돕는 배필을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에덴동산은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친히 아시고, 그것을 채워주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곳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 삶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옴으로써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이라는 것을 주심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안식이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 그분이 주시는 모든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안식입니다.
세상에서 살다가 지친 영혼들이, 상처입은 영혼들이, 병든 영혼들이, 근심과 걱정과 염려로 불안해하는 모든 영혼들이 나아와 세상의 모든 짐들을 내려놓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빌4:18)”고 고백한 사도바울처럼,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로 인해 우리들의 필요가 채워지고 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의 필요가 채워졌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채워졌습니다. 구하지 않아도 채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에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맡길 때에는 모든 필요가 채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사
창 2장 1~3절 / 이영훈목사
오늘은 창세기 2장 1절로 3절을 본문으로 하여서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사” 이와 같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제목을 큰 소리로 따라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복 받기 싫어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새해 어디서든지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복 많이 받으세요. 복 많이 받으세요.” 그 복만 다 쌓아놔도 엄청나게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미국에 유학 갔을 때 대학원 기숙사 아파트 마주보고 있는 집이 중국 유학생이 살고 있는 집이었는데 정초가 되면 ‘복’자라는 한문을 거꾸로 써서 이렇게 붙여놨어요, 알고 보니까 중국 사람들이 이렇게 ‘복’자를 거꾸로 써서 정초가 되면 다 붙여 놓는답니다. 복이 막 쏟아지라고. 그러나 아무리 빨간 종이를 뒤집어 놓고 어떻게 붙여도 그래도 복이 쏟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근데 사람들이 말하는 복은 무엇입니까?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이것이 복입니까? 그렇다면 부자들은 다 행복합니까? 권력자들이 다 행복합니까? 권력의 정점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그것이 불행이더라고요. 오래 산다고 다 행복하게 오래 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우리 마음 가운데에서 넘쳐나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행복이 진정한 행복인데 이 행복은 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매 예배 때마다 우리는 만복의 근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예배 순서여서 그냥 찬양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우리의 고백입니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께서 이 시간 나에게 복을 내려주옵소서. 내가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믿음의 고백으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게 될 때 우리에게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해서 영적인 존재로 만들어 주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 28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복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복 받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살아갈 때 그때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린 문의 복을 각자 각자에게 허락해 주시고 쌓을 곳이 없이 넘치게 많은 복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시편 144편 15절은 말씀합니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야훼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 그 백성은 복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여러분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 복 받은 존재입니다. 늘 우리는 고백해야 됩니다. “나는 예수 믿고 복 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고 나는 복덩어리입니다.” 할렐루야.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 안식하시며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1. 일곱째 날 안식하신 하나님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창세기 2장 1절과 2절은 말씀합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엿새 동안 온 천하 만물을 말씀 하나로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하나님이 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1절입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야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야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 안식일은 복 되고 거룩한 날입니다. 그래서 이날은 개인의 유익을 위한 모든 세상일을 쉬게 하시고 주님 앞에 감사하며 예배드리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0절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야훼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우리가 참 바쁘고 힘든 삶을 살아도 주일이 되면 세상일을 내려놓고 몸과 마음이 쉬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영적으로 재충전해서 주님이 주신 그 영적인 축복을 가지고 한 주간 또 승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수많은 축복 가운데 안식일의 축복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만일 안식일에 축복이 없었다고 하면 우리는 번 아웃 해서 피곤하고 지쳐서 일찍 세상을 다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무신론 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주일예배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열흘에 한 번으로 쉬는 날을 바꾼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모든 생산량이 40%나 감소했습니다. 러시아 혁명 때는 레닌이 일주일을 8일로 바꾸었더니 생산량이 30%가 줄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육간의 건강한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며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이 주일을 안식일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시편 118편 24절입니다.
이 날은 야훼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우리가 일주일에 하루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첫 태생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고 또 구약 성경을 보면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모든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고 하나님께 영광 돌림으로 큰 복을 받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날
안식일은 주님께서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날입니다. 창세기 2장 3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이날을 복 되게 하셨다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앞에 예배드리는 자가 복 받은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일요일에 부활하셔서 지금은 일요일이 안식일, 주일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8절입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6장 9절입니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예수님 당시까지만 해도 토요일 날은 안식일로 지켰는데 예수님이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심으로 그들로부터 모든 초대교회 전통이 주일날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전통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사도행전 20장 7절 보면 이와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주일날 사도 바울이 가서 말씀 전할 때 얼마나 저들이 은혜를 사모했던지 밤중까지 설교를 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께서 일요일에 부활하신 이후에 모든 크리스찬들이 주일날 모여 예배를 드리는 전통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은 토요일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를 믿으면 받는 것이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감사와 감격으로 드리는 날이 주일인데 “토요일을 지켜야 구원받는다. 토요일 지키지 않으면 구원 못 받는다.” 하는 것은 잘못된 교회이고 잘못된 가르침에 저들이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킬 때 하나님께서 복에 복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수주일하여 복 받은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조상들이 성수주일 해서 복을 받았습니다. 저희 할아버님이 얼마나 철저하게 주일성수를 강조하시는지 “주일날은 그 어떤 세상일을 하면 안 된다. 뭐 나가서 뭐 사 먹고 물건을 사고 하는 것도 주일날은 하지 말고 뭐 물건 살 거 있으면 토요일 날 다 하고 주일날은 예배드리는 일에만 전념해라. 주일날은 만화도 봐선 안 되고 TV에서 오락프로를 봐서도 안 된다.” 아주 전통적인 우리 한국의 장로교 보수인 장로교의 가르침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셔서 우리 온 가족은 성수주일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단 한 번도 유행가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 집에 갔더니 TV에서 오락프로를 하는데 처음으로 제가 거기서 유행가를 들었습니다.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박재란이라는 사람이 ‘산 너머 남촌’을 부르더라고요. 지금 부르진 않겠습니다. 하여간 제가 태어나서 제일 처음 들은 곡이 그 곡이기 때문에 ‘아 저런 노래도 있구나.’ 그렇게 제가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성수주일 하면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존 와나메이커’라고 하는 미국의 체신부 장관입니다. 미국의 크리스천 사업가이며 마케팅이라고 하는 분야를 개척한 분입니다. 이분이 체신부 장관이면서 성수주일하기 위해서 4년 동안 워싱턴 DC와 필라델피아를 기차로 왕복을 했습니다. 약 10만 마일을 왕복하면서 성수주일하며 교회학교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미국의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이 그를 체신부 장관으로 불렀을 때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각하. 주일날 필라델피아로 돌아가서 예배드리고 교회학교 교사를 하는 것을 허락하면 제가 장관직을 수락하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주일날 필라델피아에 내려가서 교회를 섬겨도 좋다.” 약속을 받고 1889년부터 1893년 동안 4년간 체신부 장관으로 봉사합니다. 토요일이 되면 기차를 타고 필라델피아에 올라가서 주일날 교회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주일날 오후에 다시 워싱턴 DC로 내려왔습니다.
그가 장관으로 있을 때 미국 내 전교회에 교회학교를 창립했고 기독교 신문 잡지를 발행해서 종교와 교육 사업에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처럼 주일을 지키고 예배에 힘써 복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존경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일 날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과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선한 일을 하는 날입니다. 나 개인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그럼 기준이 애매해지는지 모르겠는데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면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주일날 살아가면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주일날 일하지 말라고 그랬다고 그래서 의사 선생님이 병을 안 고치면 그날 사고 나서 다친 사람들은 어떡합니까? 선한 일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릴 일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유익을 주는 일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주일날 일하지 말라 그랬다.” 그래서 버스 운전하는 분이 다 쉰다 그러면 어떻게 교회를 옵니까? 선한 일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개인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서 가진 것이 많은데 더 쌓아 놓으려고 주일날 일하지 말라 그 말씀인 것입니다.
3. 복 받는 비결
기쁨으로 주님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십니다. 복 받는 비결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할렐루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우리에게 폭포와 같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복 받는 비결을 신명기 28장 1절로 14절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1절, 2절에 그 조건이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야훼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야훼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말씀을 지켜 행할 때 형통의 복이 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절로 6절입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할렐루야. 하나님 뜻대로 살아갈 때 말씀을 지켜 행할 때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12절, 13절에 계속해서 축복이 이어집니다.
야훼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야훼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할렐루야! 남에게 꾸어줄지언정 꾸는 자가 되지 아니하고 위에 있고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면 이와 같은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생 살아가는 동안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주님의 복 받은 자녀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우리에게 퍼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올림픽사에 길이 남을 에릭 리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분은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님의 아들입니다. 중국 텐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에릭 리델은 어릴 때부터 육상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에딘버러대학 가서 그가 달리고 난 모든 단거리 경주에서 다 우승을 했습니다.
1924년 제8회 파리에서 올림픽이 열릴 때 당연하게 영국 대표로 출전하게 되었고 100m 금메달은 그가 다 목에 걸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100m 달리기 예선 경기 날짜가 7월 6일 주일이었습니다. 선교사님 자녀로 철저하게 성수주일을 하던 에릭 리델은 일정표를 보고 얘기했습니다. “저는 주일에는 달리지 않겠습니다.” 영국 스포츠단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영국 왕세자가 와서 그를 설득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영국 매스컴에서는 조국의 명예를 버린 위선자라고 그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결정을 번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00m 경주에 그의 라이벌인 헤럴드 영국의 헤럴드가 나가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그는 그다음에 주일이 아닌 평일날 나가서 자기 주 종목이 아닌 200m에 나가 동메달을 목에 걸고 며칠 후에 400m 경주에 나가게 됩니다. 원래 단거리 선수가 이렇게 자기의 주경기가 아닌데 나가서 최고의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갈 때 이사야서 40장 말씀을 붙들고 나갔습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야훼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모든 사람들 스포츠 전문가까지도 에릭 리델이 이 400m에 나가서 절대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이유는 그가 100m 달리기하듯 달려나가면 처음에 잘 달려나가지만 중간에 힘이 빠져서 뒤로 쳐지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6명의 대표 중에 키가 가장 작기 때문에 신체적으로도 불리하다. 셋째로 그가 배정받은 트랙이 맨 바깥쪽 트랙을 배정받아서 맨 바깥쪽 트랙은 경주할 때 굉장히 불리한 조건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예전에 다른 선수들 두 사람이나 세계신기록을 냈기 때문에 당신이 아무리 뛰어도 세계신기록을 낸 사람을 이길 수가 없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 맨 끝 선에서 달려나갔는데 처음부터 100m 달리게 하는 것처럼 막 있는 힘을 다하여 초인적인 힘으로 달려 나가서 47초 6이라고 하는 세계신기록을 세우고 우승을 했습니다. 저 기록은 16년 동안 깨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강력한 빠른 속도로 달려나갔던지 모두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런 놀라운 속도를 중간에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기자들이 물을 때 대답했습니다.
그 비결은 간단합니다. 처음 200m는 저의 최선을 다해 달린 것이고,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달린 것뿐입니다. 제가 끝까지 달릴 수 있었던 힘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헌신한 제 마음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할렐루야! 올림픽이 끝난 후 그는 국가적 영웅으로 온 국민의 환호를 받으며 영국에 돌아갔습니다. 그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네가 받은 메달보다 더 위대한 메달, 더 위대한 영광이 있다. 너는 복음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라!
그는 24살의 나이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중국으로 건너가 선교사로 생활을 합니다. 텐진을 비롯한 산동반도 곳곳을 다니며 농촌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일본군에 붙잡혀서 스파이 누명을 쓰고 수용소에 감금되었는데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에서 제2차 세계대전 끝나기 얼마 전 순교합니다. 43살의 나이로 그의 꽃다운 인생을 마무리했지만 그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큰 업적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그 비문에 이렇게 쓰여져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웅 에릭 리델, 여기에 잠들다!
그의 이야기는 ‘불의 전차’라고 하는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의 삶이 에릭 리델처럼 하나님 앞에 귀하게 아름답게 쓰이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제일주의의 삶을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 먼저의 삶을 살아가야 될 때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복을 주시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전진 또 전진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앞에 시온의 대로를 열어주시고 놀라운 은혜와 축복 기적으로 넘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한 번뿐입니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게 되길 바랍니다. 보람 있고 의미 있고 위대하고 아름답고 존귀한 존재로서 쓰임 받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우리도 그렇게 살게 하여 주셔서 하나님 영광에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지금까지는 나 자신을 위해 살아왔지만 앞으로 남은 여생 주님의 영광 위해 살다가 장차 주님 앞에 설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받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주님 앞에 충성과 헌신을 다짐하면서 우리가 찬양으로 고백합니다.
안식일의 4가지 개념
창 2장 1~3절 / 이한규목사
1. 지난 6일을 돌아보는 날
하나님은 6일 동안 창조를 다 마치시고 7일째에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쉬셨다는 말은 침대에 누워 주무셨다는 말이 아니라 6일간의 천지창조를 돌아보시면서 보좌에 앉으셔서 그 창조하신 작품을 바라보며 음미하셨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안식일은 그 주간에 했던 일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날입니다.
저는 가끔 저의 홈페이지에 게시된 저의 말씀을 클릭해서 봅니다. 특히 누군가 깊은 감사 표현을 하면 기뻐서 그 주간의 설교를 다시 클릭해서 봅니다. 그러면 몸과 마음의 피로가 씻기는 것을 느낍니다. 그처럼 주중에 있었던 일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그 일 중에 스며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출애굽기 20장 8절 말씀을 보면 십계명의 제 4계명으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안식일을 기억하라!”는 말은 단순히 안식일을 기억하라는 말이 아니라 “지난날의 주님의 은혜와 사랑의 손길의 기억하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게 쉼이 없으면 자기 일을 평가도 못하고 자기 발전도 이루기 힘듭니다. 쉼을 통해 지난 일을 살피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사람에게 내일의 은혜도 주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에게 7일째의 안식일이 없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 18절에 보면 사탄의 수가 666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흔히 7에서 하나가 빠진 6은 인간의 수, 땅의 수, 불완전한 수로 여겨집니다. 아무리 열심히 6일 동안 일해도 7일째의 안식일의 삶이 없으면 그 인생은 사단의 통제를 받는 666 인생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6일 동안의 삶을 7일째 날에 돌아보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인생은 가장 복된 인생이 됩니다.
2. 하나님 안에서 노는 날
안식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즐겁게 노는 날’이기도 합니다. 안식일이라고 해서 늘 거룩한 모습으로 예배와 봉사만 하고, 웃고 즐기는 일은 전혀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안식일에 세상적인 오락을 삼가야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성도들끼리 즐겁게 노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
저는 1984년에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다짐하면서 경건하게 살려고 애썼습니다. 그때는 성도가 재미있게 놀면 안 되는 줄 알았습니다.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면 경건하지 못한 것 같아서 웃어도 약간 미소만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이제는 놀이와는 완전히 담을 쌓게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목회자 세계에도 나름대로 놀이가 있고 또한 놀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편 23편 1-2절에서 다윗은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은 성도가 푸른 풀밭에서 마음껏 뛰고 쉴만한 물가에서 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건전한 놀이라면 노는 것을 정죄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건전한 놀이문화 속에 건전한 마음이 생기고 공동체성과 인격성과 창조성이 배양됩니다. 하루에는 낮과 밤이 있듯이 삶에도 땀과 놀이가 함께 있어야 건전한 삶이 됩니다. 그처럼 안식일은 예배의 개념과 함께 놀이의 개념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약 20년 전까지만 해도 볼링은 특별한 사람만이 하는 사치스런 운동이었고 주일에 교인들이 볼링을 치러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목사님들 사이에 볼링 치는 것이 유행했습니다. 볼링은 원래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가 수도사들의 안식을 위해 고안한 놀이였습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볼링 치는 것이 한때 목회자들의 중요한 놀이 문화가 되기도 했습니다.
놀이에 대한 나쁜 고정관념을 깨십시오. 건전하고 적절한 놀이는 경직된 신앙을 막아주고 하나님의 통찰력을 얻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저도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할 때만 말씀이 떠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놀 때 말씀이 더 잘 떠오릅니다. 때로는 운전을 할 때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을 때에 말씀이 더 잘 떠오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주일성수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과 ‘하나님 안에서 노는 것’의 2가지가 다 있어야 합니다. 예배만 드리고 바로 가지 말고 예배 후에 성도들 간의 교제와 대화도 힘써 가지십시오. 예수님은 마가복음 2장 27절에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 안에서 노는 것의 중요성을 잘 말해줍니다. 성도는 일도 끝내주게 잘하고 예배도 끝내주게 잘 드리고 하나님 안에서 노는 것도 끝내주게 잘해야 합니다.
3. 새로운 6일을 준비하는 날
안식일은 이전의 6일의 삶을 돌아보는 의미도 있지만 앞으로의 6일의 삶을 준비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내일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성공하겠다고 쉬지 않고 일하면 일의 능률은 더 떨어지고 결국 일을 더 그르칩니다. 잠을 너무 줄이면서 일하지 마십시오. 수면 기간을 줄이는 것보다 자투리 시간을 줄이는 것이 좋습니다. 잘 쉬어야 잘 일할 수 있습니다. 일하는 시간도 중요하지만 쉬는 시간도 중요합니다.
인생은 짧지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충분히 이룰 정도의 시간은 됩니다.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너무 서두르면 하나님이 간섭하실 틈도 없고 될 일도 안 됩니다. 겉으로는 일이 잘 되는 것 같아도 부실공사로서 언젠가는 무너집니다.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면서 쉬지 않고 일하면 낙심도 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7일째에 안식하셨듯이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7일째에 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식이지 사람의 공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기에 먼저 6일 동안 일하시고 7일째에 안식할 수 있지만 사람은 먼저 6일 동안 일할 수 있는 자체 에너지가 없기에 먼저 안식일에 하나님으로부터 에너지를 받아야 합니다.
자동차를 6일 동안 열심히 몬 후 7일째에 “자동차야! 지난 6일 동안 수고했다!” 하고 자동차에 연료를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연료를 넣어야 자동차가 달릴 수 있습니다. 그처럼 사람은 먼저 안식일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6일 동안 세상에 나가서 열심히 일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에게 안식일은 7일의 마지막 날이 되어도 괜찮지만 인간에게 안식일은 7일의 첫째 날이 되어야 합니다.
창조사역을 보면 하나님은 6일째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다음날에 안식하셨기에 하나님께 안식일은 7일째 날이었지만 6일째 창조된 인간에게 그 안식일은 첫째 날입니다. 그 사실은 먼저 하늘로서 신령한 은혜를 받아야 세상에 나가서 6일 동안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참된 에너지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일한 후에 피곤해서 쉬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안에서 쉬고 힘을 얻어서 일하는 삶을 사십시오.
4. 복된 삶을 위해 구별된 날
본문 3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그런 말씀이 없었는데 유독 일곱째 날을 복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사람에게 복을 주시려고 특별히 구별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을 원하면 주일을 지키십시오. 주일을 지키지 않고 복 받는 길은 없다고 믿으십시오.
주일을 가장 복된 날이고 찬란한 빛으로 가득한 날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십시오. 창세기 1장에는 6일간의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하루의 사역이 끝나면 어떤 구절이 반복됩니까? 1장 5절을 보십시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그 말이 1장 8절, 13절, 19절, 23절, 31절에서 계속해서 반복해 나옵니다.
그러면 관례상 본문 다음에도 이런 말이 나와야 합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일곱째 날이니라.” 그러나 일곱 번째 안식일 날에는 그런 구절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곱 번째 날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거룩한 날로서 오직 찬란한 빛만 있고 저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타락이 않았다면 그 일곱째 날은 영원히 지속되며 이 땅에는 빛과 평화가 넘치는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에덴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빛 가운데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며 사는 삶의 현장이 에덴입니다. 그러나 타락 사건으로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추방되었고 에덴에서 추방된 그들에게 처음 다가온 가장 무서운 현실은 저녁이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창조된 후 처음 맞이하는 저녁을 보면서 아담과 하와는 그때서야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참된 안식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했을 것입니다. 안식일은 영적인 의미에서 밤이 없는 날이고, 오직 찬란한 빛과 평화만이 존재하는 날입니다.
천국에는 밤이 없습니다(계 21:25). 밤이 없는 에덴이 이 땅에 임시로 회복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안식일로서 신약시대의 주일은 가장 복되고 좋은 날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계명은 힘든 의무로 주어진 계명이 아니라 천국의 맛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로 주어진 계명입니다. 그 계명을 따라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날을 힘써 구별해서 지킬 때 천국 평안을 얻게 되고 이 땅에서 잠시나마 천국의 맛을 보게 됩니다.
안식의 복을 누리라
창 2장 1~3절 / 이상호목사
현대문화의 한가지 현저한 특성이 있다면 스피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단 한번의 클릭으로 전세계를 접속하여 온 세계의 정보(인포메이션)를 한순간에 공유할 수 있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의 삶은 좀더 편리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딜레마는 이 편리함이 우리의 삶의 바쁨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지는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인들은 더 바빠지고 더 빨라진 삶을 살게 되었지만, 우리들의 바빠짐이 삶의 의미를 더해 주고있지는 못하다는 사실로 인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더 바빠지고 더 빨라진 삶을 살고 있지만은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채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얼마전 전 세계인들의 관심을 주목했던 베스트셀러 가운데 그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으면서도 현대인들에게 어필해온 책이 하나 있습니다. 불란서의 철학자이면서 에세이 작가인 삐에로 쌍소란 사람이 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입니다. 한국의 서점가에서도 베스트셀러의 목록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느림과 신속함이 벌리는 열띤 공방전의 세상에서 속도가 미덕이라고 주장하는 현대문화를 스스로 기소하는 검사의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느리다는 것을 게으름으로 정죄할지 모르지만 이 저자는 오히려 느림이 미덕일 수 있다고 오히려 역설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느림이 한 사람을 관찰할 때, 하나의 환경을 우리가 분석할 때, 또 하나의 사건을 들어다 볼 때 객관적인 안목을, 그리고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아침마다 떠오르는 햇살을 바라보는 감동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저녁마다 어두움을 맞이하는 행복을 아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저자는 연못의 어두운 물과 밤이 뒤섞일 때 그것을 느긋하게 들여다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는 밤의 얼굴을 최근에 목격해 본적이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는 현대속도문화의 가장 커다란 비극이 있다면 "안식의 상실"이라고 지적합니다.
따라서 현대문화의 구원이 있다면 안식을 회복하는데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드물게 보는 기독교적 가치관에 근거해서 쓰여진 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저도 요즘 굉장히 건강해지고 설교에 자신감을 갖게 됐는데 생각해 보면 2년 전에 한 달간의 안식월을 가진 덕분으로 느낍니다. 제가 이렇게 밝히는 것은 적어도 1년에 1달씩은 악식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서입니다. 제가 건강해야 여러분들이 건강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안식년을 가지면서 안식이란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저는 계속 저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의 축복을 마음속에 경험하면서 이것을 여러분과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남은 인생을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는 "안식휴가" 하면, 팔자 좋은 소리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나에게 무슨 안식의 여유가 있겠느냐고, 사실 저는 안식월을 가지면서 안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요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가져야만 안식하는 것은 아니더라구요. 오랜 시간을 가져도 안식하지 못할 수가 있고, 짤막한 시간을 가져도 그 질적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안식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의 형태는 매우 다양할 수가 있습니다. 늘 책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 사무실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연 속에 들어가 흙을 만지며 땀을 흘리고 노동하는 것이 오히려 안식일 수가 있고, 반대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짧은 시간을 내어서 커튼을 닫고 조용히 책을 읽고 열중하는 것이 오히려 안식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안식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안식! 도대체 안식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 안식을 처음으로 만드신, 그리고 안식이 필요하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그 교훈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안식이 필요 없는 유일하신 분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도 쉬셨습니다. 그는 엿새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쉬셨다고 오늘 본문은 기록합니다. 아니, 무엇을 위해서 그분을 쉬셨을까요? 여기에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안식의 의미가 있습니다.
창조의 일곱째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쉬신 날입니다. 창조의 완성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안식일입니다. 여기서 "안식"이란 단어 "사밧"은 "멈추다" "절제하다" "정지하다" 라는 동사형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세상이 창조되면서 우주라는 공간에 가장 위대한 보석이 담겨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원하면 다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하신 것 중에 "복"이라는 것을 창조셨습니다. 복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만 이 복을 받을 그릇이 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열심히 일을 하셨습니다. 그 일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하여 보면 인류를 축복하시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를 보면 칠일동안에 일을 하셨습니다. 칠일 동안의 일과를 보면 엿새 동안은 천지를 창조하시는 일을 하시고 마지막 칠일 째는 인류에게 복을 주시는 날로 삼았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날을 안식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복된 날은 어떤 날이며 복 받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복된 날에 ‘안식의 복을 누리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복된 날은 하나님이 창조의 일을 마치신 날입니다.
세상에는 인간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누가 인간을 살 수 있게 하셨는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인간을 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을 살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구상에 생명을 유지하는데 가능하게 하신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빛, 공기, 물, 불, 식물, 태양의 열과 낮과 밤, 그리고 계절들을 조화 있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과학적입니다. 우주 안에는 원자, 분자, 중성자, 전자 등등의 물질을 구성하는 모든 기본적인 것들을 다 창조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엿새 동안에 다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칠 일째 되는 날에는 안식하셨습니다. 안식일은 모든 일을 마치신 날입니다. 만족하신 날입니다. 기쁨의 날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일하는 기쁨과 일의 완성의 기쁨을 누리는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이 복된 날을 안식하는 날이라 하였습니다. 이 안식일을 복 주신 날로 삼았습니다.
안식일은 거룩한 날로 삼았습니다. 3절
2:3절에 "거룩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되고 성결 된 것입니다.
이 날이 어떻게 거룩한 날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들이 다 완성 된 날입니다. 더 이상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구별된 날입니다. 안식일은 어제의 일하는 날과 다르며, 내일의 일하는 날과도 다릅니다. 하나님이 만족하여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는 일주일이 있었습니다.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레 되는 날은 안식하는 거룩한 날이었습니다. 이 날은 모든 일을 마치시고 쉬시는 날입니다. 이날은 하나님께서 따로 생각하는 날입니다. 이날은 거룩한 날이라 선언하셨습니다. 어떤 일도 하지 않는 날입니다. 모든 일을 다 완성하셨고 할 일이 없으셨습니다. 이 날은 완성의 날이요 성취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이 실수 없이 만족하게 성취된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과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이 날을 안식일이라 하시며 거룩한 날로 선언하실 때 하나님의 창조하신 천군 천사들과 함께 즐거워하며 경축의 날로 정하였습니다.
시89:8-11,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며 주와 같이 능한 자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주께서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평정케 하시나이다...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이처럼 하나님이 하신 역사를 돌아보면서 즐거워하시는데 피조물 된 천군 천사들이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이는 사단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즐거워하는 날에 피조물 된 천군 천사들도 즐거워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즐거워해야 할 때 즐거워하고, 웃어야 할 때에 웃어야 하며, 노래 할 때 노래해야 하며, 춤을 추어야 할 때 춤을 추워야 합니다. 웃을 때에 웃지 않고, 춤을 출 때 춤을 추지 않는 것은 정상적인 인격이 아닙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안식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오늘 본문은 안식은 과거를 되돌아봅니다 라고 가르칩니다.
안식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 이라고 가르칩니다. 일반적으로 왜 쉬십니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피곤해서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적이고 성경적인 안식의 중요한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피곤해서 쉬신 것은 아니 시잖아요? (본문 1절과2절)
1절을 다시 보시죠.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그 다음에 2절입니다. 창세기 2장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 하시니라"
어떤 단어가 강조되어 있습니까? "다 이루니라" 또 지으시던 일이 다했기 때문에 그분이 쉬셨다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분은 창조의 사역을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마치셨다는 말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졌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그분에게는 창조하신 만물을 돌봐야 하는 엄청난 섭리의 사역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이 쉬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창세기1장을 들여다보면 그 대답을 쉽게 얻을 수가 있어요. 하루하루 창조의 과정이 마무리될 때마다 또 다음날에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은 한 날의 창조를 마무리하면서 그 소감을 매우 인상 깊은 한 단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1장에, 예를 들어서 빛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빛을 보신 하나님의 소감을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좋았다" 이렇게 기록합니다. 히브리어로 좋았다는 단어는 "토프"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우리말에 "좋다"라는 단어와 상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감격을 담아서 말하는 "좋구나!" 이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이 안식이라는 것은 지나간 엿새동안의 창조를 돌이켜보며 그것을 즐거워하는 시간이셨던 것을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일종의 하나님의 자축의 시간, celebration의 시간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어떻게 우리는 적용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안식이라는 것은 즐거움과 감사의 시간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늘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냐 하면, 죽어라고 일하다가 죽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일한 결과를 전혀 즐기지 못하는 그런 여유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주변에는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 까지도 예외 없이 지나치게 바쁘고 서둘러가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쫓기는 삶의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한 기독교문화 신학자는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오늘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세속적 가치관에 설득되었거나 영향을 받은 까닭이라고 지적합니다. 오늘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중요한 가치관의 하나는 실용주의적 가치관입니다. 혹은 기능주의적 가치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움직이는 시간이 생산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쉬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에요.
그러나 실용주의적 가치관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가치관 중에는 심미적 가치관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창조솜씨를 바라보는 여유 또한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 앞에 도착했을 때 뒤에서 추격하는 바로의 군대,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 엄청난 홍해바다 앞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했습니까?
그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만 가만히 있어라! 당황해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바라보아야 한다”라고 모세는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서두르는 제자들에게 잠시 길을 멈출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공중에 나는 새를 바라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좀 바라보라!
전도 갔다 와서 서둘러 보고하는 제자들에게 잠시 중단하자고, 먼저 가서 쉬자고 제안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그리고 이미 역사하신 그분의 역사하심을 좀 생각해보라고,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깊이 있는 생각으로 바라보면 이 바라봄 속에서 찬양이 나오고, 바라보면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예배가 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나간 안식월을 통해서 저가 개인으로 경험한 가장 커다란 축복이 있다면 제 안에 감사하는 마음이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너무 바쁘게 쫓기다 보면 우리는 늘 신경질 나는 삶의 반응을 보이기가 쉽습니다. 여유 있게 다시 돌아볼 수 있었던 나의 삶을 돌아보며 내 삶의 발자국마다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 그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볼 때에 저는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길을 함께 걸어준 아내가 감사하고, 말없이 함께 기도로 같이해준 기도의 동역자들이 감사하고, 교회가 감사하고 또 부족한 사람의 리더쉽을 인정하고 따라준 교회의 모든 제직들이 감사하고, 때로는 제 마음에 버거움을 가져다주었던 사람들까지도 감사하더라구요.
그들이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만들 수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제 안에 회복된 이 감사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안식에 들어가 있는 사람의 상태라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추수하는 계절에, 모든 나무들이 낙엽을 떨구며 돌아가는 계절에 여러분들에게 과거를 돌이켜보는, 그리고 예배를 회복하는, 감사를 회복하는 이런 안식의 여유가 주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안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서 두번째로 안식이라는 것은 현재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안식이 과거를 돌이켜보는 것이라면 둘째로 안식은 현재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안식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피곤함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안식이 우리에게 피곤함에서의 회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에너지의 소모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에너지가 소모되면 일단 그 에너지가 보충되지 않고는 우리는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식을 계획할 때 그 안식이 우리의 회복에, 육체적인 회복에, 또 정서적인 회복에, 또 우리의 영적인 회복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 안식인 것인가를 고려하고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처음 안식일의 의도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요? 과거를 돌아봄 못지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메시지가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3절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여기 두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날을 축복되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거룩하다는 말은 여기서 구별하다는 뜻이 더 합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안식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날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정말 축복되고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을 그 분은 기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가를 계획하실 때 안식을 계획하실 때 반드시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런 여가를 통해서 내가 얼마나 축복된 사람이 될 수가 있을까? 내가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사람이 될 수가 있겠는가? 라는 사실입니다.
안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함께 안식을 해야 합니다. 특히 예배로 축복을 받는 날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위엄을 존귀하게 높이고 경배하며, 찬양하고, 감사를 드리게 하기 위하여 정하여 주신 날입니다. 천하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경배를 드리는 날로 삼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생활에서 주일을 지키며 교회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형제 자매들을 서로 만나며 반깁니다. 서로 마주보며 반기고 즐거워하여야 합니다. 서로 손을 마주잡고 기뻐하여야 합니다. 기도할 때 힘을 합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찬송할 때 같이 찬송을 하고,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화답하며 청종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일은 인간을 위하여 즐거워하시는 일입니다. 안식일을 복 된 날로 삼으신 것은 사람을 복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복된 날에 복을 받을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로 지키는 것이며, 예배를 드리는 행위며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가장 귀한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개, 원숭이, 물개, 돌고래쇼... ×,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보십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복 받는 믿음으로 성장을 해야 합니다. 믿음이 성장을 해야 합니다. 주일을 못 지키던 사람이 주일을 지키며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늘 지각하던 사람이 일찍 나오는 것입니다. 항상 뒤에 앉기를 습관처럼 하던 사람이 앞자리로 나오는 것입니다. 앞자리를 거절하고 뒷자리에만 앉는 사람은 예배가 성실치 못한 사람입니다. 예배 시간 내내 졸던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참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먼 이야기로 듣던 사람이 이 말씀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고 감격해 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자세가 바로 되면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준비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만남의 날이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까? 주일날 안식을 누리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놀이에 대한 이해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교육은 놀이를 정죄하는 풍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에 있어서 아마도 한국 부모들이 제일 많이 하는 이야기가 두 가지 단어일 것입니다. 하나는 뭐에요? "공부해!" 그리고 또 하나는 무얼까요? "놀지마!" 그것입니다. 놀지마.
그러나 현대의 교육학은 놀이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있습니다. 놀이는 학습입니다. 놀이를 통해서 우리는 건강한 인격적인 성숙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그리는 천국을 공부하다가 저는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스가랴 선지자는 회복된 예루살렘, 혹은 새 예루살렘, 시온의 거리, 천국의 거리를 그리면서 성경은 이렇게 그립니다.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슥 8:5) 천국은 천진난만한 어린 소년 소녀들이 뛰노는(장난치는) 거리, 이렇게 성경은 묘사합니다. 놀이는 죄악이 아니에요. 건강한 놀이는 우리의 여가와 우리의 안식의 회복에 도움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이 종교개혁기념주일인데 여러분, 볼링이 기독교에서 만든 것이란 것을 아십니까, 볼링이? 볼링 교과서를 보시면 1페이지에 볼링의 시조가 마르틴 루터라고 되어있습니다. 본래 볼링은 수도사들이 수도를 하다가 잠시 쉼의 여유를 갖기 위해서 공놀이를 하던 데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놀이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그러나 놀이에 빠지지는 마십시요. 건강하지 못한 놀이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놀이가 끝난 후에 힘을 얻기보다 내가 더 지쳐야 한다면, 그리고 삶의 현장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놀이를 생각한다면 나는 놀이의 노예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놀이가 나의 인생에 활력을 더해줄 수가 있다면 육체적이고 정서적이고 영적인 회복에 도움이 될 수가 있다면 놀이도 안식의 한 방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꼭 놀이만해야 되는 것은 아니에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훌륭한 안식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경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따금씩 아플 때 우리가 무얼 합니까? 아프면 아무것도 못하지요. 가만이 있는 거에요. 그런데 며칠 지나면 치료가 되잖아요. 그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이 있음, 그것이 나쁜게 아니에요. 우리는 일부러 그런 시간을 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치유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런 경험을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1장17절에 보시면 하나님도 안식하시고 이 하나님이 안식을 통해서 얻으신 하나님의 경험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제 칠일에 하나님이 쉬어 평안하셨더라" 우리말 번역에는 "하나님이 쉬어 평안하셨더라" 이렇게 기록되어있어요.
그런데 영어성경에서 보시면 이런 단어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좀더 의미를 잘 들어낸다고 생각합니다. He, 하나님이 rested , 하나님이 쉬셨다 and was refreshed 그래서 하나님이 새로워 지셨다. 하나님도 안식을 통해서 새로워 지셨다고요.
여러분 하나님에게 안식의 필요가 있었다면 저와 여러분에게는 얼마나 이 안식이 필요하겠어요? 안식은 곤고한 나의 현재를 새롭게 함입니다. 그렇다면 일부러라도 안식의 가치를 발견하고 안식을 찾아가는 여러분과 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식은 우리의 현재를 새롭게 함인 것입니다.
자, 안식의 의미. 첫째로 안식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둘째로 안식은 현재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세번째로 안식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안식은 결코 안식 그 자체에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만약 안식자체에 의미가 있었다면 하나님이 쉬셨다! 그리고 성경이 거기서 끝나야 되요. 창세기 2장3절로 성경이 끝나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죠? 하나님은 그 다음에 다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그가 창조한 만물을 돌아보시고 인생을 돌아보시고 역사를 섭리하시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계속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인류의 위대한 섭리를 그 안식의 타이밍을 통해서 더욱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안식은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영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안식의 또 하나의 의미요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식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그래서 한 기독교문화 신학자는 안식을 가리켜서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괄호 라고 그랬어요. 창조적인 괄호. 괄호 알죠? 글 쓰다가 괄호. 잠시의 쉼. 그러나 그 쉼 속에서 우리의 미래를 새롭게 만들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같은 저자는 그의 책을 통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인류의 문화의 발전은 뜨거운 폭염에 태양이 내려 쪼이는 노동의 현장에서만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비오는 날의 동굴 속이야말로 문화의 산실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비오는 날의 동굴 속을 생각해 보세요. 펑펑 비가 쏟아지는 날, 옛날 원시인들이 동굴에서 무얼 했을까요? 뭐, 비 쳐다보는거죠 뭐. 그저 앉아서 비오는 것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쳐다보다가 어느날 갑자기 누군가의 머리속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지나갔을 것입니다. 이 아이디어야 말로, 그 생각 속에서 튀어나오는 아이디어야말로 문화의 불꽃, 창조의 불꽃이었다 라고 그는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왜 보다 건강한 미래를 만들지 못할까요? 생각없이 서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한국사회가 겪고있는 커다란 진통과 아픔, 무엇 때문일까요? 졸속 때문입니다. 서두름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서두르고 그리고 너무 미스테이크를 많이 저지르고 우리는 그것을 교정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쉬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쉬어갈 수 없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십시요.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특별히 한국 사람들. 우리 한국인들이 더 바쁘게 살고 있어요. 본래 한국인들이 급한 사람들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그 밥을 짓던 모습을 보면 오랜 시간동안 밥을 만들고 뜸을 들이고 온기를 피워내고 아랫목에 그 밥그릇을 조용히 묻어두고 가족 식구들이 마침내 식탁에서 나누는 교제의 시간들을 우리는 회상해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부 장관을 지냈던 이어령 씨가 쓴 글에 보면 한국 사람들이 언제부터 바빠졌느냐? 라면이 나온 때부터 바빠졌답니다. 소위 인스턴트 문화가 출현한 그때부터 한국 사람들이 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라면은 일본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르지만 라면의 종류를 다양화 시킨 것은 한국입니다.
숫자마다 라면을 다 만들어 냈어요. 일, 일번지 라면. 이, 이백냥라면. 삼, 삼양라면. 사,사발면. 뭐 사천짜장. 오, 오양면, 오뚜기 라면도 있고. 뭐 육, 육개장, 육개장 짜장면. 칠, 칠보면. 팔, 팔도라면. 구, 구운면. 열, 열라면. 하하하~~ 이런 소위 인스턴트 문화, 이런 인스턴트 문화 속에서 우리는 너무 급해지고 있어요. 너무 여유를 잃어버렸어요.
저에게 주신 안식월의 축복은 우리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고, 또 저 라는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쓰임을 받기 위한 생각들의 여유를 주었다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인생의 길에도 이런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지도록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서두름의 졸속에서 자유하십시요. 느긋하게 기다리시면서 하나님의 그 멋진 간섭을 기대해 보십시요. 인생은 짧지만 각자의 삶에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라고 말한 사람의 이야기를 여러분 앞에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저와 여러분은 이 안식을 회복할 수가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는 왜 우리는 안식을 잃어버렸을까요?
성경은 한마디로 우리가 안식을 잃어버린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욕심이 죄가 되고 죄는 우리 마음속에서 평안을 빼앗아갔어요. 죄가 우리 마음속에서 여유를 빼앗아 갔어요. 죄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마음속에 독기서린 한을 우리의 속에 심었습니다. 죄가 우리를 긴장하게 만든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날 이런 죄 많은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왜일까요? 그분은 어느 날 팔레스타인의 피곤하고 지쳐버린 군중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분은 쉼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 분 앞에 오는 순간 그분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순간 우리는 죄의 용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평안이 회복됩니다. 그는 진실로 안식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안식을 잃어버렸습니까? 다시 그 분 앞에 오십시요. 그리고 그 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십시요. 그곳에서 멈추지 마십시요. 그분의 은혜 안에 거하십시요. 그 풍성하신 은혜 그리고 그의 그 넓은 평안 안에 거해 보십시요. 내 안에서 그 안식이 회복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회복되는 안식의 마음속에서 다시 본 하늘과 땅, 그 하늘과 땅은 얼마나 아름다운 하늘과 땅인지,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위해서 예비하신 그 놀라운 미래, 또 미래를 향해서 손짓하는 하나님의 손길의 인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묵상
이곳에 피곤하신 분이 계십니까? 마음이 혼란한 분이 계십니까? 상처가 무거워 발걸음을 옮기기 어려운 곤고함이 나를 붙들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안식입니다. 그 안식은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이 안식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 앞에 오세요. 그 짐을 붙들고 있지 마세요. 그 분 앞에 다 내려놓으세요. 아픔도 좌절도 당황함도 다 내려놓으세요. 고통도 원망스러움도 다 내려놓으세요. 그 분 안에 거하세요. 그 분의 사랑 속에 빠지세요. 그 분의 음성을 들어보세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다 내려놓으세요. 모든 짐을 내려놓으세요. 그 분이 주인 되게 하십시요. 그 분을 의뢰 하십시요. 그 분이 소망이십니다. 그 분이 구원이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창 2장 4~7절, 요 11:25~27 / 이성희목사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기적이 35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선별된 7가지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마지막 기적이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의 최후의 기적이었고, 최대의 기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죽은 직후에 살리셨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장례하러 가는 도중에 살리셨고,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 만에 살리셨습니다. 살리신 시간으로 봐도 가장 큰 기적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은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최대의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최후의 기적입니다.
그런데 왜 공관복음서에는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요한복음 12:10에는 그 해답이 될만한 구절이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이는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믿음이라”. 공관복음서는 대략 65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요한복음은 95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은 당시에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사건으로 떠들면 나사로의 생명을 위협받을 것입니다. 65년경까지 나사로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95년에는 이미 나사로가 죽었고, 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예루살렘이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함락되고 백성들이 흩어진 후였기 때문에 나사로에게 직접적 위협이 없어졌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으로서 증거 하신 네 번째 말씀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나사로의 죽음 후에 마르다와의 대화에서 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과 베다니의 나사로 가정은 특별히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가정의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다시 유대로 돌아가자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돌로 칠 것이라고 말립니다. 이 와중에 도마는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흘 만에 도착하셨습니다. 얼마든지 죽기 전에 오실 수 있는 거리였는데 왜 늦게 오셔서 나사로가 죽게 하셨을까요? 성경에는 이에 대하여 별다른 해석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일부러 늑장을 피우시고 죽기를 기다리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의도가 41-42절에 나타납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신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무리로 하여금 믿게 하려고 나사로를 죽게 버려두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실 때에 마르다는 동네 어구까지 나와서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고 하십니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생명은 죽음에 반대되는 말입니다. 부활도 생명도 죽음과는 대치되는 말입니다.
생명과 부활은 이미 태초부터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두 나무가 있었습니다. 두 나무는 하나님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삶의 형태를 보여줍니다. 생명나무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율법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부활과 생명을 택하지 않고 죽음을 택합니다. 이것이 태초의 인간의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부활이란 단어가 401회 나옵니다. 신약 전체 가운데 423쪽에 부활이라는 단어가 나타납니다. 신약의 매 쪽에 부활을 증거 합니다. 부활은 그만큼 중요한 사건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확인입니다.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그 의미를 살펴보고 현재의 부활을 맛보고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첫째, 부활은 곧 생명입니다.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내가 곧 생명인 부활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인 생명입니다. 부활은 문자적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다시 생명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사로는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시체가 썩어서 냄새가 나지만 새로운 생명을 받아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당시의 군중들이 놀랄 일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생각해보면 더 놀랄 일은 나사로가 또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나사로는 또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불가타(Vulgate) 성경을 번역한 제롬(St. Jerome)이 재미있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자마자 예수님께 “나 또 죽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 또 죽는다”고 하였답니다. 그랬더니 나사로는 일생을 고지방에 가서 전도하며 헌신하여 살았지만 그러나 다시 웃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요? 또 죽을 것이니까 웃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죽음의 고통을 이미 경험하였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사는 것 없이 죽는 것이 가장 괴로운 일입니다. 사실은 나사로는 행운이 아니라 불운한 사람입니다.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사실은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나사로를 두번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도 죽음은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또 십자가에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복음을 앞둔 고통스런 메시야의 절규입니다.
반면에 부활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소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일본의 의약품 벤처회사인 ‘화루마 디자인’과 도쿄대학교 분자세포생물학 연구소는 인간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단명유전자’를 처음으로 발견하였습니다. 이 유전자를 발견하므로 장수 의약품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단명유전자를 발견했다고 인간이 죽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약품 자체가 생명은 아닙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자들도 지혜의 삶이란 곧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무엇을 하는 것이냐는 말하지 못합니다. 철학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비로소 죽음을 극복하고, 죽음을 준비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바꿈표였다”고 필립 얀시는 말했습니다. 죽음은 마치는 것이 아니라 바꾸는 것입니다. 죽음은 이 땅의 삶을 접고 저 땅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바꿈표의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게이 바꿈표는 인류에 최대의 공헌입니다. 가장 위대한 사역입니다. 부활이 생명인 것을 아는 이 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찬송 94장 2절에는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가사에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예수님은 부활이고 생명이십니다.
둘째, 죽어도 삽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죽었습니다. 비록 나흘이 되었습니다. 비록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르시면 순종하고 나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죽음도 순종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에는 죽었어도 삽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왜곡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것이 아니라 기절했다가 사흘 만에 깨어났다는 기절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합니다. 만일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다 흘러나오고도 기절했다가 깨어났다면 그것도 기적입니다. 우리 몸의 피는 약 2리터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3분의 2가 없어지면 사람은 죽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짧은 죽음입니다. 그리고 다시 사신 것은 영원히 사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죽으심도 육체적 죽으심이고 부활도 육체적 부활인 것을 증거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다음에 고기를 잡수셨고, 예수님의 몸을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심처럼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죽습니다. 그러나 다시 삽니다. 그러므로 사는 자에게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부활이요 생명인 것을 아는 사람에게도 죽음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부활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 죽음이 영원한 생명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 앞에 서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어떤 학자는 만일에 그 때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하지 않고 그냥 “나오라” 그랬다면 무덤에 있던 자들이 다 나왔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관계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관계입니다. 개인적인 관계란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요한복음 10장에 있는 양의 이름을 불러내는 목자 모습에 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의 이름을 부르듯이 나사로의 이름을 불러 내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4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합니다. 죽으면 열매를 맺고, 죽으면 사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역설이며 진리입니다. 또 한 알의 밀의 비유는 예수님의 삶을 묘사한 말인 동시에 우리의 삶을 제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전 UN 사무차장인 로버트 뮬러는 “죽음은 비극이 아니다. 비극이란 살아 있는 동안 죽도록 놔두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더 비극적이고 비참한 것은 죽음이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만 안다면 사람들이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복음을 알고, 죽음을 알고, 죽어도 산다는 비밀을 아는 것은 참 다행한 일이고, 행복한 일이고, 축복이며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복음의 가장 주목할 만한 주제는 복음이 죽음에 도전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적 힘은 죽음을 이기는 부활과 생명입니다.
키엘케골은 본문의 말씀을 해석하면서 “죽음에 이르지 않는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죽어도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죽음에 이르지 않는 병입니다. 세상에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있습니다. 이것을 그는 절망이라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죽음에 이르지 않는 병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어도 병으로 고생합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그러나 그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원히 사는 병입니다.
이 비밀을 캐고 진리를 터득한 바울은 로마서 14:8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1:21에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합니다. 그는 죽음과 삶이 차이가 없는 초월적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죽는 것이 이미 사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이미 죽은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회는 인간이 타고난 두려움인 죽음을 길들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오래 전 교회는 프랑스 교회를 필두로 시체를 교회 밖에 쫓아내지 않고 교회 경내의 묘지에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 앞에서 찬송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산자와 죽은 자가 자리를 같이 하였습니다. 교회의 이러한 일은 생사의 경계를 얇아지게 하였습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일치하였습니다. 이렇게 죽음을 삶과 일치할 수 있었다는 것은 위대한 삶입니다. 교회는 이 엄청난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마르다에게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십니다. 죽어도 영생합니다. 이 땅에서 죽지 않으면 죽음 없는 영생을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하여 일어나서 공중에서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때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천국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진시황제는 불로초를 구하려고 선남선녀들을 한반도까지 보냈습니다. 늙지 않고 죽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의 욕심입니다. 늙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다가 더 늙어요. 죽지 않으려고 버둥거린다고 죽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늙고 아름다운 것임을 알고, 죽는 것이 사는 것임을 아는 지혜는 이런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필립 얀시는 그의 책에서 아주 예리하게 현대 문화를 비평합니다. 사람들이 젊어 보이는 것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사후의 생명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이상입니다. 젊음이란 불확실한 미래를 지연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건강식품이나, 다이어트 기구나 식품 그리고 운동 같은 젊음의 환상을 지켜주는 산업이 나날이 번창하고 있습니다. 젊음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미래나 죽음에 대한 확신이 없이 건강만 추구하고 젊음의 환상만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불쌍한 일입니다.
또 다른 불쌍한 영혼들이 있습니다. 죽어서도 영원히 자신의 육체를 보존하려고 하는 존재들입니다. 지금 세계에는 사후에 시신을 부패하지 않게 처리하여 거창하게 보존하고 있는 사람이 네 사람입니다. 레닌, 모택동, 호치민 그리고 김일성입니다. 저는 그 네 사람을 다 보았습니다. 사람은 죽기 쉬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살기도 쉽습니다. 부활을 아는 사람은 육체를 썩지 않게 보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썩지 않는 육체가 부활이 아니며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부질없는 일을 하려고 그렇게 공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살아야 합니다.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알아야 합니다. 죽음과 생명이 다 고귀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이 두 세계를 동시에 알고 동시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계에 살면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살고 있지만 죽음도 압니다. 이미 주 안에서 내 자신이 죽었습니다. 이런 삶이 부활의 삶이며 생명의 삶입니다.
최근에 갑자기 네티즌 사이에 유행한 노래가 있습니다. ‘사랑해도 될까요’인줄 알았지요? 저는 ‘파리의 여인’을 보지 않습니다. 집에서 ‘자양동 여인’을 볼 시간도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 ‘올챙이 송’입니다. “개울가에 올챙이 한 마리 꼬물꼬물 헤엄치다 뒷다리가 쏘옥, 앞다리가 쏘옥, 팔딱팔딱 개구리 됐네. 꼬물꼬물 꼬물꼬물 꼬물꼬물 올챙이가 뒷다리가 쏘옥, 앞다리가 쏘옥, 팔딱팔딱 개구리 됐네”. 아주 단조로운 곡조에 단조로운 가사인데도 너무 좋아합니다. 올챙이는 개구리의 시간을 기대하면서 삽니다.
개구리가 잘 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개구리헤엄이고, 다른 하나는 물과 뭍에 동시에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구리는 개구리헤엄 밖에 못합니다. 개구리가 평형이나 배영하는 것 보셨습니까? 못하지만 그것 하나만 잘 해도 물에 빠져죽지 않고 물에 살 수 있습니다. 이게 전문성 시대의 삶의 지혜입니다.
올챙이는 물에서만 살지만 개구리는 물과 육지에 동시에 삽니다. 올챙이와 개구리가 다른 점은 다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리가 있으면 육지에도 삽니다. 다리가 없으면 물에서밖에 못삽니다. 많은 사람들은 올챙이의 삶 밖에 살지 못합니다. 하나의 세상 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구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늘도 이 땅도 다 우리의 세상입니다. 이 둘을 동시에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물질세계와 영적세계, 서로 다른 두 환경에서 살아가는 양서류로 생각하는 것이 삶의 열쇠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물질세계에서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숨을 쉽니다. 지금도 생각하면서 숨을 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쉬어집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의 호흡인 기도는 애써 마음을 잡아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그냥 그렇게 되어집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삶은 애써 묵상하고 살아야 합니다. 부활을 묵상하고 생명을 소유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참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고래는 우리가 늘 보는 산, 도시, 빌딩 등 우리의 일상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고래는 반면에 해양의 식물이나 바다의 생물들로 가득한 활기찬 거주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래는 한 시간에 한 번 수면 위에 올라와 산소를 들이키지 않으면 죽습니다. 바다 위의 세계에 대하여 아는 바는 없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접촉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이 고래처럼 살아남기 위해 가끔씩 위로 올라가 공기를 들이 킨 후 다시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위의 세계는 아직 우리가 완전히 소유한 세계가 아닙니다. 익숙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수시로 위의 세상으로 올라가 그 세상의 것을 들이켜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부활과 생명을 호흡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입니다. 이 땅에서 잘 사는 방법입니다.
영적 세계를 호흡하세요. 현실만 바라보면 숨이 막힙니다. 영을 호흡하면 거기에 이미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생명의 잔치가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움츠렸던 가슴이 트입니다. 전혀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은 “죽겠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어떤 부흥사가 그랬습니다. “죽겠다” 하지 말고 “주께 있다” 그러라고 했습니다. “죽겠다” 하지 말고 “살겠다”하고 사세요. 죽기가 쉽지 않습니다. 살기가 더 쉽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다시 죽지 않습니다. 영원히 사는 사람들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뼈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마른 뼈들이 살아서 군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무기력합니다. 육체가 죽어 있습니다. 마음도 가라앉고 좌절합니다. 경제도 침체하여 돌파구가 없습니다. 유가가 치솟아 물가의 불안정을 부추깁니다. 내년의 경기는 더 나쁠 것이라고 벌써 야단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만 바라보지 마시고 이따금씩 수면 위로 올라와 저 세상을 호흡하십시오. 거기에 부활의 소망이 있고 참 생명이 있습니다.
마른 뼈같이 무기력한 우리들이지만 부활과 생명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생명을 공급받고 살아서 승리하는 하나님의 군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날, 거룩하고 복된 날
창 2장 1~3절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선 본문이 전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여섯 날 동안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는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이유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그 날에 마치시고 안식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보기에 따라서는 우리와 상관없는 일인 것 같이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엿새만에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든, 열흘만에 창조를 마치시고 그 다음 날에 쉬셨든, 아니면 창조하시는 데에 몇 날이 걸리셨건 마치신 후에 쉬신 일이 없든, 그것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이 쉬신 날이라고 해서 그 날을 복되게 하시든 마시든 거룩하게 하시든 그냥 두시든 그건 하나님 소관이고 우리하고는 관계없는 일 아니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전하는 사실들은 우리와 관계없는 것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그 일곱째 날을 우리와 관계시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 가운데 네 번째로 말씀하시기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20:8)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9-11) 덧붙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십계명이 이스라엘 백성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주신 계명임을 믿는 우리는 그 안식일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을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고 그 날에는 안식하셨다"고 했습니다. 일을 마치시고 쉬셨다는 것은 그저 아무 것도 안 하셨다는 것인지, 그러면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일곱 날을 주기로 돌아가는 매 주의 하루는 하나님께서 전혀 일을 안 하시고 그냥 쉬신다는 것인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안 하시고 그냥 계시기만 한다면, 그것은 사실 큰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주만물을 다스리시고 모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셔야 할 하나님께서 일주일마다 하루씩 쉬신다면 그 날이 하나님께는 안식일일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씩 불안과 공포와 혼란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이시고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이시며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다"고 했으며(행17:24-25, 28),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했는데(히1:3), 만일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에서 손을 놓으신다면 그것은 곧 우주의 대재앙일 것입니다. 만일 일주일에 하루씩 우리 나라의 모든 군인들과 경찰들과 소방관들과 의사들과 병원종사자들이 일제히 할 일을 멈추고 쉰다고 하면 불안해서 주말휴가니 뭐니 즐기겠다고 나설 사람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온 식구 다 집안에 문닫아 걸고 들어앉아 기도하던가 교회에 모여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쉬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쉬지 마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마음놓고 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으십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 한 사람을 베데스다 연못에서 고쳐주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준 것은 안식일을 범한 일이라고 죽이겠다고 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고 그 날에는 안식하셨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여섯 날 동안 지으신 세상이 더 이상 부족한 것이나 바랄 것 없이 완벽하게 좋았으며, 그래서 일곱째 날에는 새로 또 무엇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 지으신 모든 세상과 만물이 각각 제 자리를 잡고 서로 조화를 이루고 운행되게 하심으로써 그 만족스러운 결과를 누리시며 편안히 즐기셨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는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뒤에는 안식이 있고, 그가 하신 일의 결과를 누리는 기쁨과 행복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함이라기보다 우리를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은 모두 우리의 안식과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어떤 의미에서 안식이 따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많은 일을 하셔도 피곤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는 쉬시면서 꼭 하셔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언제나 일하시며 깨어계셔야 할 분이십니다. 시편 121편의 기자는 뭐라고 했습니까?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4-8)
셋째로, 안식의 의미는 그저 기계적으로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 데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루를 쉬며, 우리가 지난 엿새 동안 살게 하신 것도 오늘 하루를 쉬면서도 살 수 있게 하신 것도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그 크고 놀라운 역사를 돌아보며,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와 감사와 찬송을 드리고, 하나님의 그 은혜의 역사의 결과를 즐기는 데에 안식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께만 돌려질 수 있는 이 "거룩하다"는 말이 하나님 외의 어떤 존재에 붙여질 때에는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선택되어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바를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바르게 행할 때입니다. 예를 들어 한 민족을 거룩한 백성이라 한다던가 어떤 개인을 성도라고 부른다던가 어떤 건물을 성전이라고 할 때에는 이들이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선택되어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바를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바르게 행할 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그 날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에게 속한 날로 정하셨으며 그 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거룩하다"는 말이 사람이나 어떤 물질적 존재에 붙여지지 않고 시간에 붙여진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지만 사실 하나님의 날인 제7일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첫 번째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날의 거룩함과 이 날이 거룩하게 지켜져야 함의 중요성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앞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말씀하심으로써 그 하나님의 날에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날의 기쁨과 평안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귀한 은혜입니까? 이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동반자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을 까다롭고 귀찮고 부담스러운 요구나 조건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편히 쉬게 하시려는 배려이며, 우리가 쉬어도 삶의 염려가 없도록 책임지시겠다는 의지이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평안과 행복에로의 초청인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하나님나라의 삶에로의 택하심과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의 초청을 거부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있습니다. 그들은 한 주일에 하루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루를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하루를 공짜로 가장 복되게 누리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의 본 뜻이 무엇입니까? 구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7일을 앞선 엿새와 구별하셨습니다. 본문 3절에서 우리는 "복되게 하셨다"는 말과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이 나란히 나오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하나님의 날인 제7일이 특별히 복된 날이 되기 위해서는 그 날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즉 다른 날들과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의 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다른 날들과 다름없이 나를 위해서, 세상적으로 보내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복된 삶을 누리는 길이며 또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임을 확인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출31:13-17)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주의 날을 다른 날들과 구별하여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우리에게 선한 것이라고 믿는 믿음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내라 명령하신 일도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기 위하여 하신 일이라고 믿고 그 날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선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가 존중하고 따르는 태도는 더더욱 귀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날, 주의 날은 성별하여 지낼 때 참으로 복된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의 날을 바르게 지키는 것은 그 날 하루만 복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월드컵 축구경기가 시작되어 한 달 동안 지구가 뜨거워질 것입니다. 온 세상이 만사를 잊고 축구열기에 빠지게 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날과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려는 우리의 믿음에 장애가 되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 5일 근무제가 정착되고 주말연휴를 즐기는 생활양태가 확산되더라도 하나님의 날을 침범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주 5일 근무제를 하나님의 날을 더 잘 구별할 수 있고 더 잘 지킬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일주일에 주일 하루밖에 쉬는 날이 없어서 성수주일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쉬는 날 하루를 더 주셔서 이제는 주일 하루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 5일 근무제와 주말휴가문화 때문에 유럽의 교회들은 병들고 죽어갔을지 몰라도 한국교회는 그 때문에 오히려 튼튼히 살아나는 역사를 만들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하루씩 거룩하고 복된 하나님의 날을 만들어주신 것은 우리에게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아 즐기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