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덕수궁 2015.7.2
덕수궁의 석조전
대한제국
황제의 정전(正殿)이다.
자주 근대국가를 염원했던 우리의
역사가 담긴 곳,
박공의 오얏꽃이 세월을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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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옛 나라이나 천명을 새로 받았으니 새로 이름을 짓는 것이 합당하다. 조선은
기자箕子가 봉해졌을 때의 이름이니 당당한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다.
韓은 우리 고유한 나라 이름이며, 우리나라는 마한, 진한, 변한 등 원래의
삼한을 병합한 것이다. 큰 한(大韓)이라는 이름이 마땅하다". 대한제국 선포 배경이다.
1897년 10월 13일, 고종(광무황제)은 아관파천 이후 환궁하면서 조선이 '황제의 나라'임을
선포하고, 정궁인 덕수궁 안에 서양식 건축물인 석조전을 지었다.
석조전은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건립을 계획하여 1900년에
착공, 910년에 준공되었다. 엄격한 비례와
좌우대칭이
돋보이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내부에는 접견실과 대식당, 침실, 서재 등을 갖춘 근대 건축물이다. 건립 후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으로 사용되었으나, 1933년 이후에는 미술관, 국제회의장,
박물관 등으로 사용되면서 원형이 훼손되었다. 이에 문화재청은 석조전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미를 되찾고 국민들에게 돌려주고자
2014년 10월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재탄생시켰다. 국립고궁박물관과 창덕궁에서 보관하고 있던 당시 가구들을 원래 자리에 배치하여 황궁의 생활사를 재현하였으며, 재현이 어려운 공간은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안내문>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전경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은 1층과 2층 그리고 지층 등 3개 전시관으로 구분되어 있다.
중앙홀과 접견실, 대식당 등 공적 업무공간으로 사용되던 1층은 옛 석조전의 모습을
고증자료를 통해 최대한 원형으로 재현하였다. 이곳에서는 대한제국의선포, 대한제국 황제의 폐헌 의례 등을 엿볼 수 있다.
1층 귀빈 대기실.
황제의 폐현을 기다리며 차와 음료를 마시던 공간으로 배치된 가구들은 영국의 메이플사의 가구들이다. 이 방의 가구들은 일부 진품들과 고증을 거친 재현품들로 꾸며졌다. .
대한제국 황제 폐헌 의례. 가운데 고종(광무황제), 사진 왼쪽은 이범진 프랑스 주재
대한제국 공사, 오른쪽은 민영환 원수부총장(육군중장)의 복장이다
이 방은 석조전 준공 당시 식당이었으나., 현존하는 고증 자료의 부족으로 식당 복원
대신 대한제국의 의례를 설명하는 공간으로 꾸몄다. 대한제국의 황제국의 격에 맞추어 조선왕조의 여러 의례를 크게 고쳤다. 또한 새로운 국제질서에
맞는 서양식 의례를 도입함으로써 외교 의례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황제가 손님을 맞이했던 접견실. 석조전의 다른 방들과는 달리 가구의 벽, 커튼 등이
황실문양인 오얏꽃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 이채롭다.
황제를 폐현했던 외국 사신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접견실 입구에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서 끊임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고 나오면서도 그랬다' 고 하는데 걸어 가면서 인사를 해도 세 번이면 충분한 거리지만 당시의 엄숙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한다. 접견실의 가구들 중 일부 의자와 원탁, 그리고 협탁은 석조전 준공 당시의
가구들이다.
이화문(李花紋), 원래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꽃인 이화(李花, 오얏꽃-자두나무꽃)를 도안화하여 황실의 문장으로
사용한 것인데, 사실상 대한제국 국장(國章)의 용도로 쓰여 각종 칙서나 정부문서, 여권 등에 태극기와 함께 이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의도하에 대한제국 황실은 이왕가(李王家)로 낮추어졌고 오얏꽃 문양 역시 단순히 왕실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사용되었다.
대식당. 공식행사가 끝나고 가진 오찬이나 만찬이 열린 곳으로 서양식 음식이
제공되었다. 식기들은 오얏꽃 문양의 서양식기들로 채웠다.
1층에서 2층으로 가는 계단
황제와 황후의 사적인 공간인 2층 전시공간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 서재,
거실 등 사적 공간의 모습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으며 대한제국의 황실 가계도와
사진 등을 볼 수 있는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당시의 사진 등을 통해 서양 문물이 도입된 대한제국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대한제국 황실
가계도. 이 가계도에 명성황후의 사진이 없는 까닭은 현재 어디에서도 명성황후의 실제 모습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황제의 침실. 그러나 실제 고종은 덕수궁의 함녕전에 머물면서 사용하지 않았고, 일본에
거주하던 영친왕이 귀국할 때 사용했다.
황제의 서재
서재에 놓인 회전하는 사각 책장(앞쪽)은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회전이 잘 되고 있다.
원탁 책상 위에는 어떤 책이
놓여있었는지 고증할 방법이 없어 대한제국의 법령제정에 관심이 많았던 고종이 늘 즐겨보던
영문 법전을 올려 놓았다고 한다.
황후의 침실. 이 방은
순헌황귀비(영친왕의 생모)의 침실로 계획되었으나 석조전 준공 직전 황비가 별세하여 사용하지 못하였다. 후에 이방자 여사가 사용했다고 한다.
2층 복도 공간. 테라스로 나가는 길과 연결되어 있다.
2층에서 내려단 본 1층 중앙홀. 사진 오른편에 출입구가 있고
왼편에 접견실이 보인다. 중앙의 탁자는 석조전 준공 당시의 탁자다.
2층 테라스에서 내려다 본 석조전 앞뜰. 시원하게 내뿜는 분수가 7월의 싱그러움을 더해준다.
사진 오른쪽은 덕수궁 미술관
석조전 건축 구조
석조전의 벽면은 안쪽 벽에는
적벽돌은, 바깥쪽에는 화강암을 쌓아올려 완성하였다.
벽면위에 받침돌을
쌓고, 그 위에 I 자형 철제 빔을 올렸다. 그 위로 아치형 철판과 I 자형 철조 빔을 연결하여 철골을 올렸다.
난방을 위한 장치(사진 왼쪽
적벽돌 위의 굵은 두 줄)도 마련되었다.
지하층, 덕수궁 주변의 풍경도
시종들의 생활공간이었던 지층에는 대한제국의 근대 개혁과 신문물의 도입 과정, 당시
덕수궁 주변 지역을 소개하고, 석조전 복원 5년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덕수궁 연못의 새끼오리들이 7월의 더위를 피해 그늘에서 평화롭게 놀고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를 알 까닭이
없다.
덕수궁 뜰. 도심 속 궁궐의 푸르른 숲은 한여름 지친 몸을 쉬어가기에 충분히
여유롭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치욕의 일사늑약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
덕수궁을 나와 담장을 타고 서울시청 별관쪽을 오르면 정동교회, 이화학당이 있고 그 맞은편에 정동극장이 있다. 극장 옆 골목으로 들어서면 1905년 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 현장, 중명전이 있다.
중명전은 1897년경 황실의 도서관으로 러시아인에 의해 설계된 서양식 건물로
원래 이름은 수옥헌이었으나 1904년 4월 덕수궁 함녕전 화재 이후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중명전이란 이름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데 과연 그랬을까?
1905년 11월 18일 새벽,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중명전을 침범하고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후 주권 회복을 위한 대한제국의 민족적 투쟁이 시작되었다. 고종은 대한제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한 각국의 원수들에게 친서를 보내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렸다. 전국 유생들은 항일 상소운동을 벌였으며, 민영환, 조병세 등은
자결로써 항거했다. 종로거리의 모든 상점들은 문을 닫고, 학생들은 자진 휴교하였다. 또한 민종식, 최익현 등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났으며,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도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며 항일 여론을 고조시켰다.
고종의 특명으로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측사를
파견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펼쳤으나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고종은 1907년 아들 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겨줄 때까지 약 3년 반 동안
이곳에서 국사를 처리하였다.
구 러시아 공사관.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이 이루어진 역사의 현장이다.
7월이 시작되던 날 불현듯 덕수궁을 둘러보고 싶어 나섰다가 석조전이 대한제국의 역사관으로 거듭난 사실을
알았다.
역사에 무임승차하며 살아온 것이 부끄러웠다. 지난 날 몇 번씩이나 익히고 상기했던
사실들이었지만 막상 현장에 서 보니 마치 그날의 일들이 처음 들은 것처럼 생소하기만 했다. 수시로 배우고 익히는 것은 주체적으로 생각하기 위함이니 우리의 지난 역사를 기억하는 일에 게으름이 없어야하겠다. 생각 깊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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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직장이 그동네였을때는 직장인에게 무료개방이라서
산책하고 지냈습니다
역사는 그런사연을 지녔지만
모르면 그냥미술관이나 고궁으로만 알고 지난간듯합니다
그렇지요? 자세한 내막을 모르면 왜 고궁 안에 어울리지도 않게 돌로 된 건물인가 하고 지나가는 것이 일반적일 겁니다. 저 역시 특별히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니까요. 이번에 다시금 좋은 공부했습니다. ^^
체험 학습으로 의무적으로 학생들에게 보게끔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서야 바로 잡히기는 했지만 그동안 국사를 입시에서 선택으로 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쉽게 취급되던 우리의 역사가 학생들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던 것이 아쉽습니다. 자연스러운 가운데 학생들이 스스로 찾아 갈 수 있는 풍토가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만 지금같은 현실에서 과연 가능할지 의문스럽기도 하고요. 인문학이 우리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는 것이 걱정입니다.
석조전내부가 그렇게 달라졌군요
내부를 잘 고쳐놓았지만 아픈역사는 그대로네요 그리고 건물도 일제때지은 르네상스식건물 그대로이고요
암튼 미술관이나 박물관으로 사용했던것과 달라서 좋습니다만 그 건물은 그대로두면서 중앙청건물은 애 부셔야했는지....
여기처럼 역사의 무엇인가로 바꾸어놓으면 좋았을것을...(개인적으로 생각함니다만) 서울역건물이라든지 ....부셔버린것에 무척아쉬워하는 한사람이거든요. 청와대앞에 버티고 있어서 ?? 고궁과 어울리지않기는 덕수궁도 마찬가지인데..
지난번 동유럽에서도 보니까 꾀나많은 르네상스식건물들을 그대로 두어서 세계관광객들의 돈을 떨어뜨리게 하드구먼....
아 만저 감사해요
내가 좋아하는 덕수궁을 이렇게 자세히 알려주어서요
한번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려운 설명도 있네요
학창시절엔 대한제국때의 사건들을 잘알었는데...지금은 도무지 모르겠네요....아관파천이라든지....ㅎㅎ
역사를 다시한번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저는 대하드라마라든지 사극을 전혀안보는데...왜냐면 500년동안 끊임없는 남인북인 노론소론 당파싸움의 역사라서....제일좀 아쉬웠던 대장금을 못본것이.....많이 깨달았읍니다 수고하셨어요
ㅎㅎ 어려운 설명이 있었군요. 죄송합니다. ~
아관파천이 원래 한자어인데다 역사적으로 굳어진 용어라서요. ^^
@무명시대 네 저도 과거엔 알었었는데...지금 잊었다는말이예요. 어렴풋이는 알어요. ㅎㅎ
다시 공부해서 정확히 알아여겠다는 겁니다
무명시대님의 설명은 훌륭해요 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