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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안악 3호분의 대행렬도
한국 초기 국가의 전사집단
고대 전쟁의 전투구성원은 대체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고구려나 부여 등을 비롯한 초기 국가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전시에는 대체로 무장을 갖춘 전사집단이 적군을 맞상대하였으며, 일반 민(民)들은 전사집단을 위한 보급임무를 수행하며 간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측케 하는 구절이 보인다. 이는 3세기 당시 한국 고대국가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삼국지』 동이전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라에는 군왕(君王)이 있고, 모두 여섯 가축(六畜)의 이름으로 관명(官名)을 정하여 마가(馬加) · 우가(牛加) · 저가(豬加) · 구가(狗加) · 대사(大使) · 대사자(大使者) · 사자(使者)가 있다. 부락에는 호민(豪民)이 있으며, 하호(下戶)라 불리는 백성은 모두 노복(奴僕)이 되었다. 제가(諸加)들은 별도로 사출도(四出道)를 주관하는데, 큰 곳은 수천가(家)이며 작은 곳은 수백가(家)였다. (중략) 활·화살·칼·창을 병기로 사용하며, 집집마다 자체적으로 갑옷과 무기를 보유하였다. (중략) 적의 침입이 있으면 제가(諸加)들이 몸소 전투를 하고, 하호(下戶)는 양식을 져다가 음식을 만들어 준다.
國有君王, 皆以六畜名官, 有馬加·牛加·豬加 校勘 ·狗加 ·大使·大使者·使者. 邑落有豪民, 名下戶皆爲奴僕. 諸加別主四出道, 大者主數千家, 小者數百家. (중략) 以弓矢刀矛爲兵, 家家自有鎧仗 (중략) 有敵, 諸加自戰, 下戶俱擔糧飮食之.
-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
『삼국지』 동이전 부여전에 따르면 부여는 각기 집집(家家)마다 자체적으로 병장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전투는 대체로 지배계층인 제가(諸加)들에 의해 이루어 졌으며, 백성(民)인 하호(下戶)들은 일선에 나가 싸우는 군대를 위하여 먹을 양식을 보급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집집마다 자체적으로 갑옷과 무기를 보유하였다던' 계층이 누군가 하는 것인데, 이들은 대체로 부유하여 자체적으로 무장을 갖출 수 있었던 일부 백성들이나 혹은 지방의 재지세력으로써 어느정도 경제력을 갖추었던 중간계층인 호민(豪民)들, 그리고 이들을 지휘하였던 최상위 지배계층인 제가(諸加)들이라 할 수 있다. 즉, 자체적으로 무기를 갖추어 적과 싸울만한 여유가 있었던 호민과 제가 등의 상위계층이 일종의 전사계급을 이루어 집적적인 전투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그 외에 가난하여 적을 상대할만한 무기나 전투기술을 보유하지 못한 일반민들은 전사계급을 보조하는 보급임무를 수행하였던 것으로 파악해볼만 하다.
이처럼 스스로 무장할 수 있는 부(富)에 따라 구성된 군사체계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의 경우와도 흡사한 일면이 있다. 기원전 7세기 경의 아테네는 무장을 할 수 있는 부의 척도에 따라 그 사회 구성원들의 계층화가 이루어졌다. 예컨데 최상위 계층인 고위 귀족층은 고위장교이자 지휘관으로 활동했으며, 귀족층인 힙페이스(Hippeis)층은 기병 혹은 장교로써 말을 소유하여 전장에 타고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이들로 구성되었다. 중간계층인 제우기타이(Zeugitae)층은 스스로 갑옷과 창을 갖추고 싸움터에 나갈 수 있는 중장보병들이었는데, 특히 점차 중장보병의 대열을 통해 집적적인 전투가 이루어졌던 호플리테스(Hoplites) 전법이 일상화됨에 따라 제우기타이층의 권한이 강해져 훗날 아테네 민주주의의 초석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딱히 스스로 무장을 갖출만한 경제력을 갖추지 못했던 일반민 테테(Thetes)들은 가장 낮은 대우를 받아야 했다. 그 아래에는 가장 비천한 노예가 있었다. 이처럼 부여의 경우에도 스스로 무장을 갖출 수 있는 귀족인 제가층과 중간계층인 호민층이 일반민인 하호층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갖추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군사체계는 같은 시기인 3세기 당시의 고구려라 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상당히 흥미롭다.
그 나라의 대가(大家)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므로, 앉아서 먹는 인구(坐食者)가 만여명이나 되는데, 하호(下戶)들이 먼 곳에서 양식·고기·소금을 운반해다가 그들에게 공급한다.
其國中大家不佃作, 坐食者萬餘口, 下戶遠擔米糧魚鹽供給之.
-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조
이에 따르면, 농사를 짓지 않는 고위귀족인 대가(大家)를 일명 '앉아서 먹는 인구' 즉 '좌식자(坐食者)'라 표현하였고, 일반민인 하호들이 그들에게 식량을 대어주어서 먹고 살게 해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는 하호들이 전시에 식량을 지고 와서 전투를 수행하는 제가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공급했다는 부여조의 기록과 대단히 흡사하다. 때문에 이처럼 '앉아서 밥먹는 자들', 즉 좌식자들을 평소에 농사를 짓지 않고 전투에 전념하는 전사집단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특히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에서는 부여인과 고구려인을 가르켜 공통적으로 '용맹하고 전투에 능하다'는 뉘앙스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부여와 고구려의 군대가 각기 어느정도 훈련된 전사집단을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특권계층으로 구성된 전사집단을 중심으로 한 전쟁의 양상은 당시 한국 고대의 초기국가들의 성격에서 비롯되었다. 부여와 고구려 등을 비롯한 초기국가들은 대체로 아직 중앙집권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였다. 비록 당시 부여나 고구려 등 어느정도 발전을 거친 국가들은 국왕(國王)을 중심으로하는 여러 부(部)의 연맹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아직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체제는 완전히 갖추어 지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왕은 해당 국가의 대표적인 존재였을 뿐, 그 휘하에 있는 각 부(部)와 그 부의 우두머리인 가(加) 등의 상위 지배층들은 자신들의 세력권에 대해 어느정도 자치권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국가에서 자체적으로 백성들을 전시에 동원할수 있는 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설사 일반민들을 징집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들에게 무장을 지급할만한 여력도 충분치 않았을 것인데, 무장이 제대로 갖추어있지 않은 하호들을 전장에 몰아넣는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도박이었다. 승률도 높지 않을 뿐더러 자칫 노동력만 상실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더불어서 당시 전사집단은 일종의 특권계층이었으며, 전투의 양상도 대체로 해당 지역에 대해 무력으로 제압한 후에 약탈이나 수취를 행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처럼 전쟁으로 인해 창출된 부와 경제적 혜택은 대체로 지배계층에게 돌아갔고, 때문에 지배계층들은 더더욱 하위계층인 하호들을 전투에 참여시키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는 전사집단을 구성하는 일부 특권층들이 일반 전투원들에게까지 전투의 결과로 성취한 부를 나누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시 말해 이 시기의 참전이란 곧 일종의 신분적 · 경제적 특권과 같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제력이나 계층 면에서 뒤떨어지는 일반 하호들이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고 허드렛일만 담당했던 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을 듯 하다.
중앙집권체제의 징병제
그러나 위에서 소개한 특정 전사집단을 중심으로 한 군사체계는 초기국가 시대를 거쳐 삼국 간의 항쟁이 가속화되면서 점차 허물어져 가기 시작하였다. 특히 313년에 이르러 한반도 북부에 존재하던 낙랑군과 대방군이 세력확장을 꾀하던 고구려 미천왕의 맹공에 밀려나 요서 지역으로 이치되고, 이에 따라 고구려-백제의 두 강국(强國)이 한반도 중북부에서 집적 국경을 마주하면서 그 군사적 대립이 본격화되면서 전쟁의 규모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확대되었다. 더욱이 당시의 고구려와 백제는 어느정도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져 있었고, 그에 따라 왕권이 강화되고 국가의 역량을 한곳에 집중할만한 힘 또한 갖추고 있었다. 고구려는 고국천왕 대인 2세기 이후로 점차 기존의 구성단위였던 5부(部)가 부족적 성격을 벗어나 국가의 방위명을 나타내는 행정기구적 성향을 띄게 되었으며, 백제의 경우에도 고이왕 대에 기초적인 관직체계를 규정하고, 4세기 경 근초고왕 대에는 본격적인 중앙집권화와 지방통치체계의 확충이 이루어지면서 어엿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의 행태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기존에 소수의 고위층 전사집단에만 의지하던 군사체계 만으로는 상대국을 완전히 격파하기가 힘들게 되었으며, 전쟁의 성격도 크게 변화하였다. 본래 기존의 초기국가들은 국왕을 중심으로 모인 여러 집단의 연맹체에 가까운 형태를 지니고 있었고, 따라서 군대도 일원화된 체계를 갖추지 못하여 여러 집단의 연합군에 가까운 모습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각 집단은 자신들의 세력에 속한 전사집단을 이끌고 참전하여 전쟁의 부산물을 나누어 분배하며 경제적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2~3세기 이후로 점차 국가의 기틀이 잡혀가고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국가를 구성하던 여러 부(部) 집단은 점차 자치력을 잃고 왕권에 귀속되는 형태를 띄게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던 고구려와 백제의 일련의 중앙집권화적 성향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단순히 다른 집단을 갈취하고 수탈하는 수준에 그쳤던 전쟁의 양상도 크게 변화하여서 해당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여 국토로 삼고, 그 토지와 거주민들을 상대로 수취를 하게 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지방통치와 조세제도가 확립되어감에 따라 더이상 단순한 약탈물이나 착취물이 아닌 영토와 노동력, 그리고 그에서 나오는 조세가 전리품이 된 것이었다. 물론 사기진작 효과를 위한 약탈행위는 있을 수 있어도 더이상 그 자체가 전쟁의 목적이 되지는 못하였다. 과거처럼 전투에 참여한 전사집단에게 전리품을 분배하던 기존의 방식으로는 이처럼 정교한 체제를 따라잡기 힘들게 되었다. 때문에 여러 국가들은 기존의 소수 전사집단에 의지하여 전투를 수행하고 영토를 확장하던 방식에서 탈피하여 보다 큰 규모의 체계화된 군대를 보유할 필요가 생겨났다. 그에 따라 일반 백성들을 상대로도 징집제가 시행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4세기를 전후하여 고구려와 백제 등은 수만 단위 군사를 동원하여 전쟁을 벌이는 등 그 군대의 규모가 크게 확장된 것을 여러 기록에서 찾아볼 수있다.
한편『삼국사기』에서 백제의 근초고왕이 태자인 근구수왕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과 맞붙어 이를 격파하는 대목에서는 당시의 군사체계에 대해 알 수 있는 주목할만한 대목을 접해볼 수 있다. 해당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근구수왕 (近仇首王)은 근초고왕 의 아들이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국강왕 (國岡王) 사유(斯由)가 직접 와서 침범하였다. 근초고왕은 태자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다. 그는 반걸양(半乞壤)에 이르러 전투를 시작하려 하였다. 고구려인 사기(斯紀)는 원래 백제인이었는데, 실수로 왕이 타는 말의 발굽을 상처나게 하였다. 그는 이로 말미암아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고구려로 도망갔었다. 그가 이때 돌아와서 태자에게 말했다. "고구려 군사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가짜 군사로서 수를 채운 것에 불과합니다. 그중 제일 강한 부대는 붉은 깃발을 든 부대입니다. 만일 그 부대를 먼저 공략하면,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허물어질 것입니다." 태자가 이 말에 따라 진격하여 크게 이기고, 달아나는 군사를 계속 추격하여 수곡성 서북에 도착하였다.
近仇首王 一云諱 湏 近肖古王 之子先是髙句麗 國岡王 斯由 親來侵 近肖古王 遣太子拒之至 半乞壤 將戰髙句麗人 斯紀 夲百濟人誤傷國馬蹄懼罪奔於彼至是還來告太子曰彼師雖多皆備數疑兵而已其驍勇唯赤旗若先破之其餘不攻自潰太子從之進擊大敗之追奔逐北至於水谷城之西北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 원년조
해당 기록에서 백제의 태자 근구수가 고구려의 고국원왕과 싸워 크게 이겼다는 싸움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4년(369)조의 기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보기(步騎) 2만 명을 거느리고 오늘날 황해도 배천 일대로 생각되는 치양(雉壤)을 공격해오자, 근초고왕이 태자를 파견해 이를 쳐서 5천여 명의 적을 죽이고 노획한 물품은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대목과 동일한 사건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해당 기사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사기가 고국원왕이 이끌고 온 군사들을 가르켜서 "가장 강한 부대는 붉은 깃발은 든 부대이며, 그 부대를 먼저 공략하면 나머지는 절로 허물어질것이다"라고 했던 부분이다. 이에 대해서는 '붉은 깃발을 든 군사'를 고구려왕의 직속인 정예병들로 전투에서 실질적인 주력을 담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외에 사기의 표현에 따르면 '가짜 군사로서 수를 채운 것에 불과'하다던 병사들은 대체로 실제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징집병들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당시 고국원왕은 백제가 세력을 팽창하여 옛 중국군현의 땅이었던 황해도 일대까지 진출하자 그 기세를 꺾기 위해 몸소 출전했으나, 당시 전연의 모용황에게 참패를 당한 터라 여건이 충분치 않아 급한대로 소수의 직속 정예병과 다수의 급조한 징집병을 이끌고 치양을 공격했던 것 같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369년 당시에 근초고왕은 가야와 왜 등의 세력과 연계하여 일종의 국제 연맹을 형성하고 남쪽의 마한잔여세력인 침미다례를 공격하는 등 이른바 남방경략에 분주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고구려의 침공을 받게 되자 태자를 보내 이를 급히 막도록 했던 것이다. 고국원왕이 일대를 집적적으로 공격하기보다 주로 민가를 약탈했다고 했던 것으로 보아, 백제에 집적 타격을 입히기보다는 견제적 성격의 도발 행위를 감행했던 것으로 보이나 예상외로 태자인 근구수가 군사를 이글고 빠르게 진격해와 몸소 반격을 시도한데다가 급조한 병력의 약점이 드러나자 여지없이 패퇴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이렇게 시작된 징병제적 성향은 6~7세기에 이르러 고구려와 백제, 신라 등 삼국 사이에 한강유역의 패권을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렇다면 당시 백성들은 어떤 방식으로 징집되어 군역을 지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신라의 설씨녀 설화를 통해 당시 삼국간의 치열한 항쟁의 시기에 이루어진 징병제의 실상을 어느정도 파악해 볼 수 있다.
설씨녀(薛氏女)는 [경주] 율리(栗里)의 일반 백성 집 딸이다. 비록 지체가 낮은 가문에 세력이 없는 집안이었으나 얼굴빛이 단정하고, 뜻과 행실이 닦여지고 가지런하였다. 보는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진평왕(眞平王) 때에 그 아버지는 나이가 많았으나 정곡 (正谷)에 외적을 막으러 갈 순서가 되었다. 딸은 아버지가 늙어 병들었으므로 차마 멀리 헤어질 수 없었고, 또 여자의 몸이라서 대신 갈 수도 없음을 안타까워하면서 다만 스스로 근심하고 괴로워할 뿐이었다. 사량부 소년 가실(嘉實)은 비록 매우 가난하였으나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지조가 곧은 남자였다. 일찍부터 설씨를 좋아하였으나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는데, 설씨 가 아버지가 늙은 나이에 전쟁터에 나가야 함을 걱정한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설씨 에게 가서 말하였다. “저는 비록 나약한 사람이지만 일찍부터 뜻과 기개를 자부하여 왔습니다. 이 몸이 아버님의 군역을 대신하기를 원합니다.”
설씨가 대단히 기뻐하여 들어가 아버지에게 아뢰었다. 아버지가 [가실을] 불러 보고 말하였다. “듣건대 그대가 이 늙은이가 가는 것을 대신하고자 한다고 하니 기쁘면서도 두려움을 금할 수 없네. 보답할 바를 생각하여 보니, 만약 그대가 우리 딸이 어리석고 못생겼다고 버리지 않는다면 어린 딸을 주어 수발을 받들도록 하겠네.” 가실 이 두 번 절을 하고 말하기를 “감히 바랄 수 없었는데 이는 [저의] 소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가실 이 물러가 설씨에게 [혼인할] 날을 물으니 [그녀가] 말하였다. “혼인은 인간의 중요한 도리이므로 갑작스럽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미 마음으로 허락하였으니 죽어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당신께서 변방 지키는 일을 교대하고 돌아오시면 그런 후에 날을 잡아 혼례를 올려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거울을 가져다 반을 나누어 각각 한 쪽씩 가졌는데, [그녀는] “이는 신표로 삼는 것이니 후일 그것을 합쳐 봅시다.”라고 하였다. 가실 이 말 한 필을 갖고 있었는데 설씨에게 말하였다. “이는 천하의 좋은 말이니 후에 반드시 쓰임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제가 떠나니 기를 사람이 없습니다. 이를 두고 쓰십시오.” 드디어 물러나 떠났다.
마침 나라에 변고가 있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교대하도록 하지 못하여 6년을 머물고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딸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3년으로 기약을 하였는데 지금 이미 지났구나. 다른 집안에 시집을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설씨가 말하였다. “지난 번에 [가실이] 아버지를 편안히 하여 드렸고, 그러므로 굳게 가실과 약속하였습니다. 가실은 이를 믿었고, 그러므로 전쟁터에 나가 몇 년이 되었습니다. 굶주림과 추위에 괴롭고 고생이 심할 것이고, 하물며 적지에 가까이 있어 손에서 무기를 놓지 못하고, 호랑이 입에 가까이 있는 것 같아 항상 물릴까 걱정할 것인데, 신의를 버리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의 마음이겠습니까? 아무래도 감히 아버지의 명을 좇을 수 없으니 다시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 아버지는 늙어서 정신이 없었고, 그 딸이 장성하였는데도 짝이 없었으므로 억지로 그녀를 시집을 보내려고 몰래 동네 사람과 혼인을 약속하였다. 정한 날이 되자 그 사람을 불러 들였으나 설씨는 굳게 거절하였다. 몰래 도망을 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구간에 가서 가실 이 남겨두고 간 말을 보면서 크게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때]에 가실이 교대하여 왔다. 몸과 뼈가 야위어서 파리하였고 옷이 남루하여 가족들도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라고 여겼다. 가실 이 곧바로 앞에 와서 깨진 거울을 던지니 설씨 가 그것을 주워 들고 큰 소리로 울었다. 아버지와 가족들은 좋아하고 기뻐하였다. 드디어 다른 날을 약속하여 서로 만나 그와 더불어 해로하였다.
- 『삼국사기』 열전 설씨녀조
해당 기록에 따르면 설씨녀는 늙은 아버지를 다신해 군역을 지게 된 가실에게 보답하는 의미로 약혼을 하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는데, 기한이 3년이 부쩍 넘어 6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다가 뒤늦게 교대를 하여 돌아온 가실과 다시 맺어져 혼인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비록 설화적 성격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진평왕 대인 6~7세기 당시 신라의 징병제와 군역이 대략 어떤 체계로 이루어졌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려주는 문헌사료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진평왕 대의 신라는 무왕 대에 이르러 점차 국력을 회복한 백제와 치열한 사투가 벌어진 때였다. 당시의 신라의 사정은 늙은이마저 병사로 끌어다 써야 할 지경에 이를 정도로 전쟁이 빈번했던 것으로 알 수 있는데, 특히 백제 무왕은 관산성 전투 이후 상실한 낙동강 서변의 옛 가야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목적으로 집요하게 신라를 공격하여 실제로도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던 것 같다. 그만큼 당시 신라의 사정은 절박하였던 면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년 가실이 설씨녀의 늙은 아버지 대신에 군역을 지고 그 조건으로 설씨녀와 혼약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어떤 특정한 댓가를 받고 타인의 군역을 대신 지게되는 것도 당대의 사회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해당 기사에서 '3년의 기한'을 두었다는 대목으로 보건데, 당시 신라의 군역은 대체로 3년 정도였으며 기한이 지나면 다른 징집병이 와서 군역을 교대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가실은 기한인 3년을 넘겨 6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못하엿다. 실제로도 변경의 전투가 치열해지고 전선의 긴장감이 오래 지속되는 경우에는 기한을 넘겨도 부득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군역을 살아야했던 경우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고대의 전쟁은 일반 백성들에게 있어 크나큰 고통이었음이 분명하다. 국가 간의 전쟁이 단순한 지역의 패권 다툼과 약탈전의 규모를 넘어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전면전으로 확대되면서 전쟁의 무거은 짐은 기존의 귀족들 뿐 아니라 징집되어 군역을 살아야 했던 백성들도 피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귀족의 책무
위에서 언급한 사실이지만, 점차 중앙집권적 고대국가가 등장하고 삼국 간의 항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더이상 소수의 특권층 전사집단에 의해 전쟁이 좌우되던 시대는 끝이 났다. 전쟁의 결과 창출된 부는 더이상 약탈품의 수준을 떠나 영토와 해당 지역에서 나오는 조세의 형태로 확대되었고, 그에 따라 전쟁의 규모 또한 확대되어 더이상 소수의 전사집단만으로는 이러한 체계를 감당키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삼국의 군대는 그 규모가 크게 확장되어 갔으며, 그 중 대다수는일반 백성들로 하여금 군역을 살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충원한 징집병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귀족들이 더이상 전쟁에 참여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귀족들은 전장에서 세운 전공을 발판으로 삼아 가문의 격과 명예를 드높이는 한편 그 세력을 강화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던 것 같다. 때문에 삼국의 귀족들은 대체로 호전적이고 상무적인 기풍을 지니고 있었다. 『신당서』에서는 고구려에는 길거리에 큰 집을 지어 그 이름을 경당이라 하였는데, 결혼하지 않은 자제들을 이 곳에 보내 글을 배우게 하고 활쏘기를 익히게 했다고 전한다. 경당은 대체로 귀족 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생각되는데, 여기서는 글을 읽는 법 외에도 활쏘기 등의 무예 또한 베우게 하였던 것이다. 『구당서』에서는 백제인들을 가르켜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즐긴다고 하였는데, 이 역시 상무적 기풍을 중요시했던 백제 귀족사회의 일면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에서는 태자 시절부터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우며 두각을 드러냈던 태자 근구수(근구수왕)나 태자 여창(위덕왕)의 활약상을 전하고 있다는 점이 무척 특이한데, 이같은 상무적 기풍은 왕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듯 한다. 신라의 김유신도 전공을 세우며 활약하여 가야계 진골이라는 출신적 콤플렉스를 떨쳐내고 삼한일통의 주역으로 떠오를 수 있었으니, 당시 귀족들에게 전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글과 더불어 무예를 갈고 닦은 귀족들은 자라서 전장에 나아가 공을 세우며 가문의 세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특히 나라에서 강한 권세를 지닌 고위귀족일수록 두드러지는 성향인것으로 보이는데, 더불어 하급귀족들에게 있어 전장에서 공을 세우는 것은 신분상승의 한 길이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은 『삼국사기』 열전의 온달조의 기사이다. 해당 기록에 따르면, 천대받던 고구려 사람이었던 온달은 매년 봄 3월 3일 마다 열리는 낙랑언덕의 사냥대회에서 뛰어난 활솜씨를 발휘하여 평원왕의 눈에 들게 되었고, 이후 전공을 세워 비천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대형(大兄) 벼슬을 얻고 부마로 인정받아 부귀영화와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온달이 본래 하급귀족 출신이었으나, 뛰어난 전공을 세워 신흥귀족으로 떠올랐고, 평원왕이 그를 부마로 삼고 고위관직을 내려 왕권을 엄호할 지지세력으로 삼았다는 설이 있다. 그만큼 당시 귀족들에게 있어 상무적 기풍은 무척 중요한 것이었다.
신라의 경우에는 이에 관련해서 화랑도(花郞徒)의 존재가 특히 주목된다. 『삼국사기』신라본기의 진흥왕 37년(576)조에 따르면,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그를] 받들었는데,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혹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겼는데, 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기니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사악함과 정직함을 알게 되어 착한 사람을 택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고 하였고, 이에 대해서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어진 이와 충신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은 이로부터 생겼다.'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또 이에 대해서 당나라 사람인 영호징은 『신라국기』에서 '귀족의 자제 중에서 아름다운 이를 택하여 분을 바르고 곱게 꾸며서 이름을 화랑 이라고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높이 받들어 섬겼다.'라고 하기도 하였다.
화랑도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화랑은 각기 수백명에서 많게는 천명이 넘는 낭도를 거느리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대체로 진골 귀족 자제 출신이었다. 화랑 가운데에서 김유신과 같은 명장으로부터 사다함이나 관창 등의 소년장수에 이르기까지 이름난 군인이 다수 배출된 것을 보면, 화랑도 또한 상당히 상무적인 기풍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여러 기록에서 나타나는 고구려와 백제 귀족의 상무적 기풍과 비교해볼수 있음봄직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화랑도의 의의는 단순히 뛰어난 귀족 군인을 양성해내는데에 그치고 있지 않았다. 화랑도는 그 기원이 본래 선사시대로부터 존재해왔던 일종의 부족적 남성집회에 두고 있는 것인데, 신라가 국가의 기틀을 갖추어가고 더불어 율령 반포와 골품제를 통해 사회질서가 규정됨에 따라 국가적 제도로 변모하여 귀족적 청소년전사단 내지는 가무조합의 성격을 띄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비록 화랑도의 우두머리는 진골 출신의 화랑이었으나, 그 구성원인 낭도들은 진골 이하의 귀족으로부터 평민과 승려 등 다양한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화랑도는 기존의 원시 부족적 남성집회의 성격을 유지하여 다양한 계층의 청소년들이 함께 어울리며 일종의 동질감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더불어 국가적 제도로서는 나라와 군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배경을 통해 화랑도를 거친 신라의 젊은이들은 신분을 초월하여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는 이념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던 듯 하다. 화랑도로부터 어진 이와 충신이 나왔고, 뛰어난 장수와 병졸이 생겼다고 하던 김대문의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하다.
※참고문헌
Michael Cheilik 저 · 고려대 대학원 고대사연구실 역,『서양고대사개론』, 문맥사, 1987
三品彰英 저 · 이원호 역, 『신라화랑의 연구』, 집문당, 1995
김기흥, 『새롭게 쓴 한국고대사』, 역사비평사, 1993
김용만,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역사의아침, 2011
이기동, 『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1990
이기백, 「삼국시대의 사회구조와 신분구조」, 『한길역사강좌 12 : 한국고대사론』, 한길사, 1988
이희진, 『근초고왕을 고백하다』, 가람기획, 2011
여호규, 「전쟁에도 역사가 담겨있다」,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개정판)』, 청년사, 2005
첫댓글 원한의 거리님 여기서도 뵙네요! ^^ 역사문에서도 양질의 글들을 보길 바랍니다!ㅋㅋ
감사합니다. 누구신가 했더니 한량 님이셨네요. 여기서 보게 되어 반갑고 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