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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서울 경기(의존교회) 중생, 칭의1-6
05. 11. 14 강의 이근호목사
세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의논해서 의롭다고 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사람의 행동여하에 따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공로가 그 사람 속에 들어가니 하나님께서 그 예수님의 공로를 보고 의롭다고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이를 전달하는 도구에 불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만들은 의는 찌그려져야 하고, 박살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든 의란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만든 의라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착한 행동해서 만들어 낸 의이거든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의 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를 인정하지 않는가 하면, 이것이 세 번째 시간이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왜 안 되는가 하면, 우리가 나쁜 짓해서도 아니고, 우리가 마귀 들려서 그런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라는 화목제물이 따로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의 제물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냉정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금덩어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한 사람에게 줄 때에 옆에 있던 사람이 왜 저에게는 안 주는 거예요? 라고 할 때에 하나님의 뜻은 이 사람에게 주었기에 너에게 돌아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네가 그 사람보다 나빠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우리가 율법 지키면 구원 받을 수 있는데 우리가 온전히 지키지 못하여 구원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제대로 지켰다면 구원받을 필요도 없는데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기에 예수님을 대신 보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의만이 의이고 우리의 의는 의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화목제물은 예수님만이 화목제물이시기 때문입니다. 화목제물의 중심에는 예수님 빼놓고 그 어떤 인간도 끼어들지를 못 합니다.
왜 이 사람한테는 주고 저 사람한테는 안 주는가? 하나 밖에 없는 것을 주었으니 더 이상 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시도록 이미 창세전에 계획되어 있습니다. 이미 스케줄이 잡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화목제물만 받기 때문에 다른 화목제물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또 무엇이냐 하면, 그 아들이 이루신 화목제물을 믿는 사람을 의롭게 하시고 하나님도 의롭게 되시고, 하나님도 의롭고 그 인간도 의롭데 되는 것은 전부 다 화목제물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그러니 착하고 안 착하고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냉정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주 비정하고 냉철하고 싸늘하지만 좀 정신 차리고 너무 감격하려고 하지 말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근호 목사는 이상한 사람이다. 예수 믿고 난 뒤에도 우리에게서 의가 안 나온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면 예수 믿고 설교하는 것이 나쁜 짓인가? 이런 식으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모든 것이 예수님의 화목제물에 근거 한다는 것을 모르고,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구약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었는데 실력이 모자라서 못 이루었는데 이제 신약에서는 성령이 오셨기에 이제 자신이 율법을 다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영현이라는 사람이 그것을 빈정대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것을 다 이룬다는 사람 나와 보라고 한 것입니다. 성령 받아서 율법 다 지킨다는 사람 나와 보라는 것입니다. 나는 성령 받고서 행동해도 죄가 나오던데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떤 도사가 되었는데 성령 받고 행동하니 완벽하게 행할 수 있다고 하는지 보자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인 줄 알고,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를 염려도 하지 않고, 범죄 한 오른 손을 찍어버리고 하는 그런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 자기가 한 평생 못 보았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거짓말 하느냐는 것입니다. 성령 받고 새 사람 되어서 율법을 다 지킨다고? 어디서 그런 거짓말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죄 개념은, 잘 들으세요!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의 죄 개념은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이 죄입니다. 구약에는 오징어 먹는 것이 죄였고, 돼지고기 먹으면 죄였고, 추어탕? 큰일 납니다. 사도시대에는 목 졸라 죽인 것 먹으면 안 되고 했는데 고린도 전서에 보면 사도바울이 한 말이 무엇이든지 감사함으로 먹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이든지 감사함으로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죄냐 죄 아니냐 하는 것은 마지막 심판의 기준인데 그 심판의 기준은 십자가의 복음을 믿지 않으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그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갑니다. 제가 오랜만에 바른 소리 한번 했지요!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십자가 모르면 지옥 갑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그 피의 화목제물을 믿는 자는 죄가 있어도 죄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죄를 그에게 돌리지 아니하신다고 고린도후서 5:19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다고 하셨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毬ご纛?딴 데 계시지 않습니다. 이근호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지 제 안에 하나님이 바로 있지는 않습니다.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1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작전은 우리 인간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제 한 테도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일방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처리해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는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계속하여 유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일토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이 계속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 이후에는 개인적으로 의인이냐 아닌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너 누구 안에 있느냐로 물어야 합니다. 쉽게 하겠습니다. 너 예수님이라는 의인 안에 있어? 그래! 그렇다면 의인이네! 너 예수님 밖에 있나? 그렇다면 죄인이네! 그러므로 십자가 이후에는 개인에게 너 의인이냐 죄인이냐고 묻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루터도 오해하고 칼빈도 오해한 것입니다. 십자가 이후에는 그런 질문 자체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왜? 십자가 이후에는 모든 인간이 죽었는데 죽은 인간 붙들고 네가 죄인이냐 의인이냐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미 죽은 인간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버렸는데, 죽은 자에게 무슨 의인이고 죄인이고가 있습니까? 만약 죽은 자 가운데서 의인이 나타났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살려 주셨기에 된 일이고, 죽은 가 가운데서 계속 죽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안 살려 주려서 그런 것이고 그게 바로 십자가 이후에 달라진 인간의 위상이 이렇게 변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꼭 귀신 신 나락 까먹는 소리 같지요! 이것이 성경에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소리 말고 납득이 될만한 소리 해 드릴까요? 그것은 이렇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죄가 많습니다. 살인죄 간음죄 부모공경하지 않은 죄, 안식일을 안 지킨 죄, 그런데요 예수님이 우리의 그런 죄를 대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의인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 전체를 다 뒤덮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출발점이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나쁜 짓, 여러분들도 납득이 가는 나쁜 짓에서 출발하여 그런 나쁜 짓을 했으니 죄인 맞지요! 하는 것은 납득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십자가 앞에서 간음을 하든지 안하든지 이혼을 하든지 안하든지 안식일을 지키든 아니 지키든 모든 인간은 태어나는 자체가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태어나는 자체가 죽은 자로 태어났으니 태어나고 나서 어떤 도둑질을 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죽은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4에 나오잖아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자가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시 하겠습니다. 여러분 성경보세요! 성경 보니 여러분이 죄인 맞지요! 맞아요! 보모 공경했습니까? 아니요! 그러니 죄인 맞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 죄가 무거워서 천당을 못 가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죄를 씻어주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인됩니다.
여기서 하자를 찾는다면 찾는 그 자체가 나쁜 놈처럼 여겨질 만큼 완벽한 복음 그 자체인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질문 자체가 윤리적 도덕적으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서 심판아래 있기 위함이고 그래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화목제물을 주셔서, 율법 외에 다른 하나님의 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죽자고 율법 지켜서 구원 얻겠다고 매달리는 사람에게 율법 외에, 예를 들면, 우리 동네에 중국집이 하나뿐인데 음식 배달을 시켰는데 오지 않는 것입니다. 배고픈데 왜 빨리 안 오는 것입니까? 예 곧 갑니다. 이러고 있는데 남편이 있다가 여보 지금 음식이 왔소! 아니 중국집이 한 집 뿐인데 어디서 왔어요! 하늘에서 왔소! 이런 식의 예상 밖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배고파했습니다. 그런데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주어진 것입니다. 만약 율법 외에가 아니라 그 율법이라면 나는 율법을 지켰다! 발광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못 지켰다면 내 대신에 예수님이 율법을 지켰다는 것이 되겠는데, 율법 외에 이기 때문에 지켰다 안 지켰다는 문제가 아니고 이미 의인되었다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쉽게 합시다. 귤을 눈앞에 보고도 이빨이 아파서 못 먹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가지고 먹었다, 먹었다고 하는데 뒤통수를 치면서 이것은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못 먹으라고 준 것이고, 다른 것 사倖?줄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귤을 먹어서 좋아한다는 것은 구원 욕심에 매달려 있는 자기 욕심입니다.
귤은 내가 먹지만 율법 외에 주어진 사과는 사과가 나를 삼켜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먹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니다. 평생을 따라 다니면서 아브라함처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귤은 내가 살기 위하여 말씀을 지켜야 하지만 율법 외의 한 의는 그 의가 나보다 더 큽니다. 그 의가 나를 지배하고 인도합니다. 나는 그 의의 증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가 새삼스럽게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이미 하늘에 앉혀있다고 에베소서 2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에베소서에서 무더기로 나옵니다. 연달아서 계속 나옵니다. 이미 하늘에 앉힌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도 나오지요! 이미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안달이 났는데 마침 주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지켰다! 이런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의가 그대로 존속되는 것입니다. 그대로 자기 의가 존속되면 자기 의가 있고 또 남의 의가 있겠지요! 김 집사 의가 있으면 최 집사 의가 있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누가 누가 더 나은 의인가 하는 경쟁이 벌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교회입니까! 경쟁 단체이지 그게 무슨 은사 공동체 입니까! 그곳에서 어떻게 한 분을 쳐다 볼 수 있는 교회이겠습니까? 모두 자기 열성, 자기 절제력, 지신의 훌륭한 자질을 쳐다보면서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기존의 세상과 똑 같은 곳이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부분만 오면 흥분을 해서 고함을 지르다가 목이 다 가버렸습니다. 휴~ 오늘 한국교회가 경쟁을 유발시켜서 교회를 성장시켰습니다. 경쟁을 유발시켜서 성장을 시켰는데 그 근거가 각자 각자의 의를 따로 따로 챙겨야 된다고 은연중에 그렇게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를 않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의를 받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상급론까지 결부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사람도 있고 상을 듬뿍 받는 구원도 있다고 합니다.
원자폭탄 뭐하려고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것 있다면 공중투하 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 자신의 종교심을 미워해야 하고 자신의 의를 미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십자가의 의가 안 좋아집니다. 내 잘난 맛을 스스로 미워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시큰둥하고 별로입니다. 화목제물? 에이 그것이야 벌써 다 뗐다. 이제 내 문제야 라고 나온다면 죄송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증인인지 주님의 증인인지 구별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의 어떤 목사가 땅을 좀 내어놓은 모양입니다. 여러분이 성전을 건축하면서 헌금을 하는데 목사인 제가 그냥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땅을 좀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헌금으로 교회를 유지하고 그 땅은 그대로 관리를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그 지역이 재개발 되면서 땅 값이 7배로 올랐습니다. 그러자 목사가 욕심이 나서 이교회 그만두고 다른 곳에 개척하러 갈 테니 내가 전에 낸 그 땅을 돌려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교인들이 목사가 헌금한 것을 어떻게 돌려달라고 하는가? 성도의 헌금은 돌려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목사는 헌금한 것을 돌려달라고 할 수가 있는가? 그러자 목사는 특수직이기 때문에 그것이 없으면 교회를 개척하지 못하기에 돌려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러면 그 당시의 땅 값 3천만 원을 돌려준다고 하자 일곱 배 올랐으니 오른 가격 2억 1천만 원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게 무어냐 하면, 교회 내에서 무언가 너 나가 구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었고, 모두가 다 동일하게 죄인이었는데, 동일하게 예수님의 의에 끌려 와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를, 율법 외의 다른 의가 있다는 것을 알아놓고, 내 돈 돌려달라고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은 이게 교회가 경쟁단체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한 몸에 붙어사는 한 지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어느 설교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교회로 오실 때에는 내가 왜 그리 문제가 많아서 죄인인지를 아는 마음으로 오셔주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 때에 그처럼 행복한 순간이 없습니다. 그게 한 2,5초 4초 밖에 안 됩니다만 잠시 잠간 언뜻 나는 죄인이야! 하는 그 짧은 순간에 세상의 천하에 없는 행복이 다 들어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나는 잘났거든 하면 그 순간에 그동안 있었던 행복과 평안과 기쁨도 한 순간에 다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자기 의는 찌그려 져야 합니다. 뭉개져야 합니다. 아예 없습니다.
예수 믿은 자가 행하는 행동은 의로운 것이냐 아니냐? 예수 믿기 전에 한 것은 모두 죄라고 하여도 믿고 나서의 행동은 의냐 아니야? 예수 믿는 상태에서 설교하고 예수 믿는 상태에서 기도하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의냐 의가 아니냐? 하는 질문은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제가 글로 한번 써보면 성립 안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깊은 논리가 아닌데 이 짧은 논리도 모르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 다른 말로 예수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의입니까 의 아닌 즉 죄입니까?” 이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것은 이미 성령 안에 있지요? 성령은 의지요! 그러니 이 말을 고치면 의로운 기도가 의롭습니까? 이런 말입니다. 의로운 기도가 의로운 것은 당연하지 말하여 무엇 합니까?
그런데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사실은 성령 안에서라는 말은 핑계이고 성령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증거 하기 위하여 성령 받은 내가 기도하는데 성령 받은 내가 의롭습니까? 아닙니까? 하는 이런 질문인 것입니다. 성령 안에 있다면서 네가 왜 의로워야 하는가? 아니 성령 안에 있는데? 성령 안에 있다면 너는 죽어야 되고, 그렇지 않으면 성령이 죽고,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아닙니까?
십자가의 사건을 되풀이 하는 것을 성령입니다. 성령님은 십자가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마지막에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태어나지도 않은 인간까지 일괄적으로 먹칠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박복남, 김철수 등의 이름이 있다면 매직으로 여러 가지 이름을 다 검게 한 것입니다. 어? 왜 내 이름을 검게 칠하느냐고 하면 너는 태어나기 전부터 원래 시커맸어! 그래서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효과입니다. 모든 것이 십자가로 죽은 것입니다.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 의가 들어있?것입니다. 이 죽은 어떤 자에게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 의란 화목제물에 의하여 의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의는 무엇만 증거 하는가 하면,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았다고, 그리스도의 의만 있다고 하는 것이 의의 증인입니다.
보통 세상에서 말하는 의의 증인이란 무엇이냐 하면, 나쁜 짓 하던 인간이 예수 믿고 교회 나오고 나서 착해 보이는 행동을 보일 때 그 사람을 의의 종이라고 그렇게 판단을 하겠지요! 우리나라에 이단으로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 교회가 여럿 있는데 아까 지하철을 타고 오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무엇을 주는 것입니다. 축복 성회라고 하는 것을 나누어줍니다. 저는 안 받았습니다. 나중에 다른 사람이 보고 버린 것을 보았는데 연세중앙교회 윤석전에 대한 광고였습니다. 그것은 노골적인 이단이잖아요! 조용기 노골적인 이단이잖아요!
이런 노골적인 이단들이 주장하는 그러한 주장들을 보면, 주로 이북의 탈북한 사람들, 세상의 깡패도 그냥 깡패가 아니라 깡패 두목 그런 사람들이 놀아도 크게 노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가도 큰 교회로 갑니다. 그런 사람들을 간증 일군으로 세워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포섭합니다. 그 사람들은 성경을 모르지요! 목사부터 모든 교인들이 성경을 잘 모르지 집회를 할 때마다 간증 집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목회 성공하려면 성경 접어놓고 간증거리 한 50개만 외워놓고 그것을 믹스해서 적당하게 알아서 하면 누구나 알아듣고 누구나 쉽다고 하고 누구나 할렐루야 아멘 하면서 전부다 복 받고 병 고침 받고 사업 잘되기 위하여, 아까 몇 가지요? 10가지 시름시름 앓는다, 아이 공부를 못한다, 부부 금실이 좋지 못하다, 사업이 잘 안된다, 이런 문제에 먼저 효과 본 사람을 앞장세워서 간증하게 하면, 성경 안 봐도 복 받고 기도하면 다 될 일을 교회걱정 할 필요 없고 거기다가 인색하면 복 못 받고 돈 바치면 복 받는다는 그런 간증거리 또 찾는 것입니다.
그런 간증 자들 줄서 있습니다. 그런 자들이 나와서 간증을 하면, 아하 하나님이 인색한 자를 복주지 않는다는 것이 참 맞구나! 내가 너무 인색하게 바쳤구나! 이 교회도 해당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인색하게 바치면 저주받는구나! 하게 되면 돈은 돈대로 들어오지 교회는 교회대로 부흥하지 그러면 또 예배당 세우고 주차장 넓히고 큰 교회 지으면 큰 교회라는 인센티브 주어지지 이런 개척교회 누가 오겠습니까?
큰 교회 시설 좋지, 아주머니들 공짜로 꽃꽂이 배워주지, 애들을 공짜로 영어 배워주지, 수학도 봉사한다고 하면서 공짜로 과외 시켜주지, 또 치과 하는 집사님 병원에 가면 50만 원짜리 20만원 깎아 주지 모든 단골은 큰 교회 다 모이는 것입니다. 주보 뒤에 어느 내과 개업한다. 치과 개업한다고 하면 그곳으로 가서 서로 서로 이익보고 이 작은 교회에 치과의사 있습니까? 이것이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왜 우리로 하여금 의로워야 한다고 착해야 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가 하면, 착해야 착한 것을 근거로 당연하게 하나님께 손을 내 밀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 착한일 한 만큼 왜 복을 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착한 일 한만큼 내게 복을 주어야지 당신이 공의로운 하나님이, 착한 자에게 복을 저주 나쁜 자에게 저주하는 것이 정의로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착한 예수님 십자가에 죽고, 착한 바울사도 고생하고, 무슨 그런 정의가 있습니까? 다음 27일 날 부천 개혁교회 임직 식 할 때에 설교할 때에 스데반 집사 할 것인데 성령 충만하여 돌 맞아 죽고 무슨 일이 다 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납득되는 시대가 아닙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윤리도덕 가지고 이해될 수 있는 그런 성경책이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의 그 돌발적인 사태를 모르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돌입하여 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복을 받습니까?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면 그때부터 내가 행복한 것이 나를 의롭다고 하신 하나님이 행복하시면 그것을 우리의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말을 꺼내 놓고 보아도 보통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세리와 창기 같은 나를 의롭게 만들어놓으시고 의롭게 만들어 놓으신 나를 바라보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시는 분이 계시니까 같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너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구원받았어! 너 기쁘지? 안 기뻐요! 나는 기쁜데! 그러니 기뻐하라! 싫어요! 너 또 오른 쪽 갈 것을 왼쪽 가서 고생해볼래? 주여 맞습니다. 주님만으로 만족합니다. 그게 한 3초갑니까? 한 3초지나면 또 엉뚱한 길로 가다가 얻어맞고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여러분 제가 이것을 꾸몄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아브라함이 그렇게 살았고, 스데반 집사 빌립 집사 열두 제자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게 성경이에요!
삼층 천에 올라간 사도바울은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고 다 땅에서 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악마가 조작해 낸 것이기에 거기에 현혹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짜 하늘에서 온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화목제물, 그것이 사랑이라고 요한일서 4장에 나옵니다. 사랑은 여기 있나니, 예수님의 화목제물이 바로 사랑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죄가 많아서 구원을 받지 못하였는데 예수님의 화목제물로 구원을 받았구나! 이렇게 오해하지 마시고, 예수님의 화목제물로 인하여 나는 그 증인으로 완전히 사로잡힌바 된 것입니다.
이제 내가 스스로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권리조차 박탈되었습니다. 왜?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니까! 내 인생은 이제 내 것이 아닙니다. 몽땅 주님의 의가 차지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주의 의의 증인이라고 합니다. 주의 의가 넘쳐나는 그런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 인생 따로 없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이게 바로 성경의 이야기이고 하나님의 의가 바로 우리의 의를 지배하고 추방하고 통치하는 것이 성경의 뜻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것을 우리가 하루 종일 간직하면서 기쁘게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기에 대한 답변을 정말 그렇고 싶습니까? 이것을 답변으로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하루 종일 주님의 의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런 마음은 주님께서 주신 성령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잘나서 그런 마음이 생긴 것이 아니고 진짜 하나님의 종이기에 가끔가다가 정말 예수님만으로 기뻐하는 그런 진짜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문득문득 듭니다. 그러므로 욕심내지 마세요. 그것이 24시간 다 차지하도록 욕심내지 마세요!
24시간 다 차지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주님 뜻대로 이지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전히 자신의 의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내 놔! 나 이렇게 착한데 복 내 놔! 이것이 여전히 우리의 본심으로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경은 아직도 버릴 책이 아닙니다. 평생 동행해야 합니다. 평생 동행하면서 이 성경에서 나오는 잔소리와 질책을 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주시는 잔소리와 질책으로 받아주시면 여러분들은 성도 그 자체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에서 십자가 지시고 율법 외에 다른 의가 우리를 점령해서
이미 우리 몸은 우리의 몸이 아니라 주님의 의의 몸이 되어 버렸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자기 의를 포기하지 않고
자기 의에 근거해서 남에게 안 지려고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잘난 맛에 살고 싶어 하는 옛 품성이 또한 남아 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질책하여 주시고
십자가 지신 그 아픔과 고난과 그 고마움을 잊지 않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녹취 060425 이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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