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어느 시기나 폭풍의 연속이다. 항상 그 당시에는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러나 시행착오의 연속인 우리들의 삶은 무수히 많은 함정과 지뢰밭들을 숨겨 놓고 있어서, 질풍노도의 시기는 언제까지나 지속된다. 특히 아직 자아와 세계에 대해 확실하게 눈뜨지 못하고 있던 유년시절, 미확인 비행물체처럼 무엇인가 우리들 머리 위를 떠돌며 설레게 하는 것이 있다. 첫사랑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게 찾아와 열병처럼 우리를 들뜨게 한다. 기억하는가? 그 순수하고 아름답고 뜨거웠던 유년의 첫사랑을?
MBC 느낌표에 소개되면서 백만 독자들의 지지를 받았던 위기철의 베스트셀러 [아홉 살 인생]을, [약속][와일드 카드]의 이만희 작가가 각색하고 [마요네즈]의 윤인호 감독이 연출한 영화 [아홉 살 인생]은, 삶에 대해 눈뜨기 시작하고 세계 속에 위치한 개인적 자아가 탐색되기 시작하는 아홉 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시절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 학교와 집과 친구들로 둘러 쌓인 그 작은 세계는 비록 축소된 세계지만, 모든 것이 있었다.
서울 산동네를 배경으로 다양한 에피소드가 펼쳐졌던 원작과는 달리, 70년대 경상도 마을을 배경으로 첫사랑에 눈뜨는 주인공들의 섬세한 감정을 부각시키는 영화 [아홉 살 인생]은, 비록 아홉 살이지만, 그 주변에 펼쳐진 학교와 집과 친구들의 관계를 통해 삶의 원형적 질서를 보여준다.
주먹으로 그 작은 세계를 지배하는 강자가 있고, 힘 있는 세력에 의존하는 비겁한 약자가 있다. 또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세력들도 있다. 백여민은 학교에서는 쌈짱들을 주먹으로 제압하고 친구들을 지켜주며, 누이와 함께 사는 외로운 친구를 위해 도시락을 나눠 먹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한쪽 눈에 백태가 낀 어머니에게 선글라스를 사주기 위해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는 의리파다.
서울에서 전학 온 장우림은 새침하고 도도한 공주과다. 하지만 백여민은 장우림의 모습에 설레기 시작한다. [아홉 살 인생]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아홉 살 첫사랑의 시작을 동화처럼 묘사하는게 아니라, 나이를 불문하고 남녀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감정의 밀고 당김을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랑과 질투와 시기, 그리고 이별, 이런 원형질적 모습들이 [아홈 살 인생]을 단순히 아홉 살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근대화가 시작되었고 고도 성장의 경제가 꿈틀거렸지만 아직은 누구나 힘들었고 누구나 어려웠던 그 시절 70년대는 제작팀의 노력으로 뛰어나게 복원되어 있다.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달동네의 작은 판자집들도, 초등학교 교실의 오밀조밀함도, 토끼를 기르던 학교 뒷마당, 또는 머리에 냄비를 뒤집어쓰고 골목을 뛰어다니던 그 시절 아이들의 놀이까지도, 사실적으로 [아홉 살 인생] 속에 등장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70년대 풍경은 그러나 단순히 복고적 정서를 자극하는 뒷배경으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키워가는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다. 장우림의 삼단으로 된 하얀 플라스틱 도시락은, 양철로 된 백여민의 도시락과 대비되면서 그들이 소속해 있는 사회적 배경의 차이를 드러내 주고, 산동네 가파른 계단에 위치해 있는 자살한 청년의 집은 세계 속에 삼투되지 못하고 떠 있는 위태로운 삶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묵직함으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힘을 부여하는 백여민 역의 김석, 공주과의 허풍쟁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흡인력을 가진 [대장금]의 어린 금영이, 장우림 역의 이세영, 그리고 백여민의 부하를 자처하는 신기종 역의 김명재와, 백여민을 짝사랑하는 오금복 역의 나아현 등, 아역배우들의 연기는 그 어떤 성인 연기자들의 조화보다 더 뛰어난 극적 흥미와 재미를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아역 배우들이 흔히 빠지는 작위성과 상투성을 극복하고 배역에 밀착해서 생성되는 자연스러운 대사와 눈빛으로 [아홉 살 인생]의 아역 배우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해 축소된 세계의 다양한 갈등을 드러낸다. 이 작품이 단순히 어린이들의 동심세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비록 아홉 살 인생이지만 그 속에서 세계의 다양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도록 확산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약품이 튀어서 한쪽 눈에 백태가 낀 백여민의 어머니나, 백여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 그리고 서울에서 의사를 하고 있는 장우림의 아버지와 갈등 끝에 시골로 내려온 장우림의 어머니는 각각 남녀 주인공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아역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커서 그들의 내적 갈등이나 자식들과의 관계가 세밀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특히 장우림의 낙향의 배경이 된 아버지와의 갈등은 짧은 대사로만 처리되어 있어서 장우림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세밀하게 구체화시키는데 결정적 흠으로 작용하고 있다.
인생의 첫 쓴맛을 알만한 나이 아홉 살, 인생의 첫 번째 아홉수를 넘기기가 어디 쉽겠는가? 열 살이 되기 직전,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이 세계가 나 없이도 무사히 돌아갈 것이라는 뼈저린 소외감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나를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내가 원하는 것들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고 한낱 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아홉 살에 알아버렸던 것이다. 그렇다고 한들 어떠하겠는가? 인생은 이미 시작된 것을. 한 번 출발한 차는 목적지를 향해 달릴 수밖에 없는 것을. 그러나 이렇게 가끔 블레이크도 밟으면서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는 것 또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