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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문화 고도육성을 위한 선진지 답사기(중국편) 2013. 1. 30 고도육성 아카데미 교육생 23명은 익산시청직원2명, 전북문화재연구원3명과 함께 3박4일 국외 선진지 답사를 위해 새벽02:25 세화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인천공항을 향해 출발하였다. 금마면사무소에서 대기 중이던 일행 모두를 태운 후 공항 가까이에 있는 식당에 들러 김치찌개로 아침을 가볍게 떼우고 공항의 F영역에서 화물 수송과 출국절차를 마친 후 게이트130에서 동방항공사 소속인 중국 민항기에 몸을 실었다.
필자는 기내에서 김용준 총리 임명자의 5일만의 자진낙마 기사를 보고 한국 고위층의 부정부패와 도덕적양심의 씁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기에 애석하게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나로호” 3차 발사 성공을 기원하는 기도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야만 했다. 09:30에 기내식으로 볶음밥을 먹고 밀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해 곧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잠시 졸았다 싶었는데 비행기는 어느새 상해 포동공항에 도착하고 있었다. 입국 수속 후 화물을 찾아 공항 밖을 나오니 가이드 최찬일 씨와 일행을 태울 버스가 대기하고 있어 우리는 그 버스를 타고 상해 시 한 변두리에 있는 중국음식 식당으로 가 점심을 먹었다.
식사 후 우리는 우선 상해의 브랜드 마크라 하는 “동방명주” 탑을 구경하기로하고 서둘러 이동하였다. 이탑은 세계에서 세 번째, 아시아에서는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탑으로 순수한 중국 자본과 기술로 1991년7월 착공하여 94년10월에 완공한 468M의 TV 송신탑이다. 고속 엘리베이터로 10초 만에 오르는 263M와 350M에는 전망대가 있어 오르고 보니 주변을 감싸고 흐르는 황푸 강과 상해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실로 장관을 이루고 있어 관광 명소이기에 충분하였다.
지금은 상해하면 국제적 상업도시로서도 유명하지만 우리 한국인 입장에서는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해 수립하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청사가 있어 역사적으로 한국민족의 독립성과 합법성, 정통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도시가 상해시다. 우리는 그 당시 대한민국 의 임시정부 의미를 기리기 위해 그 곳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지금은 초라한 주변 환경 속에 파묻혀 허술하기만 한 그곳에서 나는 한민족의 애국적 함성이 뜨겁게 용트림치고 있음을 가슴속 깊이 느끼면서 영구보전과 성역의 발전된 모습으로의 개선 발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화12만원을 기부함에 넣고 당시 그 곳 근무자로부터 감사장을 받으니 부끄럽기만 하였다. 추억에 남을 만한 사진 몇 컷을 촬영하기도 하였다.
여행 2일차를 맞아 06:00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한 샤워와 식사를 마친 후 07:00 타고 온 버스를 이용 09:00소주에 도착하였다 소주는 예부터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의 중국에서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으로 양자강 삼각주 평원위에 자리한 도시로서 동양의 베니스라는 별칭을 가진 정원과 물로 대변되는 중국남방의 대표적인 도시이다. 이러한 자연환경으로 인하여 송에서 부터 명에 이르는 사이 정원이 많이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정원은 200가구에 이르렀었으나 지금은 10군데 정도가 복원되어 외부에 개방되고 있다하였다. 우리는 그 중 명나라 시대의 졸정원(拙政園)을 견학하기로 하였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출입문의 웅장함과 조각물로 이루어진 중국 남방의 고전 원림 건축예술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소주관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크고 아름다운 정원이라 과연 북경의 이화원, 승덕의 피서산장, 소주의 유원등과 4대 명원이라 꼽히는 곳을 둘러보게 된 것에 고도문화 답사자의 한사람으로서 가슴 벅차오름을 억제할 수 없었다. 정원의 면적은 약5만Km2이고 그 가운데 3/5가 호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 중, 서 세부분으로 나누어 고풍스럽게 지어져 있었다. 이는 원래 당나라의 시인 육귀몽의 집으로 지어졌는데 원대에는 대광사로 바뀌었다가 명나라 때 어사 벼슬을 지낸 왕헌신이 중앙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와 칩거할 때 개축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하였다. 정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곳은 중원으로서 그 곳에는 원향단을 비롯하여 향주, 견산루, 파산랑, 비파, 해당, 파초가 빽빽이 들어선 비파원등의 건축물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었고 건축물의 하나하나가, 비치된 집기 하나하나가, 정원을 꾸민 조형물 하나하나가, 구간 구간을 이어주는 통로 바닥이나 계단 또는 벽면 하나하나 특히 휴지통, 돌맹이, 기왓장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당시 그네들의 삶이 살아 숨 쉬는 듯 조각품처럼 복원 되어져 있음을 보고 백제 고도문화 복원의 방향을 생각하게 하는 좋은 사례를 견학할 수 있었음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하면서 감사하기만 하였다. 일행은 중국 강남의대표적인 원림작품을 보면서 많은 사진을 촬영하기도 하였지만 다음 계획을 위해 2시간 반 동안 시간에 쫒기 듯 견학을 마칠 수밖에 없는 아쉬움을 남기고 다음 예정지인 주원장이 쌓았다는 남경성으로 향했다.
주원장이 장수 시절에 당시 황제에게 국가 패망의 위기에서 황제에게 충성의 징표로 만들어 바쳐 승리를 가져 오게 했던 성을 둘러보는 동안 내내 성곽의 웅장함과 크기에 놀랐고 그 성의 설계나 축조과정에서 구워 만든 흙벽돌 하나하나에 만든 시기와 만든 사람의 이름을 새기게 함으로서 잘못된 책임을 갖게 함은 물론 외성둘레를 따라 넓은 해수호를 연결, 내부로의 출입을 하나의 성문을 통해서만 가능토록 하여 외성과 내성사이의 공간을 이용, 평시에는 식량을 저장하는 창고로, 적이 공격 시는 유인하여 3000명까지 그 공간에 가두어 “항아리”내의 적을 몰살 시키는 방식으로 전쟁을 하게 함으로서 난공불낙의 승리를 보장할 수 있었음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다시 소주에서 5Km떨어진 곳에 위치한 소주의 상징 호치우를 향해 이동하였다. “호치우”는 호구(虎丘)와 같은 말로서 원래 이름은 해용산(海涌山) 이었는데 호랑이가 웅크려 앉아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호구라 이름 붙여졌다 한다. 호구에 이르러 해발 356m의 높이에 위치한 호구 묘와 호구 탑으로 향하는 동안 짙은 연무 속에 비를 맞으면서도 나이를 잊어버린 체 이를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걸어가며 사진을 찍는 모습에서 일행 중 어느 한 사람도 힘든 기색은 없어 보였다. 큰 바위를 칼로 쳐서 검의 품질을 시험하였다는 칼로 잘라진 듯 쪼개어진 시검석(試劍石)을 살펴본 후 우리는 춘추시대 오왕 합려를 연못 아래 안장하면서 관 속에 검3000개를 함께 안장한 후 묘의 위치를 비밀에 부치기 위해 묘지 작업에 동원했던 1000여명의 공부를 죽여 지금도 붉은 핏물이 물들여져 있다하는 넓디넓은 암반광장을 올라서야 호구 묘를 볼 수 있었다. 오왕 합려와 명검 3000개가 있다는 호구 묘 위로는 지금도 용솟음치는 듯 거센 샘물이 휘돌아 치고 있었고 뒤편 암벽에는 호구검지(虎丘劍池)라는 큰 글씨가 붉은 색으로 새겨져 있었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네 글자 중 호구라는 두 글자를 도둑맞아 검지라는 글자체를 본떠 지금의 네 글자로 새겨져있다 하였다. 계단을 따라 얼마를 더 오르니 40m정상부위에 47.5m 높이의 호구 탑이 있는데 세계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피사의 탑처럼 우측으로 기우러져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는 호구 탑 밑에 있는 합려의 무덤이 침하하고 있어서 그렇다하여 보수공사를 통해 안전에 문제가 없도록 하였으나 탑 내의 출입은 금지되고 있는 상태였다. 여기서 필자는 익산 미륵사지 西 塔도 예전 그대로 해체 시키지 않고 보수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다.
우리는 중식 후 공자 동상이 있는 크고 넓은 천지궁에 들러 “향교대성전”이라 새겨진 곳을 견학하게 되었는데 내부에 들어가 보니 그 곳에는 일반 사찰의 대웅전처럼 불상이 모셔져 있었고 당시 사람들이 입었던 의복류를 포함한 장신구류, 도자기, 집기, 생활모습 등을 일반 전시관처럼 진열 전시되어 있었으며 군데군데에는 기념품 판매장이 있어 관광객들이 특산품을 쉽게 구매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우리가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인근에 있는 상가가 밀집해 있는 시장 같은 곳에서 30여 분간 쇼핑을 하고 나니 시간은 어느새 밤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늦은 시간에 석식을 하고 숙소인 남경으로 가는 도중 가이드의 입에서는 대륙문화에 대한 이모저모 등, 중국에 대한 소개가 막힘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중국영토의 크기가 우리나라 국토면적의 100배에 달하며 인구는 14억 명, 52개 소수민족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중 한족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으며 대륙 중앙을 가로지르는 2800Km 길이의 양자강하나가 범람하면 중원평원의 2/3가 침수하게 되기 때문에 대홍수 발생 시 전군에 동원령을 내려 필사적으로 보호한 일이 있었다고도 했다. 중국에는 역대 38명의 황제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유일하게 거지신분에서 황제가 된 사람이 주원장이라고도 하였다. 내일의 일정계획이라는 소리를 끝으로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숙소에 도착하고 보니 시계는 밤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함께 편성된 룸메이트와 함께 배정된 호실에 들자마자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우리는 여행 3일차를 맞아 08:30분 숙소를 출발 남경 박물관으로 향했다. 백제성왕(523~554)의 재위 때 사신으로 보내진 당시 신분과 복장, 그리고 백제를 설명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는 양직공도가 있다는 곳이기에 견학하고자 하였으나 박물관이 개보수 공사기간이라는 통보를 이동 중 연락 받게 되어 할 수없이 남경시립 박물관이라도 보려고 막상 도착해 보니 그곳 또한 리모델링 기간이라 견학치 못해 아쉬움을 남겨야만 했다. 하는 수없이 최완규 연구원장님의 안내로 주연묘를 찾아 얼마를 지난 후 현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곳도 개발 중인지라 현장접근이 어려워 울타리 밖에서 개발 중인 외형상의 모습만 눈으로 확인하고 원장님의 강의를 청강할 수밖에 없었다. 일행은 아쉬움을 뒤로한 체 석상 정원을 견학하고 인근 식당에서 중식을 마친 후 손문가의 가족사와 일대기를 알 수 있는 전시실도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마안산에 위치한 주연묘를 견학하기로 했다. 그 곳에 도착해 보니 하나의 능이라고 보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큰 공원을 조성해 놓은 듯한 모양으로 몇 개의 성문 같은 출입문을 지나 다 보니 맨 끝 부분에 능이 있겠지 하고 끝까지 들어가 보았으나 능은 끝내 보이지 않고 마지막 벽에 “묘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이산 어디엔가 있다”라는 표지 문구가 벽에 새겨져 있음을 보고 아! 이렇게도 옛 전통문화를 살릴 수도 있구나 하는 의미를 깨닿고 그 곳의 풍수지리학 상의 산새만을 살펴보고 뒤 돌아 나왔다. 한식으로 준비된 석식을 돼지 삽결살과 함께 맛있게 먹은 후 지친 몸으로 상해 서커스를 구경하게 되었는데 여러 가지 기교가운데 둥근 구의 안에서 오토바이 5대가 질주하는 모습을 보이는 묘기는 이로 하여금 식은땀을 흘리게 하는 묘기중 묘기라 감탄사가 절로 나와 과연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의 환상적인 연기임을 알 수 있었다. 서커스 관람을 마치고 일행은 상해시 중앙을 흐르는 황푸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상해시의 야경을 보면서 중국의 무한한 가능성을 느낄 수가 있었고 세계가 중국을 주시하고 중국으로 모여들고 있음도알게 되었으며, 그리고 필자는 한국 삼성의 스마트폰 카메라 간판과 농심의 신라면 백산수 간판을 보면서 세계 속의 한국 위상도 실감할 수 있었음에 감사드리면서 금번 고도문화 선진지 답사가 어떠한 결과로 맺어질지를 기대하면서 숙소에 도착 즉시 지친 몸을 씻은 후 여행 가방을 정리하고 마지막 잠자리에 들었다.
답사 마지막 날을 맞아 일행은 숙소에서 09:00에 출발하여 남방 정원양식의 대표이자 중국 정통 정원인 예원으로 향했다. 예원은 상해시 동남쪽에 위치하여 소주의 4대 정원과 함께 강남 명원으로 손꼽히는 곳으로 16세기 옛 중국을 대변하는 상하이에서 완공하는데 20년 가까이 소요된 세밀하고 웅장한 정원이었다. 항상 연무가 끼는 곳이지만 비가 오면 더욱 운치가 있어 관람하기 편한 장소이기도하다. 이 정원은 명나라 관료이었던 반윤단이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북경의 황궁정원인 이화원을 본떠 만든 것으로 황제만 쓸 수 있었던 용 문양을 조각할 때 용의발가락 한 개를 더 만들어 역적으로 몰릴 위기를 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愉悅老親”이라는 현판이 있는데 이는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리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정원 안에는 40여개의 정자가 있고 그 중 예원 입구에 있는 차관 호심정이 가장 유명하여 항상 관광객이 넘쳐나므로 예원담장을 안쪽으로 들여 100년 전부터 이를 누구나 즐겨볼 수 있도록 개방 하였다한다. 이곳에는 예원을 찾는 다양한 종류의 독특한 기념품이나 전통공예품, 먹거리들을 파는 시장이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일행은 예원견학을 마치고 인접해 있는 전통시장에서 30분가량 쇼핑을 하였고 “동보인”이라하는 한약매장에 들러 “보이차”들을 구입하였으며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는 상해 박물관에 들러 아내에게 선물할 목도리와 스카프를 사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공항 인근의 창고 같은 건물 내부에서는 많은 사람들은 참깨를 구입하기도 하였다.
공항에서 출국 절차를 밟은 후 기내에 탑승하여 귀국하는 도중에도 연신 중국의 묘장 문화가 백제 부여무열왕릉과의 연관성이 있고 남조의 하나인 양의 원제 재위 기간에 각국에서 조공하러 온 사신의 모습을 태수인 소역이 그린 양직공도에 나타나 있는 백제인의 의복과 용모하며, 또한 주연묘에서 출토 된 채색청자기와 청자반구대를 비롯한 청자양, 청자호자, 청자향로 등 50여종의 부장품이 몽촌토성에서 발굴된 것과 유사한 점 등은 당시에 왕성했던 백제와의 교류를 확인하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따라서 이번 고도 선진지 답사는 “살아 있는 백제 고도문화 육성”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선진지 답사였음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면서 2월2일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하게 됨으로서 마감 짖게 되었다.
아무튼 값진 답사이었기에 감개가 무량할 따름이다. 같이 동행한 모든 분들의 열정과 자기희생을 통한 지속적인 홍보만이 살아 숨 쉬는 고도 금마마을 육성에 대한 성공의 지름길이 있으리라 부언하는 바이다. (2013년 2월 3일 고도육성 아카데미 제2기생 전근표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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