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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아이주쿠에서 마고메 까지 세계에서 찾아온 트레커들이 걷는 길이다. 이 언덕만 오르면 번화한 마고메 4거리를 만나고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식당이나 상점 등이 있다. 이 길을 오르며 아침에 떠난 오치아이주쿠를 기억하고 있었다. 여행이란 나에게 무엇일까? 하고 새삼 자신에게 물었다. 사진을 종종 찍으며 공간 이동을 하면서 일행을 늘 살필 기회가 참 많다 사람의 감정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신체 부위는 얼굴이다. 특히 눈을 보면 정확한 느낌이 다가온다. 그리고 말과 그 안에 들어 있는 사용하는 단어들이다. 또한 발걸음에서도 상대의 감정이나 지금의 심정을 감지할 수도 있다. 간혹 내가 앞장서서 갈 경우는 뒤에 오는 사람들의 표정을 확인하고 사진을 찍을 때다. 대부분 밝고 행복한 표정이 대부분이다. 무한한 자유를 느끼고 있음을 발견할 경우가 많다. 인간은 늘 구속이나 속박 등등을 싫어하지만 현실에 머물며 하나의 공동체의 한 인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기에 그 삶 안에는 수평, 수직적 무수한 관계 속에서 연줄이 알게 모르게 나를 감싸게 된다. 인연에 대한 관계 대부분은 책임과 의무가 수반되기를 원함으로 늘 나를 짓누르게 된다. 잠시 이런 환경에서 벗어나는 일이 바로 여행이 갖고 해방의 묘미다. 인간은 감동을 받는 순간 곧 이어서 환희심을 얻게 된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 바로 여행이 지니고 있는 전반의 성격이 아닌가 한다. 시시각각 다가왔다 흘러가는 정경 속에 담긴 것들 사이사이에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정체성이나 감정선은 뒤 전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의 제한에서 오는 불가피성이다. 어느 날 당면한 군중 속에서 고독감이 몰려올 적이 있다. 수많은 군중과 같은 삶의 영향과 공유라는 현실이 신기루처럼 느껴질 적이 있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소멸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 때 홀연히 지금 이 공간을 벗어나기 위하여 자신이 공항이나 역이나 항구에 서 있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현대인들이다. 그러나 여행의 동선을 이어가는 중에도 늘 마음 한 구석에는 돌아갈 목표가 또렷하게 설정되어 있다. 이 목표가 없으면 부랑자나 방자랑자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지만 돌아갈 곳이 있기에 지금 이 순간이 자유로운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상실에서 복원으로 완성이 바로 여행이다.
마고메주쿠는 43번째 역참 마을이며 지금껏 함께 한 매화꽃 길에서 돌 다다미 길로 바뀌면서 옛 모습이 고스란히 있어 나카센도의 길의 정취를 제대로 느끼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전망대까지 가파른 편이다.
이 길 초반에서 만나는 馬籠宿水力発電1号機, 이 물레방아는 농업용 용수를 위한 물레가 아니고 순수 수력발전용이다. 무엇인가 과학적인 분위기가 짙게 느껴지는 물레다. 이 계단 위로는 곧장 마고메주쿠로 올라가는 길이 또 있다.
마고메 차야 (馬籠茶屋) 메고메주쿠 차를 파는 점포다. 갈수록 힘이 들지만 걸을 만한 길이다.
Toson Memorial Museum(藤村記念館) 마고주쿠 출신의 작가, 시마자키 후지무라의 친가인 본진터에 있는 자료관. 당시의 건물은, 메이지 28년의 대불로 은거소를 남기고 모두 소실해, 지금은 현대적인 건물이 줄지어 있다. 시마자키 후지무라의 작품이나 생생한 소개 등의 전시도 있지만, 최대의 볼거리는, 부지에 들어가자마자 오른쪽, 다니구치 요시로 설계의 후지무라 기념당(쇼와 22년 완성)이라고 생각된다. 나무, 장자, 기와지붕으로 구성된 길고 작은 건물이지만, 매우 품위 있는 디자인으로, 마고 야도의 메인 스토리에서 전시실로 자연과 사람의 조화로운 기능이 느껴지는 곳이다.
일본의 자연주의 문학- 20세기 초에 이르러 에밀졸라, 기드 모파상 같은 소설가들의 영향으로 자연주의 문학이 일본에서도 등장한다. 유럽의 자연주의는 당시의 유전학, 사회학 등을 받아들여 객관적인 묘사를 하는 것이었지만 일본에서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본의 자연주의 문학은 시미자키 후지무라의 작품에서 시작되어 후에 타야마 카타이의 작품에 의해 방향성이 결정되었다. 카타이의 소설부터는 작가가 직접접으로 경험한 것을 소재로 한 개인적인 소설의 출발점으로 여겨졌으며 이후 일본 소설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또 다른 자연주의 작가로서는 쿠니키다 돗보, 도쿠다 슈우세이, 마사무네 하쿠쵸우 등 등이 있다.
점심을 먹은 후 약 30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걸음을 옮겨야 했었는데... 가파른 길을 오르다 보니 부담이 온 것 같다. 또한 이상 기온으로 날씨까지 덥다 보니 컨디션 조절에 실패로 다들 힘들어 했다. 그러나 극복의 묘미를 익히 알고 있는 관계로 그늘에서 잠시차를 마시며 쉬었다가 출발한 이후. 평상심을 찾았다. 사소한 긴장이 이어지다가 다시 풀어지는 것이 여정의 순환이다.
숲 길에서 떨어져 나와 다시 도로를 가로질러 숲으로 접어들자 만난 단풍이다. 숲 길을 다시 빠져나온 후 도로를 다시 건너가야 한다.
여름 열기가 느껴지는 길을 걷다 만난 대나무 숲 그 안은 가을바람이 가득 들어 있었다. 대나무 사이로 흐르는 바람에 청량감이 묻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Ancient cypress tree(神居木) 사와라의 거목의 겨드랑이에서 팔이 하늘로 뻗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한때 하느님이 머무르는 나무, 또는 텐구라고 말해졌다고 한다. 이 사와라의 수령은 약 300년이며 사와라는 매우 썩기 어렵기 때문에 벽장재나 욕조에 최적인 목재라고 불리며, 이 사와라 나무에서 300개의 욕조를 만들 수 있다 한다.
이곳부터는 내리막이 시작된다.
Tateba Tea House (石栃立場茶屋)
馬籠峠을 넘어 처마 방면으로 조금 가면 찻집이 있다. 현지인들이 교대로 운영하며, 무료로 따뜻한 차를 제공하고 있다. 찻집 안에는, 격자창으로부터 햇빛이 스며들고 찻물 끊이는 화로가 뒤에 있어, 평상에 앉아 있으면 여독이 풀리며 마음의 고단함이 치유되는 듯하다. 에도 시대로 거슬러 올라 간 느낌이 드는 멋진 공간이다. 수양 벚꽃이 장관을 이루는 나무가 정면에 서 있고 그 옆으로 물을 보충할 수 있는 맑음 물 늘 떨어지는 시설이 있어 마신 후 준비한 3개의 수통에 물을 담아 두었다.
나카센도(山中道) 중 숲 속의 빈터에 자리 잡은 오아시스 같은 Tateba Tea House (石栃立場茶屋) 다. 차 향이 깊다. 화덕 안에 피어 있는 잔불처럼 인정도 너르고 평온하다.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이 이 건물의 주인이다. 찻물을 입에 넣으면서 새삼 차가 지니고 있는 오미(五味)가 오장육부를 휘 젖는 것을 깨 달았다. 달고, 쓰고, 시고, 맵고, 떫고~~ 차에 담긴 맛이다. 여행 안에 담긴 여정 속에도 이러한 모습이 담겨 있다. 어쩌면 인간이 지닌 숙명도 다섯 개의 맛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강했다가 약해지기를 반복하며 우리를 시간 속으로 등을 더미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 단맛에 도취된 모습이 역 역한데, 차후 물어봐야겠다~~~~ 행복은 단맛이다.
이곳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길을 떠났다. 떠나기 전 이곳을 방문하는 세계에서 온 트레커들이 적는 칠판에 평화와 선, 이라는 글을 남겨 두었다.
늘 활동성이 너르고 긍정적이며 유쾌함이 좋다. 잠시 돌발에 당혹한 시간이 있었는데 특유의 극복으로 정상적인 컨디션 유지를 이어 나가 정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함께한 기도의 시간 덕분일 것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이 또한 믿는 자의 복이다.
가장 힘들어야 할 조건을 갖고 계신데 극복으로 이겨 내시는 중이다.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순간이었는지 모른다.
남자 폭포를 지나 내려서면 이어서 여자폭포가 나온다.
Otaki - Metaki waterfalls(男滝女滝)
숲 길을 빠져나오자 일행을 반긴 것은 복을 불러 다 준다는 너구리였다. Inkyo(いんきょ) 공예품 선물가게는 문이 닫혔지만
너구리와 함께 잠시 쉬어 가기로 하였다. 너구리가 차고 있는 술통이 청춘시기 술의 역사를 많이 닮아 있는 듯하였다.
일본에는 행운을 상징하는 타누끼 (たぬき)라는 너구리가 있다. 타누끼는 일본어로 다른 사람을 제친다는 라는 발음과 너구리라는 발음과 같이 사용한다. 다른 사람을 제친다는 것은(他人を取り除く) 사업의 번창이나 입신출세의 의미로 해석한다. 일본 이자카야(居酒居) 입구 간판에 술을 좋아하는 너구리가 술을 마음껏 드시라는 유혹으로 술병을 들고 있는 너구리가 많으며 너구리가 갓을 쓰고 있는 것은 나쁜 일이 일어나 재난을 피하기 위한 호신용이다. 큰 눈은 사물을 바로 보고 부푼 배는 배짱이 아주 두둑한 결단을 의미한다.
인적이 숲에서는 거의 없다시피 하였는데 역참 마을에 도착해 보니 이외로 관광객들 많이 보였고 역순으로 마고메로 넘어가는 트레커들도 많이 보였다. 역참마을은 길게 1km 이상 들어서 있다.
오늘 여정의 종점인 츠마고주쿠에 도착한 것이다. 오늘 오치아이주쿠에서 마고메 까지 약 5.5KM를 70분 오전에 걸었고 오후에는 마고메에서 츠마고주 쿠 까지 약 7.7KM 3시간 30분 걸었으니 13.2KM 걸었다. 내일 다시 츠마고 주쿠를 찾아야 한다. 내일 일정은 호텔에서 츠마고주쿠로 이동한 후 츠마고주쿠에서 출발하여 가토관음을 경유한 후 나기소역까지 걸어은 후 나기소 역에서 열차를 이용하여 야부하라 역까지 이동하고 그곳에서 점심을 챙긴 후 도리이 고개를 넘어 나라이주쿠에서 나라이역까지 걸어 일정을 끝내야 한다.
산촌 마을에도 어두움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노란 전용버스를 승차한 후 오늘 일행이 머물 야츠가다케 호텔로 이동하였다. 차창밖으로 스치는 11월의 가을 단풍들 강과 어울려 아름다운 채색 빛을 고요하게 전해오고 있었다. 하루 종일 걸으며 스치는 자연의 생태와 인간이 그려낸 문명과 문화에 깃든 속성의 근본은 인간을 중심으로 볼 때 대동 소이하지만 그 속을 침잠으로 빠져들어가 보면 그 나라에 살고 있는 민족성들이 드러나게 된다. 산촌은 자연을 닮아 순수의 결정이 사람을 이끌지만 도시는 생존경쟁이 치열한 것은 어느 나라나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하다.
온천시설도 좋다. 방을 배정하고 석식을 하기 위하여 식당으로 갔다. 온종일 숲과 마을 길을 걸으며 마음을 치유하고 건각을 세우며 나름대로 여행을 즐겼다. 석식 후에는 각자 내일을 위한 휴식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낮에 마트에서 산 일본 소주 들고 와서 여종업원에게 의사를 물으니 절 때 안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자 파스칼 형님께서 소주와 맥주를 내시겠다고 하셨다. 소주도 작은 것은 없고 큰 것 밖에 없다 하여 큰 것으로 구매하고 맥주는 딱 두 잔만 시켰다. 원하는 형제들에게만 잔에 따르고 동시에 내일도 오늘처럼 일정을 끝내자는 의미의 브라보를 외쳤다. 한 잔의 반주는 여독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다. 형제들에게 얼음과 물이 섞인 잔을 돌려 희석시키도록 유도하였다. 식사 후 잠시 쉬다 온천장으로 가 심신을 쇄신하는 기회를 가졌다. 노천탕으로 자리를 옮기자 서늘한 밤 기온에 오싹한 기분이 들어 탕 속으로 깊이 몸을 숨겼다. 감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별과 달, 산막에서 종종 보는 느낌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욕조에 누워서 본다는 것뿐이었다. 늦가을이나 겨울에 보는 달과 별은 창백하게 다가온다. 사춘기 시절 밤에 음악편지라는 방송을 들으며 공부하는 시간이 많았는데 가끔씩 엽서를 보낸 나의 사연이 소개되면서 신청 곡을 듣는 경우도 많았었다. 그 당시 겨울, 늦가을 달과 별을 스스로 표현할 때 대드 마스크(Dead Mask) 같다는 표현을 쓰곤 하였는데, 그것은 창백하고 음울한 기운이 감도는 겨울밤의 스산함 때문인 것 같다. 모진 산촌 바람이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채어가는 순간 몇 잎 남지 않은 감나무 잎이 우수수 떨어져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일본 늦가을 정취를 깨닫게 해 주었다. 내일 여정에 대한 생각을 앞세우며 깊은 잠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어제는 가수면이 60% 본수면이 40%였습니다. 오늘은 가수면을 없애 주시고 본수면을 확장해 주소서~~~ 스스로 나를 깨운 것은 변함없는 5시였다.
직원들이 전부 나와 손을 흔들며 배웅하기 시작한다, 일본인들의 배웅은 긴 시간으로 이어진다. 차창 커튼을 열고 한 동안 손을 들어 답을 해 주었다. 그들은 아직도 멀어져 가는 버스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차는 40분 정도 달려 다시 츠마고주쿠로 되돌아 가 어제 종료한 나카센도 길을 이어서 걸어야 한다. 가부토 관음상을 경유하여 나기소 역까지 3.5km 구간을 1시간에 주파하는 것이 오전 걸음 여행이다. 차 안에서 어택 옆으로 오늘 사용할 백펙을 다시 짐 정리를 해 두었다. 그리고 간략한 화살기도를 정리하여 주문을 외우듯 마음으로 외우기 시작하였다. 길을 떠난 몸과 마음 길에 화려함을 거두게 하시고 절제와 겸손의 마음으로 일행들과 함께 서로서로 평화의 마음을 전하며 걷게 하소서 오늘도 걷는 길이 주님의 길이 되게 하소서~~ 그 사이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백팩을 지고 내려섰다. 그리고 낮 익은 츠마고 역참 마을 길 복판에 서서 어제 걸었던 길을 천천히 스크린 하며 벌써 추억이 되어 버린 그림을 꺼내 보았다. 어쩌면 우린 찰나의 순간을 이어가면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과연 찰나의 순간에 모아 놓기 쉽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우린 기가 막힌 솜씨로 재주를 부리며 무엇인가 쌓아 놓는다. 찰나의 시간도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욕심인 것 같다. 욕심은 점점 물질의 노예를 만든다. 여행은 단순 명료해야 여행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몇 개의 물건 만으로도 하루를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여행이란? 모름지기 집착에 대한 치유의 시간을 얻어내는 것도 있다. 오늘 개인적인 화두는 집착에서 해탈이다.
Kabutokannon(かぶと観音) 키소 요시나카의 후예를 자칭하는 기소 요시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마고성을 떨어뜨려, 츠마기 성도 함락직전에 몰렸지만, 요시마사가 투관음을 찾아와 전승을 기원했는데, 관음당으로부터 하얀 비둘기가 나타났으며, 아내 농성의 천수지붕에 내려갔다고 한다. 이것은 일찌기 기소 요시나카가 병력으로는 뒤떨어지는 헤이에 대해 가리가라 고개의 기슭에 진을 친 시오호코쿠 하치만구(토야마현 오야베시)에 전승 기원했는데 하얀 비둘기의 인도에 의해 승리했다는 고사와 같이 아내 농성의 성안에 병사의 사기가 고양되어 성을 지킬 수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전설은 에도시대부터 전해 내려와 나카야마도를 이용하는 다이묘들은 투관음 앞에서는 하마하고 참배했다고 한다.
비행기는 입체적 시선이 필요하다면 철도는 수평적 사고를 요구한다. 그리고 직립하는 인간으로서는 감성은 늘 허공 보다는 표면 위에 서 있는 것을 선호하게 된다. 인간의 두 다리처럼 양쪽으로 나란히 목적지까지 달리며 시시각각 다가왔다 사라지는 풍경들을 쉽게 인지할 수 있고 편안하게 마음에 담을 수 있어 선호하게 되는 것 같다. 지루함이 몰려오면 자신이 원하는 역에서 내려 쉬어갈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뭐니 뭐니 해도 평행선이 지니고 있는 절대 안정감이 약속된 여행의 멋 속으로 뛰어들게 하는 것이 철도여행이다. 오전 일정은 걸음 여행으로 3,6km 정도 안에 품고 있는 숲길과 역참의 취락을 보며 약 한 시간 걸어 나기소역( 南木曽駅)까지 걷는 일이다. 나기소역에서 야부하라 역 (藪原駅)까지 이동 후 점심을 먹은 후 야부하라 역참 마을을 지나 도리이 고개를 넘어 나라이 역참마을까지 걸음 여행을 즐겨야 한다.
약 1시간 정도 달리는 열차, 우측으로는 기소강이 흐르고 좌측으로는 기소산맥이 이어진다. 기소 산맥은 기소 강과 천룡강 사이에 끼인 산맥으로 통칭 중앙 알프스라고 한다. 센조시키역에서 나카다케까지 약 80분, 기소코마가 다케까지 약 120분이 소요된다. 정상 부근에서 보는 360도의 대 파노라마는 장관이다. 특히 기소강에 펼쳐지는 계곡의 아름다움은 설악산 백담계곡가 비교된다.
우측으로는 나기소 산 (南木曽岳), 스리코기 산(摺古木山), 안페이지 산 (安平路山), 고 스모 산 (越百山), Mount Minamikoma (南駒ヶ岳), 우츠기 산 (空木岳), 센 조지키카르 (千畳敷カール) 명승지를 품고 있는 기소 산맥 (木曽山脈)이 흐르고 있어 고산준령이 뿜어내는 절경을 보여준다. 기소산맥은 후지산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북알프스, 남알프스와 더불어 일본인들은 중부 알프스라 부르는 지역이다.
절경 (絶景)이라 함은 뛰어나게 아름다운 경치를 말한다. 그러한 경치를 차창밖으로 보면서 야부하라역에 도착하였다. 이곳에 생활용품과 농산물 등을 판매하는 마트 안쪽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챙긴 후 걸어서 이동하여 역관마을 사이를 걸어 산으로 접근했다.
기소가와 원류의 마을에 있는 키소무라 미치노에키 안쪽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챙겼다.
우리는 언덕을 재라 부르고 또는 현(峴) 재갈현을 사용하여하고 더 높은 고개는 령(嶺) 재령을 사용하는데 반해 일본인들은 상(峠) 고개상을 사용한다. 오늘 우리가 넘을 산길 이름은 중산도(中山道) 나카센도 길, 조거상(鳥居峠) 즉 새가 머무는 고개를 넘어가는 길이다.
石畳道分岐(돌로 된 길 분기점)으로서 나가센도 (中山道) 길 중에 아름다운 숲 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이곳 분기점에 서서 손을 맞잡고 데 쉬를 외치면서 즉 힘차게 출발하자며 걸음 여행을 시작하였다.
이 길은 국내 길과 비교하면 구곡폭포에서 문배마을로 올라는 길과 아주 흡사하다. 초반에 그러한 이야기를 전하며 편안하게 걸음 여행을 즐기라는 뜻을 전한 것이다.
6부 선상에 서게 되면 숲 사이로 야부하라 역참 마을과 기소 강 원류가 보인다. 또한 겹겹 한 산세가 중부 알프스답다는 느낌을 준다.
이곳은 쉼터다. 신사가 있고 질이 좋은 샘물도 있다. 서너 잔을 마신 후 빈 수통에 물을 보충해 두었다.
이곳에서 새가 머무는 고개(鳥居峠)까지 600m 남았다.
숲을 관리하기 위하여 조성된 임도 길이 도리이 고개까지 이어진다.
두번 접어 휘돌아 나가는 길에 곰 출현에 주의하라는 경고 판가 위급 시 종을 칠 수 있도록 쇠 종이 걸려있다. 누군가 또 치면서 스쳐 지나갔다. 산속에서 종소리를 들으며 내심으로 어릴 적 부르던 동요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도리이 고개(鳥居峠) 표고 1332m이다. 이곳에서 부 터 내리막 길이 나라이 역참까지 이어진다. 겨울철 이곳을 넘으려면 아이젠과 스패츠, 스틱은 필수 장비가 된다. 이 고개에서 100m 내려가다 우측으로 떨어져 걸어야 나라이 역참마을 초입으로 내려설 수 있다.
부담 없는 내리막 길 여유롭게 걸어 내려왔다. 이 지점에서 0,3km 더 걸으면 가파른 돌 다다미 길이 30m를 끝으로 오늘 걸음 여행은 종료된다.
주저앉아 행동식과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오후 내내 숲 길을 걸어 적당한 피곤이 느껴지지만 충분히 견딜만한 3시간 행보다
기소지방에서 자랑하는 숲 길은 국내인들과 세계 트레커들에게 입소문 난 나카센도(中山道) 중에 하나이다. 파 안 하는 표정을 보며 즐거운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鳥居峠へ・石畳道(도리이 고개를 넘어 돌길) 종착지다. 이곳이 바로 나카센도(山中道) 역참 중에 옛 모습 그대로 본존 된 34번 째역참 마을이다.
역참 마을 전체가 보존지역이다.
좌측으로 우물이 있어 한 바가지 떠서 목마름을 해결하였다. 청량감이 온 몸으로 퍼지며 심신의 여독을 씻어내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순간을 참 좋아한다. 성취 후에 몰려오는 견딜 수 있는 피로감도 걸은 후 나에게 자연이 선물해 주는 것 또한 사랑하게 된다. 그러한 감정선이 나를 산과 숲과 인연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한 것이다.
죽선 당에서 사진을 찍은 후 나란히 걸으며 많은 관광객들이 입가에 아이스크림 자국을 남기며 스쳐 지나갔다. 그 모습이 목마름과 동시에 달콤한 아이스크림 유혹이 휘감아버렸다. 이후 발걸음이 나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매의 눈이 대표주자로 나섰다. 그러나 아이스크림 집을 찾아내 것은 자매 님이었다. 수많은 세월 진찰의 시간이 불러낸 경험이 일으킨 반란인 것 같았다. 아무튼
구매로 동반자 모두들 잠시 행복한 아이스크림 잔치 기회를 갖을 수 있었다. 산중 생활에서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 부 터 큰 것까지 귀하고 소중한 마음이 곁들여지는 것이 여행의 일상이 된다.
도시에서는 이 맛의 음미는 경험할 수 없는 탓일까? 한 입 드시고 잠시 거의 사색의 입문으로 진행하시는 모습이다.
사람을 참 즐겁게 하는 아이스크림 녀석이다. 아 행복의 빛은 참 여러 가지인데.... 도시에선 획일적인 행복만 추구하는 것 같다.
나라이 역참 마을 배치도다. 원형 그대로 보존된 마을 경외감을 느끼게 해 준다.
커피 향이 유혹의 발걸음을 만들어 잠시 머뭇거리다. 시간적 여유가 없어 사진만 찍은 후 돌아섰다.
솔방울을 채색하여 걸어 놓은 정물 중앙에 새겨 놓은 LOVE와 그 아래 걸어 놓은 퇴색해 가는 주황색 꽈리 인상 깊게 다가와 찍다 옆에 벨린다 자매가 있어 초대하여 찍었다. 마침 옷 색과 정형물이 동색이라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시각의 정형화에 변화의 기회를 얻는 것이 바로 여행 중에 자주 발생하게 된다. 인식의 변화는 생각의 변화를 부르게 하고 생각의 변화는 새로운 시도를 요구해 오기 마련이다. 다양성은 마음의 심지에 밝은 불을 지피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사고의 틀은 늘 알에서 반복적으로 보편성과 합리성으로 깨고 나올 수 있어야 삶의 균형을 얻게 되는 것 같다.
CF를 찍는단다
철도 아래로 뚫린 통로를 빠져나오자
마지막 단풍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느티나무 사이로 전용버스가 대기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이 다리는 교각이 없는 다리로서 순수 목재만으로 아치형으로 세운 다리다. 일본에서 단 4개뿐이라는데... 일본인들도 느티나무 배경으로 연신 촬영 중이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산촌마을 나라이 정겹다.
나라이 역 모습이다. 이곳에 서서 잠시 지나 온 여정을 되새겨 보았다.
일본인들이 나카센도(中山道)라 부르는 69개의 역참 마을을 이어 나가는 총길이 534km이다 그중에 마고메 걸음 여행 13,2km, 나기소 걸음여행 3,6km, 나라이 주쿠 걸음 여행 7,9km 걸어 이곳 나라이 역에서 나카센도 걸음 여행을 종료하게 되었다. 우리들이 걸었던 역참 마을은 일본 문부성에서 지정한 중요 건축물 보존 지역이었기에 에도시대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일본의 역사를 느끼며 걸을 수 있었다. 중부 알프스 지방의 자연과 이어지는 길에는 산촌 마을과 함께 옛 역참 마을이 전해오는 생생한 그들의 여행과 관련된 옛 정서를 공유할 수 있었으며 여러 도로를 만들어 중앙과 지방을 잇는 합리적인 공적개념을 공유하였으며 행정의 효율은 이루어 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만 갖고 있는 것이 나카센도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길이라는 기능성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문화가 고스란히 스며 있는 것이다. 나카센도는 중요한 두 도시 에도와 교토를 잇는 도로는 맞는 말이다. 1601경 분열되어 있던 일본을 통일한 도코가와 이에야스가 도카이도 동쪽 해안도로 대체도로의 필요성을 간파하고 혼슈의 중산간지방을 관통하는 도로를 만들게 된다. 도카이도 495km 보다 나카센도가 534km로 더 길었다. 그런 관계로 여행자들을 위하여 69개의 역을 만들고 숙박, 음식, 여흥을 제공하는 시설을 만들어 산간지방은 외지인과 소통하며 삶의 문화를 재창출하고 살았던 것이다. 에도 니혼바시(日本橋)에서 출발하여 교토의 가모가와( 鴨川 ), 삼조대교( 三条大橋 )까지 69개의 역이 중산간 지방을 지나감으로 나카센도(中山道) 부른 것이다.
1797년 출생하여 1858년 고인이 된 안도 히로시게라는 유명한 판화의 대가인 일본 화가가 있다. 그는 일본의 전통적인 자연을 우키요에에 담은 화가로 유명한 사람이다. 서양의 유명화가 고흐가 자신의 그림배경에 우타가와의 그림을 배경삼을 정도로 그를 아끼고 사랑했다. 일본이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하면서 파리 사교계와 문화계에는 일본 열풍이 불어 닥쳤고, 유럽 서양 미술 전반에 그 영향을 떨쳤다. 이를 '자포니즘(Japonism)'이라고 하는데, 우키요에는 마네, 모네, 로트렉, 보나르, 고흐 등 수많은 화가들을 매료시켰다. 특히 고흐는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탕기 영감의 초상〉,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의 초상〉 등의 배경에 우키요에를 그려 넣었을 뿐만 아니라 우타가와 히로시게를 좋아해 〈에도 명소 100경(名所江戶百景)〉을 유화로 모사할 정도로 심취해 있었다.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일본의 풍경을 서정적이고 시적으로 그려 낸 화가이다. 그는 1797년 에도의 변두리인 아즈마지에서 하급 무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안도 도쿠타로로, 안도 히로시게라고도 불린다. 그는 13세 때 부모를 연이어 잃고 가장이 되었고, 아버지의 직업을 세습하여 에도 성의 소방일을 담당하는 무사로 일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그는 15세 무렵 우타가와 도요히로(歌川豊廣)의 문하에 들어갔다.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이듬해 스승에게서 우타가와 히로시게라는 이름을 받았고, 22세 때인 1818년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 장 짜리 판화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도요히로의 문하에서 약 17년간 가부키 배우와 미인을 소재로 한 판화를 제작하면서 여타 우키요에 화가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그러나 화가로 활동하면서도 무사의 일은 계속했다. 그는 1823년 조부인 주에몬의 아들 나카지로에게 일을 물려주고 우키요에에 전념했다.
1828년 스승 도요히로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 2대 도요히로의 자리를 물려받을 것을 권유받았지만 자신만의 작품을 그리고 싶었던 히로시게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2년 후 히로시게는 '이치유사이(一遊齋)'라는 호로 〈동도명소(東都名所)〉를 발표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풍경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일본 풍경화에 서구의 원근법과 빛의 변화를 표현하는 기술을 적용한 대담한 것이었다. 그는 교토, 나라, 에도 전역을 두루 여행하면서 현장에서 직접 관찰하고 사생한 바를 토대로 현실의 풍광을 그려 냈다. 특히 섬세한 필치와 차분하고 조화로운 색상으로 서정적이고 시적인 분위기를 묘사하는 데 뛰어났다.
히로시게의 대표작 〈도카이도의 53 경치(東海道五十三次)〉는 1832년 가을, 왕실에 말을 진상하는 막부 관리로 선발되어 교토에 올라가면서 한 스케치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다. 도카이도는 에도에서 교토에 이르는 도로인데, 이 길을 통해 에도와 교토 간에 물자와 사람이 이동했다. 히로시게는 여행에서 돌아온 즉시 작품을 시작했다. 이 연작은 에도의 니혼바시에서부터 교토의 가모가와 삼조대교까지 53개 역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계절과 날씨,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풍광을 섬세한 필치와 따뜻한 색감으로 표현한 걸작이다. 이 작품은 훗날 파리의 살롱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면서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히로시게는 〈오미 8경〉, 〈오사카 명소 그림〉, 〈교토 명소 경치〉, 〈기소가도의 69 역참〉 등 수많은 명소를 그렸으며, 이 중에는 이미 간행된 그림을 토대로 그린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은 〈도카이도의 53 경치〉와 같이 스스로 관찰한 바를 토대로 한 작품들이다. 그는 사물을 직접 보고 묘사한 것을 토대로 현실 세계를 옮겨야 진실한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직접 답사하여 눈으로 확인한 후 이를 자신의 내면세계와 조화시켜 표현했다. 히로시게는 직접 관찰을 토대로 지형을 세세히 묘사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원근법을 사용하여 화면을 구성했다. 또 계절과 날씨, 시간의 흐름에 따른 광선 변화를 표현해 서정적인 분위기를 부여했다. 그는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시적인 감수성을 발견해 내는 감성적인 인물이었는데, 그의 그림은 이런 특유의 감수성에 전통 일본화풍이 조화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평생 일본의 전통적인 자연관을 담은 풍경화를 그린 히로시게는 '눈과 달과 꽃의 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말년에 발표한 〈설월화〉 3부작 〈기소지의 산천〉, 〈가나자와 8 승지의 야경〉, 〈아와나루토 풍경〉 때문에 생긴 별칭인데, 이 연작은 일본의 자연을 가장 일본적인 감수성과 색채로 표현한 동시에 보편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내가 이 화가를 언급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기소가도(나카센도.中山道)의 69 역참이란 주제로 나카센도 풍경화를 그렸기 때문이다.
우타가와 히로시 키소 가이도(나카센도) 69역. (The 69 Stations of the Nakasendo(中山道六十九次, Nakassendo Rokujukyu-tsugi)
에도에서 교토까지 중산간지방을 관통하는 키소가이도의 69개 역을 그린 연작 에이센은 1836년 출판업자 다케노우치 마고하치와 작업을 시작하여 2년 동안 69개의 역참 풍경중 24장의 작품을 그렸다. 그러나 히로시게로 화가가 교체되면서 1842년 7년 만에 히로시게는 출판업자 이에야 리헤이와 함께 70장의 그림을 그려 키소가이도 69차 연작을 완성시켜 출판을 하게 된다. 69 역참의 풍경을 그린 연작 목판화인 키소가이도 69차는 당시 일본인들에게 여행지침서로 받아들여졌다.
두 명인을 통해 표현된 19세기 당시 일본인들의 생활상을 들여다보면 마치 에도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시대적인 기록 화이면서도 예술적인 가치가 출중하여 세계 어디를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명작인 것이다. 케이사이 에이센과 우타가와 히로시케의 작품을 살펴보면 두 사람의 화풍은 전혀 다름을 알 수가 있다. 에이센은 미인도, 히로시케는 풍경화의 달인으로서 상반됨을 알 수 있지만 키소가이도 69차 연작 시리즈에서는 두 사람 모두 실험적인 디자인과 함께 채색, 기법, 구도를 구사하는 것은 같다. 동행 오십삼 차(東海道五十三次를 그렸을 때와 달리 에이센도, 히로시케도 키소가이도를 직접 전부 가보지 못하였으나 여행지침서, 여행자들의 기록과 그림들을 참조하여 두 사람의 상상력을 총 동원하여 연작을 그려낸 것이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천하통일하고 에도를 수도로 결정하였을 때 에도는 습지에 불과한 곳이었다. 그러나 10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명실상부한 큰 도시로 발전하였으며 일본의 정치, 군사, 경제의 중심 도시로 자리를 잡게 된다. 에도시대에는 무사들이 에도와 그들의 영지를 정기적으로 오고 가는 교토부터 에도까지 두 곳을 잇는 도카이도(東海道) 같은 도로들이 발달하였다. 이런 발달은 사무라이 귀족계급만 아니라 승려와 일반인들까지 이곳을 오가는 여행객들이 많아졌다. 당시 산야의 사찰과 신사, 경승지를 순례하는 것이 대중화를 이루었지만 인기 있는 여행지는 아무래도 에도였다.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여행은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는데 부유층에 극한 되었지만 19세기 초반에는 부유한 도시인이 점차 늘자 여행인구가 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여행 안내서가 요구되면서 여행 지침서, 목판화 등이 만들어지고 1830년 경부터 대중화되기 시작하였다. 여행자들은 도보를 이용하거나 말을 타고 다녀 역참을 중심으로 숙소, 상점, 여흥과 휴식을 겸비한 식당 등이 번성기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시설들이 목판화 연작 시리즈의 많은 부분의 주제로 이어진 것이다.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1797-1858)는 특출 난 재능을 소유한 우키요에(浮世繪) 화가였다. 그는 에도(江戶)에서 세습적인 직업인 소방관일을 했던 하급무사 가문 출신이다. 전통적인 일본 회화에도 탁월하였지만 서양기법까지 섭렵하여 새론 만들어진 교토와 나라를 잇는 도로를 여행하면서 현실과 현장감을 극대화하여 수많은 걸작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파리의 문화계와 인상파 화가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고 막강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타고난 재능에 힘입어 세상에 자신의 능력과 이름을 남긴 사람이다. 일본을 움직인 10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등재되었다. 히로시케는 어느 부분은 직접 여행을 하면서 사생과 인상을 담아 목판화로 제작하였는데 유명 명승지를 계절과 시적인 언어를 표현하는 전통방식으로 신사, 사찰, 찻집과 식당, 극장과 가게 강과 운하 같은 분주한 일상의 모습을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지형의 세부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원근법을 이용하여 계절에 대한 암시와 아름다운 색채를 이용하여 각 화폭마다 따듯한 서정성을 표현하였다. 에도의 경치의 아름다움과 물질적 번영을 찬미했던 작가는 에도 시민과 여행객 그리고 유럽의 일본 애호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빈센트 반 고흐는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작품에 심취되어 서양화 기법을 이용하여 히로시게 작품을 모사한 그림도 여러 점 남겼다.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일본 풍속화인 우키요에 대가로서 풍경화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가다. 연작으로 발표한 도카이도(東海道) 53차와 키소카이도(나카센도. 中山道) 69차는 역참을 그려낸 걸작이다. 당시 생활상이 정밀하게 그려져 있어 감탄과 함께 찬사를 받고 있다. 키소가이도 69개의 역참마을 중 24개는 케이사이 에이센이 그렸고 나머지 46개는 우타가와 히로시게가 그렸다. 특히 32번은 걸작 중에 걸작에 속한다.
그리고 45번 오치아이는 운보 김기창 청록산수 닮은꼴이고 55번 고도(kodo)는 가마우지를 이용한 어로작업으로서 일본이 중국 남조와 교류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밀한 부분까지 깎아서 찍어내는 우키요에 판화는 그림 그리는 사람, 조각하는 사람, 찍어내는 사람, 출판업자, 각각 다른 전문가들의 협업으로 출판된 우키요에판화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오치아이는 우리들이 걸었던 길이다. 길 위를 걷다 보면 문명과 함께 예술도 체험하는 기회가 수도 없이 다가온다.
길 위에서 얻는 체험은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게 된다. 직접 본 후 마음에 담기는 감성과 글이나 말을 통하여 보고 들은 후 엮어져 쌓인 감성은 천지차이와 같다. 그 사실을 알기에 여행을 통하여 실존의 가치를 통하여 세세한 감정 속으로 몰입하게 되는지 모른다. 또한 여행은 공감과 이해를 증진시키며 예술작품을 작품을 감상하면서 내면투사작용에 의해 감상하거나 바라보는 대상 속에 자신이 들어가 있는 듯이 느끼는 감정이입도 여행에 얻는 소중한 감정이다. 예술이론에서 대상과 자신의 감정이 결합되는 경험을 얻게 되는데 여행 중에 얻어지는 수많은 기억들도 추억의 빛으로 재현되면서 늘 여행 중 자연의 아름다운 길 위에서의 여정 안에서의 감정이입이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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