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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부터 1598년 11월의 조선은 ‘산도들도 마을도 모두 불타고 자식들 앞에서 부모를 칼로 죽이고 아이들은 묶어서 포로로 끌고 가는 지옥 같은 상황’(일본군 종군 승려 케이넨(경념(慶念))의 「조선일기」중)이었다.
이런 와중에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승군(僧軍)들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 일본군은 전국의 사찰들을 약탈하고 불을 지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현재 남아 있는 전통사찰의 상당수는 이 시기에 참화를 입어 중건된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7년 전쟁 속에서도 참화를 면했던 절이 있으니 바로 ‘부석사’다. 1592년 4월에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부석사인근 까지 왜군들이 쳐들어 왔지만 이 해 8월 강원도 영월로부터 영천(榮川)의 부석사(浮石寺) 등지로 넘어 들어왔다가 우리 측 군사들에게 쫓겨 갔다고 김성일(1538~1593)의 『학봉속집』은 전하고 있다.
이렇게 전란을 피한 부석사는 다른 사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부석사의 주요 불사를 보면 1611년 음력 5월말에 폭풍우로 인해 무량수전의 중보(중량(中樑))가 부러지는 피해를 입어 이듬해부터 1613년까지 보수와 단청을 새로이 하였다. 이어 1618년 5월에는 무량수전 수미단의 보개(寶蓋)의 보수와 1656년 무량수전 등의 건물에 대한 기와를 교체하였다. 1684년에 조선된 사불회괘불도. 이 괘불은 1745년 보수를 거친 후 충북 제천 월악산 신륵사로 이안되었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부석사에서 제작된 불상과 불화를 살펴보면 현재 경북 문경 대승사에 봉안된 보물 제575호 아미타후불목각탱이 1675년에 조성되었으며, 9년 뒤인 1684년에는 사불회(四佛會)괘불도와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만들어졌다. 이후 1739년 현재 동국대박물관에 소장된 철제은입사향완이, 1745년에는 보물 제1562호 오불회(五佛會)괘불도가 조성되었다. 이 중 보물 제575호 아미타후불목각탱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목각탱의 효시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보물 제1562호 괘불도는 1684년에 제작된 괘불이 낡고 오래되자 새로 조성한 것으로 기존의 약사, 비로자나, 아미타, 석가여래로 구성된 4불에 노사나불을 추가하여 그렸다. 1684년에 제작된 괘불은 보수를 마친 후 1745년 4월 충북 제천 월악산 신륵사로 이안되었다.
당시 신륵사와 부석사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괘불의 이안과 관련된 자료가 전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신륵사 극락전 외부 벽화(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301호)에 ‘사명대사행일본지도(四溟大師行日本之圖)’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부석사와 마찬가지로 당시 서산스님의 문도들이 주석했던 사찰로 보인다. 특히 이 괘불을 보수할 때 증명(證明)과 증사(證師)를 맡은 월암당 진기(月巖堂震基)와 환허당 상심(幻虛堂詳心)스님이 1745년작 부석사 괘불 조성때도 증명법사로 등장한다는 것도 이 절이 부석사의 문도들이 상주한 사찰임을 간접적으로나마 알려주고 있다.
한편 보물 1562호 괘불의 시주자 가운데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린 재가불자가 있는데 평안도 은산 남면 화석리에 거주한 임진표(林振杓)라는 사람이다. 벼슬을 하지 않은 유생인 그가 천리가 넘는 영주 부석사까지 와서 대시주가 되었다는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왜 평안도 은산에서 경상도 영주의 태백산 골짜기까지 와서 괘불에 쓰일 비단과 안료, 종이 등 거액이 소모되는 물품을 시주한 것일까.
‘임진표’라는 인물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지만 그가 부석사에 시주를 하기 전 그가 살았던 평안도 은산지역은 당시 우박, 서리, 지진, 병충해 등 자연재해가 심해 살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 당시 유행한 『정감록』에 따르면 재난을 피할 십승지 열 곳 중 세 곳이 풍기의 금계촌, 안동의 화곡, 단양의 영춘인데 모두 소백산과 태백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이미 조선 중기 때부터 황해도, 평안도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아마도 ‘임진표’ 또한 『정감록』을 신봉한 사람으로 자연재해 등을 피해 십승지로 들어온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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