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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코액션The Korean Actions(大高麗國復興會) 원문보기 글쓴이: 의성대군2
고구려와 신라의 전통 이어받은 고려 황제릉들..
고려를 개국한 태조 왕건 황제의 릉. 현릉(북한 국보유적 제179호)
조선은 한양 주변이 그렇고, 신라는 경주 주변이 그렇듯 개성은 고려의 수도로써 대부분의 황제께서 태어나고 죽은 곳이며, 묻혀있는 곳이기도 하다. 34명의 고려 황제 중에서 16명의 능이 개성에 있다. 이중 개성역사유적지구에 속한 왕건황제 폐하릉(현릉), 공민황릉, 명릉군, 칠릉군 등이 이번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고려뿐만 아니라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수도로 옮긴 데 반해 다시 개성으로 천도했던 조선 제2대 이씨 왕인 정종의 능(후릉)이 개성 판문군에 있다.
고려 황릉은 개성 외에도 인천시 강화군에 21대 희종(석릉), 23대 고종(홍릉)의 능이 있다. 강화에는 황후의 능도 2기가 있다. 몽고가 침략하면서 강화도를 수도로 39년간 지난 결과다. 나머지 황릉들은 개성지역 근방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조선 후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며 방치, 훼손과 도굴을 당해 정확하게 능의 주인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고려청자나 석물을 노린 도굴꾼들의 집중 표적이 되면서 심각하게 파괴됐다. 아울러 그동안 북한주민들이 사는 협동조합 근처거나 휴전선 근처 군사지역(판문군)에 있어서 관리가 제대로 안 됐다. 6대 황제 성종(강릉), 11대 문종(경릉), 12대 순종(성릉) 등의 능이 판문군 주변에 있다. 망월대와 마찬가지로 고려가 멸망한 이후 방치돼온 셈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왕건황릉, 공민황릉은 북한 국보로 지정돼있는 만큼 그나마 잘 관리되거나 보존돼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북한에 위치한 고려 황릉들은 1956년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공민황릉을 발굴하기 시작해 1982년 개성역사박물관이 문종의 경릉, 경종의 영릉을, 1983년에는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충목황제의 명릉을 발굴했다. 1992년에 왕건황릉, 1997년 동구릉 등 한국전쟁 이후 총 20여 기의 황릉과 황릉급 고분들을 발굴했다. 북한은 이러한 발굴성과를 모아 2002년 '고려무덤발굴보고'를 냈으며, 이 책은 국내 서점에서도 구입이 가능하다.
고려시대 황릉은 대체로 고구려 능묘 전통을 이어받은 발해와 통일신라 능묘의 전통을 계승해 능실은 석실이었고, 산기슭에 3~4층 단을 쌓고 맨 윗단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 봉분을 쌓고 아래로 석등, 문·무인석, 제향각 등을 배치했다. 왕건황제릉과 공민황릉을 비롯해 정종 안릉, 문종 경릉, 신종 양릉(156개의 별들이 그려져있어 유명하다), 원종 소릉, 충목황제 명릉 등에 능실 내부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 무덤에서 발생하고 발전한 벽화가 고려 황릉에 그대로 이어진 것. 벽화의 내용은 사신, 인물풍속, 12지신, 선인, 풍경, 성좌 등이 있다.
고려시대의 능에는 신라시대의 능에 없던 망주석, 장명등, 정자각 등 새로운 요소도 갖춰졌는데, 이러한 시설은 조선시대에 계승된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능침제도와 능묘조각은 송나라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되어 전개된 우리 나름의 능묘 문화를 보여 주고 있다. 고려시대 황제릉과 조선 이씨 왕릉이 크게 다른 점은 고려의 황릉은 돌을 쌓아 단을 만들고 돌계단을 만들어 그 상단에 봉분을 조성하지만, 조선 이씨 왕릉은 둥그스름한 토단 상부에 봉분을 조성한 점이다.
고려를 개국한 태조 왕건 황제 폐하의 릉. 현릉(북한 국보유적 제179호)
태조 황릉은 고려 태조 왕건과 신혜황후 류씨를 함께 묻은 현능(顯陵)으로, 송악산 줄기가 뻗어내려 온 만수산의 나지막한 등성이 위에 자리 잡고 있다. 943년에 창건된 것을 1994년에 대대적으로 재정비했다. 역대 황제의 수호가 각별해 외침이 있을 때마다 태조의 재궁(梓宮)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았다가 다시 능에 안치하는 일을 여러 번 했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당해 재궁을 부아악(負兒嶽) 향림사(香林寺)로 옮겼던 일이 있었고, 몽고 침입 시는 재궁을 강화도로 모셨다가 충렬황제 때 다시 개경의 현릉에 복장한 일이 있었다.
현재 능문 앞의 한 옆에는 "고려태조왕건황제릉개건비"가 세워져 있다. 능문으로 들어서서 제당과 비각이 있는 구역을 지나면 맨뒤의 제일 높은 단 위에 고려 돌칸흙무덤(석실봉토분)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춘 왕건황릉이 있다. 제당은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파괴된 것을 1954년 옛모습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무덤칸 안의 가운데에는 큰 판석으로 된 관대가 놓여 있고, 좌우 벽체 아래에는 유물을 올려놓는 긴 대가 있으며, 동, 서, 북쪽의 벽에는 참대와 소나무를 비롯한 그림들을 그린 벽화가 있다. 무덤칸 안에는 국화 무늬박이 청자간, 옥띠장식을 비롯한 유물들이 얼마간 남아 있었다. 무덤의 바깥 둘레에는 쥐(자), 소(축), 범(인)등 12지신을 새긴 12각의 병풍돌을 세웠으며, 그 밖으로 돌난간을 둘렀다. 봉분의 높이는 8m이며 병풍돌의 대각직경은 19m이다. 무덤의 네 귀에는 돌범이 놓여 있으며, 앞에는 상돌과 망주석, 석등 등이 있다. 상돌의 받침돌 정면에 새긴 꽃무늬와 새무늬 조작은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다. 황릉이 있는 곳보다 조금 낮은 둘째 단과 셋째 단에는 태조 왕건 황제를 따라 통일국가 수립에 공헌한 개국공신을 비롯한 8명의 측근 신하들이 4명씩 양 옆에 서 있다. 이 돌 조각상들은 야외조각물이지만 비교적 섬세하게 만들어졌으며, 무관의 모습에는 용감한 장수의 기상이 잘 나타나 있고, 문관의 모습에는 지혜로운 문인의 성격이 잘 반영되어 있다. 제당 안에는 고려 태조 왕건 황제 폐하의 화상이 있으며, 그밖에 고려를 창건하고 고구려의 통일지향을 계승해 민족을 통합해 나간 그의 생애를 그린 그림들이 있다.
슬픈 사랑을 한 공민황릉(북한 국보유적 제123호)
공민황제의 현릉과 황후 노국대장공주의 정릉은 고려황릉 가운데 가장 완비되고 보존상태가 좋으며 고려황릉 제도의 완성품으로 조선 이씨 왕릉제도의 모범이 된 능(陵)이다. 2기의 무덤을 나란히 세워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학자들은 우리나라 역대 무덤건축과 석조 조각기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하고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1365년(공민왕 14) 황후 노국대장공주가 산고(産苦)로 돌아가자 황제의 비통함이 도를 지나쳐 황후를 위한 법사(法事)는 물론 산릉역사(山陵役事)에 온갖 정성과 재력을 기울여 화려한 능을 만들고자 했다. 1366년 정릉과 나란히 자신의 수릉(壽陵)을 만들도록 했는데 그것이 현릉이다. 공민황제는 뒤늦게 자신의 아이를 임신해 노산을 하다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실의에 빠져 신돈에서 모든 정사를 맡겨 개혁을 이끌었지만, 신돈이 지배층의 근간을 흔들며 반발이 거세지자 신돈을 제거하고 나서 술과 여흥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자신을 모시던 젊은이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그간 원나라의 간섭으로 무너진 황실의 위상을 높이려는 시도는 좌절됐다.
현·정릉은 현재 개성시 서쪽 교외 봉명산(鳳鳴山)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무선봉의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능역은 동서 폭이 약 50m, 남북 길이가 45m 범위의 장방형의 능3계와 이어지는 경사면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일대 지형은 이른바 '풍수설'에 잘 어울린다. 그 경사면 중앙에 계단을 두어서 능에 오르내리도록 하고 있으며 중앙계단의 좌우에도 몇 단으로 석축을 쌓아서 흙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무덤구역은 3개의 층단(상, 중, 하단)과 맨 아래의 경사단으로 이루어졌다. 상단의 크기는 동서 약 40m, 남북 약 24m인데 그 한 가운데 2기의 무덤을 남향으로 나란히 놓았다. 무덤은 석실봉토분으로 봉분의 높이는 약 6.5m이고, 병풍돌의 대각 직경은 13.7m, dl 두 무덤 사이 간격은 0.5m이다. 각 봉분 둘레에 12각으로 병풍돌을 돌리고, 그 밖으로 난간을 둘렀는데 병풍돌에 구름을 탄 12지신과 연꽃무늬를 섬세하게 새겼다. 이 밖에 상단에는 한 쌍의 상돌, 범, 양조각, 한 쌍의 망주석이 있다. 두번째 중단에는 두 쌍의 문인상과 한 쌍의 석등이 있고, 세번째 하단에는 두 쌍의 무인상이 있다. 경사단 아래에는 최근에 복구한 정자각이 있으며, 능의 원찰인 광통보제선사터와 비가 있다.
두 무덤의 내부구조는 유사하므로 여기서는 현릉만 살펴보기로 한다. 고분은 무덤 안길(연도)과 안칸(현실)으로 이루어진 외칸무덤(단실묘)으로 안칸의 크기는 동서 2.97m, 남북 3m, 높이는 2.29m이다. 무덤 안길은 안칸 남쪽 벽 가운데에 냈는데 길이 9.1m, 폭 2.04m, 높이 1.82m이다. 안칸의 벽면은 잘 다듬은 화강암 판돌을 한 면에 하나씩 세워 만들었고, 천장은 3개의 판돌로 덮은 평천장이다. 동, 서, 북, 세 벽면에는 공왕이 그렸다고 전하는 12지신상(높이 70~75cm) 벽화가 각각 4구씩 배치되어 있다. 12지신상은 구름을 타고 손에 홀을 쥐었으며, 머리에 관을 쓴 인물이다. 관 위에는 각각 방위에 해당하는 동물의 머리가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하늘을 상징한 해, 북두칠성, 그리고 한 쌍의 3성을 그렸다. 안칸의 동벽에는 높이 43cm, 폭 38cm의 문을 새기고, 그 밑에 방형의 구멍을 뚫어 정릉과 통함을 표시해 두었다. 공민황릉의 건축과 설계에는 당시 고려 사람들이 도달했던 수학 및 천문지리, 석조건축술, 조형예술 수준이 종합적으로 집대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 무덤 건축에서는 고려 사람들이 해당 건축물을 웅장하게 보이기 위해 궁전, 무덤, 기타 건축에서의 건축구획을 여러 개의 층단으로 배치하던 수법을 드래도 도입했다. 그래서 제일 윗단에 무덤무지를 두고 그 아래로 여러개의 층간을 구성하면서 조작과 시설을 배합함으로써 효과를 높인 것이다.
무덤구역에 배치되어 있는 돌조각들, 특히 문인상과 무인상은 선각을 주로 하면서도 입체감을 잘 살리고 있고, 문인과 무인다운 특징은 물론, 젊은이와 늙은이의 특징까지도 잘 표현하고 있다. 고려 황릉 중 확실하게 문인석과 차별해 무인석을 세운 예는 거의 없으며, 현(玄)·정릉(正陵)에 와서 비로소 갑옷으로 무장한 무석을 세움으로써 이후 이씨 조선 왕릉의 문무석을 갖추는 제도의 모본이 되고 있다.
일제에 의해 도굴당해 주인을 알 수 없는 일곱 개 황릉, 7릉군
(참고 : 이와 같이 일제가 고려황제릉을 도굴하게 된 경위는 고종 이희의 지시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 되었고 그 내막을 본문 하단에 게시하였다. https://cafe.daum.net/grandeurlove/qyo6/26)
이 7릉군(7릉떼)은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한 고려시대 황릉급 무덤군이다. 해선리 만수산 기슭에 동서로 나란히 인접해 있는 이 무덤들은 일제에 의해 묘지석 등이 도굴당해 그 주인공이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황제나 황족으로 추정되고 있다. 축조 시기는 대체로 고려시대 말기로 추정된다. 맨 서쪽의 것을 제1릉, 동쪽으로 가면서 제2릉, 제3릉 등으로 부른다.
모두 7기의 능이 있지만, 각 능의 구조와 형식이 비슷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대표적으로 제3릉에 대해서만 소개하고자 한다. 제3릉의 무덤 구역은 3개의 층단을 쌓아 만들었는데, 1단에 무덤의 봉분이 있고, 그 주위에 돌난간을 돌리고 돌로 만든 동물상을 배치했으며, 그 앞에 망주석, 상돌 등을 두었다. 봉분의 크기는 높이 2.4m, 직경 7.6m이다. 봉분에 돌린 병풍돌에는 12지신상과 운문 등을 섬세하게 돋을새김했다. 2단에는 한 쌍의 문인상이 있고, 3단에도 문인상 한 쌍이 배치되어 있으며,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터가 있다. 이러한 무덤구역 설정 및 시설물 배치는 고려시대의 특징적인 무덤 형식으로,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이 무덤은 규모가 작을 뿐 건축 및 장식기법에 있어서 공민황릉과 거의 유사하다. 서로 연관된 무덤들이 일정한 지역 안에 밀집되어 축조된 방식도 앞선 시대 무덤축조 방식과 유관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3릉구역의 조각에서 무인상이 없고 문인상 두 쌍만 둔 점은 무덤 주인공의 성격과 관련된 특징일 수도 있고, 무덤구역 설정에 있어 어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아직까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8살에 등극해 12살에 요절한 충목황제의 능, 명릉군(명릉떼)
황해북도 개풍군 연릉리에 있는 고려시대 고분군으로, 공민황릉과 왕건황릉 사이에 위치해있으며 3개의 능이 약 25m, 50m 간격으로 나란히 하고 있다. 가장 서쪽에 있는 1능이 29대왕 충목왕(재위 1344~1348년, 공민왕의 조카)의 무덤이며, 무덤의 크기는 너비 8m, 높이 2.3m이다. 왕릉급 무덤인 2능, 3능도 같은 크기로 지어졌는데 심각한 도굴과 훼손으로 인해 아직 누구의 무덤인지는 해명되지 않았다.
충목황제는 충혜황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나라의 덕녕공주였다. 원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있다가 1344년 8살에 원나라에 의해 즉위했으나 후사 없이 12살에 요절한다. 1348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그의 어머니 덕녕공주가 섭정했다.
참조
-'사진으로 보는 북한 국보유적', 국립문화재연구소, 2006년
-'북한의 문화재와 문화유적 Ⅳ', 조선유적유물도감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년
-통일부 평화문제연구소 북한지역정보넷
-'천년의 눈물'... 모습 드러낸 개성의 고려 왕릉, 한겨레신문, 2009년
-통일뉴스
-고려황릉, 박길상 인천시민운동지원기금 상임이사, 기호일보 2012년
-민족대백과사전
출처 : www.k-heritage.tv/brd/board/909/L/CATEGORY/911/menu/901?brdCodeField=CATEGORY&brdCodeValue=911&bbIdx=4495&brdType=R&tab=
제공 : 코액션The Korean Actions(大高麗國復興會) : http://www.koaction.org
일제 도굴팀이 고려황제릉 주변에서 청자를 발견하여 고종에게 가져와 신고하였더니...
일제공무원들이
고려황실릉을 발굴한다며 파 헤치고
이것저것 유물과 함께 고려 청자를 이희에게 가져왔고...
그리고 이자에게 보여 주었더니..
" 이거..우리나라꺼 아닙니다." 라고
손사래를 치며 맘데로 가져 가라고 했다.
매장물은 당연히 신고 후 반출하여야 하였기 때문에
일제 발굴팀이 그 청자를 가져와 신고하였던 것이었다.
이희(고종)가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팔아 먹기 전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자가 위와 같이
" 이거..우리나라꺼 아닙니다." 라고 말하자
이후 일제는고려황제릉을 제 멋데로 도굴하고
고려청자등 황실유물들을 맘껏 가져 갔다.
고려황실릉은 이때 많이 훼손되었다.
그랬다.
고종에게 고려, 즉 Korea는 우리나라가 아니었고,
그들 중국인 한민족(韓=漢民族)의 나라는
중공=조선=한국(Chosun, Hankuk)이었기 때문이다.
Korea(고려)는 고려족(예맥족)의 나라였고,
조선(한국)은 천손 단군의 후손이 아님을 스스로 웅변한 것이었다.
지금 대한민국(한국)의 뿌리는 대한제국(한국)에 있고
그 대한제국은 짱깨 조선에 있으며 그 헌법은 경국대전으로서
Korean(고려인, 예맥인)을 노예로 부리기 위한 법을 만들어
지구역사상 가장 잔인한 식민통치를 지금 까지 하고 있다.
지금 짱꼴라 조선 왕릉은 국립공원으로 관리되고 있고
우리민족 천손 고려(신라) 황제릉은 시,군,구의 보호시설로 되어 있으며
이것만 보아도 그들 중국인 한민족(한국)의 조상이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고
그들은 위대한 고려(신라)황실과 인연이 없음을 스스로 강변, 입증하고 있다.
1940년 대동아전쟁 참전 일제 히로히토 천황에게 경례하는 영친왕(계급 중장)
출처 : ttps:// www.youtube.com/watch?v=Pl21aL2SqZA
(1955년 일본에 완전히 귀화 해서 일본국적을 취득했다... 그리고 그의 집안 대부분은 일본에 귀화 했다..그후, 메이지천황의 종묘가 있는 그 산 이름으로 성 마저 개명을 했다.)
(고종 야스쿠니신사 참배후 기념 활영후 다과를 베풀며 연회를 열고...)
의성대군2
작성자 23.01.29 18:22
첫댓글 청자는 고려족(예맥족)의 얼이 담겨 있고, 한민족(韓=漢族)의 얼은 중국 당나라에 있습니다.
서라벌(의성대군1)
23.01.29 18:57
첨부한 주소에는 고려족(예맥족)이었기에
조선(대한제국=한국)시대 내내 노비로 살아야만 했고
오늘날 경국대전을 불문헌법으로 사용하는 한국(후조선)에서도
천손 단군의 후손들은 불평등, 불공정에 시달리며 살고 있으나
내 동족이 왜 이런 수모를 당하는지 자각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 짱깨 한족(한민족)은
절라도..홍어...갱상도..과메기..등등 자극적인 언사를 사용하여
위대한 대고려국의 후손들이 서로 반목하고 피 터지게 싸우도록 하고 있으며
이것으로 부터 정권을 유지하는 수단을 삼고 있습니다.
여, 야 좌, 우 지도부는 모두 같은 족속으로서
중국인 짱꼴라 조선의 후손입니다.
현재 대고려족(예맥족)은 전 인수의 65%, 중공족(한민족)은 30%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고려족 인사들이
이들 중국 짱꺠 한민족에게 부역하고 있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하루빨리 자신의 주체성, 정체성을 찾아 떨쳐 일어 나서
위대한 대고려국 그 새시대 새하늘 새땅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가자~!
위대한 대고려국의 재림을 위하여......
The Great Korea Again~!
國 聖(高麗皇室復興會)
코액션The Korean Actions(大高麗國復興會)
참고 : https://cafe.daum.net/grandeurlove/LhIX/251
제공 : 코액션The Korean Actions(大高麗國復興會) http://www.koaction.orghttp://www.koacti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