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바마의 흰두교도(1)
라훌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 곳에서의 우리 가족의 생활이 그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게 될 것이라고는 결코 예상하지 못하였다. 내가 1년 동안 머물게 된 UNA(University of North Alabama)는 알라바마주의 소읍 플로렌스라는 곳에 위치해있는데, 8월말의 어느 날, 플로렌스의 한 호텔에서 나는 그를 처음으로 보았다. 그는 UNA의 학생으로, 이번에 같은 대학 어학과정에 입학한 나의 큰 딸을 어찌하다 알게 되어, 나에게 인사를 하러 왔던 것이다. 네팔인이라고 하였으며, 이 곳에 온 지는 1년 반 되었고, 올 해 서른 살이라고 하였다. 키가 작고 구레나룻을 길렀으며 눈빛이 그윽하고, 그리고 그저 그랬다. 집을 구하고 자동차를 구하는 데에 도움을 주겠다고 해서, 나는 사양하는 척하다가, 그러려면 그러라고 하였다.
그 다음 날 라훌은 자기 차에 우리 가족을 태우고 중고차 판매상 미스터 로버트에게 갔다. 아무리 중고차라고 하여도, 한번 보고 그 자리에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라훌은 그 뒤로 이틀에 걸쳐 두 번 더 나를 그 곳에 대리고 가야만 하였다. “라훌, 저 사람 믿을 만한가?” “로버트 이즈 마이 프랜드. 히 이즈 어 굳 맨. 제가 제 친구들 차도 전부 저 이에게서 사게 해 주었는데, 아무 말썽이 없었어요.” 나는 심사숙고한 끝에 상아색 캐딜락 -- 2001년 형, 8만 5천 마일, 5천 4백 달러 -- 으로 결정하였다. 라훌은 매매 계약을 체결하는 것도 도와주었으며 미캐닉 미스타 숀을 불러 자동차를 점검해 보게까지 하였다. “숀 이즈 마이 프랜드. 히 이즈 어 굳 맨.”
우리 가족은 하룻 밤에 10만원이 넘는 호텔방을 두 개씩이나 쓰고 있는 중이라 집을 구하는 것도 대단히 시급하였지만, 집을 결정하는 것은 자동차를 결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라훌은 거의 매일 나와 내 와이프를 대리고 집을 보러 다녔다. 9월 중순 경이 되어서야 우리는 집을 계약할 수 있었다. 큰 아이가 걸어서 학교에 갈 수 있을 만한 거리에 있는 단독 주택 -- 월세 400달러 (보증금 400달러 별도) -- 이다. 이 때쯤에는 나는 이미 와이프의 빈축을 사고 있었다. 자동차를 장만했으니 발이 생긴 셈인데도 나는 그것을 끌고 나가 집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고, 호텔방에 드러누워 뜻도 모르는 ‘미드’를 보거나 규칙도 모르는 미식 축구 중계를 보면서 라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에게는 핑계가 있었다. (내가 이번에 얻은) 안식년이라는 것은 일을 안 하고 지내게 되어 있는 기간이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지만) 안식이라는 것은 일, 즉 바깥을 돌보는 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며, 다시 말해서 안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고 보면, 흰두교는 중년을 넘어가는 모든 사람에게 안식을 명령하는 셈이다. 흰두교 교리에 의하면, 중년을 넘어 선 사람은 사회와 가족에 대한 의무로부터 해방되어 자기 안의 신(神)을 찾기 위해 수행자의 삶을 살게 되어있다. 그래서 나는 자동차가 아니라 텔레비전 리모콘을 운전하면서 라훌을 기다렸다. “여보, 오늘은 라훌이 늦는 모양이요.”
사실, 라훌이 늦는 날이 많았다. 잠을 자다가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이다. 그는 ‘퀄리티 인’이라는 호텔에서 상당히 실하게 아르바이트를 한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일 주일 내내 밤 10시부터 아침 8시까지 근무를 한다. (한 달 급료가 300만원이나 된다고 한다.) 아침에 퇴근을 한 후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오후에 잠을 자곤 하였는데, 잠을 자는 그 시간을 쪼개어 나에게 와주었던 것이다. “괜찮아요. 그 정도만 자도 충분해요. 저는 5 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어요.”
그가 근무하는 ‘퀄리티 인’은 나도 잘 안다. 집 구하는 일이 쉽게 결판나지 않자, 라훌은 우리 가족의 숙소를 자기 호텔로 옮겨버렸다. 그리고 인도인 호텔 주인에게 잘 말하여, 우리를 직원 가족이 내는 비용(50% 할인)으로 묵을 수 있게 해주었다. 돈 걱정에서 벗어난 우리는 느긋한 마음이 되어, 호텔의 야외수영장을 마음껏 이용하면서 열흘 이상을 그곳에서 보냈다.
집을 구하여 그 호텔을 떠난 뒤에도 라훌의 도움은 계속되었다. 라훌은 플로렌스시 시청에 나를 대려가 ‘유틸리티’(전기, 수도, 가스 등)를 신청하게 해 주었고, ‘컴캐스트’라는 회사에 대려가 전화, 유선 방송, 인터넷 등을 신청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시내의 한 은행에 나를 대려가 히스패닉계 은행원을 소개해 주고 계좌를 개설하게 해 주었다. “멜리사 이즈 마이 프랜드. 쉬 이즈 어 굳 우먼.”
그러나 아직도 그 청년이 우리에게 베풀어 준 도움을 다 말하지 못한 느낌이다. 그는 내 집의 집사였으며 내 운전사였고 수행 비서였다. 그리고 그는 내 통역이었다. 나는 중고차 판매상 로버트나 미캐닉 숀, 은행원 멜리사, 혹은 부동산 업자들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였는데, 내가 막힐 때마다 라훌이 나서서 그들의 말을 짧고 쉬운 영어로 옮겨 주곤하였다. 그래서 나는 라훌에게 몇 번이나 한국말로 말을 하곤 하였다. “라훌, AS는 일체 없다는 뜻인가?” “라훌, 1년 계약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거지?” 정말이다. 이렇게 한국말로 말해 놓고 쳐다보면, 그 얼굴, 즉 무성한 구레나룻 속에 그윽한 눈빛을 하고 있는 그 얼굴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라훌, 너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나를 도와주는 것인가?” 내가 이렇게 묻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의 대답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자기는 나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네팔이나 인도 등에서 온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도와주고 있다고 말하였던 것이 기억난다. 흰도교는 절대적인 신(브라흐만)의 존재를 믿는다. 그리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아트만)가 바로 그 신이라는 점을 믿는다. 아나트만(무아, 無我)은,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진정한 나가 아니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러니 흰두교도 청년 눈에는, 동북 아시아 어느 나라에서 식솔들을 달고 날아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 매고 있는 중늙은이 한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라훌은 이렇게 사람들을 잘 도와준다. 그러나, 어쩌면 ‘사람들을 잘 도와준다’는 말보다 ‘사람들을 많이 안다’거나 ‘사람들을 잘 사귄다’, ‘사람들을 잘 믿는다’는 말이 라훌에게 더 적합한지 모른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기 일쑤며 식당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기 일쑤다. 동양인, 서양인 가리지 않으며, 백인, 흑인 가리지 않는다. 당연히 많은 파티에 초대를 받는다. 그의 입에 베어있는 말은 “히 이즈 마이 프랜드. 히 이즈 어 굳 맨.”이다. 누구를 소개하건, 그는 그렇게 말한다. (굳 맨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짓곤 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청년은 아주 열심히, 그리고 아주 많이 살고 있다는 점이다. 잠을 줄여가면서 사람들을 도와주고 잠이 부족해 자주 하품을 하면서 사람들을 사귄다. 유학 생활에 수반되게 마련인 위기감 같은 것은 이 청년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우며 위기감이 초래하기 마련인 박덕함 같은 것은 이 청년에게서 찾아보기 어렵다.
삼례에도 그런 청년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중국인 유학생들 가운데에도 그런 청년들이 있을지 모르며, 내가 알지 못하였을 뿐, 우리 학생들 가운데에도 그런 청년들이 적지 않게 있을 것이다. 사실 UNA는 학생 수나 캠퍼스의 면적 등 그 규모에서 우석대학교와 비슷하다. 그리고 플로렌스는 그러한 여러 면에서 삼례와 비슷하다. 물론 차이점도 많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자동차를 천천히 운전하며, 매사를 천천히 처리하고 --내 연구실에 인터넷을 연결해 주는 데에 딱 1달이 걸렸다 -- 더 많이 웃고, (아무 데서나 서서) 더 많이 잡담을 나누고, 햇볕을 더 많이 즐기고, 그리고 라훌 같은 청년을 더 많이 만들어낸다. 이 차이는 역사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 대학은 1830년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계속)
첫댓글 이 글은 내가 우석대 신문에 기고한 것이다. 신문은 이미 발간되었고, 나는 그 신문을 오늘 받아보았다. (세 부를 받았는데, 세 부 모두 라훌에게 주기로 약속이 되어있다.) 심심한 사람이 있으면 한번 읽어 보라고 올린다. 세 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