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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0:1-41:57 하나님의 섭리 2000. 9. 17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자 애를 썼는데 감옥에 갇혀 버렸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서 변호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노예에게 무슨 변명의 기회나 주어졌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기회가 왔습니다. 요셉이 갇혀 있는 감옥에 바로왕의 고위 관리가 잡혀 들어 온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입니다. 이들이 무슨 고위직이냐 하시겠지만 술과 떡이란 왕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가장 신뢰할만한 사람을 임명하는 자리이지요?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왕의 술 맡은 관원이었는데 왕에게 청구하여 예루살렘성을 중건하는 허락을 받습니다. 이 정도로 술 맡은 관원이란 높은 지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감옥에 들어온 것은 요나단의 탈굼에 의하면 왕을 독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쳐서 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요셉이 수종을 듭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에 보니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것입니다. 꿈을 꾸었는데 그 뜻을 알 수가 없어서 근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요셉이 그들에게 무어라고 합니까? 8절입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으니 청컨데 나에게 고하소서라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지 않고 하나님께서 해석을 하실 거라고 하면서 그 꿈의 해석을 해줍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은 포도나무의 세 가지에서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에게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해석이 3일안에 당신의 직위가 복직되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떡 맡은 관원장도 그 결론이 좋음을 보고서 자기도 흰떡 세 광주리가 있는데 그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각종 구운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그것을 먹었다는 꿈입니다. 그러자 요셉이 3일안에 당신의 목이 잘리고 그 시체가 나무에 달리고 새들이 당신의 살을 뜯어 먹으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꿈의 해석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을 하고서 그대로 되리라고 한 것은 요셉의 능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요셉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요셉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안 짓고 살았고 정말 믿음으로 살았기에 잘 견뎠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얼마나 감옥에서 억울하게 생각하였을까 하는 면을 등한히 여길 때가 많습니다. 요셉은 우리와 달라, 사무엘은 우리와 달라, 다윗은 우리와 달라, 아브라함은 우리와 달라 그런 생각을 먼저 하고서 성경을 보게 되니 요셉을 사람들이 참 좋아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고결하게 살수가 있을까 하면서 요셉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시면 요셉이 자신이 당한 일이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누구에게 하는 것입니까?
40:14-15절입니다. “봉독”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알려서 여기에서 나를 건져 달라고 합니다. 자신은 히브리에서 끌려온 자인데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에게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구하여 달라고 합니다. 요셉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을까요? 하나님이 응답을 안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셉인들 기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꿈은 해몽을 해 주면서도 자신의 꿈은 어떻게 될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시편 105편에서 본 것처럼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저를 단련하였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연단의 기간인 것입니다. 그 때가 차기까지는 감옥에 갇히고 착고에 상하고 쇠사슬에 묶이는 것입니다. 노예에서 감옥까지 무려 13년입니다.
이러한 기간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다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부르시고 약속을 주셨지만 75세에 부름을 받아 이삭을 얻기까지 25년이 걸렸고, 이삭은 네 후손이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고서도 결혼 20년 만에 자녀를 얻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양치기로 보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훈련이라는 학교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펼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러한 연단의 기간동안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하는가를 보게 됩니다. 인간의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여 봅니다. 그러나 결국은 지쳐서 모든 것을 포기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때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연단의 과정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과정입니다만 그런 기간을 꼭 거치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이루어 내시는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의 꿈 해석대로 되었고 복직을 하였는데도 23절에 보니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오래된 사건도 아닌데 꿈을 꾸고 3일 만에 복직이 되었는데 3일 만에 잊어버린 것입니다. 요셉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을 하고나서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연락만 오면 풀려 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기다렸지만 술 맡은 관원장이 잊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 2년동안 무엇을 하였을까요? 대책 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잊어 버렸지만 요셉에게 꿈으로 계시하신 그 하나님은 요셉을 잊지 않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요셉을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물론 요셉은 감옥에서 고통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다시 2년이 지납니다.
41:1절입니다. 만 2년 후에 바로가 꿈을 꿉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고서 만 2년이나 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섭리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서 복직 후에 요셉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면 그래 그 자를 풀어 주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풀려 나왔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 때는 바로가 아직 꿈을 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성경밖의 기록들이지만 이집트의 관리로 나아가는 나이가 30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요셉이 총리가 될 때에 애굽의 왕조가 셈 계통의 왕이었다고 합니다. 이집트의 왕조는 주로 함 계통이었는데 요셉 때에 셈 계통의 왕이 등극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란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의 꿈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살찌고 좋은 일곱 암소를 파리하고 흉악한 일곱 암소가 잡아먹어 버리는 것과 충실한 일곱 이삭을 세약하고 마른 일곱 이삭이 삼켜 버린 것입니다. 이 꿈을 바로가 꾸고서 그 해석을 애굽의 술객과 박사들에게 고하였으나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기억을 합니다. 3일 만에 잊어먹은 것을 2년이 지나서 기억을 하고서 요셉을 추천하는 것입니다.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급하게 요셉을 준비시켜 왕 앞에 데리고 갑니다. 목욕하고 옷을 입히고 수염을 깎습니다. 유대인들은 수염을 깍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요셉을 형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은 수염을 깎고 있었기에 더 알아보지 못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수염이 깎이는 것은 수치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왕 앞에 나왔습니다.
41:15-16절입니다. “봉독” 바로왕의 질문과 요셉의 대답을 볼 수 있습니다. 너 꿈 해석 잘한다면서 그러자 요셉의 대답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요셉됨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게 됩니다. 17살 때 하나님이 계시를 꿈으로 받고서는 그 꿈을 마구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있는 지금은 꿈의 해석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아마 자기의 꿈이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에 겸손하여 졌는가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감옥에서 연단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앞에서 꿈의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고서 해석을 합니다. 해석뿐만 아니라 처방까지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을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돌립니다.
41:25,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임이라. 41:32, 두 번 겹쳐 꿈을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속히 이루시기로 정하셨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자 바로가 요셉을 총리로 임명을 합니다. 그 임명의 이유는 하나님의 신이 요셉을 감동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애굽의 온 땅을 치리하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총리가 되고 애굽의 제사장의 딸과 결혼을 하고서 아들을 낳습니다. 그리고서 그 이름을 무어라고 합니까? 51절입니다. 자신의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아직도 무슨 뜻인지 정확히 파악을 못하고 있다고 보아집니다. 그 총리가 되고서 아들을 낳고 이름을 므낫세 라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로 나의 고난과 아비의 온 집안의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이름을 짓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난과 아비의 집에서 자신이 팔린 것을 잊어버리게 하신 것으로 애굽의 총리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풍년과 흉년이 일어나게 하시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예정된 프로그램입니다. 요셉 개인의 고난과 형통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서 이렇게 하심으로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애굽만이 아니라 온 땅에 기근이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7년 풍년동안 저축을 하지 않은 나라들은 당장 양식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약속을 하나님이 이루어 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란 요셉의 노예로의 팔림과 감옥행 총리가 됨. 이런 모든 것을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크고 멀리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되면 우리 앞에 닥친 자잘한 것들에 대하여 어떤 자세가 됩니까. 금요일 저녁에 성경 공부 한 것처럼 종말론적인 자세와 영원의 시각으로 사건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낮추시면 낮추어지라는 것입니다. 정당하고 옳다고 고함을 지르지 마시고 감옥에 있으라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술 맡은 관원장에게 호소하여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대가 주의 손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시적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세미하게 역사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하고서는 늘 자신의 주변의 상황에만 빠져서 허덕이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일이 이렇게 풀리지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요셉을 단련하듯이 우리를 단련시키는 것입니다. 요셉 자신의 꿈이 자신의 개인의 성공이나 출세의 차원이 아니라 형제를 살리는 희생자로서의 부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지 형제들의 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의 주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자들입니까? 우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다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않고서는 누구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계시는 이미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도 꿈 이야기를 자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요즈음 우리가 꾸는 꿈이 계시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꿈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이 평소에 늘 생각하는 것들이 꿈에 꾸어 지는 것이고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로 스트레스 받는데 꿈에서 대리 만족을 하기도 함으로 정신 건강을 지킨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요즈음의 꿈을 지나치게 의존하여 해석하려 하지 마시고 우리는 이미 주어진 계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꿈이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꿈에 매달려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꿈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우리의 꿈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섭리를 보면서 살게 됩니다. 주의 말씀을 보고 묵상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의 섭리에 인도함을 받아 사는 것이 복있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지금 고난 중에 계십니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인도하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노예 같고 감옥 같을 지라도 하나님이 계시를 주셔서 자신의 자녀를 삼은 자를 결코 잊지 않고 계십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의 억울함을 잊어버린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기대하고 바라던 사람이 전혀 반응이 없을 때 그것으로 인하여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저것 다 놓게 하셔서 지푸라기라도 잡을 것이 없게 하시고서 주님을 붙들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섭리의 손길을 믿고서 마음 푹 놓고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때는 우리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전도서 3:1-11절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시종을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섭리와 인도를 받으며 사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창세기 42:1-17 죄를 깨닫게 함 2000. 9. 27
요셉의 생애를 간단히 보자면 계시를 받고, 그 계시를 인한 고난, 그리고 그 계시의 성취. 이런 차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주가 되는 꿈을 이루시는 방법이 고난 없이 주어지면 될 텐데 고난을 통하여 주어진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이러한 요셉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볼 때에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대속적 고난인 것입니다. 형제들의 죄악을 담당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을 통과한 후에 주가 되는데 이때 형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이 이미 주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온 세상이 누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가를 보면 요셉이 노예로 있을 때도 그 집안에 주의 역할을 하고 감옥에서도 주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제 눈에 드러나게 주가 되어 있을 때, 요셉의 형들 열명이 양식을 구하려 왔는데 엎드려 절하며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요셉이 당장 알아봅니다. 그러면 당자 알아보고서 형님들 바로 제가 요셉입니다 하든지 아니면 당신들이 나를 팔았지 맛 좀 보아라 하는 식으로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지금 형들을 알아보고서도 모른 체 하면서 이들을 여러 가지로 시험을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드러내는 그 이유를 오늘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함을 계속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고 예수님을 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세례문답서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33문, 우리가 어떻게 구속에 참여하게 됩니까? 성령님의 내적 부르심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34문, 성령님은 먼저 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게 합니다. 35문, 누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까? 성령께서 하십니다. 36문, 성령께서 우리를 중생시키는 방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37문, 진정한 회개는 무엇입니까? 성령님의 역사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얼마나 잘 정리되어 있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기초적인 내용이 우리 안에 얼마나 적용이 되고 있는 가를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말씀으로 세례 문답공부를 하였다면 무언가 지금의 상황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주에 어느 집사님이 신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칩니까? 하고 묻길래 신학교에서는 그런대로 바르게 가르칩니다. 그러니 배운 대로만 하여도 반칙을 하지 않을 텐데 최소한 이러한 세례 문답을 할 때의 정도라도 제대로 지킨다면 오늘 날 전도라든가 선교라든가 하는 것이 이렇게 혼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제대로 예수님을 믿게 되면 무엇이 나타난다고 하였습니까? 자신의 죄와 비참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를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만나면서 어떻게 자신들의 죄를 알아 가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아 가는 것도 얼마나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아는가가 먼저입니다. 요셉은 이미 형들을 알아보지만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와 비참함을 철저하게 알도록 일부러 알리지 않고 감옥에 가두기도 하고 볼로로 잡아 두기도 하는 것입니다.
42:6-9절입니다. “봉독” 요셉이 알아보고서 자기의 꿈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 꿈이 무엇인지를 이제 알게 된 것입니다.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은 자신의 출세를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그 고난을 통하여 형제들을 살리기 위한 주가 됨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당장 그 형제들을 보시오 내가 그 요셉이요 나의 꿈대로 되지 않았소 하여도 될 텐데 그렇지 아니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계시에 함께 참여시키기 위하여 자신들을 죄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요셉이 모른 체 하고 정탐꾼이라 하고서 그들을 엄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니라고 자기들의 가족을 이야기 하여도 막무가내로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17절입니다. 3일간 감옥에서 이들이 무엇을 하였을까요? 그 내용이 42:2-3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 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더니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야 그때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르우벤이 보아라 내가 죽이지 말자고 하여도 그렇게 안하더니 우리가 그 피의 값을 내게 되었도다 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들을 죽이고 살리는 것이 요셉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다 죽여도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시므온만 인질로 잡아 두고 다른 형제들을 보내어 동생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는 중간에 짐승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다가 돈이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42:28절입니다. “봉독” 돈이 생겨서 좋은 것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이것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난 이후의 모습입니다. 전에는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동생을 은 20에 팔아서 나누어 가졌든지, 형제들의 유흥비로 사용하였든지 그들은 자기 동생의 생명의 값을 받아 챙긴 자들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을 횡재로 받아 들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돈을 지불하였는데 영수증도 받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갑자기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42:35-36절입니다. “봉독” 역시 두려움입니다. 야곱조차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가지고온 양식은 다 떨어지고 아직 흉년이 끝나려면 5년이나 더 남았습니다. 다 굶어 죽든지 베냐민을 데리고 가든지 해야 하는 지경입니다. 어쩔 수 없이 베냐민을 딸려 보냅니다. 야곱의 포기입니다. 잃으면 잃으리라. 그리하여 다시 요셉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잔치를 준비하고 이들을 받아들이는데 이들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43:18절입니다. “봉독”
우리를 억류하고 잡아서 노예로 삼으려는가 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요셉은 한번 더 시험을 합니다. 베냐민의 곡식자루에 요셉의 은잔을 넣고서 그들을 추적하여 다시 잡아들입니다. 그러자 그 형제들이 어떻게 나옵니까? 서로 핑계하거나 베냐민만 잡혀 있으라고 하지 않고 모두가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들이 어떤 처분을 받아도 할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엄격하게 따지자면 요셉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요셉의 형들이 어떤 자세가 됩니까?
44:16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종들의 죄를 적발하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를 적발하셨으니 우리가 무어라 변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종이 되어도 할말이 없습니다. 이 자세가 나오기까지 요셉이 모른 체 하고 몰아세운 것입니다. 그러자 요셉이 베냐민만 종이 되고 나머지는 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다가 자신이 대신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자기 늙은 아버지와 약속을 하였기에 그렇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여기에 이르자 요셉이 통곡을 하면서 자기를 알립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만나면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끊임없는 두려움과 자기들의 죄와 비참한 신세를 보게 된 것입니다. 이러고 나서 요셉이 자신을 드러내자 이들이 요셉에 대한 자세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우리는 너를 죽였는데 너는 우리를 살려 내는구나. 이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제일 먼저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 자신의 죄와 비참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론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조명을 하여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이 없이 우리가 그저 예수를 내가 믿어 주었기에 예수는 나에게 구원도 주고 세상의 복도 주어야 된다고 생각하면 성경도 하나님도 모르고 오해한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왜 예수님이 죽으셨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은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제대로 알게 될 때 주님께 부탁하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주여 죽어도 마땅한 죄인입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도식을 출애굽을 통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고서 바로 가나안에 간 것이 아니라 광야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아 가는데도 어디로 갑니까?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불평과 원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 놓고서는 너희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너희의 마음이 완악한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가나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 무엇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까? 자기들의 능력과 실력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불신앙이 광야에서 다 노출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아는 것입니다. 아무도 들어 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광야에서 죽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한데도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은 이것이 너희의 실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8:2절입니다. “봉독” 이들을 시험하여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 40년은 이들이 얼마나 죄악이 가득한지를 드러내는 기간인 것입니다. 그리고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신명기 8:11-17절을 봅니다. “봉독” 너희 실력과 너희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 자신이 팔림과 고난에 그 형제들을 참여시킴으로 자신들의 죄와 비참함을 알게 하시고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형제들이 요셉에 대하여 어떤 마음자세일까요? 늘 자기들의 죄에 대하여 죄스럽고 한편으로는 그 용서에 대하여 감사하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도들의 설교를 봅시다. 무엇을 전하였습니까?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설교의 핵심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을 너희가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납니다. 스데반의 경우는 이를 갈면서 돌로 쳐 죽이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전하는 자를 돌로 쳐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우리가 어찌할꼬 합니다. 자신들의 죄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럴 때 사도들이 무어라고 합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를 봅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의로운 자였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서는 자신이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아나니아 선지자가 기도함으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주님입니까? 자신이 흠이 없노라고 큰 소리 치던 사람인데 주님을 만나고 보니 바로 자신이 주님을 죽이고 핍박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임하심으로 알게 되는 자신의 죄와 비참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나쁜 짓만 죄로 생각하면 윤리 도덕적인 죄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이 주님을 만나는 장면을 보면 무엇이 죄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의 고백은 늘 이러합니다. 나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외에는 다른 할말이 없습니다. 이 자랑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제대로 알아가는 것이 바르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요셉을 만난 형들이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서 회개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되면 될 수록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임 당하신 주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죽였는데 오히려 그는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살려만 주시고 이제는 너 알아서 살아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어라고 합니까?
창세기 45:3-11절입니다. 요셉이 자신을 밝힙니다. 형들이 놀라서 능히 대답을 못합니다. 우리가 주님앞에 이러한 자세가 당연한 자세입니다. 놀라서 능히 대답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그를 찌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나를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살리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내려오소서. 내가 봉양하겠나이다.
오늘 우리 앞에 서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너희가 나를 죽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희를 살려내노라 그리고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노라 라는 이 말씀 앞에서 정말 무어라 말하여야 하겠습니까?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제대로 아는 자가 그 은혜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능히 대답지 못하는 그 놀라운 주님의 용서를 알기 위하여 우리의 죄의 깊이도 함께 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은혜란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서야 그 용서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들이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창세기 44:14-34 유다의 희생 2000. 10. 1
요셉이 형들임을 알아보고서도 모른 체 하면서 형들을 테스트합니다. 무엇을 하기 위함입니까? 그들의 죄를 인정하게 되도록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말한바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서도 베냐민을 보내지 못하겠다는 야곱의 고집으로 인하여 곡식이 다 떨어진 것입니다. 만약에 베냐민을 데리고 갔더라면 두 번이나 갔다올 그런 기간입니다. 이제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베냐민을 살리기 위하여 다 굶어 죽느냐 아니면 베냐민을 포기하더라도 다른 가족을 살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가장 사랑하던 아내 라헬의 첫째 아들이 죽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제 하나뿐인 베냐민을 잃는다면 자신이 죽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하게 기근이 닥치고 있으니 드디어 야곱이 포기를 합니다. 잃으면 잃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에는 또 다른 요인이 있는데 그것은 유다의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43:8-9절입니다. “봉독” 제가 저 아이의 몸을 담보하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데리고 오지 못하면 자신이 영원히 죄를 지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르우벤은 무어라고 하였습니까? 창세기 38:36-37절입니다. “봉독”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못하면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물론 희생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몸으로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근은 계속되고 양식은 떨어지고 이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야곱이 베냐민을 자기의 힘으로는 지킬 수 없음을 알고 포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두 가지를 합니다. 하나는 총리에게 선물을 가져가게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43:11절입니다. 유다가 대신 담보한다는 말을 듣고서 선물을 보내는데 지금 시므온이 잡혀 있고 또다시 돈도 들어 있으니 용서를 구하는 차원에서 선물을 보냅니다.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유향 조금, 꿀 조금, 향품과 몰약과 비자와 파단행을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애굽의 총리에게 얼마나 하찮은 것이겠습니까? 물론 준비한 자는 기근속에서 가장 귀하고 값비싼 선물을 준비하였다고 하여도 그것이 요셉의 마음을 풀 수가 있겠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요셉이 지금 원하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 무엇입니까? 회개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형제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곡식값을 두 배로 가지고 가고 귀한 선물을 들고 가는 것은 준비하는 자들로는 최선의 것이라고 하여도 요셉이 볼 때는 그런 것은 너무나 하찮고 시시한 것들입니다. 무엇을 원하는 것입니까? 그들의 죄를 알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세도 이런 면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사야 1:10-17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들고 간 선물이나 돈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선물을 차려놓았는데 그 선물에 요셉이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두 번째로 한 것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43:14절입니다. “봉독”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 베풀기를 원하노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란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서 주님의 은혜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에만 기대를 걸고 자신의 막내 아들 베냐민도 잃으면 잃으리라고 합니다. 43:29절입니다. “봉독” 요셉이 베냐민을 보고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풀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가 베풀어지기 전에 또다시 시험을 하는 것입니다.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어서 모두를 끌고 오게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다시 붙들려 왔을 때 이들은 이제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총리의 호의를 그렇게 받고서도 배신을 하였으니 더욱 죽어 마땅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노 앞에 무엇으로 해결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요셉의 분노 앞에서 형제들이 모두가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대단한 변화입니다. 자신들이 함께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요셉이 아니라고 합니다. 죄를 지은 자만 종으로 잡히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가라고 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장례식장에 가서도 먹을 것 다 먹지 않습니까? 전에 코메디언 김용순인가 죽었을 때 김미화라는 사람이 조사를 하는데 포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 언니 언니는 죽었는데 그래도 우리는 살아 있다고 먹을 것이 목으로 넘어가데 라는 말이 인상 깊게 들렸습니다. 죽은 자는 죽은 것이고 산자는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집안에 가족들과 늙은 아버지도 있는데 그러나 이때에 유다가 나서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이 아버지 앞에서 약속을 한 것이지요. 자신의 목숨으로 담보를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요셉에게 유다가 청원을 합니다. 그 내용이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저를 살리시고 나를 대신 종으로 삼아 주십시오.
44:33절입니다. “청컨데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보내소서” 이 간청과 대신 종이 되겠다는 탄원 앞에 요셉이 울음을 참지 못하고 자신을 밝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다의 희생을 보게 됩니다. 물론 다른 형제들도 모두다 종이 되겠다고 한 것입니다. 베냐민 혼자 두고서 자기들만 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유다의 탄원과 그 내용을 보면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신 당하는 희생의 정신을 보는 것입니다. 단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수준이 아닌 대신 고난의 의미를 알 때까지가 회개의 깊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과 죄를 반성하고 뉘우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 견딜 수가 있습니까? 남의 잘못을 대신 짊어지고 견딜 수가 있습니까? 이러한 모습이 유다에게서 나오는 것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당한 그 고난의 여정을 유다가 반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난당하는 자에게 형제들이 절하는 것이 요셉에게 성취되었듯이 이제는 대신 고난당하려는 유다에게 형제들이 엎드려 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49:8-12절입니다. “봉독” 유다가 형제들의 찬송이 되며 네 아비의 아들들이 절하리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요셉에게 야곱의 아들들이 절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장자의 직분을 르우벤 대신에 하였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유다가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의 대신 희생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하여 유다지파에서 대신 희생하는 메시야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누가 희생당하는 자의 모습으로 나오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누가 미움을 받는 자로 등장하는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너무나 심한 미움을 받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미움을 받는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치고 고난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다지파로 나오는 다윗의 예를 들어 봅시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고서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하여 내자 누구에게서 미움을 받습니까? 그 당시의 최고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울에게 미움을 받아서 늘 쫓겨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탄원들을 보면 자신의 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쫓겨 다니는 것입니다.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유다 지파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은 죄인을 위한 대신 받은 고난이었습니다. 그분이 대신 받으신 고난으로 인하여 우리가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대신 고난을 받으시는 모습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치 요셉이 형제들의 미움을 받는 것처럼 미워하고 싫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미워하고 싫어하고 멸시 천대하여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죽으심이 어떤 죽음이라고 합니까?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대신하여 죽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5:14-21절을 봅니다. “봉독”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은 대신하여 죽으심입니다. 누구를 대신한 것입니까? 바로 예수 믿는 자를 위한 대신 죽으심입니다. 그러면 대신 죽으신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도 함께 죽은 것이 됩니다. 이전까지의 삶이 나를 위한 삶이었다면 대신 죽으신 분으로 인하여 죽은 자가 되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대신 죽을 자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토요일 극동방송에서 간증을 조금 들었습니다. 평소에 간증에 대하여 별로 좋게 여기고 있지 않는데 이분의 간증은 좀 달랐습니다. 중간에 들어서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아마 조선족으로 중국에서 공산당 서기의 아내로 예수를 믿었는가 봅니다. 이 여인도 예수 믿는 것은 귀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여 학교 다닐 때 배척 하다가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분의 간증의 내용이 자신이 8년을 남편에게서 죽도록 맞아 가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이 분이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과 부활과 재림의 단순한 사실을 믿고 있는데 얼마나 확신에 차 있는지 그 고난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깊게 알게 되었는지 절절히 베여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믿는 것은 고난을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아주 확신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으니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서 부자가 되고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기를 바라는 그런 예수믿음이 이상하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를 살리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신 죽으심이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신 것입니다. 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한 자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 우리의 옛사람의 죽음입니다.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죽으신 분을 위하여 사는 것이고 그분에 의하여 살리워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신 죽으신 분 안에 거하는 삶이란 이제 우리도 유다처럼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는 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하지 못한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과 우리의 덜 죽은 모습을 안타까워하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은 이제 우리가 자아에 대하여 죽고 예수님을 위하여 살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본분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되어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 마땅한 우리를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나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얼마나 잘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의 옛사람이 죽었음을 말씀으로 확인을 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사는 이유는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임을 날마다 묵상하시고 분초마다 기억하시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45:1-28 자신을 알리는 요셉 2000. 10. 8
드디어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립니다. 그러면 그동안 왜 자신을 숨긴 것입니까? 전에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요셉 자신이 바르게 의롭게 살았는데도 고난의 길을 걷게 된 그 이유를 이제는 형제들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고난을 통하여 자신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버린 잘못을 알게 되고 또한 대속의 의미까지 알게 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동생 베냐민이 범인으로 지목되었을 때 모든 형제들이 모두 종이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냐민만 종으로 잡혀있어야 한다는 요셉의 말에 유다가 자신의 몸을 담보로 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고서 요셉이 자신을 밝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자신을 밝히는 모습에서 특이한 것은 자기 자랑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차원임을 알기에 자신은 그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지 자신의 착함이나 유혹을 이김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차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 것이 요셉이 겸손하여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고난을 통하여 그리고 애굽의 총리가 되는 과정을 통하여 자신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이 성취되도록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 앞에서 무엇을 자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한 요셉의 결론적인 말이 오늘 본문입니다.
요셉이 자신을 알리니 형들이 놀라서 말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팔아 버린 자가 총리가 되어 있으니 어떻게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형제들의 두려움을 상상이 되십니까? 그래서 요셉이 자신을 무어라고 합니까? 4절에서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고 합니다. 당신들이 팔아버린 그 요셉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 이제 형들은 처분만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왕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형제들과 아들들을 죽이는 세상에서 자신을 죽이려한 형들쯤이야 죽여 버린다고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이 무어라고 합니까? 형들이 얼마나 놀라고 두려워하였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하는 말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서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냈습니다. 8절입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로 삼으셨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요셉의 이러한 말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을 판 형들을 원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내셨으니까 형들이여 두려워 마소서 근심하지 마소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형들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심에 함께 참여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중요한 두 가지가 후손과 땅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요셉을 먼저 보내신 것이며 땅은 아직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4대가 되지 않았기에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 들어와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성경이란 요셉 참 훌륭하다 그렇게 착하게 살더니, 고생 끝에 낙이라더니, 사람이 자고로 착하게 살아야 복을 받는다, 이렇게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요셉이 자신을 말하면서 자신이 바로의 나라에서 총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의 아비와 주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건방져 보입니까? 자신이 노예로 팔려와서 꿈 해석하고서 총리가 되었는데 그런데 자신을 바로의 아비로 바로의 주로 말하고 있는 이러한 배짱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요셉이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보고서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7:29절을 봅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가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이삭이 야곱을 향한 축복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축복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기 마음대로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대신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이삭이 에서가 와서 간청을 하여도 에서에게는 축복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학교의 프로그램에 보니 아버지는 자녀에게 축복권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아버지 치고 자녀에게 축복하지 않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언약의 차원에서 에서가 그렇게 매달려도 이삭이 축복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이 야곱에게 주어지는데 야곱의 그 언약이 요셉을 통하여 완성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란 야곱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시는 차원에서 사용되어지는 계시를 드러내는 도구인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성도의 자세가 아닙니까? 바울이 그토록 죽도록 충성하고서 주님 앞에 가서 무어라고 할까요? 아 주님 제가 세상에서 주를 위하여 얼마나 고생하였는지 아십니까?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 보고 야 너희들 다 나보다 서열이 아래야 어디서 함부로 나와 맞먹으려고 그래 그런 식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됨이 주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요셉이 자신을 알리면서 자신의 고생담이나 자신의 인내나 자신의 꿈을 해석한 능력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일을 하셨고 자신을 부르시고 이 일을 이루어 내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주어진 그 언약의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지금 애굽에 양식 구하러 온 나라들이 한두 나라입니까? 그리고 형제들의 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형제가 에서뿐인데 어떻게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또 노아언약으로 올라가 보아야 합니다.창세기 9:20-27절입니다. “봉독” 함의 후손이 셈의 후손의 종의 종이 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함의 후손 중에서 가나안의 아들들이 주로 가나안땅에 살게 됩니다. 그러나 함의 후손들이 애굽에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의 대부분의 왕조가 함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함의 후손이 살고 있는 땅에 셈의 후손이 와서 무엇이 됩니까? 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종입니까? 바로가 종이고 셈의 후손이 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요셉이 자신이 바로 집안의 주요, 아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야곱이 바로에게 와서 야곱이 바로를 축복합니다.
창세기 47:7-12절입니다. “봉독” 야곱이 바로를 축복한다고 합니다. 겉으로 보면 누가 누구를 축복하여야 합니까? 바로가 야곱을 보고서 해야지요. 자기 땅에 밥얻어 먹으로 온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축복이란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아비멜렉이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의 땅에 셈의 후손이 얻어먹으러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로 들어간 것입니다. 처음에는 요셉이 종의 모습으로 들어 왔지만 그가 주가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가 온 세상의 주로 등극할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종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주로 알아보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요셉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려고 이렇게 하신 것이랍니다. 전에 한번 보았지만 한번 더 시편 105:17-19절을 봅니다. “봉독”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저를 연단하였도다 그러므로 형들에게 이러한 말을 하기까지 말씀이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23절에 보면 함의 땅에서 라고 합니다.
이제 형들도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몇 번이나 사지로 몰아넣으면서 형들에게도 요셉의 받은 그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게 하고서는 요셉이 자신을 알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양식 구하러 온 자에게 그래 여기 있다 하고 양식이나 주어 버리고 모른 체 하였다면 그것으로 먹고 배부르고 끝난 것입니다. 형제들이 애굽에 온 것은 양식을 구하러 왔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양식을 구하러 온 다른 나라 사람들이 당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을 죽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악해서가 아니라 우리는 양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몇 년을 훈련해야 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을 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먹고 사는 문제로 염려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너희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훈련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나라가 겪지 않아도 될 고생을 죽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믿는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겪지 않아도 될 고생들을 할 수가 있습니다. 토요일에 김현주 집사 심방을 갔습니다. 말씀을 보고서 기도하고 나니 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가 교회 잘 안나가서 이렇게 아픈가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 잘 안나가서 그렇게 아픈 것 같으면 우리가 하루에도 여러 수천 번 벼락을 맞아 죽어도 할말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교회를 잘 안나와서 그렇게 아프다면 교회 아예 나오지도 않고서 그렇게 일하면서도 아프지도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러나 이런 기회를 통하여 내 인생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런 입원을 통하여 자신이 신앙생활 잘못하고 있구나를 알게 된 것이 은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 생각하면 자신의 어려움을 없애기 위하여 열심을 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자신의 어려움의 문제만 해결되면 되는 그런 열심이란 사실 종교적인 것입니다. 내가 종교적인 공을 많이 들이지 않아서 이런 어려움이 오는가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에게 양식만 주어서 보내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됨을 알게 하시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당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시켜서 주님의 뜻을 이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이제는 요셉이 무엇을 합니까? 아직 5년이나 흉년이 남았으니 아버지와 가족이 모두 이리로 오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봉양하겠다는 것입니다. 은혜위에 은혜러라. 이럴 때 쓰는 말 아닙니까? 요셉을 죽인 죄에서 용서를 받을 뿐만 아니라 먹여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용서를 받은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평생 고생을 하고, 병이 들고 가난하여도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하여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팔아 버린 요셉이 주가 되어 있는데 평생 강제 노역을 시키더라고 할말이 없는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인데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용서 하셨다면 우리가 평생을 죽을 고생을 하더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 감사 합니다 하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조그마한 어려움만 닥치면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잘못하여 이렇게 되었나 라고 하든지 아니면 남과 비교해 보고서 나는 저사람 보다는 열심히 출석하고 봉사하고 헌금하는데 왜 이렇게 어려움이 오는가 주님이 원망스럽다 이런 마음이 없습니까?
제발 정신 차립시다. 우리가 어떠한 사랑을 받았으며 어떠한 용서를 받았습니까?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단지 먹고 마시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미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가장 적절하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무언가 불만이 있는 것은 자신의 욕심이 커서 그렇지 하나님이 부족하게 주시는 적이 없는 것입니다. 가장 필요한 것을 가장 적절하게 주시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대하는 그 자세가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자세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용서해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 무어라고 합니까? 먹여 살릴 테니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45:16-24절을 봅니다. “봉독” 물론 바로의 명으로 하지만 그러나 이미 주는 요셉입니다. 그러니 형들을 보내면서 수레와 양식과 옷을 주고서 베냐민에게는 옷 다섯 벌과 은 삼백을 줍니다. 그렇다고 형들이 베냐민을 질투할까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지금 자기들이 받은 용서와 그 은혜가 너무나 큰데 다른 사람과 비교할 틈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심초사 길에서 서로 다투지 말라는 당부까지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 땅에서 나오는 귀한 것을 요셉에게 가지고 가라고 하였는데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이 자기 아버지에게 보내는 것은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선물로 실어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주께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습니까? 그저 주시는 은혜를 우리를 받을 뿐입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면서 요셉에 형들에게 자신을 드러낸 것처럼 주님이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려내심으로 주님을 바르게 알고 그를 섬기며 주님께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창 46:1-7 애굽으로 간 야곱 2000. 10. 22
요셉이 자신을 알리고 자신의 가족들을 애굽으로 내려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모시고 올 수 있도록 수레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식을 들은 야곱이 기절을 할 정도입니다. 45:26절입니다. ‘기색하더니’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고서는 기운이 소생하여 내가 죽기 전에 가서 보리라고 합니다. 야곱은 요셉을 어떤 자로 알고 있었습니까? 죽은 자로 알고 있었지요? 형들이 요셉의 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 왔을 때 죽은 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브엘세바에 이릅니다. 브엘세바는 가나안의 끝 지역입니다. 이곳을 지나면 사막이 시작되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이 브엘세바는 이삭이 주로 살았던 지역입니다. 야곱이 이곳에 이르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립니다. 희생을 드리면서 그의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십니다. ‘야곱아 야곱아’ 하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대답하자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삭에게 언약하신 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야곱이 형을 피하여 외삼촌집으로 갈 때에 역시 밤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서 무어라고 하신 것입니까? 창세기 28:10-15절을 봅니다. “봉독”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도망을 가다가 누워 잘 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네가 누운 이곳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을 이루시기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20년이 지나서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가나안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 약속도 역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네 후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4대만에 돌아오리라는 것을 이미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야곱이 하란으로 갈 때와 지금 애굽으로 갈 때에 달라진 점이 무엇입니까?
하란으로 갈 때는 희생제사가 없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배나 기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희생을 드림은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란으로 도망갈 때에 약 70세로 보았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바로왕 앞에 설 때에 130세라고 하였으니 그때로부터 60년이 지난 것입니다. 달라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 물어 보는 것입니다. 지금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브엘세바에 이르렀지만 어찌할지 망설여지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의 뜻을 묻는 것이라고 봅니다. 60년 전에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야곱의 절반을 산다고 본다면 예수 믿은 지 30년쯤 되었다면 이제 주님의 뜻을 물어도 보고 분변도 하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저 내 고집대로 밀어 붙여 놓고서는 ‘하나님 이것 이루어 주옵소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하여 나에게 무엇을 하시렵니까? 하고서 묻는 것이 기도입니다. 주보의 복음묵상이라는 란에 지금 기도에 대하여 계속 싣고 있습니다. 주보를 순서지로만 한번 보고 예배당에 그냥 버리고 가시지 마시고 한번씩 더 보시고 버리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자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고 하시면서 또 다시 하나님의 언약을 주시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봉독”
1,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계속 주어진 약속입니다.
2, 나도 너와 함께 내려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행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과거에 약속 하신 바가 있는 내용입니다. 하란으로 갈 때에 네게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3,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야곱 자신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도 하나님이 일하심이고 지금 애굽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죽어서 가나안으로 오지만 그 후손이 430년 후에 가나안으로 나오게 되는 것을 보면 역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시는 것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4,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라고 합니다. 죽었다고 생각한 그 요셉이 자신의 임종을 지킬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하여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몇 년이 걸리든지 상관없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세계 최고의 강대국 이집트라도 아무른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도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서 야곱의 일행이 드디어 애굽으로 갑니다. 요셉이 보낸 수레를 타고서 자신의 처자식을 거느리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가나안에서 얻은 재물도 가지고 갑니다. 그 당시의 재물이라면 주로 가축떼입니다. 그런데 이 이사하는 행렬을 보면서 우리도 이사할 준비를 하고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지금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들어가지만 또다시 가나안으로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계속 떠남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떠날 때 그냥 떠납니까? 필요 없는 것들은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요셉이 무어라고 하였습니까? 45:20절에서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가나안의 살림살이들을 아깝다고 보따리 보따리 싸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곳의 모든 것이 너희 것이라고 합니다. 요셉의 것이 자기들의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것들이 이러하지 않을까요? 아끼지 말고 버려두고 가자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살 때는 귀하고 없어서 안 될 것 같지만 하늘나라에 필요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소풍 이야기이고 하나는 이사 이야기입니다. 인애가 소풍을 갔다 오는 것을 보고서 과자 남겨온 것이 있느냐고 물었지요? 동생 좀 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집사람이 아주 구질구질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얼 남겨오는가 이런 표정입니다. 이게 문화차이인가 봅니다. 저희가 어릴 때는 먹을 것은 일년에 소풍갈 때나 먹어보는 김밥에 돈 몇 십 원 들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풍에 따라온 장사하는 사람들에게서 사먹는 것인데, 도시 사람들은 먹을 것을 사서 들려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나들이 소풍 갔다 오면 꼭 동생 먹을 것을 사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시는 먹을 것이 많은데 무얼 남겨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서 생각하기를 그래 남겨오지 말자 냉장고를 열면 먹을 것 있고 가게에 가면 많은데 무얼 먹다가 남겨오는가 그냥 먹고 나누어 주고 그렇게 오자 라는 생각이 든 것은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를 보면서 그래 소풍 나왔으니 그냥 주고 함께 나누고 가자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또 하나는 저희 집이 밀양에서 부산으로 이사 올 때입니다. 시골에서 도시로 오면 시골의 농사짓는 모든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지간한 것들은 다 그저 주고 어떤 것들은 돈을 조금씩 받고 팔기도 하고 그렇게 정리를 하고 온 것입니다. 농사짓고 살 때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도시로 이사를 오니 아무른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다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에 없어서 안되는 것 같지만 하늘나라로 갈 때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가는 것이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이사하는 모습을 통하여 이렇게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믿음으로 산다면 늘 이사할 준비를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히브리서 11:13-16절입니다. “봉독” 이 땅에서 나그네라 외국인이라 하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이사할 준비를 하면서 사는 이 사람들의 하나님이라 칭함 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느뇨 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여자가 더 세상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애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로 이사할 준비를 하면서 산다면 무엇을 버리고 가야 할지를 늘 생각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셉의 말을 기억합시다. 기구들을 아끼지 마시고 오시기 바랍니다. 이 땅의 것이 모두 여러분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어라고 하실까요? 너희들은 땅의 것들을 다 버리고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준 용서와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오너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것들이 다 너희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수 강가에서 생명나무의 열매가 공짜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지고 갈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의 것들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야곱의 가족이 47절에 보시면 70명입니다. 출애굽기 1:5절과 신명기 10:22절에서도 70명으로 되어 있는데 사도행전 7:14절에 보면 75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아내와 네 명의 며느리를 포함하고 안하고 하는 차이라고 봅니다. 이런 숫자의 차이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야곱의 언약 안에 포함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혈속, 야곱의 허리, 그 부러진 허리로부터 나온 70명이 애굽에서 커다란 민족으로 이스라엘 국가로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애굽으로 내려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들이 드디어 애굽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요셉과 바로를 만나게 됩니다. 요셉과 야곱의 뜨거운 상봉을 합니다. 목을 어긋 맞겨 울면서 이제야 내가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고 합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을 뿐 아니라 애굽의 주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미 하나님이 야곱에게 형제들의 주가 되리라는 말씀의 성취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을 다시 만남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다가 다시 받은 것과 같은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는 언약의 조상들입니다. 이삭은 어떻게 경험을 하는가 하면 에서인줄 알고 축복하고 보니 야곱이었고, 야곱은 형이 죽이려는 것을 피하여 도망간 사건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모두가 같은 경험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 같으며, 이삭은 야곱을 20년이나 지나서 만났으니 죽었던 것 같은 자가 살아 온 것이며, 야곱 또한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하였던 아들 요셉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들을 버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잃어버림의 아픔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 늘 기억하여야 할 것은 나의 잃어버린 아픔보다도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아픔을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서 바로를 만나고 바로를 축복합니다. 이 내용은 지난주에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야곱이 애굽에 들어 온 것은 주로 들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을 한 번 더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47:9절입니다. “봉독” 자신의 생애를 험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애를 나그네라고 합니다. 두 번이나 나그네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이 땅의 나그네입니다.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편지 하기를 흩어진 나그네들이라고 합니다.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한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도란 나그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나그네임을 확인하는 것이 야곱이 가나안에서 하란으로, 다시 애굽으로, 다시 가나안으로 가는 것입니다. 결국 죽어서 가나안에 매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야곱의 나그네의 세월, 그 험악한 세월을 보시면서 무엇을 마음에 느낍니까? 우리도 결국 떠나야 할 나그네 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도저히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삽니다. 그저 이 땅에 천년 만년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택한 자들은 그러면 그럴수록 고난이 많은 것입니다. 야곱이 그러합니다. 얼마나 악착같았습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험악한 세월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야곱의 생애를 보면서 결국 누구의 고집이 센가를 보게 됩니다. 아무리 야곱이 발버둥을 치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신실한 하나님을 우리가 믿을진대 너무 염려 마시고 세상에 눌러 붙어 있으려 마시고 오늘도 떠나는 준비를 하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하면서 하루하루를 사시기 바랍니다. 이런 나그네는 짐이 가벼운 것입니다.
창세기 47:27-48:22 야곱의 유언 2000. 10. 29
야곱이 드디어 임종을 맞이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죽을 때가 다 되었음을 알고서 유언을 합니다. 몇 가지의 일들을 유언합니다. 첫째는 자신을 열조의 무덤에 묻어달라는 것이며, 둘째는 요셉의 두 아들을 손을 어긋맡겨 축복을 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자신의 모든 아들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두 가지를 중심으로 보고자 합니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고서 죽을 때가 되면 그 생의 농축된 것이 유언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평소에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고 살게 되었는가를 그의 죽음 직전에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리 미리 죽음을 잊지 말고 준비를 하는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것입니다. 전도서7:2절에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음을 잊고서 삽니다.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온갖 세상의 일들에 분주하게 삽니다. 너무 바빠서 죽음을 생각할 틈도 없이 살고, 어떤 사람은 너무 바빠서 죽을 틈도 없다 라고까지 합니다. 그러나 나는 죽음을 잊어도 죽음은 어김없이 잊지 않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유언을 생각해두고 묵상하여 두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밤에 내가 죽는다면 무엇을 유언으로 남길 것인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평소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신문에 난 이야기랍니다. 한 가난한 집에 노모가 죽으면서 평생에 소원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한번 끼어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었답니다. 아들이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마당에 그 소원을 이루어 드리려고 살 형편은 안 되고 친구의 부인에게서 다이아 반지를 빌려와서 어머니에게 끼워 드린 것입니다. 물론 빌려 왔다고 하지는 않았지요. 그런데 이 어머니가 반지를 두고 그냥 죽기는 너무 아까워서 반지를 물 마시면서 삼켜버린 것입니다. 아들은 하는 수 없이 어머니를 화장하여 반지를 회수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을 일이 아니라 나는 죽을 때에는 어떤 모습이 나오겠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니 저의 어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사람이 돼지고기 장사를 하여서 부자가 된 사람이랍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사회사업도 하고 아주 유명한 사람이 되었는데 죽을 때 그의 유언을 지켜보려고 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지요? 그의 임종의 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돼지고기 얇게 썰어라 라고 하였답니다. 우리의 평소의 관심사와 소원이 드러나는 것이 자신의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의 유언을 보고자 합니다. 애굽에 130세에 내려와서 17년을 지냅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합니다. 그러면 애굽의 호화로운 생활이 어느 정도 몸에 익을 만도 한 때입니다. 아들이 누구입니까? 바로의 아비요 주라고 불리우는 총리입니다. 그 엄청난 흉년을 지혜롭게 극복하였을 뿐 아니라 재산과 토지의 소득세까지 모두 정비하면서 애굽의 실질상의 왕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중심의 역할을 한 것이 물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차원이지만 이러한 아들의 권세가 있는 곳에서 자신이 묻히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묻혔다면 초라한 가나안의 바위 구멍을 파서 넣는 그런 무덤이 아니라 호화 분묘를 마련하였을 것입니다. 피라미드 정도의 무덤은 아니더라고 얼마든지 자신의 무덤을 꾸밀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자기 아들에게 얼마나 신신당부를 하고 맹세를 시키고 있는지 29-31절을 봅니다. “봉독”
나를 애굽에 장사하지 않도록 맹세를 시킵니다. 손을 환도뼈 아래에 넣고서 맹세를 하게 합니다. 이러한 맹세는 아브라함이 자기의 종에게 이삭의 아내를 데리고 오라고 할 때에도 이러한 맹세를 시킵니다. 이것은 아마 목숨을 걸고서 지키라는 맹세로 봅니다. 환도뼈란 허리이고 사람의 생식을 나타내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맹세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자 요셉이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야곱의 평생의 연단을 통하여 무엇이 소중한지를 이제 죽을 때가 되어서 분명히 안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은 세상의 성공과 출세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까? 형도 아버지도 속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마지막 소원이, 아들에게 맹세를 시키면서 하는 소원이 가나안땅 그 아비 이삭과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묻힌 곳에 묻어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앞으로 자기의 후손들에게 주실 그 땅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맹세를 받고서 야곱이 31절에 보면 침상머리에서 경배를 합니다. 이 침상머리에서 경배를 한다는 것이 히브리서 11:21절에 보면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침상에서 지팡이 머리를 의지하고서 하나님께 경배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면 이 지팡이가 무슨 지팡이 입니까? 단지 늙어서 짚고 다닌 지팡이가 아니라 자신이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침을 당하고 나서 짚고 다닌 지팡이입니다. 그때로부터 의지하고 다닌 지팡이입니다. 그러니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은 이때의 사건이후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에 의하여 껶여지고 이제는 자기 힘이 아니라 지팡이를 의지해야 하는 그런 백성이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야곱이 그렇게 독립하려고 불철주야 애를 쓰던 것이 이제는 그 노력조차 포기할 수밖에 없는 절름발이가 되어서 평생을 지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이제 임종직전에 그 지팡이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야곱의 모습을 보면서 신앙이란 무엇이라고 생각이 됩니까? 신앙이란 하나님에 의하여 침을 당하는 것입니다. 천국이 나를 부수고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자신이 의지하던 것들이 부러지고 이제는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을 야곱의 생애를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이 두 아들을 야곱이 자기의 아들로 삼습니다. 손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지금 장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자란 두 몫을 받는 것입니다. 그 두 몫을 요셉에게 주는 것인데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후의 너의 자손은 너의 자손으로 하되 그러나 그 형들의 명의하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5-6절입니다. “봉독”
그러므로 요셉이 장자가 되고 두 몫을 받기까지 요셉은 섬기는 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드디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할 때 손을 어긋맡겨 축복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8-22절의 내용은 요셉이 자기의 두 아들을 야곱에게서 축복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장자인 므낫세를 왼손에 차자인 에브라임을 오른손에 잡고서 야곱앞으로 갑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야곱의 오른손이 므낫세에게 왼손이 에브라임에게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갑자기 손을 어긋나게 하여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버지 그게 아니고 이렇습니다’ 하자 야곱이 ‘아들아 나도 안다’ 라고 합니다. 야곱이 눈이 멀어서 잘 보지 못하는데도 영안은 어둡지 않은 것입니다. 나도 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요셉의 생각에는 장자이니 당연히 오른손의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마치 이삭이 장자인 에서가 당연히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처럼 요셉도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무어라고 합니까? 자신의 평생을 통하여 알게 된 것은 아우가 형보다 크게 되리라는 것은 섬기는 자가 큰 자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승리하고 힘을 얻고 이기는 것이 큰 자가 되는 줄 알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일하심이 사람들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야곱 자신이 큰 자가 되리라고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러나 막상 야곱의 생애는 고난과 험악한 세월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무엇을 계시하기 위함입니까? 높은 자는 섬기는 자가 높은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방식은 남을 누르고 이기고 밟아야 높은 자가 됩니다. 한마디로 살아남기 전쟁입니다.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식으로 사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장자와 차자를 바꾸어 축복함으로 이 세상의 높고자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 섬기는 자로 부름받은 것이 큰 자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생애에서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희생당하는 자가 희생시키는 자를 살려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섬기는 자가 오히려 주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희생당하는 자가 주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17-28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은 죽으러 가시는 길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하여 죽기까지 섬기시는 길로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누가 서로 높냐의 싸움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 하지요. 얼마나 반대되는 마음입니까? 한 편은 섬기기 위하여 죽음으로 가는 길인데 한 편은 서로 높아지려고 가는 길입니다. 이런 싸움에서 누구까지 동원합니까? 세베대의 아들은 어미까지 동원됩니다. 세베대의 아들이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그러니 야고보와 요한이 자기의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예수님께 한 자리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하니 두 아들이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때도 치맛바람이 불었습니다. 높아지는데 무엇을 동원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때에 예수님의 질문이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겠는가 합니다. 그러자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마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잔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내는 잔입니다. 대신 고난당하는 잔입니다. 십자가의 잔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예비하여 두셨기에 그들이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깁니다. 아니 너희가 무언데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너희 어머니까지 동원하느냐? 누구는 어머니 없냐? 그런 식으로 높아지려고 하느냐 하면서 서로 서로 높아지려고 싸우는 것입니다. 마치 야곱의 깨어지기 전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마치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런 속마음을 예수님이 왜 모르시겠습니까? 25-27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이방인 가운데서는 집권자들이 임의로 주관하고 대인들이 너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것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는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무엇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입니까? 너희는 그렇지 않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그래 지금 섬기고 종이 되면 나중에 높은 자리 차지하리라는 식으로 계산하면 또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높은 자란 섬기는 자라는 것입니다. 으뜸이 되는 자란 종의 자세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시고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섬김을 받아야만 하는 중환자들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입니다. 이러한 죽음의 증세가 어떤 것입니까? 내가 남보다 높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섬김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욕구가 무엇입니까?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공주병, 왕자병이 다 걸린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자들을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삼기 위하여서 왕이요 주인이신 예수님이 섬기는 자로 종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분의 섬김을 받은 자는 이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죽으셨는가? 내가 높아지려는 것으로 인하여 예수님이 죽으셨구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섬김을 받은 우리라면 마땅히 우리가 섬기는 자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높아지기 위하여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높아졌기에 섬기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주님 안에서 왕노릇 하기에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증거되는 것이지 세상에서 높아지고 다스리고 군림하는 모습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이방인이 하는 모습입니다.
야곱의 생애를 보면서 우리의 유언이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고 소망하도록 자녀들에게 맹세를 시킬 정도의 믿음의 삶을 지금 살고 계십니까? 어느날 갑자기 닥치는 죽음입니다. 순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리 미리 준비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사는 방법은 섬김을 받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섬기라고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주님의 섬김을 받아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높아지려고 섬김을 받으려는 것 때문에 주님이 죽으신 사실을 아시고 이제는 섬기고 사는 복을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평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부렸나로 평가되지만 주님의 나라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겼는가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49:1-7 야곱의 예언(1) 2000. 11. 5
지난주는 야곱의 유언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보았습니다만 오늘은 야곱의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갈 것인지를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열두 아들의 예언은 단지 야곱의 가족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떻게 역사 속에 펼쳐지는가를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 차원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하나님중심으로 본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단지 나의 성공출세를 위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의 집 밑에 세 들어 사는 총각이 자기 누나는 교회 나간다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교회와 성경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원하는 이유가 자신은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영업 관리직이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성경 교회 이런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관심을 가지는 경우도 있구나 하여 성경을 한 권 주고서 읽어 보라고 하였습니다만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런 관심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작업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보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 아들들을 마지막으로 예언하는 내용을 보면 그 아들들의 평소의 행실을 가지고 장래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과율적인 면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런 모습을 인과율적으로만 보기 보다는 하나님이 이 야곱의 열두 아들들을 통하여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르우벤은 나쁜 짓을 하여 벌을 받고 요셉은 착한 일을 하여 복을 받았다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되어 버리면 성경에서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너무 좁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악인을 벌하시고 의인을 상주시지만 그러나 성경에서 악인이 오히려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다루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너무 권선징악적 차원에서 성경을 보면 의인의 고난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지난주 수요일 이사야 53장에서 고난 받는 메시야의 예언을 보았을 때 왜 그가 고난을 받는다고 사람들이 생각한 것입니까? 그 고난 받는 사람이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죄인을 위한 대속적 고난인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자면 노아의 세 아들 중 저주를 받은 자와 축복을 받은 자가 나누어지는데 저주를 받은 자는 함이고 축복을 받은 자는 셈과 야벳입니다. 그 이유는 아비의 허물을 가리워 주었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과율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알리시는 계시를 보는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적용을 하자면 남의 허물을 잘 가리워주자 라고 적용을 하는 것은 너무 좁은 적용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외에도 얼마든지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의 구원은 허물이 가리움을 받는 것이구나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무도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행함대로 갚으신다면,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시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구원에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야곱의 예언은 단지 개인의 유언이 아니라 앞으로 이스라엘에 나타날 하나님의 일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된 일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 내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표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기는 것이 목표입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는 것, 그리하여 아들을 닮는 것이 신앙의 목표라고 금요 구역공부 때 하셨지요?
그러면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가기를 원하면서 보도록 합니다. 창세기 49:1절에 보시면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이른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들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미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삭이 야곱을 에서인줄 알고 축복을 하였다가 나중에 에서가 돌아와서 축복을 해달라고 빌어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을 통한 이 아들들의 장래란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는 것이지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하여 축복하고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3절입니다. 르우벤의 내용입니다. 장자로서 굉장한 능력을 가진 자로 되어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 능력과 영예와 권능이 탁월하였지만 그러나 그 아비의 침상에 올라간 것으로 인하여 탁월치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르우벤이 자기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한 사건을 두고서 말하는 것입니다. 장자로서 그 능력이 뛰어 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못 사용하여 오히려 장자권이 요셉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5-7절입니다. 시므온과 레위입니다. 이들의 모의에 참예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들은 세겜에서 자기의 누이동생 디나가 강간을 당한 사건에 대하여 지나친 복수를 하였습니다. 세겜의 추장의 아들이 그냥 장난삼아 한 것이 아니라 정말 연애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그러니 어떤 대가를 요구하더라도 다 응할 테니 결혼을 허락하려 달라고 하였을 때 할례를 받으라고 해 놓고서는 그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가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 사건에서는 기록이 되지 않았는데 오늘 말씀에서 보면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고 합니다. 그냥 사람만 죽인 것이 아니라 소들까지 그 힘줄을 끊어버리는 분노와 혈기가 가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노와 혈기는 자신들의 자존심에 관한 분노와 혈기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분노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저주를 받아서 이스라엘 가운데 흩어지리라고 하였습니다. 나중의 역사를 보면 시므온은 유다 지파 중에 부속되거나 북쪽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민수기에서도 가장 적은 족속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예언대로 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도 시므온과 함께 흩어지리라고 하였는데 레위 지파가 이스라엘의 전역에 흩어져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시므온과는 달리 레위 지파는 제사장으로서 흩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다같이 흩어지리라고 하였는데 레위지파는 제사장의 직분으로 흩어지게 된 것입니까? 출애굽기 32:25-29절입니다. “봉독” 금송아지 사건 때 이들을 진멸할 자를 모세가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금송아지를 섬기는 진 이문에서 저문까지의 사람을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레위 지파가 칼을 차고 나가서 그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도륙하였는데 삼천 명 가량이나 죽었습니다. 이것을 모세가 보고서 오늘날 너희가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2여전도회 헌신예배때 이 말씀을 정목사님이 하셨지요? 헌신은 하나님에 대한 질투입니다.
비느하스가 음행하는 이스라엘의 남자 시므리와 미디안 여인 고스비를 창으로 찔러 죽인 것을 여호와의 질투로 질투하여 백성이 진멸되지 않았다고 비느하스를 축복하면서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을 허락합니다. 그러므로 레위 지파가 세겜에서 자신들의 자존심에 대한 지나친 분노와 혈기가 흩어짐의 저주를 받았지만 그러나 금송아지 사건에서 여호와께 헌신하여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의 저주와 모세의 축복이 함께 성취되는 것이 레위 지파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 일에 있어서는 얼마나 무덤덤합니까? 교회와 성도가 주님의 이름 때문에 욕을 얻어먹는 것이라면 성도의 고난으로 복일 수 있지만, 그러나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성도 아닌 행동으로 욕을 얻어먹으면 누구에게 욕이 돌아가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입니다. 세상과 구별된 무리입니다. 땅의 것을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의 사람들이 교회와 성도에 대하여 전혀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신문에 오르내리는 교회의 소식들이 대형교회의 부자 세습문제를 다루고 이것을 반대한다는 시민단체의 항의가 따르고, 대형 교회의 재산이 자신의 아들의 회사로 수백억이 들어갔다는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싣고 있는 잡지들을 그 교회가 많이 사들여야 다른 곳으로 덜 팔린다고 생각하였는지 그 잡지를 무더기로 사들이기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잡지는 좋게 기사화 하지 않을까요? 이렇던 저렇던 간에 오늘날에 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요즈음 기름값이 올랐다고 하니 러브호텔의 네온사인과 교회의 십자가의 네온사인을 끄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에 대하여 분노가 일어납니까? 이제는 분노가 아니라 그저 체념입니까?
그런데 만약에 자신의 명예에,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가 갔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만히 있겠습니까? 시므온과 레위처럼 끓어오르는 분노와 혈기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겠습니까? 직접 죽이지는 못하여도 이를 갈면서 미워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살인입니다. 그런데 나로 하여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받고 있는 일에 참으로 분노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가리워지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분노가 일어납니까? 교회가 주님의 피흘리신 공로가 사라지고 사람들의 인위적인 경영방법이 동원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프로그램에 분노가 일어나십니까?
오늘 새벽에 여호수아 22장에서 어떤 사건이 있습니까? 요단 동편으로 돌아가는 두지 파 반이 커다란 돌단을 쌓습니다. 요단 서편의 아홉 지파 반이 이 소식을 듣고 현장을 보러옵니다. 만약 이방신을 섬기는 단이라면 이들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단을 쌓은 것은 우리가 이스라엘중의 기업이 있음을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적용이 된다면 교회 오지마라는 것이 가장 큰 걱정과 염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 이제 교회 오지 말라는 것이 가장 큰 치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 지파 반이 단을 쌓으면서 ‘우리도 이스라엘입니다’ 하는 증거를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서 나가라 그러면 ‘안됩니다. 살려 주세요’ 그럼니까? 여기 없으면 교회 없나? 차 보내라 그러면 가줄께, 이런 건방진 일들이 무엇 때문에 나온 것입니까? 교회 나와서도 조금만 기분 나쁘면 여기 아니면 교회 없나 그러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를 따르는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라 나의 자존심을 채워주는가 아닌가가 되어 버린 이런 현실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모두 자기 자신에게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시므온과 레위를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동시에 우리가 바로 시므온과 레위처럼 자기의 이름에 목숨을 걸고 있음을 지적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저주가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저주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난 것은 레위지파의 헌신이었습니다. 이들의 헌신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진멸되지 않는 것입니다. 비느하스사건 때도 그렇게 된 것입니다. 민수기 25:1-13절입니다. “봉독”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 음행한 자들을 죽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누가 나섭니까? 레위지파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질투를 대신하였기에 그 진노를 돌이키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때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킨 것이 바로 비느하스의 질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위 지파의 제사장의 직분이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범죄를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림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는 것이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이것을 레위지파가 감당함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하여야 피하여 지는지를 그들의 지파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 지파가 금송아지 사건에서 헌신하여 형제들을 죽인 사건과 비느하스가 그 음행하는 자를 죽인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질투로 질투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킨 것입니다.
구약에서 레위 지파의 역할이란 하나님의 진노를 제사를 통하여 돌이키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신이 빠져버리면 제사란 또다시 우상숭배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금 어려운 부분이 대두됩니다. 그러면 레위 지파에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나와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레위지파의 제사장이 영원하지 못한 것을 히브리서에서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 봅니다. 히브리서 7:1-10절을 봅니다. “봉독” 레위 지파가 아직 나기도 전에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을 때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보다 멜기세덱이 높은 자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는 레위 지파의 후손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짐승의 피도 아니요, 죽어버리면 대제사장이 바뀌는 그런 제사장이 아니라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히브리서 8장, 9장, 10장에 계속 이어집니다. 이 시간에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행하신 일들을 보시면 어떻게 행하시는 것입니까? 질투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질투로 질투하시는 것입니다. 그 질투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다른 사람에게 갚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받으심으로 자기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이란 야곱의 이 유언 속에서 단지 레위지파가 자신의 분노와 혈기가 넘쳐서 흩어짐을 저주로 받는 것만 야곱의 유언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레위지파의 모습을 보면 야곱의 이 저주가 그대로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모세의 예언대로 - 물론 이러한 예언이 모세 자신의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예언입니다 - 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들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시는 계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일에 분노하시면 어떤 일에 그 분노를 돌이키시는가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가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명예와 자기의 자존심에 대하여 질투를 하고 있기에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레위 지파에서 헌신자가 나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킨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자기의 몸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라면 나의 이름에 대하여 자존심 상하는 일에 대하여 분노하고 있는 것이 죄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유언을 읽으면서 우리가 받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봅니다.
창세기 49:8-28 야곱의 예언(2) 2000. 11. 12
지난주에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의 예언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명예에 대한 분노와 혈기로 인하여 저주를 받게 되었지만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의 질투로 질투함으로 그 저주가 오히려 축복이 됨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축복과 저주란 어떻게 보면 됩니까? 자기의 이름에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 자기의 이름에 모든 가치를 두는 것, 이것이 저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축복이란 무엇입니까? 나의 이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에 기뻐하는 자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자신이 만물의 찌기같이 여김을 받아도 그리스도가 증거됨을 인하여 항상 기뻐한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 받을 우리 인생에 주어진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복을 받은 자의 당연한 자세가 아닙니까?
제가 은혜만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이 행함을 강조하지 않는가 하는 분이 계십니다만 그러나 어떤 집사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십일조가 아니라 하면서 전부 다를 바치라는 것이고, 주일성수 아니라 하면서 모든 날을 주일로 지키라는 것이라고 합디다. 그러니 주일성수 십일조 하라는 것 보다 더 무섭다는 말을 합디다. 그러니 제가 행함을 강조 안한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큰지를 우리의 어줍잖은 열심으로 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은혜를 제대로 알아 가면,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주신 분이 감동하심으로 정말 자원하는 심령으로 기쁨과 감사로 자신의 목숨까지를 바쳐도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그렇다 할지라도 그저 종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하는 것이 은혜받은 자세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줍쟎은 행함으로 감히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을 통하여서도 주님의 복음을 받는 것입니다. 구약이 왜 복음인지를 먼저 보고서 오늘 말씀을 봅니다.
갈라디아서 3:8-14절입니다. “봉독” 아브라함이 복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이미 율법과 선지자에 의하여 즉 구약에 의하여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복음의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그렇지 않고 또다시 행함으로 돌아가는 것은 갈라디아서 3:10절로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야곱의 예언을 지난주에 보았고 오늘은 나머지 아들들에 대한 예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편의상 유다를 제일 나중으로 돌리고 나머지 아들들부터 보고자 합니다.
13절입니다. 스불론인데 그 지경이 해변에 거하리니 그곳은 배대는 해변에서 시돈까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대로 갈릴리와 지중해 사이의 땅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파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땅을 나눌 때 제비뽑아 나눕니다. 그런데 스불론이 야곱이 말한 경계를 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다 더 가까이 아셀지파가 위치하지만 스불론도 그 지경에 이르러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성경이 오랜 세월 여러 사람에 의하여 예언되고 기록된 것이 통일된 중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의 통일성이라고 합니다. 14-15절입니다. 잇사갈인데 그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긴다고 합니다. 이들이 차지한 땅이 역시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어깨로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긴다는 것은 그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는 것도 되고 또 그들의 생필품을 구하기 위하여 그 자유를 매매하는 것으로도 봅니다.
16-18절입니다. 단인데 두 가지입니다. 그 백성을 심한하리라 하여 단 지파에서 삼손이 나온 것을 말하고 하나는 단은 뱀의 길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말굽을 물어 그 타자를 떨어지게 하는도다 라는 것을 단 지파의 폭력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사사기 18장에 단지파의 내용이 나오고 미가 집안의 우상과 레위 소년을 탈취하여 가서 자기들의 우상과 제사장을 삼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 단 지파에는 이 신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또 교부들 중에는 이 단 지파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온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시록 7장에서 이스라엘 지파의 명단에 단 지파가 없습니다. 왜 그런지는 아직 명확하게 드러난 주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 중에서 특이한 것은 18절입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라는 내용입니다. 단 지파와 같은 악당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달라는 그런 내용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메시야에 대한 간구로 봅니다.
19절입니다. 갓지파인데 군대의 반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라는 내용처럼 다윗시대에 용기를 발한 적이 있습니다(대상12:8-15). 20절입니다. 아셀지파인데 기름진 땅이라고 합니다. 이 예언처럼 솔로몬시대 때 이 땅의 곡식으로 히람왕에게 양식을 공급하였습니다. 21절입니다. 납달리지파인데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식을 발한다고 하는 것은 전쟁의 승리를 말하는 것으로 납달리 지파가 가나안왕 야빈을 이긴 것입니다(삿 4-5장)
22-26절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희생과 형제를 섬김과 야곱을 봉양함으로 장자의 지위를 얻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형제들 보다 두 몫의 기업을 받아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가 되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씀의 정확한 번역은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목자의 계신 곳에서부터’입니다. 그러니 요셉의 왕성함과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축복을 누구의 이름으로 하는가를 25절과 26절에서 보면 네 아비의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언약의 하나님을 말할 때 언제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리우시는데 지금 야곱은 오히려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네 아비의 축복이 네 부여조의 축복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잘나서 하는 말이 아니라 야곱이 얼마나 하나님께 대항한 자입니까?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겨루어 싸운 야곱입니다. 그러한 야곱을 하나님이 얼마나 열심히 언약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으면 이렇게 표현하겠습니까? 야곱이 고집을 부릴수록 고난은 심하였습니다. 그러한 고집과 고난 속에서 아브라함보다 이삭보다 더 많이 하나님께 매를 맞으며 연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깊이 하나님을 체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곱이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보면서 누구에게서 힘을 얻습니까? 야곱입니다. 아브라함도 높아 보이고 이삭도 순종의 사람으로 보이지만 야곱 정도는 우리도 상대할만한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열심히 더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자신의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야곱의 이런 고백처럼 할 수 있습니까?
27절입니다. 베냐민지파입니다. 물어뜯는 이리처럼 호전적인 지파입니다. 베냐민지파의 이러한 모습이 사사기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파들에 대한 야곱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예언되고 성취되어 지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예언에 야곱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임을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죽으나 언약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이 언약대로 온 세상이 움직여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가나안에 들어가고, 사사시대, 왕정시대, 포로시대, 포로귀환을 하면서 그 역사의 초점이 어디로 가는가 하면 유다지파로 모아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예언의 성취가 어떻게 유다지파로 연결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우선 이미 살펴본 대로 유다가 베냐민의 목숨을 자기의 목숨으로 담보하겠다고 나선 사건을 우리가 이미 보았습니다. 이러한 정신을 담아내는 것이 바로 유다가 메시야의 모형론적인 역할입니다. 형제를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파에 대하여 어떤 예언이 주어지고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8-12절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이 찬송의 뜻입니다. 그러니 이 이름을 언약 속에서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며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서 절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요셉이 어릴 때 꾼 꿈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형제들이 그 앞에 절하는 꿈을 꾸었지요? 결국에는 요셉에게 형제들이 절을 하였지만 그러나 그 일이 있기까지는 요셉이 얼마나 많은 고난과 희생을 당하는지를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러면 요셉에게서 메시야가 나와야 하지 않는가 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요셉은 그의 역할이 끝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유다에게서 형제들이 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의 희생을 보이시면서 형제들이 절하게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다가 자신을 담보로 베냐민을 살리고자한 그 모습이 메시야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누가 애매히 고난을 받는가를 유심히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지파에서 사자가 나오고 홀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로가 오시기까지 그 홀이 미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홀이란 왕위를 말합니다. 왕의 지팡이인데 이 홀이 실로가 오기까지라고 합니다. 이 실로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 메시야로 봅니다. 그러니 메시야가 올 때까지 홀이 유다지파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21:26-27절을 봅니다. “봉독” 유다 지파도 결국 왕이 끊어집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입니까?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무엇을 준다는 것입니까? 관을 제하며 면류관을 벗기라고 하였으니 왕의 면류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유다 지파로 오시지만 육으로는 유다 지파요 영으로는 유다 지파와 단절된 하늘로부터 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요셉도 아니요 레위 지파도 아니요 왕도 아니요 제사장도 아니요 이스라엘 국가도 아니요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실로가 오시기 까지 유다가 홀을 이어가기는 하지만 그 홀을 그대로 이어 받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완전한 왕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왕입니까? 9절에 보시면 사자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유다는 사자 새끼, 수사자, 암사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자란 짐승의 왕입니다. 라이온 킹입니다. 이러한 사자 즉 왕으로서의 유다의 모습을 두 곳에서 보고자 합니다. 민수기 24:9,17. 발락왕이 발람 선지자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라고 하지만 저주가 통하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축복이 나오는데 그 축복의 내용 중에 9절에서 이스라엘을 사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17절에서는 홀과 별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사자가 되고 홀과 별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때의 일이 아니고 가까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장래에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60편 7절에서 유다는 나의 홀이라고 합니다. 유다 지파에서 홀이라는 것은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시편이니 자신의 왕됨이란 바로 하나님이 언약을 따라 주신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특히 사무엘하 7장에 나단의 신탁에 의하면 하나님이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서에서 본 것처럼 다윗의 왕위가 끊어집니다. 그러나 누가 오시기까지입니까? 마땅한 자가 오시기까지입니다. 그리하여 오신 영원하신 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왕이 사자로서 오시는데 어떤 사자인지 계시록을 봅니다. 계시록 5:1-10절을 봅니다. “봉독” 요한이 웁니다. 왜 웁니까?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 인봉된 책이 있는데 이것을 하늘위에나 땅위에나 능히 펴거나 읽을 자가 없어서 웁니다. 그런데 장로중의 하나가 울지 말라고 하면서 유대지파의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자란 메신저가 아니라 라이온입니다. 창세기 49:9절의 라이온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가지나 열매가 아니라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다윗의 뿌리로부터 나온 하나의 열매입니다. 그러니 다윗이나 아브라함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윗이 자신을 주라고 하였고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사자 즉 왕인데 어떤 왕입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6절입니다. 일찍 죽임당한 어린 양입니다. 왕으로 오신 분이 어떤 모습입니까? 일찍 죽임당하신, 희생하신 어린 양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분이 그 책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책이란 열려질 때 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시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 대접이 쏟아지면서 온세상에 심판을 행하시는 심판주가 다윗의 뿌리가 되시며, 유다지파의 사자로 오시되 어떤 모습으로 오십니까? 일찍 죽임당한 어린 양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임 당하신 어린양 그분을 왕으로,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심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기에 예수 믿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제 모든 하나님의 인봉된 계시를 손수 집행하시는 분이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 양임을 잊지 마시고 우리의 마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늘 향하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49:8-12 유다 2000. 11. 26
강아지는 짖어도 열차는 달린다는 말이 있지요? 경부선 열차가 달리는데 옆에서 강아지가 아무리 짖어 된다고 하여도 열차는 아무런 상관없이 달리는 것입니다. 요즈음 도울의 강의로 인하여 기독교계가 KBS에 항의를 하고 여러 사람이 설교중에 그의 잘못을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강아지는 짖어도 열차는 달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임을 믿는 것입니다. 누가 믿으라고 하여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사이기에 누구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절이 무엇입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누가 이 말씀을 믿습니까? 누가 변호한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누가 이 말씀을 비판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말씀도 아닌 것입니다. 수천 년을 성경을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문서비평이 일어났을 때는 성경이 사라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역사비평 문서비평을 통하여 성경을 해체시킨다고 하여도 그러나 성경은 여전히 제갈 길을 묵묵히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1:1절의 말씀을 믿을진데 믿기지 않는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몇 구절의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11: 36절입니다. “봉독” 에베소서 1:10절입니다. “봉독” 베드로후서 3:10-13절입니다. “봉독”
요한계시록 21:1-2절입니다. “봉독” 이러한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우리가 믿던 믿지 않던 상관없이 이 말씀대로 되어질 뿐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성취하여 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운동력이 있는 것이며, 비가 와서 땅을 적시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내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그 입에서 나온 말씀은 헛되이 돌아가지 아니하고 말씀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돌아가는 일들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세상이 이렇게 되면 내가 어떻게 될까를 두려워하지 마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되는가를 관심을 가지는 것이 성도의 당연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이러한 관심이 본능적으로 싫은지를 우리가 말씀을 배워 가면 갈수록 더욱 절감을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신앙클리닉을 공부하면서 배운 것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우리가 평소에 생각한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가 많았는가를 확인하였을 것입니다.
오늘은 야곱의 예언이 단지 한 늙은이의 유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유언중에서 유다의 부분을 확인하고자 그리하여 세상이 어떻게 말씀대로 되어지는 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8:9절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이 태어날 때에 찬송이라는 뜻으로 지어졌습니다. 유다는 레아의 네 번째 아들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고 레아에게 사랑을 주지 않자 하나님이 레아를 긍휼이 여기심으로 자녀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총이 없는 레아에게 네 명의 아들까지 주시니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라고 이름을 짓는 것입니다. 이 이름의 뜻대로 유다가 형제들의 찬송이 되며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서 절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누구에게서 그대로 성취가 됩니까? 다윗입니다. 다윗이 처음에는 형제들의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이 건방진 놈이 하는 대접을 받습니다만 이미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형제들의 찬송이 되었으며 그리고 다윗시대때에 가장 많은 적을 정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제들이 왕에게 절하여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이 예언되고 성취가 되는 것이 요셉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서 그것으로 형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형들이 요셉에게 절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유다가 요셉처럼 희생의 뜻을 담고 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베냐민을 대신하여 내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신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희생당하는 자가 살려내는 방식이 언약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요셉이 그리하였고 다윗도 처음에 희생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생당하는 자들을 사람들은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사야 53:3절에 보시면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메시야로 오신 분이 고난 받는 종으로 멸시받는 모습으로 비참한 모습으로 오셨기에 희생자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우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한 것입니다. 마치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한 것처럼 다윗의 형들이 다윗을 건방진 놈으로 본 것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기름부음 받은 자를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가 예수님을 귀하에 여기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모습으로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만 주님의 백성들을 모으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다면 세상의 볼만한 것들을 주시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아마 우리 중에 대다수가 탈락이 될 것입니다. 빽도 없고 돈도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없는 것만 있는 자들이라면 어디에 감히 줄이라도 설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는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미련한 모습으로 감추어져 있기에 찾는 사람이 적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인기있는 곳으로 만들려고 하니 이것이 교회의 타락을 가져오는 지름길이 됩니다. 그렇게 하든 아니 하든 하나님의 일은 막히는 적이 없습니다만 우리의 시각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9절을 봅니다. 유다는 사자라고 합니다. 사자 새끼, 수사자, 암사자라고 합니다. 10절입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홀이란 왕의 지팡이입니다. 이것이 실로가 오시기까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자라는 것과 홀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봅니다. 민수기 24:9,17절입니다. “봉독” 발락왕이 발람을 불러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였으나 저주할려고 하면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축복의 말이 나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람의 입에서 하나님의 신의 강권적인 역사로 나온 말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사자 같고 홀이 나온다는 내용입니다. 사자와 홀이 이스라엘 전체로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홀이 한 지파에서 나오는 것임을 볼 때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다지파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진을 치고 행진할 때 동편 가운데가 유다 지파입니다. 성막 사면으로 세 지파씩 진을 치고 행진할 때도 그렇게 하는데 유다 지파가 앞장을 섭니다. 그리고 사사기 1장에서 여호수아가 죽고 나서 가나안을 치러 올라갈 때 하나님께서 유다지파로 먼저 올라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60:7절에서 유다는 나의 홀이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한 지파를 거론하여 나의 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홀, 왕위가 다윗에게 영원한 왕위로 세워진다는 것이 사무엘하 7장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왕위가 영원하리라 하면서도 바벨론 포로시에 왕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21:26-27절을 봅니다. “봉독” 관을 벗기고 면류관을 제하라고 합니다. 언제까지?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를 때까지랍니다. 이 말씀을 실로가 오시기까지의 예언으로 봅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의 말씀을 메시야 구절의 성취로 보는 것이 이 구절입니다. 사자니 홀이라는 부분은 다른 곳에서도 나오지만 실로라는 말이 나오지 않기에 여기서의 마땅히 얻을 자가 오시기까지를 실로의 변형된 단어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메시야적인 내용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유다의 왕위가 벗겨지나 그러나 언제까지 메시야가 오실 때까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제 영원한 왕위를 이어가시는 것입니다.
홀, 왕의 지팡이에 대하여 봅니다. 히브리서 1:8절입니다. 시편 45;6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홀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시편 45:6절은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이 말씀의 성취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아들에 관하여는”이라고 추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구약의 성경의 예언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로 보는 것입니다. 아들에 관하여 영영한 보좌와 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영한 보좌와 그 홀을 가지신 분이 바로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자입니다. 요한계시록 5:1-10절을 봅니다. “봉독” 요한이 웁니다. 왜 웁니까?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 인봉된 책이 있는데 이것을 하늘위에나 땅위에나 능히 펴거나 읽을 자가 없어서 웁니다. 그런데 장로중의 하나가 울지 말라고 하면서 유대지파의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자란 메신저가 아니라 라이온입니다. 창세기 49:9절의 라이온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가지나 열매가 아니라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다윗의 뿌리로부터 나온 하나의 열매입니다. 그러니 다윗이나 아브라함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윗이 자신을 주라고 하였고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사자 즉 왕인데 어떤 왕입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6절입니다. 일찍 죽임당한 어린 양입니다. 왕으로 오신 분이 어떤 모습입니까? 일찍 죽임당하신 희생하신 어린 양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분이 그 책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책이란 열려질 때 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시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 대접이 쏟아지면서 온세상에 심판을 행하시는 심판주가 다윗의 뿌리가 되시며, 유다지파의 사자로 오시되 어떤 모습입니까? 일찍 죽임당한 어린 양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임 당하신 어린양 그분을 왕으로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심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기에 예수 믿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제 모든 하나님의 인봉된 계시를 손수 집행하시는 분이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즉 다윗의 뿌리 사자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앞으로 심판주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창세기 49:11-12절을 봅니다. 나귀를 포도나무에 메며 옷을 포도주에 빤다고 합니다. 아니 옷을 포도주에 빨면 어떻게 됩니까? 붉게 물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윗이 가나안 지경을 정복하고 나서 그 땅의 소산물의 풍요로움으로 주석가들이 보고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포도주로 눈이 붉겠고 우유로 이가 희리라고 하는 내용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풍요로와도 그렇지 어떻게 포도주로 옷을 빱니까? 아마 포도를 따서 수확하여 발로 밟아서 즙을 짜니 옷이 붉어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가 떨칠 수 없는 말씀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유다지파에서 홀이 나오고 사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일찍 죽임 당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앞으로 재림하실 때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요? 계시록 14:17-10절을 봅니다. “봉독” 천사가 예리한 낫을 들고서 익은 포도를 거두어서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밟는데 말을 타고 밟았는지 그 틀이 밟히니 피가 말굴레까지 닿았습니다. 포도즙이 아니라 피가 된 것입니다. 계시록 19:11-16절을 봅니다. “봉독” 피뿌린 옷을 입었고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사가 거두어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지면 이 백마타신 분이 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너무 무시무시한 장면 같습니까? 그러니 이러한 심판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심판을 정말 알고 있다면, 믿는다면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노아가 배를 만들고 있는 곳은 산위입니다. 그러나 산 아래에서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기 바쁜 것입니다. 누가 노아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 그보다 더 높이 물로 심판을 준비하고 계신 분을 기억이나 하겠습니까? 노아를 미친놈 보듯이 한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사느니 죽느니 괴롭느니 슬프느니 하는 것들에 초연해지지 않습니까? 사랑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다투는 일들이 우스운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자세로 살면 됩니까?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나누어 주는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 복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을 입은 대로 은혜와 긍휼이 나오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더욱 주님의 도우심을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주님은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언약의 말씀을 따라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49:28-50:14 야곱의 죽음 2000. 12. 3
“언약을 받은 사람은 죽어도 언약은 영원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으나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언약은 영원하여 이삭에게로 연결이 되고 이삭은 죽으나 그 언약은 영원하여 야곱에게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이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 이루어내고 계신 결과로 오늘 우리도 이 언약에 참여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그 복이 모든 족속에게 미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동안 살펴보았던 야곱의 생애를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 부분을 중심으로 야곱의 생애를 돌아보고 그 죽음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야곱에게 하나님이 처음으로 말씀하신 것은 태중에 있을 때입니다. 야곱이 직접 듣지는 못하였지만 리브가에게 하나님이 야곱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바울이 말하면서 내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아직 선과 악을 행하기 이전에 배속에 있을 때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며, 성경의 특징이고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이 선택이 없어져 버리면 인간의 종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여도 하나님이 받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앙의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하나님의 선택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생애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태어난 야곱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야망에 붙들려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성공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형제이든 부모이든 친척이든 상관없이 오직 자신의 성공과 출세를 위한 도구들도 본 것입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면 함께 하는 것이고 도움이 안되면 거짓말하고 속이고 도망가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야곱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와 꼭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야곱이 나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 장근식 강도사와 전화를 하였습니다. 지금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동안 성경을 통하여 발견한 인간의 죄성을 확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성도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려고 한다면 단 하루도 살지 못하는 세상임을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살려고 하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어떻게 양보하고 손해보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서 살겠습니까? 그저 강한 자가 내 앞에 나타나면 굽신거리며 그의 비위를 맞추고 그를 이용하여 나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려고 하며, 약한 자를 만나면 나의 희생물로 삼으려고 하는 세상 아닙니까?
야곱이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야곱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면 가끔씩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상황과 환경을 인도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아래 있지만 그러나 야곱의 147년 동안 하나님이 야곱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은 몇 번 되지 않는 것입니다. 간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을 합하여 약 9번 정도입니다. 그러니 야곱에게 이러한 말씀이 주어지는 것과 야곱의 힘들이고 애를 쓰며 살아가는 것과 비교를 해보자면 어느 것이 비중이 큽니까? 시간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147년의 생애 가운데 하나님이 친히 꿈에서 말씀하시고 얍복강에서 씨름하신 그런 시간을 다 합하여도 24시간이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애를 쓰고 자신의 성공을 위하여 달린 야망의 세월은 얼마나 엄청납니까? 그런데 결국은 누구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의 생애 가운데서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그동안 그렇게 불철주야 자신의 성공을 위하여 애를 쓰고 고생한 것이 남는 것이 아니라 무엇만 남기게 됩니까? 하나님의 언약만 남는 것입니다. 그 남겨진 언약이 무엇인지 말씀을 찾아봅니다.
창세기 25:23 리브가에게 야곱에 대한 말씀. 27:27-29 이삭의 축복. 28:3-4절 이삭의 축복을 반복함. 28:10-15 하나님께서 친히 야곱에게 말씀하신 내용. 31:3, 11-13 야곱에게 하나님이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심. 32:28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함. 여기서 이름 바뀜. 35:1 세겜에서 지체할 때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심. 35:9-13 벧엘에서 말씀하심. 야곱이 도망갈 때 약속하신 그 장소. 46:1-4 애굽으로 내려갈 때 하나님이 말씀하심.
이것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말씀하신 내용의 전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신 말씀의 내용을 요약하고 보니 야곱이 147년 동안 살면서 남아진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언약만이 남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이 앞으로 이루어질 내용만 남은 것입니다. 그동안 야곱의 고생과 피와 땀이 남았습니까? 그 야망이 남았습니까? 오히려 그러한 고집을 부리다가 꺽어진 허리로 인하여 절룩거리는 흔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야곱입니다.
결국 야곱의 고집과 하나님의 고집의 충돌입니다. 누가 이깁니까? 두말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더 고집하시겠습니까?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국 하나님이 남기시는 것은 자신의 언약만 남기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눈에 보이는 것, 사람들의 칭찬, 자신을 알아주는 것, 모두 모두 사라집니다.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언약만이 영원합니다.
이러한 부르심을 우리가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십니다. 반드시 그 부르심의 목적대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두려움이 됩니다. 고집부리면 혼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큰 위로가 됩니다. 나의 모습이 비록 이러할지라도 주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고 나를 인도하시구나 하는 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란 결국 하나님의 은사이지만 그 믿음의 내용이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인 것입니다. 로마서 11:30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이제 야곱의 죽음의 장면을 봅니다. 무엇을 남기고 갑니까? 지난 2주간 살펴본 대로 자신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하실 일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 예언대로 되는 것은 이 예언이 야곱의 사사로운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야곱의 유언대로 되었음을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다에게서 왕이 나오는 것입니다. 영원한 왕입니다. 그러므로 이 왕에게 절하지 아니하면 다 망하는 것입니다.
열두 아들을 축복하고서 자신의 매장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29절입니다. 자신이 열조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열조 곧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예표로서 그 언약의 사람들이 묻힌 곳에 묻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맹세시킵니다. 야곱이 애굽에서 묻혔다면 호화분묘를 꾸몄을 것입니다. 바로왕이 죽으면 애곡하는 기간이 72일인데 야곱을 애곡하는 기간이 70일이었다면 왕과 버금가는 예우입니다. 이처럼 요셉의 권세가 막강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곳에 묻히길 원하지 않고 초라한 가나안땅의 아브라함이 사 놓은 그 곳에 묻히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147년 동안 무엇을 남기고 갑니까? 무엇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까? 인생의 수고와 애씀이 무엇입니까? 시편 90편 1-12절을 봅니다. “봉독” 인생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목전에서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고 밤의 한 경점 같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가운데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여도 팔십입니다. 그러나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야곱이 바로에게 무어라고 합니까? 내 나그네의 세월이 130이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남겨진 자신의 인생의 한마디 아닙니까? 우리의 인생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신속히 날아갑니다. 인생이 40을 넘기면 5단위가 없어지고 10단위로 넘어간답니다. 그러니 날아가는 인생을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11절입니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주여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를 알게 하소서.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수고와 슬픔뿐인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지혜롭게 사시겠습니까? 야곱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그 험악한 나그네 세월을 살았지만 남겨진 것은 오직 주님의 약속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무엇을 많이 남겼습니까? 세상의 업적들이 있습니까? 아니면 앞으로 남기기 위하여 열심히 살고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 무엇을 남기기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무엇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까? 영원한 세계를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보이는 것을 남기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을 준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즉 출세상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출세는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출세가 아니라 출 세상을 목표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야곱의 매장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서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0일 동안 미이라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미이라 만드는 법으로 시체를 처리합니다. 코 구멍으로 뇌를 긁어내고 옆구리로 내장을 드러내고 그 속에 향재료를 넣어서 미이라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기간이 40일이 걸립니다. 그리고서 70일을 애곡하고 드디어 장례행렬이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누가 따라 갑니까? 이스라엘의 어른들이 다 따라 갑니다. 그리고 애굽의 관리들도 많이 따라 갑니다. 이러한 행렬을 보면서 무엇이 함께 더빙이 됩니까? 출애굽입니다. 지금 야곱은 죽어서 자신의 시체로서 출애굽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것을 이미 언약으로 받았고 자신이 시체를 가나안에 묻어 달라고 함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질 것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최고의 성공이 무엇입니까? 내가 죽었을 때 그사람은 참으로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평가는 아무른 상관이 없습니다. 가난하든 부자든 건강하든 병이 들었든 그런 평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가야할 곳입니다. 이러한 출애굽이 일어났고 이제는 영원한 출애굽이 우리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일평생 동안 남긴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땅에 묻히기를 소원하였으며 그 언약을 내다보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죽음조차 출애굽을 미리 보여 주는 행렬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이러한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시위하는 것입니다. 데모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데모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음을 시위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죽음을 보면서 우리가 살아야 할 방향인 것입니다.
창세기 50:1-26 요셉의 죽음 2000. 12. 10
일년 반 동안 창세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속도로 보신다면 수요일 주일낮 주일저녁 다 참석하면 성경을 평생 동안 한 번 정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분을 통하여 전체를 보고 전체를 통하여 부분을 보면서 보아 간다면 다 보지는 못하여도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는 알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많은 분량을 한번의 본문으로 하여 보고자 합니다. 이렇게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알고 믿고자 하는 것입니까? 세상의 모든 일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45:5-8절을 봅니다. “봉독” 형들을 만난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알리면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생은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형들이 죽이려하고 동생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지만 결국 노예로 팔려가고 남의 집 종살이에서 유혹을 뿌리치다가 감옥에 가고 감옥에서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의 모든 역사의 결론을 지금 요셉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는 겁니다.
오늘은 요셉의 죽음 앞에서 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요셉의 형들이 용서를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의 용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는 역시 요셉의 유언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먼저 요셉의 형들이 용서를 믿지 못하는 모습을 살펴봅니다.
15-17절을 봅니다. “봉독” 아버지 야곱이 죽고 나자 혹시 요셉이 다시 자기들을 보복하지 않을까 걱정을 합니다. 우리가 행한 악을 다 갚지나 않을까 염려를 하는 것입니다. 요셉에 효자이기에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아버지를 의식하여서 형제들에게 잘해 주었지만 그러나 아버지가 죽고 나면 우리를 해치는 것이 아닌가 하고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마치 가인이 동생 야곱을 미워하여 죽이려 하였지만 언제 까지 참습니까? 아버지 야곱이 죽을 때가 다 되었으니 ‘죽고 나면 보자’ 하는 것처럼 지금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가 죽고 났으니 보복을 하면 어떻게 하나 하면서 두려워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말을 상기 시키면서 용서해달라고 합니다.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 지라고 너는 용서하라고 한 그 말을 다시하면서 용서를 구합니다.
이것이 요셉의 형들의 모습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용서를 얼마나 믿지 못하는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만나기 전에는 양심에 어느 정도 가책은 있었을 지라도 이 정도로 자신들의 죄악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노예로 팔아버린 그 요셉, 죽인 것과 다름없는 그 요셉이 지금 모든 권력을 가진 자로 나타나 있으니 늘 자신들의 죄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용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안해하고 염려합니다. 그래서 요셉의 안색이 조금만 달라져도 벌벌 떠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리하여 형들이 다시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서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이러한 죄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것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 때에 주여 나를 용서하소서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죄라는 것을 죄로만 여기고 있으면 그런 죄는 다른 선행으로 대신 갚아 낼 수 있으려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죄인임을 아는 것은 오직 십자가 앞에 직면하여야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 앞에 직면하여서야 자신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처럼 오늘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앞에 직면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과 우리의 욕심과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모든 것들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가 주님의 용서를 시시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 이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용서받아 본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은 용서를 받았지만 그러나 확신이 없었습니다. 용서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들의 모습을 보면서 요셉이 웁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형들의 불신에 대하여 요셉이 세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신앙의 모습입니다. 1) 19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이것이 오늘 성도들의 자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용서를 받은 자라면 적어도 이러한 자세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비행을 바로 잡는 길은 결국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손을 써서 어떻게 고쳐보려고 하면 더욱 일이 틀어지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두라는 말입니까? 라고 하지 마시고 21절까지를 먼저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하는지 아십니까? 내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양도함 없이 움직이려하는 것입니다. 내 가정을 내가 하나님처럼 하고자 합니다. 내 자녀를 내가 하나님처럼 키우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는 찾아보기도 힘이 듭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대신하고자 하는 교만함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할 수도 있고 장로가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요즈음은 평신도연합회라 하여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단체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이 말씀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입니다.
로마서 12:19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께 맡겨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교회 안에서 판단하고 분별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훈계하고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지 그러한 판단이 나의 감정이나 나의 뜻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창세기 50:20절입니다. “봉독” 인간의 악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다고 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나를 헤치려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하더라도 주님의 약속을 믿고 원수를 내가 갚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인내를 요구하는지 모릅니다. 요셉은 이렇게 되기까지 몇 년이 걸렸습니까? 17세에 팔려서 30세가 되기까지 그리고 풍년이 7년, 흉년이 들어 2년이 되기까지 무려 22년을 지나서 형들이 양식을 구하려 왔을 때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눈앞에 닥치는 조그마한 경제적 손실, 또는 인격적인 모독을 얼마나 견디고 참고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 억울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요셉을 보면서 우리가 배우는 바입니다.
3) 그리고 창세기 50:21절입니다. “봉독”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라며 간곡히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요셉이 이렇게 된 것이 자신의 꿈을 가지고 자기의 야망을 이루어 내었다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였음을 알고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전생애를 통하여 보여주는 계시의 절정이 바로 이것입니다. 죽임당한 자가 죽인 자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를 미리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4절입니다. “봉독” 새언약의 내용입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는 기억도 아니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용서를 받고서도 두려워 한 것은 다시 그 죄를 기억하고 우리를 벌하지 아니할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이 정말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무슨 나에게 안 좋은 일만 닥치면 내가 죄를 지어서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였다는데도 그렇게 벌벌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러면 죄를 지어도 상관없네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요셉의 형들이 요셉이 용서를 확인하여 주었다고 해서 다시 요셉을 죽이려고 하였을까요? 아니면 요셉의 그 용서에 평생 감사하면서 살았을까요? 후자이지요. 당연한 것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그 용서 속에서 감사하면서 요셉이 무어라고 하면 얼른 얼른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강조하면 사람이 방종하게 되지 않는가 하시는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염려는 아직 제대로 용서를 받지 못한 것이 아니가 하고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50:20절입니다. “봉독” 그날 그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짓지 않아서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죄를 사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새언약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라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용서를 우리가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서도 용서의 삶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용서를 죄사함의 용서를 맛보고 또 우리 가운데서도 진정한 용서를 맛보는 것이 천국을 지금 맛보는 것입니다. 벌써 12월입니다. 아직 용서치 못한 부분이 있다면 용서를 하는 그리하여 따뜻한 겨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요셉의 임종입니다. 역시 야곱의 임종처럼 자신의 뼈를 가나안땅에 묻어 달라고 합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훨씬 오래 살았습니다. 제 2의 고향이라는 말이 있듯이 애굽에서 총리가 되기까지 한 사람인데 그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니게 여기는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어떠한 부귀와 영화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마지막 소원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마지막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원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안에 들어가는 것이 정말 우리의 소원입니까?
창세기 50:24절을 봅니다. “봉독”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하나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출애굽의 언약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권고하시는 날에 내 해골을 메고 올라 가겠다고 하라 하고서 110세에 죽었습니다. 애굽의 그 부귀와 영화를 누린 곳에서 묻히기를 싫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유언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살펴봅니다. 이미 수백 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출애굽이 일어납니다. 출애굽기 13:18-19절입니다. “봉독” 애굽땅에서 나올 때에 무엇을 들고 나옵니까? 요셉의 해골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얼마나 바쁜 때입니까? 출애굽의 상황에서 요셉의 해골을 취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빈틈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요셉의 해골도 함께 출애굽을 합니다.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서 드디어 가나안땅에 도착을 합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정착을 함과 동시에 요셉의 해골이 가나안에 묻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24:32절입니다. “봉독” 요셉의 해골이 가나안땅에 묻히는 것으로 여호수아서가 끝이 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빈틈없이 이루어지는 지를 우리의 눈으로 확인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어야 마땅합니까? 주님의 나라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최고의 목표요 성공입니다. 그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면 이미 그 나라를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마치면서 우리의 소망을 다시 점검하시고 주님의 약속 안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인생의 행복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히브리서 11:21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실 영원한 터를 바라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주님이 날을 사모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창세기의 언약들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살펴보면서 이제 우리가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요한계시록 22;20절입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창세기 강해 목차
01. 빛이 있으라-1페이지
02. 보시기에 좋았더라-4페이지
03. 안식-7페이지
04. 사람됨-10페이지
05. 유혹-13페이지
06. 찾아오시는 하나님-16페이지
07. 죄의 소원-19페이지
08. 가인의 후손-22페이지
09. 하나님과 동행-23페이지
10. 죄악의 관영-25페이지
11. 방주에 있던 자만-28페이지
12. 하나님의 권념-31페이지
13. 언약-34페이지
14. 덮어줌의 은혜-37페이지
15. 영걸-40페이지
16. 바벨탑-43페이지
17. 택한 백성-46페이지
18. 복의 사람-49페이지
19. 애굽으로 간 아브람-52페이지
20. 다시 가나안으로-56페이지
21. 십일조-59페이지
22. 아브람의 상급-62페이지
23. 언약체결-65페이지
24. 이스마엘-68페이지
25. 전능하신 하나님-71페이지
26. 나그네 대접-74페이지
27. 웃음-77페이지
28. 아브라함의 기도-80페이지
29. 농담으로 여긴 사람들-83페이지
30. 롯의 처를 기억하라-86페이지
31. 아브라함과 아비멜렉-89페이지
32. 분리-92페이지
33. 브엘세바-95페이지
34. 여호와 이레-99페이지
35. 사라의 죽음-102페이지
36. 이삭의 결혼-105페이지
37. 아브라함의 죽음-108페이지
38. 선택-111페이지
39. 장자 만들기-114페이지
40. 이삭-117페이지
41. 이삭의 축복-120페이지
42. 벧엘-123페이지
43. 서원-127페이지
44. 우물가에서-130페이지
45. 총이 없음-133페이지
46. 경쟁-136페이지
47. 야곱과 하란-139페이지
48. 돌아가라-142페이지
49. 얍복 나루에서-146페이지
50. 얍복강 이후-149페이지
51. 다시 벧엘로-152페이지
52. 야곱의 허리-155페이지
53. 야곱의 복-158페이지
54. 라헬의 묘-161페이지
55. 에서의 형통-164페이지
56. 요셉의 꿈-167페이지
57. 유다와 다말-170페이지
58. 요셉의 형통-173페이지
59. 하나님의 섭리-176페이지
60. 죄를 깨닫게 함-179페이지
61. 유다의 희생-182페이지
62. 자신을 알리는 요셉-185페이지
63. 애굽으로 간 요셉-188페이지
64. 야곱의 유언-191페이지
65. 야곱의 예언(1)-194페이지
66. 야곱의 예언(2)-198페이지
67. 유다-201페이지
68. 야곱의 죽음-204페이지
69. 요셉의 죽음-207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