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일상 17 : 원심점과 구심점
일본에 살면서 이가 갈리는 때가 있고, 가슴을 치는 때가 있으며, 비교하여 부러운 때가 있다. 다 무병장수에 안 좋은 반응이다. 서울 강남에 그렇게 많은 일제차에 비해 도쿄시내에 한국 차는 한 대도 없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한국대사관에서 관용차로 몇 대 쓴다고 한다. 연일 친일, 친일 욕하면서 우리는 배알이 있는가?
점심을 먹고 작심하고 야스쿠니 신사를 찾았다. 면상을 보고 싶었다. 와세다대학에서 와세다로를 쭉 따라가면 나온다. 이것은 일본 왕궁 옆 얕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입구에 선 엔자 모양의 도리는 엄청나게 웅장하게 만들었다. 본전까지는 사찰의 일주문과 같은 큰 도리가 2개가 서 있다. 여느 신사와 다름없지만 여기는 일반인들이 본전가까이 못 가게 하고 멀찍이 참배하게 한다. 경찰들이 여기저기서 눈을 부릅뜨고 있다. 옆에 일부러 일반인 참배처를 따로 만들어 두었다. 개인, 가족, 동료들이 삼삼오오 끊임없이 들락거리고, 검은 양복을 입는 단체참배객도 적지 않다. 누구나 그 앞에서 동전을 던지고 박수를 치고 합장하고 짧은 묵념을 한다. 야스쿠니신사에는 1904년 러일전쟁부터 2차대전 말기까지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앞장선 이들이 그와 무관하게 안장된 이들과 합사되어 있다고 한다. 국립묘지 입구에서 참배를 하면 그 안에 안장된 모든 이에게 참배하는 것과 같게 만들어 둔 것이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대대로 가업을 이어서 정치한다. 2차 대전에 패전한 독일처럼 정치지배층이 물갈이되지 않았다. 그들 정치지배층의 혈맥이 끊긴 적이 없다. 그래서 일본에게 식민지배나 침략에 사과하라고 해도 안하고 못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자기 조상의 ‘대단한 업적’에 대해 듣고 자란 아들과 손자가 되돌아서서 제 조상 무덤에 침을 뱉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간간이 마른 목을 추스르며 침을 뱉어가면서, 혼잣말로 일제를 저주 분개하면서 주변과 뒤뜰을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은 2차 대전 전후로 일본이 얼마나 ‘천신만고 끝에, 각고의 노력’으로 한반도와 중국대륙과 동남아에 ‘진출’을 하였는가를 각종 작전도와 사진, 그림, 유물로 전시해두었다. 야스쿠니는 침략전쟁기념관이다. 히로시마 원폭기념관이 왜 일본이 원폭을 맞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고, 원폭피해만 내세우는 것과 다름없다.
옆의 기념관에는 일본의 군용기와 이를 보고 그린 소학교 아이들의 입선작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정말 이러면 안 되지 하고 머리를 흔들면서, 앙증맞은 모자를 쓴 천진난만한 유치원생을 보면서, 저들도 자라서 ‘왜놈’이 될까 생각하면서 내 스스로 섬뜩해진다. 세계화시대에 나는 유학도 하고 해외 체류도 하면서, 왜 아직도 사해동포주의자가 되지 못하고 여기에 머물고 있을까? 기념품 가게는 일본(제국주의)적인 것을 판다. 다른 한 전시실에는 일본도를 전시한다. 그리고 동영상에서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장인들의 땀 흘리는 모습을 비춰준다. 30여명의 중년들이 그 기록물을 보고 있다. 단칼에 싹둑 베는 일본도,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운 일본도, 여기를 들러 가는 이들은 일본적인 것을 흠뻑 느끼도록 되어 있다. 야스쿠니를 비롯하여 일본 전국 각처에 있는 신사는 일본정신(和魂)의 구심체이다.
우리의 구심점은 무엇이며 어디인가? 우리는 무엇으로 국민들을 단결시키는가? 내가 보기에, 오늘날 우리는 정치적으로 과잉독재 후에 과잉민주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성숙한 민주주의, 민주시민의 자발적 책임, 의무는 찾아보기 어렵고 자기 권리만 주장하며 온갖 떼법이 난무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과잉성장 후에 과잉복지로 재정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중앙정부, 지자체, 공기업이나 공공기관이 허덕이고 있다. 문화적으로 과잉획일화에서 과잉다원화로 사고와 언어, 행동과 생활의 기준이 지나치게 상대적이어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다.
우리에게 분열할 원심점은 많은데 뭉칠 구심점은 무엇인가? 오늘 형세는 임란전, 병자호란 전, 19세기 말, 해방 후 찬탁반탁 시기와 다를 바가 없다. 원심점은 많아서 분열하고 흩어지는데, 구심점은 거의 찾을 수 없어 뭉치기 어렵다. 온갖 갈등이 많을수록 먹고 살기 좋은 직업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인이나 언론인들은 이를 더 부추킨다. 참으로 안타깝고 때로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애국자연하는 이들은 모두 국내 문제로 갈등을 부추기는 자들이다. 그들은 국내정세엔 천 개의 눈과 입을 가졌으나, 국제정세, 외교안보전략 등에는 하나의 눈도 입도 없다.
꿈에도 소원이라는 남북통일이 우리의 구심점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한 때는 그러했던 것같다. 1994년 통일연구원의 조사를 보면 조사대상자의 91.6%가 통일이 필요하다고 대답했고, 8.4%가 통일이 불필요하다고 답했다. 그리고 통일이 부담되어도 빠를수록 좋다는 대답이 62.3%였다. 그러나 2013년 KBS 여론조사를 보면 통일이 반드시 되어야 한다는 응답이 24%, 그리고 큰 부담이 없다면 통일이 좋다가 45%,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31%나 나왔다. 통일에 대한 무관심과 반대가 급증했다. 현 대통령이 통일은 우리 민족에게 ‘대박’날 일이라고 말하였는데 여론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있다. 주변 강대국들은 우리의 이런 속내, 희망, 의지, 능력 정도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이이제이(以夷制夷)다. 마르고 닿도록 분단을 이용해먹을 수 있다고 속으로 쾌재를 부를 것이다. 한국이나 북한이나 참 먹기 좋은 어부지리(漁父之利)감이다.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며 옆에 있는 일본 왕궁이 있는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방어벽인 호(濠)를 엄청 크게 파 놓았다. 일왕궁은 규모도 엄청나지만 감히 일반인들이 범접하지 못하게 바깥쪽을 널찍하고 훤히 볼 수 있는 공원으로 조성했다. 아주 멀리 떨어뜨려 권위를 더하였다. 둘레가 4-5킬로 정도 되는 듯한데 그 보도를 따라 달리는 조깅족으로 넘쳐난다. 우리 옛 조상들은 중국도 가 보았고 왜국도 와 보았을 것이다. 거기엔 왕궁을 수호하기 위해 엄청난 호를 팠음을 알았을 것이다. 심지어 일본의 쇼군들도 자기 사는 거처를 그렇게 방어했다. 우리는 역사상 960번의 외침을 당했다고 한다. 잦은 전란을 겪으면서도 왜 그런 호를 파지 못했을까?
중국의 자금성을 가 본 사람들은 느낄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 관광객이 서울의 왕궁을 보면 우리를 깔 볼 것같다. 나는 늘 돈이 좀 들어도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을 이어야 한다고 본다. 경희궁과 덕수궁까지 이으면 더 좋겠다. 잘 모르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이어서 쓰였을 것으로 본다. 규모로라도 좀 번듯했으면 좋겠다. 다리가 아파서 한국의 궁궐은 다 둘러보기 어렵다는 얘기가 좀 나왔으면 좋겠다. 대만의 국립박물관, 파리의 미술관, 대영박물관 등등을 말할 때 며칠을 볼 분량이라고 하듯이, 우리 궁궐도 이어두면 좋겠다. 최소한 저들이 깔보고 가지는 못하게!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선생은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인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사쿠라다몬(櫻田門) 부근에서 수류탄 1개를 던졌다. 말이 다치고 마차가 손상됐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했고 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얼마 못 가 사형당했다. 만약 당시 지원이 제대로 되어 성능 좋은 폭탄이 만들어져서 거사를 성공시켰다면 우리나라와 아시아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 이후 지원에 힘입어 윤봉길 의사의 폭탄 성능은 좋아졌고 그래서 성공했다. 내일이 바로 그 날이다. 정말 안타깝다! 이봉창 선생이여, 오늘 이 나라의 내분과 얼이 약해짐을 굽어 살피소서!
오늘 내 나라와 내 일자리가 마음에 안 들어 분신자살하는 이가 적지 않다. 심지어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들어 분신한 이도 있다고 한다. 부정선거로 당선되었다고 승복을 낳는 사람도 적지 않다. 정말 억울했을 미국의 앨 고어를 생각한다. 그는 자기 나라와 국민의 민주주의 성숙을 위해 ‘승복’했다. 자유민주국가인 내 나라를 허물지 못해 왜들 안달일까? 대외적으로 이어도를 중국의 힘에서 지켜내기 어렵고, 독도를 일본의 야욕에서 지켜내기 어려운 가운데, 붕괴될 수밖에 없는 북한을 중국의 손아귀(조차지, 신탁통치)에서 건져내려고 통일을 준비하는 이들은 너무 적다. 독도에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에 대해, 위안부에 대해 사과도 보상도 않는 일본에 대해 비분강개한다면 누군가 여기서 분신을 해야 했으리라. (물론 인명을 그렇게 가벼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이어도를 지켜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나는 지금도 마라도를 국유화해서 항공모함도 없는 나라에서 공군기지라도 만들어야 강정마을 해군기지와 합하여 우리의 영해, 영토, 영공인 이어도를 지킬 수 있다고 본다.
나도 실현하지 못하는 생각이 결국 남 탓을 하게 된다. 인터넷을 보면 10자를 적는 이들이 모두 애국자들이다. 내가 일제 강점기에 살았다면 나는 독립투사가 되었을까? 나는 ‘불령선인’이 되었을까? 당시 살았던 사람들을 분류해보면, 적극반일, 소극반일, 겉친일 속반일, 필부필부, 겉반일 속친일, 소극친일, 적극친일 중 대다수는 양극단과 상관없다. 그럼에도 당대에 살지 않았다고 하여 자기만 애국자연하는 사람들이 ‘지금’ 너무 많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세 차례 걸쳐 반민족친일분자들을 발표했는데 1,005명이다. 역으로 보훈처는 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를 발굴 포상해왔는데 오늘까지 13,403명이다. 다행히 후자가 많다. 당대를 철 든 성인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2천만명이라고 가정했을 때, 애국지사는 0.1%도 안 된다. 그래도 나는 그 축에 들었을까? 그보다, 그보다 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가혹한 치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비참한 삶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당했을 사형, 학살, 죽임, 투옥, 고문, 감금, 폭행, 차별, 멸시, 천대, 유랑, 강제 노역, 겁탈, 약탈, 위협, 누명, 욕설, 비하 등등이 우리 조상들의 가슴 속 깊이 맺힌 한이다. 우리는 나라 잃은 설움을 너무 일찍 잊었다. 그러니 960번의 외침을 당했지 않았는가? 역사를 잊은 민족, 내분을 거듭하는 민족, 꿈을 잃은 민족은 망한다!
왕궁을 돌아 국회도서관을 따라 가다보면 인근에 각 행정부처와 각국 대사관들이 나란히 있다. 왕궁을 둘러싸고 국가의 중요 통치기관과 외국대사관들을 함께 배치한 것이다. 천황숭배사상이 이런 물리적 구심점으로 나타난 것으로 본다. 우리는 어떤가? 행정부처는 세종시에, 그 행정 수반인 대통령은 서울 광화문에 있다. 국회는 여의도에서 장차관과 고위직을 불러올린다. 과장 이하 해당 부서 직원들은 줄줄이 따라와 머리를 조아린다. 이 무슨 짓인가? 나라의 중요한 일을 화상회의로 할 수도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대통령도 국회도 세종시로 가야 한다. 한심한 일에 가슴이 미여온다.
걸어서 걸어서 이미 어둑해진 메이지도리(明治通路)에 있는 S라인 건물의 대한민국 문화센터가 반갑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1층을 둘러보았다. 참 좋다. 도쿄 한 복판에 이만한 건물에 이 정도 시설과 프로그램을 유지하는 나라가 세계에 몇 나라나 될까? 참 뿌듯하다! 내 나라 대한민국! 조금 더 걸어서 와세다대학 쪽으로 오면 오오쿠보거리다. 지난날 슬럼가였던 곳에 한국인들이 정착하면서 번듯한 번화가로 변신한 곳이다. 참 장하다! 대한국인들!
다시 역사 앞에 겸허히 반성해본다. 나라가 위급할 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할 수 있을까? 내일 사꾸라다몬 앞에 누군가 이봉창 의사를 묵념을 하고 있을까?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누군가 거기서 머리를 숙이고 있을까? 나라도 가야하지 않을까? 거기서 속으로 오늘 그 분들이 만든 나라를 위해 피눈물을 흘려드려야 하지 않을까? 201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