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엉뚱한 얘기 같지만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왜 먼저 우는 걸까? 저를 기대하며 모두가 기뻐하고 좋아하는 축복된 날인데 방긋방긋 웃으면 안 될까?
우리 큰 아이가 태어 나던 날 나는 초조함 속에서도 가끔씩 들리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줄곧 그 궁금증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내의 진통이 멎고 우리 아이의 울음소리가 분만실에서 울려 나오고 부터는 아예 여유 있게 신생아실을 오가며 꼬물락 거리고 있는 갓난아기들을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면서 그 생각에 잠겼었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왜 먼저 우는 걸까? 세상으로 밀려 나가는 인생의 첫 관문이 너무나 좁고 힘들어서일까? 아늑하고 편안한 엄마의 뱃속에서 언제나 그렇게 머물러 있고 싶은데 뭔가에 의해서 떠밀려지고 엄마로부터 떨어지는 단절의 슬픔을 예민하게 느껴서일까? 그나마 엄마로부터 이어진 생명의 탯줄마저 끊기는 외로운 슬픔과 삶의 위협을 본능적으로 느껴서일까? 이제 살아갈 세상에 대한 걱정이 먼저 앞서서일까?
죄의 형벌로 인해 잉태와 출산의 고통을 받아야 하는 여인들의 기구한 인생을 엄마의 몸에서 자연스러운 태교를 통해 들은 대로 느낀 대로 자기를 잉태한 엄마를 통해 막바지에 절감하면서 그 죄의 형벌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가를 몸부림치는 엄마의 몸을 통해 가장 가까이서 옥죄어오듯 전달됨을 여린 몸으로 느끼면서 애처로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실감했기 때문일까?
산고는 멀쩡했던 사람을 졸지에 초죽음 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순간에 볼 수 있는 지옥의 아비규환이랄까? 그것은 실로 견디기 힘든 괴로운 고통을 보는 또 하나의 고통이었다.
전날 오후3-4시경 배가 아파온다는 아내를 데리고 병원엘 갔는데 아내는 긴긴 밤새 내내 진통하다가 다음날 아침 8시가 넘어서야 분만했다. 정말 그때까지의 시간은 처절한 것이었다. 나는 반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줄곧 안절부절 못하면서 진땀을 흘리며 괴롭고 고통스러워 신음하는 아내의 손을 대책 없이 부여잡고 간절히 하나님만 불렀었다. 그때 그 고통의 신음, 괴로움의 몸부림 그것은 참으로 뼈저린 진통이었다. 아내는 너무 힘들어 했고 괴로워 했다. 나는 그때 잠시 몇 시간 동안 주어지는 것이지만 하와로 인해 주어진 죄의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했다.
그렇다면 영원히 받게 될 죄의 형벌의 고통은 얼마나 무섭고 클까? 나는 그것을 몇시 간 동안이지만 뼈저리게 절감했다. 그렇게 옆에서 보기조차 고통스러운 것인데 아이를 낳는 본인은 어떠했을까? 나는 그때 아내의 몸부림치는 진통을 피해 안보고 안 들리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은 절실한 심정을 몇 번씩이나 느꼈다. 정말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처절한 고통의 모습이다.
아기는 도대체 태어나자마자 왜 먼저 우는 걸까? 방긋방긋 웃으면 안 되는 걸까? 태어나자마자 아기가 웃는 것을 보았다는 자는 혹시 없을까?
우는 것은 본능적이고 선천적이나 웃는 것은 크면서 배우는 것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분만실 밖에서 안절부절 못하면서 자기의 탄생을 초조히 기다리는 가족들을 위해 이제나 태어났다고 알리는 분명한 신호가 웃음보다 울음이 더 생생하고 확실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금방 나온 아기의 두 다리를 거꾸로 쥐고 ‘이 녀석 여러 사람 혼나게 했다’며 오래토록 멍이 들도록(그것은 몽고반점 이지만) 볼기를 때리는 산부인과 의사의 커다란 손 때문일까? 아니면 태어나자마자 보고 느끼는 난생처음의 살벌한 분만실의 그 분위기 때문일까? 마치 못되고 흉악한 죄인을 채워놓고 고문하며 취조할 때 쓰기위해 만들어진 싸늘한 형틀 같은 분만대, 사정없이 만들어진 섬뜩한 의료기들, 집게, 싸늘한 메스, 가위, 피 묻은 거즈, 약품냄새보다 더 짙게 풍겨지는 역한 피비린내, 죄인 다루 듯한 간호사와 의사의 냉정하고 짜증 섞인 소리, 그들의 엄하고 차가운 표정, 그곳에서 뒤틀림 당하듯이 채워져 몸부림치는 고통의 비명소리 뭐 이런 살벌하고 무서운 상태가 아기를 놀라게 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살벌한 분만실이 없었던 시대, 따뜻한 온돌방에서 경험 있는 이웃의 중년 아주머니나 가까운 할머니들이 자기 일처럼 다정히 정성껏 산파 역할 해 주던 그때도 아기는 울었던 것인데 그렇다면 그것도 이유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왜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응애 응애”하고 우는 걸까? 방긋방긋, 방글방글, 기분 좋게 웃으면서 나오면 안 될까? 모두가 다 기뻐하고 좋아 하는데, 하나같이 자신의 탄생을 축하하며 즐거워 해주는데 왜 우는 걸까? 이것이 엉뚱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매우 궁금했다.
산부인과 의사에게 한번 진지하게 물어볼까도 했다. 아니 그냥 슬쩍 신생아실을 들락 거리는 간호사에게 농담반조로 한번 건네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의학적이고 논리적이고 또 어떤 체험적인 대답으로 내 궁금증을 풀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뭔가 막연한 것이지만 아기의 첫 울음소리에는 누구도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굉장한 어떤 비밀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이 인생의 커다란 숙제같이 느껴졌고 이것을 아는 것에는 인생의 엄청난 비밀이 드러나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그것의 궁금증이 더하면 더할수록 매우 심각함과 진지함을 느꼈고 반면에 매우 설레임도 느꼈다. 그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내게 어떤 기발한 확신을 가져다주는 것이 생겨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번뜩이는 영감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 답을 나름대로 직감하며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그렇다, 갓난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먼저 우는 것에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에는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사는 우리 인간 모두가 들어야 하고 알아야 하는 무언의 크고 깊은 인생의 근원적인 의미가 꾸밈없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우리 죄인 된 인생의 전부가 바로 암시되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빈주먹으로 왔다가 빈주먹으로 돌아가는 슬프고 허무한 인생을 아기는 엄마의 힘들고 어려운 좁은 문을 통해 막 출발하면서 본능적으로 느낀 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인생은 슬픈 것임을 본성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일찍이 성경에서 야곱이나 모세의 인생 말년을 통해 고백되고 정리되었던 것처럼 우리 인생의 삶에 자랑할 것이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했지 않았던가. 진노의 삶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이기에..... 그래서 구원과 회복된 삶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던 솔로몬 왕도 말년에 고백하기를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일평생은 어두운데서 먹고 번뇌와 병과 분노가 있다고 했고 인생은 잠시 피었다가 사라지는 광야의 들풀 꽃과 같이 잠시 적이고 헛되다고 했는데 바로 이런 고생과 허무한 인생의 슬픔을 아기는 태어나는 과정을 통해 순진하고 예민한 감각으로 느끼면서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의 슬픈 인생의 진실이 꾸밀 수 없는 아기의 울음 속에 증거 되고 있는 것이다. 오염 안 된 순진한 몸으로 세상을 처음 대하면서 이 세상이 어떤 곳임을, 이 세상 삶이 어떤 것임을 느낀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거짓 없는 그의 순수한 울음이 인생과 세상이 어떠함을 만 천하에 고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갓 태어나는 순진무구한 아기만이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느낌이요 진실하고 심각한 표현인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고 결국 모두로부터 떨어지는 영원한 외로움의 슬픈 인생을 어머니 태로부터 떨어지면서 고난의 그 인생을 감지하는 것이다. 인생은 고난을 위해 났다고 성경도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아이는 자라가면서 웃음을 배워 가리라. 그리고 다시 웃음을 잃어버린 늙은 인생의 슬픈 말년이 될 때까지 인생의 참 슬픈 진실을 잊어버리고 살아 가겠지….
나는 우리 큰 아이가 태어나던 날 이런 슬픈 세상과 인생에 대한 진실한 고함을 갓난아기의 서글픈 울음을 통해 듣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웃지 않고 먼저 울 수밖에 없음을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었다.
좀 엉뚱한 얘기 같지만 이것은 내게 있어 난생 처음 듣는 인생의 소중한 울음 소리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