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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벳 ‘사자의 서’ 2부 - 죽음과 환생의 49일간의 여행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세계의 창의 신윤주(아나운서)입니다.
우리는 가끔 죽음의 문턱을 오갔던 사람들로부터 이 세상이 아닌 저세상 그러니까 소위 저승을 경험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옛날이야기 속에는 저승사자나 귀신과 같이 사후의 세계를 묘사한 구체적인 소재가 언급되고 있습니다만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우리는 죽음 뒤에 어떤 것을 경험하게 될지 단언할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 티벳 불교문화권에서의 윤회와 환생 그리고 죽은 자의 영혼을 다스린다는 ‘바르도 토트롤(사자의 서)’에 관한 프로그램을 여러분과 함께 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죽은 자가 환생하기까지 영혼이 떠도는 과정과 그곳에서 과연 어떤 것을 경험할 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죽음과 환생에 49일간의 여행 편을 여러분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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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는다는 건 어떤 뜻입니까?”
“죽음은 만물의 끝이 아니니라.”
“저는 ‘초탄 체린’입니다. 8살 때 어머니 손을 잡고 산꼭대기에 있는 이 사원에 들어왔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여기서 삶의 이유(?)를 찾아야 된다고 말씀하시곤 저를 남겨두고 가셨습니다. 전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 지도 몰랐어요. 그리고 벌써 5년 정도가 흘렀습니다. 대부인 저의 사부는 ‘하르마 초르단’이십니다. 사부님도 저처럼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셨데요. ‘라사’에서도 금욕생활을 계속 하셨기 때문에 사부님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고 계십니다. ‘라사’는 라마교의 성지입니다.
사부님께서 저와 다른 아이들에게 가르치시고 계신 경전은 라사에서 직접 가지고 오신 겁니다. 사부님께서는 중국 군대가 라사를 침공했을 때, 티벳의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라사에서 100권의 고대 경전을 짊어지고 이리로 피난하셨다고 합니다. 사부님께선 항상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경전은 몇 천 년에 걸쳐서 금욕의 수행을 닦은 우리 조상들의 지혜이다. 그렇지만 불교 경전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어느 날 사부님께서 약간 긴장하신 표정으로 ‘우리는 내일 아침 일찍 떠날 것이니 ’사자의 서‘를 잘 챙겨 두거라.’ 하셨습니다. 마을에서 어떤 남자가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위해 사부님과 함께 경전을 읽는 건 이 사원에 들어와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사자의 서’. 이 책은 죽은 사람이 환생할 때까지 49일 동안 읽어주는 경전입니다. 이 경전을 본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렇게 해서 49일 동안의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니라.”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그것은 이 경전에 아주 자세히 나와 있단다. 이 책은 ‘사자의 서’라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중음’으로 간다. 우리가 이 경전을 읽으면서 안전하게 죽음을 이끌어주면 죽은 자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우리의 임무이다.”
“마을 변두리에 사는 소남 가족은 아주 독실한 신자들이야. 소남 노인은 가끔 절에도 왔으니 아마 너도 본적이 있을게다.”
“그 분이 돌아가신데요?”
“나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더구나. 둘째 아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 같더라. 여행하는 중에 몸이 쇠약해졌다더구나. ‘소남 체례’가 지금 42세에다가 한창 나이에 몸져 누운거지. 그래서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을 끊어버리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야. 게다가 그에겐 부인과 아이들 그리고 늙은 아버지까지 있으니, 이런 경우 그는 사후 49일 동안 세 가지 유형의 ‘중음계’를 방황하게 될 것이다. 그 사이 영적인 깨닫음을 얻지 못하면 49일 후에 짐승으로 환생하거나 지옥으로 가게 된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 내가 최선을 다할 것이니 너는 그걸 잘 지켜봐야 하느니라.”
“울지 마십시오. 아무 소용없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의 의식을 방황하게 할 뿐입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소남 체링’이 평화와 고요함 속에서 쉬게 해주는 겁니다. 자 먼저 몸 오른편에 이 와불상을 놓아 두십시오. 그럼 이 사람의 육신을 통과하면서 불어대는 바람이 잔잔해질 겁니다.”
“사부님께선 이 사람이 죽는 순간까지 들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죽음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는 거죠.”
“소남 체링, 내 말을 잘 들으라. 소남 체링, 내 말을 잘 들으라. 소남 체링, 내 말을 잘 들으라. 두려워 말라. 지금부터 너는 조금씩 의식을 잃게 될 것이다. 너의 육체는 다시 여러 요소로 분해될 것이다. 마치 무거운 물건으로 눌리는 느낌이 될 것이다. 그 순간이 곧 올 것이다.”
“‘사자의 서’에서는 죽음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합니다. 죽음은 우리 인간이 영적인 깨우침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죽음은 전혀 슬퍼할 일이 아니다. 죽음은 가장 큰 자유를 얻는 순간이다. 죽음 후 빛이 다가오는 ‘중음(中陰)을 경험함으로서 성숙치 않은 인간이라도 순수한 삶 그 자체를 만날 수 있다. 죽음은 모든 것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의 진정한 풍요를 가르쳐준다.
불교 경전은 많지만 나만큼 굴곡의 삶을 살아온 경전도 없을 것이다. 나 ’사자의 서‘는 천 년이 넘는 동안에 수 없이 죽음과 환생을 반복했다.
“숨이 끊어지면 신령한 불빛이 보일 것이다. (초입 중음기, 사후 첫 3일간) 이것이 바로 삶의 정수이다. 이는 티멘(?) 밀교에서 물려받은 빛의 교훈이다. 바로 이것이다. 다가오는 빛 속으로 녹아들라. 그 빛에도 순수하고 공허하며 세상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빛들은 생과 사를 초월하는 영혼 자체의 흐름이다. 그 안에 녹아들라.”
“죽은 자를 구원으로 안내하는 빛. 죽은 자의 마음이 육체적 실체를 떠나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그 순간이 아주 중요한 때입니다.”
“이제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분리되는 동안 죽은 사람은 자기가 죽었는가, 살아있는가를 모릅니다. 그러면서 가족들이 울고 있는 걸 보고 듣게 되는 거죠.”
“소남 체링, 내 말을 잘 들으라. 죽음이 찾아왔다. 외로워하지 말라. 죽음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이 세상의 어떤 애착도 느끼지 말라. 이곳에 머물 길은 없느니라.”
이제 너의 영혼은 육신과 분리되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너는 네 가족과 친척들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네가 누워있던 침상에 갈 수는 있지만 거기 누워있는 것은 이제는 네가 아니다. 버려진 육신이 보일 뿐이다. 네 이름을 부르는 가족과 친척을 보라. 아무리 그들에게 다가가려 애써도 그들은 알아보지 못한다. 슬픔이 네 마음을 찌르는 순간이다.
“소담 체링, 내 말을 잘 들으라. 너에게 죽음이 찾아왔다. 그러나 ( ? )워 하지 말라.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너만이 아니다. 죽음은 모두에게 일어난다. 근원의 빛은 노출(?)된 이후 너는 여러 가지 빛과 소리(?), 색을 경험할 것이다.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 빛과 소리, 색은 실체가 없다. 그것들은 너의 의식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니라.”
“사부님께선 ‘보고 느낄 수 있는 의식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항상 말씀하십니다. 사부님께선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은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믿을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명상을 통해 배우라고 하셨죠.”
“사부님, 주문에 대해 더 말씀해주십시오.”
“음, 그건 길을 가고 있다는 뜻이다. 죽음도 그 길의 일부로서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일 뿐이다.”
“그럼 우리도 ‘중음’에 가고 있는 중인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삶의 중음’이라고 한다. 너는 중음과 환생 사이에서 세 가지 중음을 지나가야 한다. 바로 초기 중음, 중간 중음, 그리고 ‘만중음’이지.”
라마승의 나팔소리와 함께 또 하루가 밝아왔다. (중기 중음, 사후 4일째부터 21일까지)
“사부님, 그 사람은 해탈을 얻을 수는 없죠? 다른 중음으로 들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 중기 중음의 입구에서 힘이 약해졌다. 회복되려면 사흘이 걸려요.”
“아직도 들을 수 있을까요?”
“음, 이젠 귀로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혼은 육신을 떠나고 전보다 확실히 온갖 소리들이 들릴 것이니라.”
“소남 체링, 내 말을 잘 들으라. 너는 사흘 반 동안 의식이 없었다. 너는 네가 어디에 어떻게 와 있는지 모르고 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은 중음 중에서 여러 가지 빛을 보게 됩니다. 이때 그 빛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식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너는 찬란한 빛을 보았을 것이니라. 짙은 푸른색으로 빛나는 그 빛은 ‘비로전하불(?)’의 빛을 뜻한다. 그리고 또한 흰빛도 볼 것이다. 매혹적인 빛이지만 찬란하지는 않다. 그것을 조심하라. 이 빛에 이끌리면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끝없는 윤회의 고리에 다시 떨어질 것이다.”
“토탄, 이제 소담 체링이 중음에서 만나게 될 신들을 보여주겠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42개의 평화의 신과 피를 빨아먹는 58명의 분노의 신이 살고 있다. 두 번째 중음에서 이 신들은 하나씩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의 신들은 친절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인간의 혼을 유인하고 영혼을 구원으로 안내하는 빛을 내고 있다. 이러한 시도가 실패하면, 신들은 악몽처럼 무시무시한 신으로 변신해서 53개의 애착을 갖고 있는 죽은 자의 자아를 눌러버린 다음 깨침의 길로 몰아넣는다. 평화와 분노의 신들은 두 가지 모습으로 죽은 자를 구원으로 인도한다.“
너는 죽은 자를 당황하게 하는 수많은 환영을 만날 것이다. 이 환영들은 네 혼에 있는 빛의 투영이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이 나타나도 너는 분노와 함께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버려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혼이란 영혼 존재의 진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자의 서’에서는 죽은 사람이 보는 환영은 실체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만물이 물에 비치는 달무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사망 후 8일째)
“소남 체링이 죽은 뒤 여드레가 지났지만, 그는 아직도 구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의 의식은 곧 분노의 신들을 만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중음에서 가장 힘든 단계입니다. 여러분이 그를 위해 기도를 해주면 그는 악도를 벗어나서 해탈을 얻을 것입니다.”
“소남 체링, 내 말을 잘 들으라. 분노의 신들이 네 앞에 하나씩 하나씩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무서운 표정을 두려워하거나 도망치지 말라. 저것은 가면을 쓴 너의 수호신이다. 이 신들은 네 마음속에 있는 순수한 환영이니라.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 신들은 해탈을 얻도록 도와줄 것이다.”
“우리는 온화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하고 무섭고 추악한 것들은 싫어합니다. 이는 우리가 그런 것들에 너무 집착하거나 그 실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고 추악한 것은 추악하지 않습니까?”
“아니다. 가슴의 챠크라에서는 평화로운 신들이 나타나지만, 뇌의 챠크라에서는 분노의 신이 나타나게 된다. 환영은 늘 변한다. 너는 그 모두에게 어떤 집착도 하면 안되느니라.”
▶ 챠크라 - 단전처럼 우리 몸 7군에 위치한 기가 모이는 중심
“그 분노의 신도 우리 실체의 일부인가요?”
“그렇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도망하는 게 어리석다고 한 것이다.”
너는 부처나 신들 중 하나가 바로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라는 것을 믿음으로써 해탈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죽음을 관장하는 야차 앞에 자신을 드러낸다. 이 야차는 네가 두 번째 중음에서 만나는 마지막 환영이다.
(만(滿) 중음 - 사망 후 21째부터 49일까지)
만중음이 시작됐다. 죽은 자의 의식은 육체적인 실체 대신 감각으로 이루어진 욕망체를 가지게 된다. 이 단계에서 죽은 자는 살아있을 때보다 강한 힘을 갖게 된다. 너의 의식이 육신과 비숫한 것을 가졌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너는 그 육신이 기적적인 힘을 가졌다는 것과 바위나 산, 나무 그 밖의 모든 것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환생은 나쁜 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윤회가 준비한 덧이다.
“소남 체링, 내 말을 잘 들으라. 너는 가족들을 볼 수도 있고 꿈에서처럼 어디든 갈 수도 있다. 그러나 가족들은 네가 곁에 있는 걸 알지 못한다. 너는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깃털처럼 업을 따라 떠내려 갈 뿐이다.”
“그는 해탈을 얻을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는 마침내 (...)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는 환생에 직면하고 있으며 마지막 중음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천상 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 육도 고리 안 어딘가에서 환생할 것입니다.”
“소남 체링은 내말을 잘 들으라. 지금까지 너는 전생에 갖고 있던 육신의 형상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습이 흐릿해졌고 대신 내생에 갖게 돼있는 새로운 내생의 모습을 더 똑똑히 보고 있다. 그것을 알고 나서 너는 슬픔을 느끼고 또 이미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내생에서 무엇으로 살아갈지 관심을 두지 않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어떤 방향으로든 끌려가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소남 체링,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자신을 관세음보살로 안내하라. 육계로 빠져버리면 안된다. 지금이 구원의 시간이다.”
(사망 후 49일째)
“음, 우리는 이제 49일 동안의 긴 여행을 끝내고 있습니다. 중음의 끝에서 우리는 내생에 다시 태어날 세 개의 특징을 우리 눈앞에서 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신중히 판단하여 우리는 악도에 빠지지 않게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소남 체링, 내말을 잘 들으라. 너는 이미 윤회와 환생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네가 되돌아갈 세계를 잘 선택해야 더 나은 삶으로 환생할 것이다. 거기에 들어가지 말라. 거기는 끝없는 황야다. 거기는 아귀의 세계니라. 거기로 들어가면 너는 끝없는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소남 체링, 아귀의 마음에 이끌리지 말라. 짐승의 마음에도 손대지 말라. 네 마음을 선하고 순수하게 지켜라. 너는 다시 인간으로 살아나야 하니 해탈을 위해 여러 번 인간으로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 모든 걸 듣고 나니 생은 반드시 축복받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이 반드시 슬픈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생명을 얻는 것도 다 기뻐할 일이 아니다.”
“원래 우리 삶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그런 말씀이십니까?”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우리 영혼의 정수를 이해할 때에만 삶엔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삶은 그저 무의미한 축적물이 될 것이야. 여기 올 때만 해도 너는 아무것도 몰랐는데 이젠 네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하는구나.”
“아주 훗날 제가 혼자서 울고 있으면, 사부님이 저를 안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울면서 태어나지만 온 세상은 기쁨에 넘친다. 사람이 죽을 때 온 세상이 울지만 그 사람은 큰 행복감에 휩싸일 것이다. 삶은 바로 그런 것이다. 죽고 또 다시 사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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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주(아나운서)
네. 여러분 어떻게 보셨습니까?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종교는 사후의 세계를 규정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만, 티벳 불교문화에 있어서 윤회와 환생은 그들의 삶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음 뒤의 세계,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후의 세계를 알 수 없다 해서 그것을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는 ‘인간은 과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시공을 초월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일 것입니다. 윤회와 환생을 믿으십니까? ‘세계의 창’ 오늘 여기서 마칩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 후기
먼저, 영상의 상연시간이 긴 탓인지 해상도나 음성의 질이 떨어져, 집중하여 몇 번씩 반복하였음에도 정확하게 기술할 수 없는 단어들이 많아 (?), (...) 등의 방식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영상을 통해 그동안 ‘사자의 서’에 대한 내용의 궁금증이 약간이나마 해결이 된 것 같고 사후의 세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물론 ‘사자의 서’의 방식이 절대적으로 맞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영상은 내용에 대한 설명을 위해 그래픽이 추가되었으므로 단지 해설글로만으로는 영상을 표현하는 데 너무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하면, 영상으로 관람하는 것이 더 생생하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