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평〛
시간여행을 통한 모성의 탐구
한정기 장편소설『깡깡이』
김 문 홍
...내 이야기를 쓰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지만 지나간 한 시절을 복기하는 것은 작가가 져야 할 책임이구나 싶었다. 내게 주어진 그 책임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정하자 비로소 마음 깊은 곳에서 이야기가 조금씩 꿈틀대며 자라기 시작했다. - 『깡깡이』창작노트에서
과거와 현재의 교차적 서사 진행
그것을 견뎌내야 할 때 시간은 하나의 고통이었지만, 그것을 멀리 떠나와 혹은 비켜서서 바라볼 때 시간은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이 될 수도 있다. 수면 밑에 가라앉은 당시의 고통은 하나의 트라우마가 될 수 있지만, 수면 위로 떠올려 그것을 뜨겁게 안을 때 그것은 오히려 카타르시스가 될 수 있다.
한정기의 장편소설『깡깡이』(2018,특별한 서재)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에 가깝다. 그렇지만 그것은 작가의 개인적 연대기일 수도 있고, 또한 그 시절을 살았던 어느 누군가의 사적인 역사일 수도 있다. 지금도 그곳을 찾아가 당시에 있음직했던 그 골목 어귀에서 누구누구야 하고 호명하면, 저요, 저요 하고 그리운 얼굴들이 다소 투박한 걸음걸이로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한정기의『깡깡이』는 이미 개인의 흔적이고 부끄러운 역사가 아닌 그 시절을 살았던 우리 모두의 보편적 연대기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 작품의 서사적 플롯은 특이하다. 화자의 어린 시절의 과거와 이미 성인이 된 현재가 혼재된 채 사건이 진행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과거는 화자가 초등학교 6학년 무렵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의 2년 정도의 짧은 시간이고, 현재는 그림 전시회를 앞두고 있는 화자와 치매로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어머니의 일상적 시간이다. 시점 역시 1인칭 주인공 시점이지만 현재의 화자가 과거 속의 화자인‘정은’곁에서 그 시절을 지켜보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이중 시점을 유지하고 있다. 과거는 모두 20개의 소제목으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는 모두 9개의 장면이 과거의 몇몇 장에 덧붙여져, 시간의 교차적 전개로 진행되고 있다. 과거는 가족과 이웃의 삶의 풍경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지만, 현재는 화자인 나와 어머니에 국한되어 일종의 수필적 상황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작품은 단순한 하나의 이야깃거리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1970년대 초라는 한 시대와 당시 서민들의 생활상, 부산 영도라는 특정한 공간의 지역성, 의식주, 부산 사투리, 그리고 사회상과 산업 양상을 현재에 고스란히 재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박물지 같은 가치성을 지닌다. 즉, 한 세대 전이라는 당대의 시간과 공간을 비교적 정확하게 복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훌륭한 지역 풍물지로서의 가치성을 획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깡깡이’라는 일용직의 작업 과정과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이 작품의 서사적 내용을 구분해 보면 이야기의 큰 얼개는 모성의 강한 힘, 맏딸이라는 책임감, 가난을 벗어나려는 염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모성, 여리지만 강한 힘
모성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개념이다. 인류가 생긴 이래로 지금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성은 강하고 위대하다. 그것은 지식의 유무를 떠나, 빈부에 구애받지 않고 자식을 행한 모성은 일관되고 지속적인 속성을 견지해 오고 있다. 『깡깡이』에 나오는 5남매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한국적 어머니상을 대변한다. 자식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보이지 않으면서도 고루 사랑하는 마음, 비록 가난하지만 자존감을 지키며 자식들이 엇길로 나가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 결단, 그리고 자신의 곁을 쉽게 주지 않으면서도 모두를 품으려는 포용성, 지아비의 부덕함에도 가장으로서의 무게중심을 인정하려는 의연함 등이 바로 그것이다.
①
나는 가만히 엄마를 안았다.
엄마는 계속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엄마 가슴에 손을 얹어 봤다. 말라붙은 젖가슴 아래 심장이 뛰는 게 가늘게 느껴졌다.
나와 동생 넷이 이 젖을 빨며 자랐다. 자식 다섯이 차례로 빨아 먹고 이젠 껍질만 남은 엄마의 흰 젖가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처진 가슴 끝에 달린 젖꼭지만이 한때 생명을 먹여 키웠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엄마는 작은 몸피에 견줘 가슴은 풍만했다. 크고 단단한 젖가슴에서 샘물처럼 솟아나오던 흰 젖. 막내 동우는 그 젖을 휘어 삼키느라 자주 사례에 걸리곤 했다.(49-50쪽)
②
엄마가 사무실 담벼락 한쪽에 돌아앉아 셔츠를 걷어 올렸다. 온몸에 검은 쇳가루를 뒤집어썼지만 속옷 안에서 나온 엄마 젖가슴은 닦아놓은 사발처럼 하얬다. 사방에 남자들이 득실거리는 조선소였다. 여기저기서 용접 불티가 튀고 바닥에는 쇳덩이와 철판이 널려 있었다. 어른 팔뚝만큼 굵은 체인이 벌겋게 녹슨 채 쌓여 있고 독한 화공약품과 페인트와 쇳가루 냄새가 진동하는 곳. 일하는 사람들 외엔 생명체라곤 보이지 않는 삭막한 조선소와 눈부시게 하얀 엄마의 젖가슴은 너무 생경한 조합이었다.
동우는 엄마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정신없이 젖을 빨기 시작했다. 나는 눈길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랐다. 수건으로 가리긴 했지만 동생이 빨고 있는 엄마 젖을 누군가 훔쳐보는 것 같아 가슴이 졸아들었다. 나는 뒤돌아서 엄마를 가리고 서서 바다를 바라봤다.(54쪽)
③
“우리 집 아이들은 다 착했어. 너무 착하고 아까운 아이들이었어.”
엄마는 다시 기억이 돌아온 것처럼 말했다.
“아깝다니요? 뭐가 아까웠어요?”
“버리고 가기엔 너무 아까웠지. 사는 게 너무 힘들어......,죄받을 생각......, 그런 생각 안 한 것도 아니었지. 하지만 눈 까만 느그들 보면 그런 맘은 금세 사라지고 어째도 내가 이 새끼들 데리고 살아야지 하고 이를 앙다물었지.”
가슴이 먹먹했다.
‘그랬구나! 엄마도 생각은 했구나.’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었다. 엄마이긴 하지만 한 인간으로 그 힘든 책임 앞에 도망치고 싶은 생각조차 안 할 수야 없었겠지. 그래도 엄마는 끝까지 우릴 책임지고 키워냈다. 한 인간이 살면서 겪을 수많은 갈등과 고민을 생각하니 다시 가슴이 아려왔다. 나는 기분을 바꾸려고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121-122쪽)
인용문 ①은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현재의 어머니를 묘사한 대목이다.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난 뒤 잠이 든 어머니의 모습을 이제 성인이 된 화자가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다. 다섯 아이를 키워낸 어머니의 말라붙은 젖가슴을 바라보며, 지금은 비록 볼품없지만 한때 그것은 그들 다섯 남매의 생명을 키워내고 몸과 마음을 있게 한 생명의 원천이었다. 자신의 가진 것을 아낌없이 다 주고 이젠 허깨비처럼 누워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회한에 가득 찬 마음으로 자신을 꾸짖고 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을까. 그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을 품안에 안고 있다 바깥으로 내보냈기에 더 애착이 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식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거의 본능적인 힘이다. 어머니의 말라붙은 젖꼭지가 흉물스러운 것이 아니라, 생명을 무한하게 키워낸 위대한 힘의 원천이라는 것을 경외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참담함을 묘사하고 있다.
인용문 ②는 이 작품에서 가장 감동적인 한 부분이다. 젖먹이 막내 동우를 업은 채‘깡깡이’일을 하고 있는 어머니를 찾아가 젖을 먹이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쇳가루, 페인트, 철판 등의 거칠고 남성적인 것들로 가득 찬 황량한 조선소 한켠에 환하게 드러나는 어머니의 허연 젖가슴을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는 화자의 떨리는 마음을 아주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자식의 생명을 키워내기 위해 드러난 젖가슴은 부끄럽고 창피한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경외스러운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핏기 하나 없는 삭막한 조선소를 일시에 하나의 풍요로운 비옥한 땅으로 만드는 젖가슴의 위대함을 묘사하고 있다. 조선소와 허연 엄마의 젖가슴을 대비시켜, 부조화 속에서 위대한 조화를 창출해 내는 작가의 은유적 상상력이 크게 돋보이고 있는 대목이다.
인용문 ③ 역시 현재의 장면으로, 화자는 자식을 키워낸 억척스런 어머니도 한때는 어쩌면 한 연약한 여자였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자식들을 키워내야 한다는 모성의 책임 앞에서 어머니인들 어찌 자신의 한계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하고 여성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위대한 것은 그러한 한계를,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을 뿌리치고 자식들을 품안에 안기 때문이다. 화자는 위대한 모성 앞에서 한없이 작고 초라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깡깡이』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 맏딸인 화자가 동생들을 건사하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화자인 정은이는 맏딸로서의 책임감보다는 자신 스스로가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함으로써, 모성의 위대함을 체험하고 그것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다른 작품과의 차별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막상 화자인 나는 현재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 못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이 작품이 뛰어난 점은 보편적인 한국적 어머니상을 재현하고, 아울러 모성의 위대함을‘지금 이곳’의 우리들에게 다시 한 번 인식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맏딸의 책임감으로 모성을 학습하다
『깡깡이』의 서사적 시간은 1970년대 초반, 화자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2,3년의 짧은 기간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의 서사적 사건은 화자가 한 해 쉰 다음 그 이듬해 중학교에 들어가기까지에 한정되어 있다. 서사적 시공간을 채우는 큰 사건이 없이, 화자의 가족과 그 이웃들이 겪는 일상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 좀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화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과정과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기까지의 긴 시간을 다루면서, 정치사회적인 배경과 생활 풍물지를 채워 나갔다면 보다 좋은 작품으로 거듭날 것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다소 아쉽다.
①
“우리 집 살림 밑천 기특한 맏딸!”
아버지의 그 말은 나를 옥죄는 족쇄가 되기도 했다. 나는 그 말에 꼼짝없이 묶여 기특한 딸이 되어야 했다. 칭찬은 좋은 면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엄마는 늘 돈에 쪼들렸다.
“내 땅이라고는 바늘 하나 꽂을 땅도 없는 살림, 백날 살아도 그 모양 그 꼬라진 기라. 이래 살다가는 아이들 공부도 못 시키겠다고 느그 아부지가 부산으로 나가자 카대. 이불 보따리 하나하고 수저 세 벌, 밥그릇 세 개 가지고 부산 나왔다 아니가. 막상 나오니 비빌 언덕이 있나, 들에도 낭게도 기댈 데 없으니 살림이 펴지지가 않네. 그래도 느그들 다섯 안 아프고 잘 크니 언젠가는 좋은 날 안 오겠나.”
엄마의 그 말은 아버지의‘기특한 맏딸’처럼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늘 불러일으켰다. 스스로 짊어졌던 그 책임감은 나를 일찍 철들게 했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나를 옭아매기도 했다. 양면성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15-16쪽)
②
막내 동우가 태어나고부터 엄마의 사랑이 늘 아쉬웠던 정희였다. 엄마 혼자 일하면서 다섯 아이들 골고루 보살피고 사랑을 나눠주었지만 구석구석까지 손길이 미치지 못한 부분도 분명 있었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엄마가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일들. 따뜻한 엄마 품이라던가, 부드러운 엄마 목소리 같은 건 내가 대신해 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152쪽)
③
눈자위가 씀벅거려 나는 고개를 숙이며 눈을 깜빡였다.
“우리 정은 같은 딸이 세상에 어딨겠노. 아무리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지만 어린 니가 고생하는 거 엄마도 다 안다. 아버지 대신 니라도 있어 내가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하지만 니는 내처럼 맏딸이라는 말에 묶여 살지 마라. 사람은 배워야 제대로 대접받고 살 수 있는 기라. 일하다 다쳐도 보상은커녕 간신히 치료비 몇 푼 쥐여주는 그런 회사 말고 제대로 대우 받으며 일해서 먹고 살아야지! 새벽잠 못 자고 신문 돌려도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공부해야 사리 분별 하는 판단력도 생기지. 나는 옛날 사람이라 이래밖에 몬 살지만 니는 공부해라. 내 뼈가 으스러져도 자식들 공부는 제대로 시킬 거다.”
말하지 않았지만 엄마는 내 마음을 다 알고 있었다.
“어, 엄마......!”
무릎 위로 굵은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학교 가서 육학년 때 담임 선생님 찾아서 물어봐라. 어떻게 하면 중학교 갈 수 있는지.”
엄마 목소리에도 물기가 촉촉했다. (166-167쪽)
인용문 ①은 가난한 집안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화자인‘정은’의 독백에 가까운 서술로, 남편 대신 집안 살림을 꾸려가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 스스로 동생들을 돌보는 엄마 역할을 하게 되어야 할 운명을 직감하는 대목이다.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가부장적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책임감, 곤궁한 살림에 대한 어머니의 하소연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족쇄는 화자를 일찍 철들게 했다. 스스로 동생들의 울타리가 되기로 자처하는 화자의 결연한 의지는 결국 자신의 자유를 옭아매는 구속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화자의 그러한 선택은 개인적 멍에라기보다는, 그 시절을 힘겹게 살아간 그 나이 또래 누이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의 독백적 서술은 1인칭 화자의 의식이라기보다는, 그 시절을 회상하는 현재의 화자의 생각에서 비롯되는 내면적인 서술이다. 이 작품은 이처럼 현재의 화자가 그 시절의 화자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당시의 사건과 상황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인용문 ②는 화자 자신이 엄마의 역할을 자처하고는 있지만, 자식에 대한 본능적인 모성으로서의 사랑과 따뜻한 품은 줄 수 없다는 안타까움을 서술한 대목이다. 인용문 ③ 역시 이 작품에서 독자들의 눈시울을 시큰하게 만드는 아주 감동적인 장면이다. 맏딸에게 집안 살림을 모두 맡겨 놓고도 따스한 위로의 눈길 한 번 주지 못했던 어머니가 화자인 맏딸에게 자신의 속내를 토로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의 엄마와 화자는 혈연으로서의 모녀 관계를 벗어나 같은 여성으로서의 공감대를 느끼는 동류의식으로서의 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자신의 삶을 이어받지 말고 스스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라는 같은 여성으로서의 진한 공감대를 읽어낼 수 있다. 이 감동적인 장면을 계기로 화자인 정은은 비로소 맏딸로서의 책무에서 벗어나 중학교에 진학해 당당한 여성으로서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실마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딸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고 위안이며, 그동안의 구속에 대한 후회이고 용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오아시스, 가난을 벗어나려는 염원
화자인 정은은 언제부터인가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것은 곧 화자의 희망이고 삶의 목표이기도 했다. 그 희망과 목표는‘오아시스’라는 은유적 상징으로 나타나 있다. 그 희망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세상을 헤쳐 나가겠다는 개인적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가난하고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평안을 제공하겠다는 이타적 의미이다.
①
깡깡이 아지매들은 자신들의 삶에 녹처럼 붙어 있는 가난을 떨어내듯 안간힘을 다해 망치질을 했다.
“깡깡깡깡......”
쇠와 쇠가 부딪쳐 내는 깡마른 그 소리에는 가난한 살림을 붙들고 사는 깡깡이 아지매들의 결기도 섞여 있었고, 칡뿌리처럼 감겨드는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기도 했다.
“깡깡깡깡 깡깡깡깡......”
봉래동과 대평동 해안가에는 깡깡이 아지매들의 망치 소리로 하루가 시작되었고, 망치 소리가 끝나면 하루가 저물었다. (48쪽)
②
멀리 아스라이 펼쳐진 바다. 햇살에 부서지는 물비늘. 가늘게 눈을 뜨고 바다를 바라봤다.
희게 반짝이는 물비늘들이 서로 뭉치기 시작했다.
바다는 어느새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사막으로 변했다.
누런 모래가 끝없이 펼쳐진 사막.
희게 빛나는 모래 산.
빛에 따라 희고 검은 그림자로 극명하게 나뉜 모래 산의 이쪽과 저쪽.
한 줄 길처럼 보이는 길고 긴 낙타의 행렬들.
뜨거운 태양을 온몸으로 받으며 오아시스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낙타들!
‘낙타는 사막에서도 끄떡없이 견딜 수 있어.’
‘낙타는 참을성이 많은 동물이지.’
‘낙타는 모래폭풍을 이겨내!’
‘강하고 튼튼해!’
낙타 행렬은 끝없이 이어진 사막을 걸어 아스라이 사라져 갔다.
“깡깡깡깡......”
깡깡이 소리가 내 몸을 감싸고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183-184쪽)
이 작품 속에서의 유일한 희망과 염원은 곧 화자가 꿈꾸는 오아시스라는 환상이다. 이 작품은 어떻게 보면 가난을 천형처럼 짊어지고 사는 그 시절 사람들의 우울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지금 이곳’의 청춘들에게는 하나의 신기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음울한 자화상에도 한 줄기 햇볕이 드는데, 그것은 곧 화자가 꿈꾸는 오아시스이다.
인용문 ①은 화자의 어머니가 일하는 조선소에서 들려오는 깡깡이 소리를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 장면 속에서의 깡깡이 소리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자신들을 옴쭉 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난이라는 멍에에 대한 상징이고, 다른 하나는 그 가난을 떨쳐내려는 가난한 서민들의 한 맺힌 결기이기도 하다. 선박에 붙어 있는 검붉은 녹은 곧 삶에 덕지덕지 묻어있는 가난이고, 그 녹을 떨어내는 화자의 어머니를 비롯한 여인들의 망치 소리는 가난에 대한 원망과, 그 가난을 떨어내려는 하나의 몸부림을 상징하고 있다.
인용문 ②는 이 작품의 결미 부분으로 화자가 꿈꾸는 오아시스에 대한 판타지이다. 뜨거운 모래 바람과 이글이글 달궈진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의 행렬은 가난을 운명처럼 짊어지고 세파를 헤쳐 나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단한 행렬을 은유하고 있다. 갈증과 더위에 시달리는 낙타들의 고단한 행렬이 쉼 없이 이어지는 것은 얼마 있지 않아 그들에게 휴식을 주고 위무하는 오아시스 때문이다.
이 작품의 화자는 삶의 멍에를 짊어지고 있지만 결코 주저앉거나 낙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화자가 오아시스의 존재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 속에서의 낙타는 곧 화자를 상징하고 있다. 화자에게 있어서 오아시스는 가난을 벗어나려는 희망의 안간힘이고, 자신뿐만 아니라 가난에 지친 모든 이웃들에게 평화와 위무를 주는 하나의 이상향이다. 그뿐만 아니라 오아시스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꿈을 펼쳐 나가고자 하는 희망이고 염원이기도 하다.
『깡깡이』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이기도 하고 전혀 아닌 다른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다 쓰고 난 뒤 내 속에서 무언가 쑥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그게 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누구도 지워주지 않았지만 스스로 장녀라는 의무감으로 살아온 시간의 무게가 가벼워진 것 같기도 하고 한동안 외면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190쪽, 깡깡이 창작노트)
위 인용문은 작가의 후기인‘깡깡이 창작노트’의 한 부분이다. 작가의 말처럼 어쩌면 이 작품 『깡깡이』는 작가의 지난 시절에 대한 연대기이일 수도 있고, 그 시절을 함께 살아온 정겨운 이웃들의 삶의 풍경화일 수도 있다. 어쩌면 작가에게는 그 시절의 고단한 삶이 현재의 삶을 질척이게 하는 응어리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그 시절의 시간과 공간을 현재로 소환하여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그 과거를 명시적으로 형상화했을 것이다.
작품을 쓰고 나니 뭔가 쑥 빠져나간 느낌이었다고 작가는 밝히고 있다. 그것은 곧 트라우마의 치유이기도 하고 카타르시스일 수도 있다. 그 시절에 대한 연민과 부끄러움, 그 끝에서 만나는 자신을 통해 작가는 힘과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그 시절의 고단한 삶은 나만 그렇게 힘들게 산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왔던 보편적 삶의 풍경화였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이 작품은 한 시대의 풍경과 그 속에서의 삶을 박물지 같은 성격으로 복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겠다. 현재로 소환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그 시절의 삶의 풍경과 생활 습속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속에서 모성의 위대한 힘을 발견하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시간의 복원이 1970년 초의 두서너 해라는 점과, 공간의 복원이 영도 대평동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 화자인 정은이 성인이 될 때까지 세파를 헤쳐 나가며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당당하게 일어서는 모습까지를 보여주지 못한 점, 과거의 고단한 삶을 기억하기 싫은 양 치매 환자가 된 현재의 어머니에 대한 서사가 과거와 병치되어 입체적으로 전개되지 못한 점, 좀 더 그 시절의 의식주를 비롯한 삶의 풍속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지 못한 점 등은 옥의 티로 남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만하게 과거의 시간과 공간을 현재에 리얼리즘의 정신과 기법으로 복원하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성과이다. 이 작품의 화자인 정은은 작가 자신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시절을 힘겹게 헤쳐 갔던 우리 자신들일 수도 있다. 그 시절의 시간과 공간은 끔찍해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멀찍이 물러서서 먼 풍경화로 바라본다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과거 때문에 오늘의 우리들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18. 11. 6)
첫댓글 책을 벌써 다 읽으시고 평을 올리셨네요.
부지런한 선생님!
대작을 완성한 한정기 작가님에게
큰 박수 보냅니다.
선생님, 부족한 글 따뜻한 눈길로 살펴주셔서 고맙습니다.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꾸벅~!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울컥하기도 하고
찌릿 아프기도 했습니다.
그 시대를 살아낸 우리모두에게 박수를.보내며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그 시대를 소환하여
잘 그려낸 한정기선생님께도 함께 박수를 보냅니다.
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