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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고골리 숭배자
정 세 봉 절필(絶筆)을 결심했던 날 밤 영시(零時), 노작가 니꼴라이 유(庾)는 어떤 희미한 경계를 넘어 미지의 광야에 들어섰다. 집을 나선 돈키호테의 시야에 열려있었던 엄청나게 모호한 세상처럼 불확실한, 신비스럽고 적막한 세계였다. 길 잃은 미아처럼 니꼴라이 유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온통 어둡고 희끄므레한, 광대무변의 대지였는데 뜨거운 암장(巖漿)을 잉태하고 있는 듯 숭엄하다. 엷고 축축한 안개 사이로 멀리 한 귀퉁이 트인 하늘을 배경으로 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여기가 어디일까?) 니꼴라이 유는 문득 자신의 내면이 뜨겁게 깨어남을 느낀다. 그의 본능이 감지하고 맡아내는 로씨야적인 음울함과 거칠은 자연의 냄새! (지깐까 근교의 어느 지점일 것 같군.) ”야화”를 읽었던 기억이 어느새 아련한 향수로 가슴을 적셔왔다. 이윽고 니꼴라이 유는 봇나무가 듬성듬성한 숲가장자리 너른 공터에 모닥불을 피우고서 자신의 졸작 여덟 권을 불사르는 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다. 굵다란 자작나무 가지를 꺾어서 연신 모닥불속을 들추면서 한 권씩 한 권씩 게임을 즐기듯 집어넣는다. 수십년 세월속에 켜켜이 쌓이고 절은 고뇌의 찌꺼기와 앙금을 깨끗이 태워버리려는 듯 모닥불은 제법 활활 타오른다. 불길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사뭇 평정하다. 한 줄기 폭풍이 심혼을 흔들고 지나간 뒤의 초연함이었다. 지난 황혼 녘에 니꼴라이 유는 모처럼 무릉산 “잔디 언덕”을 찾아갔었다. 때맞춰 쏟아지는 장대비속에서 그는 느닷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었다. “소설사(史)의 장(章)” 밖에 쓰레기처럼 던져질, 한푼어치의 가치성도 없는 글을 쓰느니, 차라리 “현란한 추락”이라도 하리라 했던 그 자학적인 결단의 뒤끝이 그만큼 허무했던 것일까? 야속한 것은 “잔디 언덕”이었다. 열혈문학소년 시절에 자주 올라와서 로씨야문학을 읽었던 곳, 가끔씩 먼 하늘가를 바라보면서 니꼴라이 와실리예위치 고골리 같은, “위대한 별”이 되리라 꿈꾸었던 곳이었다. 어떤 미련때문에 “잔디 언덕”을 찾았던 노작가 니꼴라이 유는 그처럼 영롱하고 찬란했던 자신의 어릴적 꿈과 마주하자 “숙명”에 충실하고자 했던 자신의 인생이 지지리 못나고 억울하기도 해서 실컷 설움을 쏟아내었던 것이다. 마침내 마지막 한 권이 불속에 던져졌다. 부지깽이로 들추면서 그 한 권이 살라지고 있을 때 니꼴라이 유는 “열혈문학소년” 꼴랴의 존재를 의식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꼴랴는 맞은 켠에 앉아서 어린 새끼사슴처럼 슬픈 눈으로 모닥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객기예유?” 꼴랴의 트집스런 무성(無聲)의 질문이다. 니꼴라이 유는 모른는체 무시하고서 모닥불에다 연신 삭정이를 던져넣었다. 불이 사그러져 재만 남은 불무지는 폐허처럼 보일 것임에 틀림 없었다. 그것이 싫었다. 꼴랴는 여전히 미동도 않고 불길속에서 소각되고 있는 책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 침묵이 비구름 같은 비애를 머금고 있었다. 꼴랴는 배불뚝이 목각인형 마뜨료쉬까처럼 늘 니꼴라이 유의 내면에 옹크리고 있음을, 때론 내면의 “무의식의 늪” 속에 잠적해 있음을 “노작가 니꼴라이 유”는 알고 있다. 또한 반세기라는 아득한 세월너머에, 그 “잔디 언덕”위에 “꿈의 실체”인양 꼴랴는 존재해 있었다. 그러면서 가끔씩 자신의 존재를 암시하기도 하고, 항변의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노작가 니꼴라이 유”는 “객기(客氣)”라는 표현에 분노하거나 모멸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표현을 즐기고있는 자신을 어쩔 수가 없다. “니꼴라이(НИКОЛАЙ)”라는 필명을 굳이 고집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일종의 객기이니까! 광복 이태 전의 어느 추운 겨울날 밤, 그는 하얼빈시(市) 도리구 신안가(府) 24호에서 태어났다. 이웃으로 살고있었던 한 백계로씨야인(人)이 귀엽게 여겨서인지 “꼴랴(Коля)"라는 애명을 지어주었단다. 로씨야문학, 특히는 니꼴라이 와실리예위치 고골리의 문학에 열혈의 넋을 빼앗기고 있던 시절, ”꼴랴“라는 애명과 ”운명“이라는 치명적인 낱말을 어떤 음모(陰謀)처럼 연계시켜 본 적이 있었다. 그 순간에 느껴보았던 야릇한 환희와 감동과 전율(戰慄)!...... 그런 숨은 야심은 여러 상황 때문에 불혹의 고개에 올라서야 낼 수가 있었던 그의 데뷔작부터 “수난 시대”를 겪게 만들었다. “니꼴라이”라는 필명 사용을 편집기관마다 썩 반기지 않았고, 공개적인 빈정거림과 살벌한 구설이 난무했다. 로씨야도 아닌 중국문단에서 도대체 가당한 짓거리냐?....라는 것이 그 주된 이유였다. 하지만 그는 단호했다. 필명을 불허하면 그 자신이 발표를 거부했다. 차츰 “괴짜 작가”라는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명칭이 뒷잔등에 붙어다니는 줄 알면서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영예의 훈장처럼 즐기리라는 오기를 부리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오직 소신껏 창작에 임하여 왔다. “숙명”이라는 긴 터널에서 온 심혼을 불살라 왔던 터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다. 도저히 초극 불가능한 한계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모진 형벌 앞에 그는 굴복을 하였다. 혹여 미련의 불씨라도 남아서 부질없이 갈등하는 일이라도 생길까 두려워서 분서(焚書)를 결행하고 있는 니꼴라이 유였다. 그런데 꼴랴가 나타난 것이다. 그의 뜬금없는 등장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꿈만 먹고 사는 철부지와의 대화는 곤혹스럽기 짝이 없을 것임을 그는 안다. 꿈과 낭만에 취해있는 “열혈문학소년”이 수십년 세월을 겪어오면서 피땀에 절은 심혼속에 켜켜히 쌓인 늙은이의 고민과 방황과 인고의 아픔을 어찌 헤아릴 수가 있을 것인가! 아니나 다를가 꼴랴는 목을 뒤로 꺾고서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매에 애절한 항변이 어려 있다. “.....‘별’이 되자 했지!” 니꼴라이 유는 한참을 대꾸를 않다가 한숨을 쉬듯 내심으로 독백을 했다. “그래..... 난 패배자야! 너한텐 미안하다.” 꼴랴는 갑자기 쿨쩍쿨쩍 울고있는 듯 했다. “내가 지금, 내 미래의 운명을 보고있는 거예요?” 그런 무언의 항변이었다. 니꼴라이 유는 일순간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지. 그건 아니여!......‘열혈문학소년 꼴랴’는 영원한 꼴랴이구. ‘잔디 언덕’의 꿈은 영원히 영롱하고 찬란한 거여!” 니꼴라이 유는 다급한 김에 꿈과 현실의 절대적 대립을 주장했다. “꼴랴”와 “니꼴라이 유”, “열혈문학소년” 시절의 자신과 이미 “패배자로 된 노작가”로서의 자신은 그 무슨 “분신(分身)관계”가 아니며, 분명히 “타자(他者)”인 것이라고. 그렇지만 꼴랴는 얼토당토 않다는 듯이 팔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칠 뿐이다. 니꼴라이 유는 못난 자신으로 말미암은 꼴랴의 절망이 마음 아팠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참회하듯이 속으로 횡설수설을 시작했다. “한 때, 유럽에서 신음소리처럼 들렸던 ‘소설의 종말’에 대해서 난 믿지를 않았어. 그리 될 리는 없는 것이라고 확신을 했었지. 하지만 나 자신의 문학엔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어. ... 말하자면 ‘천재성’ 문젠데, 아무리 고심을 해도 고골리 작가의 그 우울하고 기지에 찬 유머와 통렬한 풍자적 기량을 ‘내것’으로 만들 수가 없었다는 거야. 페이지마다에 널려있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디테일들, 그의 깃펜 끝에서 태어난, 미련하면서도 우습깡스러운 수많은 인간(형상)들 앞에서 내 상상력은 빈곤 그 자체였음을 슬프게 받아들여야 했었지. 그렇지만 내 인생이 슬프고 절망적인 것은 아니야. 난 영원히 니꼴라이 와실리예위치 고골리의 학생으로 살거니까!..... 스승의 ‘문학 영지(領地)’를 산책을 하는 즐거움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가 있는 거지....... 그렇지만 단언컨대, 꼴랴는 꼭 ‘별‘이 될거야! 로씨야 하늘의 ’영롱한 별’.....세대가 틀리고, 시대가 다르니까!” 니꼴라이 유는 자신의 합리적 사유의 흔들림과 헷갈림을 의식하면서도 무작정 달래고 싶다. 그렇지만 꼴랴는 언녕 삐져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는 사이, 모닥불은 사그러들고 있었다. 이제 니꼴라이 유는 과거의 시간들과 깨끗이 결별을 하고서 쉼없이 흐르는, “현재”라는 시각의 연속성이라는 외줄 위에서 자신에게 남은 “미래의 시간”들을 맞이하리라 했다. 니꼴라이 유는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디로 가야 할지 질정이 없지만, 이제 내딛게 될 자국, 자국은 “미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그 초입(初入)을 장식하는 경이의 족적으로 찍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변적인 첫 발자국은 그렇게 떼어졌다. 그렇지만 그는 몇 걸음 못가서 어마지두 주춤 멈춰섰다.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무질서하게 띠염띠염 이어지고 있는 인간들의 행렬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축복처럼 그의 “새로운 시간” 속에 뛰어들었다. 니꼴라이 유는 본능적으로 숨는 듯이 몸을 낮추면서 유심히 바라보았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어떤 희열을 예감하면서 손등으로 연신 눈을 부비었다. (아, 이 무슨 조화속인가?) 니꼴라이 유의 가슴은 갑자기 씨비리 대지의 봇나무숲처럼 거세게 설레이기 시작했다. 그 행렬의 주인공들은 다름아닌 니꼴라이 와실리예위치 고골리의 산아(産兒)들, 그가 즐겨 표현했듯이 “고골리의 ‘형이상학’적 아들 딸”들이었다. 그는 숨을 죽이고서 맨 앞에서 걷고있는 2인(人)부터 확인해 나가기 시작했다. 기호들을 알아맞히듯이 그 이름들을 하나 하나 입속으로 호명을 했다. 이완 이와노위치. 이완 니끼포르위치.1) 아파나시 이와노위치. 플헤리야 이와노브나.2) 이완 야꼬블레위치. 꼬발료브.3) 아까끼 아까끼예위치. 뻬뜨로위치.4) 뽀쁘리시친. 소피 아가씨.5) 삐스까료브. 삐로꼬브 “검은 머리 창녀”. “금발머리 독일 미녀”. 6) “초상화”속 노인. 차르뜨꼬브7) 흘레스따꼬브. 오씨브.8) 따라스 블리바. 오스따브. 안드레이.9) ----------------------------------
1)“이완 이와노위치와 이완 니끼포르위치가 싸운 이야기”의 인물들 2)“고풍의 지주들” 주인공들. 3) “코”의 주인공들. 4) “외투”의 주인공들. 5) “광인 일기”의 인물들. 6) “넵스끼거리”의 인물들. 7) “초상화”의 주인공. 8) “검찰관”의 인물들. 9) “따라스 블리바”의 인물들.
니꼴라이 유는 잠간 두 눈을 감았다. 고골리 소설속의 수많은 형상들이 다시금 영화 몬따쥬처럼 머릿속에 흐른다. 이어지는 행렬이 눈앞에 가까워지기를 느낌으로 가늠하면서 눈을 떴을 때, 두 대의 뜨로이까가 마치 의전행렬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꼴랴!.....” 니꼴라이 유는 무심간 꼴랴를 불렀다. “뜨로이까다!.....” 그의 어조는 환희에 젖어 있었다. 바퀴 달린 멋진 마차가 앞서서 달리고 있다. 거기에는 차양 없는 모자에 무지개 빛깔의 삼각 목도리를 두르고 들쭉나무 빛깔의 연미복을 입은, 미남자도 아니고 못생긴 남자도 아닌, 지나치게 살이 찌지도 않고 여위지도 않은, 또 늙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해서 너무 젊은 편도 아닌 사나이가 타고 있었다. 니꼴라이 유는 금방 “죽은 농노”를 사들여서 일확천금을 꾀했던 천재적인 사기꾼 빠웰 이와노위치 치치꼬브10)임을 알아보았다. 그 곁에는 풍채가 당당하고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달콤한 미소가 특징인 신사가 앉아 있었는데 부유한 지주 마닐로브11)였다. 서로 사양을 하다가 나란히 “모로 걸어서 입문(入門)”을 했던 전대미문의 퍼포먼스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리고 치치꼬브의 마부 쎌리판의 곁에는 아릿다운 로씨야 처녀가 발랄라이까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두 마리의 작은 비둘기는 그대에게 보여주리라 나의 찬 시체를 괴롭게 꾸르르 울며 그대에게 말해 주리 그녀는 눈물속에서 죽었노라고...... “울린까!12) “무의식의 늪” 속에 삐져서 잠적해 있던 꼴랴는 마침내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꼬마 마뜨료쉬까처럼 수면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시를 읊듯이 열혈문학소년의 유치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아름다운 이상(理想)을 노래했던 아이디얼리스트 울린까!......” “그렇지, 울린까 맞아!.......” 그런 꼴랴가 니꼴라이 유로서는 귀엽고 반가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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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죽은 넋”의 주인공. 11) “죽은 넋”의 인물(지주) 12) <죽은 넋>의 인물
그는 짐짓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면서 뒤쪽 뜨로이까를 살펴보았다. 활주부(滑走部)가 있는 썰매였는데, 치치꼬브의 다른 한 마부인 뻬뜨루쉬까가 몰고 있었다. 썰매에 타고있는 네 사람을 살펴보면서 니꼴라이 유는 갑자기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미련한 곰 같은 쏘바께위치가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전문 남의 발등을 밟는 특기도 특기려니와 집안의 잡동산이들이 저마다 “나도 쏘바께위치야요!”, 이렇게 “자아소개”를 하는 듯 하다는 묘사가 떠올라서였다. 쏘바께위치 곁에는 머리에 나이트 캡을 쓰고 목에는 플란넬의 천을 감고있는, 십등관 과부 나스따샤 뻬뜨로브나 꼬로보치까부인이 앉아 있었다. 언젠가 꿈에 그녀의 식사초대를 받았던 기억이 새로워서 그는 또다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굉장했지!.....그 요리들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서두.) “살짝 구운 고기만두, 수우프, 완두를 곁들인 골요리, 캐비지를 곁들인 소시지, 구운 거세한 닭고기, 소금에 절인 오이, 양의 넙적다리, 바뚜루쉬까, 달걀을 넣은 삐로그.....” 니꼴라이 유의 생각을 읽은 듯 꼴랴가 얼른 끼여들어 줄줄 외워대었다. 아마도 그 꿈만큼은 둘이 공유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송아지만큼 큰 기름에 튀긴 칠면조도 있었지, 그것만큼은 나두 기억 나. 후후훗” 니꼴라이 유는 이 감동과 경이를 꼴랴와 함께 향유하고 싶은 마음에서 썰매 뒤쪽에 서로 등지고 앉아있는 두 사나이에 대해서 물었다. “노즈드료브와 쁠류스낀.......저 왼손편 쪽을 향해 앉은, 머리가 까치둥지 같은 사람이 노즈드료브인 것 같아유” “똥똥한 붉은 볼에 검은 나룻이 자란 꽤 잘 생긴 사내 말이지?...... 옳거니, 머리에 썼던 까르뚜즈를 벗어쥐고서 썰매 언저리를 저렇게 두드려대고 있는 거동을 보니 어데 가나 사단만 일으키는 망나니 기질을 아직도 못버렸나봐.....장기 게임이거나 놀이에서 팔소매 부리로 공공연히 엉터리 쓰는 뻔뻔스러운 인간이니까...... 쯧쯧.” 니꼴라이 유는 꼴랴의 대화 동참에 신명이 났다. “저 노즈드료브를 등지고 앉은 쁠류스낀의 행색을 봐, 에효!” 쁠류스낀이 입고있는 할라트는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소매와 옷자락의 상반부가 어찌나 때가 오르고 반들거리는지 장화를 짓는 유프찌11)와 비슷하였고, 등뒤에는 자락 두폭 대신에 네폭이 너불거렸고 그 속에서 면사오리가 수두룩히 빠져나와 있었다. 그의 목에도 역시 양말짝인지 대님인지 혹은 배에 두르는 띠인지 하여튼 넥타이는 아닌 무엇인가 알아 맞힐 수 없는 것이 감겨 있었다. “저게 천여명의 농노를 소유한 자의 주제꼴이라니!.....후후훗!” 니꼴라이 유는 어이없다기 보다는, 매양 그렇듯이 중독(中毒) 같은 어떤 인간애에 즐겁기만 하다. 꼴랴는 반응이 없다. 자기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듯 했다. 이윽고 엉뚱한 의문을 낚시바늘처럼 허공에다 걸어놓는다. “신기해. 책속에서 걸어나온 인간 행렬?...... ” “?! .......” 니꼴라이 유는 잠간 어리둥절 했다. 그것이 꼴랴의 어처구니 없는 우문(愚問)인 것인지? 아니면 신이 관장해 온 어떤 질서와 이치 밖의 어떤 진실을 물은 것인지?..... 혼돈이 왔다. 언녕 선(先) 해석이 되어서 값싼 상식처럼 되어버린, 고골리의 소설세계는 로씨야 전체가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라는 식의 고리타분한 “반영론” 같은 것은 오히려 섣부른 우답(愚答)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고의 심판관이 부재하는 이 세상의 “진리”는 이미 절대적이 아닌, 수많은 상대적인 진실들로 깨어져서 흩어져 버렸음에랴! “고골리가 창조해낸 ‘질서’속에서의 삶이 갑갑하면 넓은 세상으로 떨쳐 나오고, 세상이 지겨우면 다시 대렬을 지어서 ‘질서’ 속에 녹아든다. 그렇게 순환적으로 치명적인 테마들이 숨쉬는 역동적인 삶의 현장을 재현시키는 쟁쟁한 개성(個性)들!.....” 이런 가정(假定)은 니꼴라이 유의 기분을 무작정 즐겁게 만들었다. “꼴랴, 이건 진짜 놀라운 ‘발견’이야! 그야말로 ‘사변적’인.......그렇지만 그것은 오직 고골리의 산아(産兒)들- 그분의 뜨거운 심혼속에서 태동이 되고, 무서운 진통을 겪으면서 태어난 이른바 고골리의 ‘형이상학’적 아들 딸들, 그들 한테서만 가능할 것이야. 피처럼 토해낸 ‘진실’들이니까!“ 그러는 사이, 행렬은 멀어져 가고 있었다. 니꼴라이 유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슬슬 행렬을 따라 붙었다. 그들이 어디로, 무엇을 목적하고 가는 것인지 궁금증을 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미래의 시간”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는지?.......니꼴라이 유는 시간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낙엽이 갈수록 우수수 지고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하는 자연의 현상에서 계절의 무쌍한 변화를 감지할 수가 있었다. 긴 행렬이 멈춘 곳은 봇나무숲이 울창한 산자락 밑이었다. 거기에는 고골리의 상반신 조상(彫像)이 얹혀진 탑형(塔型)의 묘비가 우뚝 서있었다. 일군(一群)의 무리를 이룬 그들은 뭔가 오래도록 의식을 치르는 듯 했다. 이어서 술파티가 벌어졌다. 목을 뒤로 꺾고서 독한 워드까(vodka)를 병채로 마시는 모습들이 보였다. 차츰 난잡하면서도 들끓는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혹자는 캥가루처럼 연속 점프룰 하기도 하고, 혹자는 두 팔을 높이 쳐들면서 “우라(ура)”를 웨치기도 하고, 발랄라이까 선율에 맞춰 마주르까를 추기도 하였다. 아마도 니꼴라이 와실리예위치 고골리 탄생 206주년 기념축제인 것 같았다. 니꼴라이 유는 묘비를 향해 경건히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와중에 니꼴라이 유의 시야에 뛰어든 것이 뜨로이까였다. 치치꼬브의 마부 쎌리판과 뻬뜨루쉬까도 축제 분위기에 한 눈을 팔고 있었다. 그런 찬스는 무서운 유혹과 객기를 발동시켰다. (눈 덮힌 광활한 로씨야 대지를 뜨로이까로 한번 질주해 보는 것이 꿈이 아니었던가!) 니꼴라이 유는 사냥물을 노리는 독수리처럼 뜨로이까를 노려보면서 몸을 떨었다.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다가 날랜 동작으로 썰매위에 올라탔다. 눈덮인 대지를 질주하기엔 썰매가 제격일 것이었다. 뜨로이까는 곧 출발했다. 세필의 말들은 순순히 니꼴라이 유의 의지를 따라주었다. 가운데 리더(leader)는 중심을 잡으며 속보로 달리고 양쪽에서 부챗살 각도로 끄는 두 마리의 휠러(wheeler)는, 한 마리는 씩씩하게 다른 한 마리는 교태를 부리며 달렸다. 마침내 니꼴라이 유는 신호처럼 채찍을 울렸다. 연속 내리치는 채찍질에 말들은 네굽을 안고 뛰기 시작했다. 썰매는 눈발을 날리며 금방 가속도가 붙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우성소리가 들리건말건 내친 김이었다. 그의 심혼은 이미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오, 루씨여! 루씨여! 그대는 빈약하고 산만하며 아늑한 데가 없다. 사람의 마음을 흥겹게 하거나 경이의 눈을 크게 뜨게 하는 그런 자연의 분방한 기이도 없을뿐더러 위대하다 할만한 인공의 미도 없다..... 그렇건만 그대에게 그 어떤 신비로운 힘이 있어 이렇게까지 내 마음을 그대에게 쏠리게 하는 것인가? 국토의 모든 골짜기들과 광활한 평원, 바다에서 바다 끝까지 울려 퍼지는 그대의 그 구슬픈 노래가 어찌하여 이다지도 그칠줄을 모르고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것이냐? 대체 이 노래 속에는 무엇이 스며 있는 것이냐? 무엇이 이렇게까지 우리를 부르며 흐느껴 울며 심장을 쥐여 짜는 것이냐? 그 무슨 음성들이 이렇게까지 안타까이 내 가슴을 때리며 마음 속으로 파고 들며 내 심장의 주위에서 맴도는 것이냐?“ 쏜살 같이 달리는 뜨로이까 위에서 니꼴라이 유는 격조높은 음성으로 주정(主情)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니꼴라이 와실리예위치 고골리의 치열하고 안타까운 조국애는 그의 가슴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벌창하는 봄물처럼 뜨거운 눈물이 쉼없이 앞을 가린다. “루씨여! 그대는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이냐? 그대와 나 사이에는 그 무슨 해득할 수 없는 연계가 숨어 있는 것이냐? 어찌하여 그대는 그렇게도 나를 쳐다보는 것이며 또 그대의 품에 있는 모든 것이 어찌하여 그다지도 기대에 가득 찬 눈을 나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냐? 그 뿐이랴, 내가 이렇게 의혹에 사로잡혀 먹먹히 서 있을 때에 뇌우(雷雨)를 담뿍 안은 무거운 비구름은 벌써 나의 머리를 가리웠고 나의 사고력은 그대의 넓은 공간 앞에서 급자기 둔해진다. 이 광활한 천지는 무엇을 예언하는 것인가? 그대 자신이 이렇게도 광대무변하거늘, 어찌 여기 그대의 품안에서 무한대의 위대한 사상이 싹트지 않을 것이냐? 아아! 이 얼마나 휘황하고 찬란한,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벽지이냐! 루씨여!....“ 환상적인 무아(無我)의 경지속에 니꼴라이 유는 뜨로이까의 광란적인 속도를 의식하지 못하였다. 그는 자신이 새롭게 열어가는 “미래의 시간”들이 감동과 경이로 그득그득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격세지감을 느꼈다. 그리고 행복했다. 니꼴라이 유가 허공중에 붕-뜨는 충격을 받은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급 스톱한 뜨로이까는 그의 몸뚱이를 절벽아래로 뿌려던졌다. “아아!........” 그는 분명히 꼴랴의 비명을 들었다. “꼴랴! 꿈은 ‘잔디 언덕’에 영롱히....... ‘별’이 되자 했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었다. 자유낙하의 현란한 속도감 속에서 니꼴라이 유는 “잔디 언덕” 위에 무지개처럼 걸려있는 영롱하고 찬란한 꿈을 마지막으로 일별했다. (끝) [2015년 6월] [<장백산> 2015년 6호 登載] [서울 <국제문예> 2015년 가을호 登載] [서울 <서울문학>(출판부) 2016년 여름호 登載] [2017년, 미국 <해외문학> 登載] * 부록; 미국 LA에서 날아온 메일 書信- 고골리 숭배자를 읽고 - 정선생님! 저는 LA 사는 동화와 수필을 쓰는 작가 입니다. 이번에 해외문학에 실린 '고골리 숭배자' 를 읽고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저는 일찌기 러시아문학에 심취했던 사람이었는데 27년 전에 미국에 이민 오면서 책과 많이 멀어 졌어요. 물론 러시아의 그 현란 찬란한 혼을 모아 읽던 문학작품과도 멀어 졌지요. 실로 27년 만에 선생님의 수작을 읽고 정신이 번쩍 나네요. 선생님 정말 감사 합니다. 제 정신을 뿌리채 흔들어 깨워 주시네요. 힘찬 문장력! 더 이어졌다면! 안타깝도록 계속 읽고 싶게 하는 호소력,선생님 정말 감사 합니다. 저는 선생님 계신 곳으로 달려가 밤새워 선생님의 문학의 개인사를 듣고 싶네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혹시 주소를 남겨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저는 미주문협 회원입니다. 김태영 올림. 묵주(墨晝) 정세봉(鄭世峰) 프로필;1943년 12월 07일(음력), 하얼빈市 도리구 신안가(府) 24호에서 출생. 작품집으로, 단편소설집 “하고싶던 말”(1985년 북경 민족출판사 출판) 중단편소설집 “볼쉐위크의 이미지”(1998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출판) 단행본 “볼세비키의 이미지”(2003년 서울 “신세림” 출판사 출판) 정세봉 編著 문학평론집 <문학, 그 숙명(숙명)의 길에서>(2017년 서울 “신세림”출판사) 제1회 전국소수민족문학상, 미국 LA 所在, “해외문학상” 소설부문대상, 한국 예술평론협의회 주최, 2017년 제37회 최우수예술가상(문학부문) 등 수상. “연변문학” 월간사 소설편집, “연변소설가학회‘ 회장 역임.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리[Nikolai Vasil'evich Gogol]흉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