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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 선사미술의 요람을 찾아서-오르도스문화와 청동기-
호랑이와 늑대가 힘 겨루던 고원과 사막의 땅 오르도스
위하渭河와 낙하洛河가 합류하여 황하 본류로 유입되는 섬서성 동남쪽 끄트머리의 화음시華陰市 동관현潼關縣에서 남류 황하를 따라 곧장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산서성 하곡현河曲縣에서 내몽고와 섬서성과 산서성이 서로 맞물려 교차하는 곳을 만나게 되고, 여기서 다시 황하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산서성 편관현偏關縣 만가채萬家寨에서 완전히 내몽고 경내로 들어가게 된다. 내몽고에서 다시 강 서쪽의 준격이기准格爾旗와 동쪽의 청수하현淸水河縣을 끼고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남류 황하가 청수하현의 라마만喇 灣에서 서쪽으로 꺽어지는데, 이곳 탁극탁현托克托縣으로부터 오원五原과 임하시臨河市까지를 동쪽으로 흐른다고 해서 동류 황하라고 한다. 동류 황하는 다시 임하시에서 영하 은천시銀川市까지 남북으로 달리는데, 이 구간을 물길이 북쪽으로 흐른다고 해서 북류 황하라고 한다. 흔히들 오르도스라고 하는 곳이 바로 좁게는 내몽고의 ‘∩’자 꼴로 휘어진 황하 안쪽을, 넓게는 서쪽의 하란산賀蘭山과 북쪽의 음산산맥陰山과 동쪽의 황기해黃旗海의 안쪽 지역과 남쪽의 섬서성 북쪽의 준사막 지대까지를 말한다. 오르도스의 지형은 황하를 기준으로 그 안쪽과 바깥쪽이 큰 차이를 보이는데, 안쪽은 대부분이 해발 1,100~1,200미터의 고원성 사막 지대를 이루고 있고, 바깥쪽은 해발 1,200~1,400미터의 고원성 평지와 구릉 지대를 이루고 있다. 오르도스는 ‘많은 궁궐Ordos’ 또는 ‘궁궐들’을 뜻하는 몽골어로, 청나라가 몽골족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오르도스 일대에 몽골 왕공들을 대거 이주시킴과 동시에 중요한 라마사원을 많이 창건함에 따라 이러한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다. 과거 오르도스와 유사어로 사용되었던 수원綏遠이란 지명은 청나라가 18세기 말 이 일대의 몽골족과 회족을 통치하기 위해 건설한 ‘중국인 도시’ 수원성에서 유래하였다.
오르도스 청동기 거듭 세상의 빛을 보다
오르도스 청동기가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스웨덴의 지질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안델손J.G. Andersson으로부터다. 안델손은 1921년 민국 농상부 촉탁으로 중국 각지의 지질 조사를 하던 중 앙소유적을 발견한 인물이기도 한데, 1926~1927년 북경의 골동품상으로부터 뜻하지 않게 오르도스 일대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 중국 청동기와는 사뭇 다른 청동기를 다수 구입하게 된다. 당시 안델손은 앙소문화와 상문화가 소아시아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하서주랑을 타고 중국 내지로 전파된 서방문화에서 기원하였다는 가설을 제기한 상태였는데, 때마침 오르도스 일대에서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의 청동기와 상당히 흡사한 청동기들이 발견되자 이를 자신의 가설을 입증해주는 유력한 근거 가운데 하나로 삼고는 일괄하여 ‘수원 청동기’(1929) 또는 ‘오르도스 청동기’(1932)로 명명하였다. 오르도스 청동기가 안델손에 이어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일본의 고고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인 강상파부江上波夫와 수야청일水野淸一에 의해서이다. 강상파부 등은 안델손을 비롯한 서구 학자들의 오르도스 청동기 조사에 자극을 받아, 1930년 8월부터 1931년 1월에 이르기까지 수원, 포두包頭, 풍진豊鎭, 유림楡林, 대동大同, 장가구張家口, 선화宣化, 북경의 골동품상으로부터 오르도스 청동기를 다수 구입해 탐문 조사를 벌였는데, 그 결과 나오게 된 것이 『내몽고·장성지대』(1935)이다. 강상파부 이후의 획기적인 것으로는 전광금田廣金과 곽소신郭素新의 『오르도스식 청동기』(1986)와 김정배金貞培, 오강원吳江原, 탑랍塔拉, 조건은曹建恩의 『내몽고 중남부의 청동기와 문화』(2006)를 들 수 있다. 『오르도스식 청동기』는 1980년대 중반까지 조사한 자료를 집성하여 연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실측도를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내몽고 중남부의 청동기와 문화』는 처음으로 오르도스 청동기 대부분을 정밀 촬영하고 계측하여 집성하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다.
오르도스 청동기문화와 오르도스 청동기
오르도스 지역을 중심으로 한 내몽고 중남부지역의 청동기~초기 철기문화로는 주개구문화朱開溝文化(전21~14세기), 서차유형西 類型(전12~11세기), 노우만老牛灣 유적(전10~9세기), 도홍파랍유형桃紅巴拉類型(전6~5세기), 서구반유형西溝畔類型(전4~3세기)이 있다. 이 가운데 오르도스 청동기문화는 아주 엄밀하게는 도홍파랍유형만을 가리키나, 일반적으로는 서구반유형과 도홍파랍유형 직전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그 이유는 새 꼴 머리 손잡이 칼鳥形柄式銅劍, 학 부리 꼴 곡괭이鶴嘴斧, 구멍 머리 손칼穿孔首刀, 각종 짐승 꼴 치레거리 등으로 상징되는 도홍파랍유형의 청동기가 둥근고리 머리 칼環首銅劍, T자 꼴 머리 손잡이 칼T字形柄銅劍, 둥근고리 머리 손칼環首銅刀, 각종 짐승 꼴 대 머리 치레거리動物形杆頭飾 등으로 대표되는 서구반유형의 청동기와 양식적으로 동질적인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도홍파랍유형 전후의 기간 동안 내몽고 중남부 지역에서 성행한 오르도스 청동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먼저 무기류로는 둥근고리 머리 손잡이 칼, 두 둥근고리 머리 손잡이 칼雙環首銅劍, 새 꼴 무늬 뚫은 손잡이 칼透彫鳥文柄劍, T자 꼴 머리 손잡이 칼, 옆 머리 투겁 쪼는 꺽창 啄戈, 곤봉 머리棍棒頭, 버들잎 꼴 투겁 화살촉柳葉形 有 式鏃 등이 있다. 공구류로는 둥근고리 머리 손칼, 구멍 머리 손칼, 새 꼴 머리 손칼鳥首刀, 걸개 머리 손칼鉤柄刀, 네모 머리 끌方首鑿, 방울 머리 송곳鈴首錐, 버섯 머리 송곳 首錐, 학 부리 꼴 괭이, 대마디 꼴 손잡이 숟가락竹節柄勺 등이 있다. 거마구류로는 버들잎 꼴 말 얼굴 가리개柳葉形馬面飾, 심장 꼴 말 얼굴 가리개心形馬面飾, 잎사귀 꼴 말 얼굴 가리개渦文葉狀馬面飾, 각종 짐승(양, 학, 새, 고슴도치) 꼴 대 머리 치레거리杆頭飾 등이 있다. 치레거리와 패대류로는 새 꼴 둥근 혁대고리鳥形環狀帶 , 둥근 꼴 혁대고리圓形帶 , 물새 꼴 띠고리水禽形帶鉤, 짐승머리 꼴 치레거리獸頭形飾, 각종 짐승(호랑이, 표범, 여우, 말, 양, 소, 사슴, 학, 영양, 들돼지, 토끼, 용, 새) 꼴 다는 치레거리, 여러 구슬 연달린 치레거리聯珠飾, 짐승(뱀, 새) 꼴 머리 달린 구슬 치레거리獸頭珠飾, 두 귀 달린 구슬 치레거리雙耳珠飾, 숟가락 꼴 치레거리勺形飾, 바늘 꼴 치레거리飾針, 말을 타고 있는 사람, 서있거나 앉아있는 자세의 사람, 서있는 자세의 말과 사슴, 무릎을 끓고 앉아 있는 짐승(호랑이, 말, 사슴) 꼴 치레거리 등이 있다.
세계사적 견지에서 본 오르도스 청동기문화와 청동기
오르도스 청동기문화가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이 문화가 단순히 지역적 특색이 강한 북방 청동기문화라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오르도스 청동기문화는 오르도스 서쪽의 중앙아시아의 북방문화, 동쪽의 하가점상층문화와 동남구문화, 북쪽의 초원·유목문화, 남쪽의 중국 내지 문화가 서로 연결되는 가교 역할을 하였는데, 이 가운데 특히 동서 노선을 중심으로 한 북방문화의 상호 작용에 큰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오르도스 청동기문화를 내몽고 중부는 물론 동북아시아의 범위를 뛰어넘은 세계적인 성격의 문화로 볼 수 있다. 오르도스 청동기문화의 보편성은 북방문화권 공통의 청동무기가 유행하였다는 점 외에, 스키타이 동물 양식이 오르도스를 중개점으로 하여 그 동쪽의 하북성 북부와 내몽고 동남부 및 요서지역에, 토착적인 요소와 중국 내지의 요소가 결합되어 오르도스에서 독특하게 발생한 모경구형토기毛慶溝型土器가 서쪽으로는 감숙 북부에, 동쪽으로는 하북성 북부와 요서에까지 확산된 것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오르도스 청동기문화가 자신만의 고유한 특색이 전혀 없었다거나 무색무취하였던 것은 아니다. 오르도스 청동기는 각종 동물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동물 양식이 가장 특징적인데, 이러한 오르도스 동물 양식은 상대적으로 추상화된 스키타이 동물 양식과는 차별적이다. 동물 양식 외에 둥근 꼴 혁대고리, 짐승 꼴 치레거리, 귀 달린 치레거리, 숟가락 꼴 치레거리, 바늘 꼴 치레거리 등 또한 오르도스 고유의 것으로서, 주변의 북방 청동기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선사 미술의 요람 오르도스 청동기
20세기 중반 이후 오르도스 청동기에 대한 관심은 주로 고고학자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감이 있다. 고고학자들이 오르도스 청동기에 관심을 두는 것은 당연히 이 지역의 청동기문화를 유형화하고 편년하며 주변 청동기문화와의 상호 작용이 어떠하였는지를 살펴 보기 위함이다. 그런데 20세기 전반 세계 학계에서 오르도스 청동기를 처음 주목하였을 때는 고고학적 관점 보다는 미술사적인 시각이 더욱 컸다. 오르도스 청동기라는 이름을 탄생시킨 안델손이 그가 수집한 오르도스 청동기에서 가장 관심을 둔 것은 그가 수집한 거의 모든 청동기에 독특하게 형상화되고 문양화된 ‘동물 양식Animal Style’이었다. 오르도스 청동기와 관련하여 세간에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프랑스의 고고미술사학자인 셀몽A. Salmony이 시베리아 청동기와 중국 청동기를 비교하면서 거론한 오르도스 청동기 또한 청동기 그 자체의 양식적 특성이 아닌 청동기에 부수된 또는 청동기라는 화면에 형상화된 미술 자료로서의 동물 양식이었다. 이처럼 초기의 수집가와 연구자들이 오르도스 청동기를 미술사적인 입장에서 바라보았던 까닭은 오르도스 청동기의 가장 큰 특색이 청동단검이나 청동도끼 등의 이기류가 아닌 각종 동물상과 동물을 모티프로 하여 형상화해낸 소형 장식물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스키타이를 제외한 북중국 일대의 청동기문화 가운데 동물 양식이 종류와 수량, 모든 면에서 가장 발달한 문화가 바로 오르도스 청동기문화이다. 따라서 이제 오르도스 청동기문화를 더욱 생생하게 복원하기 위해서라도 그간 잊고 있었던 북방 선사 미술의 요람으로서의 오르도스 청동기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오르도스 청동기 상의 장식 문양과 동물 형상을 표현해낸 기법, 형상성, 형상의 변천, 맥락 등을 세계사적 견지에서 밝혀 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속에서 우리 선사 미술의 한 가닥이 찾아질지도 모를 일이다. 글 _ 오강원 (동북아역사재단)
출처: 오강원, 동북아시아 선사미술의 요람을 찾아서-오르도스문화와 청동기, [월간 예술의 전당] 4월호, 예술의 전당,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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