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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우항(金宇杭)
[본관] 김해(金海)
[생졸년] 1649년(인조 27)~1723년(경종 3) / 壽 74歲
[문과] 숙종(肅宗) 7년(168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2위(05/33)
[생원] 현종(顯宗) 10년(166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生員) 3등(三等) 70위(100/100)
[거주지] 한성([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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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우의정 김공 묘표〔右議政金公墓表〕
임인년(壬寅年,1722, 경종 2), 김일경(金一鏡)이 국정을 잡고서 맨 먼저 사친(私親, 장희빈(張禧嬪)을 추존하기를 청하자 조정의 의론이 여기에 휩쓸렸고 이어 대신과 수의(收議)하였다. 숙종조의 옛 신하들은 모두 유배되었고, 영부사 김우항(金宇杭) 공 홀로 병으로 인해 집에 있다가 분연히 일어나 “이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논의이다.”라고 논척하며 의견을 올리니 그 말이 엄정하였다.
당시 화색(禍色)이 날로 급박해져 자제와 빈객이 번갈아 간언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감히 우리 선왕을 저버릴 수 없다.” 하였다. 공은 지론(持論)이 고집스럽고 과격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남들에게 원망이나 미움을 사지 않았기에 남들이 간혹 공이 너무 너그러운 점을 문제 삼기도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모두 감복하였다. 군자가 말하기를 “사람은 응당 그 만년의 절의를 살펴보아야 한다.” 하였으니 참으로 그러하구나.
공은 자가 제중(濟仲)이니 김해(金海) 사람이다. 숭정(崇禎) 기축년(己丑年,1649, 인조 27)에 태어나 21세에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32세에 명경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을 거쳐 여러 번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철산(鐵山)에 유배된 것은 우리 숙조(叔祖) 도헌공[都憲公,이상(李翔)]을 구원하다가기사인(己巳人)에게 쫓겨나서이다.
갑술년(甲戌年,1694, 숙종 20) 다시 동류들과 함께 벼슬에 나아가 홍문관 수찬ㆍ교리를 지내고, 사간원 집의, 시강원 사서ㆍ필선ㆍ보덕으로 옮겼다가 통정대부에 올라 일고여덟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승정원 승지와 대사간은 극선(極選)된 것이다.
외직은 회양 부사(淮陽府使)와 남양 부사(南陽府使), 그리고 승진하여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와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냈다. 공은 번잡한 공무를 잘 처리하였으며 폐단을 혁파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데 힘써 부임하는 곳마다 은택을 남겼기에 초상화를 그려 공에게 제사 지내기도 하였다.
재차 도승지가 되고 육조(六曹)를 두루 거치고 이조 참판을 여러 번 지냈으며 대사성이 되었다. 공은 일찌감치 정승의 기량을 지니고 있었으나 조정에서는 이끌어주는 이가 적고 또 담박하게 묵묵히 있기를 견지하였기에 벼슬길이 대부분 순탄치 않았다.
공적이 성대해지자 성상의 지우가 날로 깊어져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있다가 형조 판서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이후로 4, 5년 동안 호조ㆍ병조ㆍ이조 삼조(三曹)의 판서를 번갈아 역임하고 중간에 한성부 판윤, 의정부 좌참찬을 지내고 수어사를 겸하였다. 공은 부지런하고 신중하게 봉직하며 대체(大體)를 지켰다. 전후로 호조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절용(節用)하여 재화를 넉넉히 만들었다고 일컬어졌다.
계사년(癸巳年,1713, 숙종 39), 예조 판서를 거쳐 어필(御筆)로 우의정에 제수되자 공이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사직하니, 성상께서 말하기를 “사직하지 마라. 내가 경의 관후(寬厚)한 도량을 알고 있노라.” 하였다. 공은 평소 양역(良役)이 편중된 것을 근심하여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루는 성상을 모신 연회에서 반복하여 아뢰고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니, 보는 자들은 공이 술에 취해 슬퍼한다고만 생각하고 공이 이처럼 지성으로 백성을 걱정하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또 일찍이 기존의 성곽을 보수하고 축조하기를 청하였는데 공의 논의가 모두 시행되지 않았고, 이후에 다시 탕춘성(蕩春城) 축조의 잘못을 극론하였다.
기해년(己亥年,1719, 숙종 45), 성상께서태조(太祖)의 성대한 고사를 따라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 기로연(耆老宴)에 참석한 이가 10명이었는데, 정승 이유(李濡) 공, 김창집(金昌集) 공 그리고 공까지 모두 내외종 형제들이라 당시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성상께서 공이 술을 잘 마신다고 특별히 한 잔 더 내리고, 어악(御樂)을 거두어 기로사에 보냈다.숙종이 승하하자 공은 애통한 마음에 더 이상 살려는 마음이 없었다.
이전에 공이 이돈(李墪)과 함께 정시(庭試)의 시관(試官)이 되었는데, 과옥(科獄)이 일어나자 이돈은 과거 응시자를 두루 찾아다닌 일로 유배되어 죽었다. 그 집안사람이 원통함을 호소하며 공을 끌어대어 증거로 삼았는데, 공이 사정(私情)을 쓴 진위를 다시 조사하기를 청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공을 의심하고 비방하니 마침내 이 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신축년(辛丑年, 1721, 경종 1) 8월, 대신들을 패초하는 명이 내려졌으나 공은 병이 심하여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새벽을 기다려 짧은 차자를 올리고 죄를 청하였다. 그래서 이날 밤에 건저(建儲)가 결정된 것을 공이 알지 못하였다. 당시 조정의 의론이 원래 공을 탐탁지 않게 여겨서 공의 차자 가운데 건저에 대하여 경하하는 말이 없다고 하면서 꼬투리를 잡아 죄를 청하였는데, 공은 태연한 마음으로 개의치 않았다.
얼마 뒤사화(士禍)가 일어나 네 명의 정승이 헤아릴 수 없는 화에 빠질 위기에 처해지자, 공은 마음속으로 그 억울함을 안타깝게 여겨 차자를 올려 구원하며살리기를 좋아하는논의를 힘써 주장하고 대관(臺官)을 국문해서는 안 된다고 논하였다. 박상검(朴尙儉)이 동궁을 해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일이 발각되자 곧장 그를 죽여 그 흔적을 없애버렸다.
공이 철저히 조사하여 신인(神人)의 억울함을 풀 수 있도록 청하였다. 흉당들이 이미 눈을 흘리며 공을 미워하였는데 공이 의견을 올리자 김일경(金一鏡)이 특히 으르렁댔으나 끝내 공을 해치진 못하였다. 무옥(誣獄)이 잇따라 일어나자 공이 다시 간언을 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남을 사주하여 공을 비방하게 만들었다.
공은 도성을 나가자마자 병든 몸으로 가마에 실려 돌아와 끝내 도성의 동쪽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이때가 계묘년(1723, 경종3) 3월 4일이었다. 성상께서 조회를 거두고 거애(擧哀)하였다. 지금 성상 을사년(乙巳年,1725, 영조 1), 충경(忠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공은 집안에서의 행실이 독실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이 전염병으로 목숨이 위태로울 때 공이 손가락을 베어 피를 받아 올리니 회생하여 결국 80세까지 사셨다. 형을 부친처럼 섬겼으며, 누이들이 모두 곤궁하였기에 매달 봉급을 떼어 도와주웠다. 평생토록 사람과 물건을 해치려는 마음이 없었으며 지위가 높아도 검약하고 공손함을 견지하였다.
일을 할 적에는 신중하여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찬란한 명성은 구하지 않았다. 입으로 당론(黨論)을 말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묻는 이가 있으면 그때마다 담소로 얼버무려 남들이 그 끝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국가의 큰 계책이나 사문(斯文)의 시비와 관계되면 반드시 피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은 천성이 화순(和順)하여 무능한 것처럼 공손하기만 했으나 마음속의 지조는 확고하여 뺏을 수 없는 점이 있었으니, 당화(黨禍)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지경에도 끝내 몸을 보전하고 또 아름다운 명성을 실추시키지 않음이 마땅하도다. 증조 휘 진선(盡善)은 의금부 도사를 지냈고 조부 휘 덕승(德承)은 사간원 헌납을 지냈으며 부친 휘 홍경(洪慶)은 부사를 지냈다.
모친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승지 광혁(光爀)의 따님이다. 이분들이은총으로 추증된 것은 모두 공의 품계에 따른 것이다. 공의 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부친이 승지에 추증된 세정(世禎)이다. 군자를 섬겨 덕에 어긋남이 없었는데 공보다 6년 일찍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공과 합장하였다.
아들 준희(俊煕)는 백부의 후사로 나갔고 언희(彥煕)는 목사를 지냈다. 딸은 각각 유수 송정명(宋正明), 목사 이사제(李思悌), 무과에 급제하고 참판을 지낸 신광하(申光夏), 군수 심보현(沈寶賢), 군수 이시선(李蓍選)에게 출가하였다. 측실 소생은 만희(晩煕)와 윤희(允煕)이다.
준희의 아들 원조(遠祚)는 진사에 합격하고 판관을 지냈으며, 언희의 아들은 기조(基祚)이다. 송정명의 아들 익보(翼輔)는 문과에 급제하고 감사를 지냈으며, 이사제의 아들은 규명(奎明), 문과에 급제하고 정언을 지낸 규채(奎采)이다. 내가 일찍이 낭관으로 있을 때 평소 공의 덕과 기량에 감복하였는데, 언희가 비석을 세우려고 나를 찾아와 비문을 청하기에 마침내 이와 같이 써서 비석의 뒷면에 새기게 하였다.
장단(長湍)의 용두리(龍頭里)는 바로 공의 선영이다.공이 일찍이 묘도(墓道) 공사를 할 때에는 송도(松都) 사람이 지역을 넘어서까지 힘을 보태주었고, 공의 장례 때에는 또 늙은이와 어린아이가 서로 이끌고 와서 상여줄을 잡은 채 눈물을 흘리고 떠났다.계해년(1743, 영조19), 선영의 구역 내 자좌(子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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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우의정 김공 묘표:
저자가 김우항(金宇杭, 1649~1723)을 위해 쓴 묘표이다.
[주02] 철산(鐵山)에 …… 구원하다가:
이상(李翔)이 중대한 옥사를 느슨하게 처리했다는 이유로 관직을 삭탈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이때 김우항(金宇杭)은 그를 변론하
며 명을 환수시키기를 청하였다. 이후 기사사화가 일어나 남인들이 뒤늦게 이상을 논죄하여 감옥에서 죽게 만들었다.
《陶谷集 卷21 議政府右議政金公諡狀》
[주03] 기사인(己巳人):
1689년(숙종15) 기사환국 때 정권을 잡은 남인들을 가리킨다.
[주04] 태조(太祖)의 성대한 고사: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1394년(태조3) 60세의 나이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일을 말한다.
[주05] 성상께서 …… 보냈다:
1719년(숙종 45) 4월 18일에 숙종이 경덕궁(慶德宮)의 경현당(景賢堂)에서 연회를 베풀도록 명하고 기로소에 들어간 열 명의 신
하를 불러 하루 종일 함께 즐겼다. 숙종이 친히 은잔을 내려 술 다섯 잔을 모두 비우도록 명하였는데, 신하들 가운데 어떤 이는 주량
이 약하여 다 마시지 못하였다.
그러나 김우항(金宇杭)은 이 술을 사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내려주는 잔마다 기어이 모두 마셨다. 그러자 성상이 말하기를,
“김 판부사가 술을 잘 마시니 함께 대작할 만하다.” 하고 술 한 잔을 더 내리라고 명하였다.
또 신하들이 이어서 하사한 술잔을 받들고 기로소로 돌아가 마실 것을 청하자, 숙종은 어악(御樂)을 거두라고 명하고 앞장서서 기로
소로 갔다.《陶谷集 卷21 議政府右議政金公諡狀》
[주06] 사화(士禍):
신임사화를 가리킨다.
[주07] 살리기를 좋아하는:
순(舜) 임금의 살리기 좋아하는 덕[好生之德]을 가리킨다. 법관인 고요(皐陶)가 순 임금을 찬양하면서 “죄의 경중이 의심스러울 경
우에는 가벼운 쪽으로 처벌하고, 공을 세운 경중이 의심스러울 경우에는 중한 쪽으로 상을 주었다. 또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형법대로 집행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감수하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書經 大禹謨》
[주08] 은총으로 추증된 것:
증조 휘 진선(盡善)은 이조 판서에, 조부 휘 덕승(德承)은 좌찬성에, 부친 휘 홍경(洪慶)은 영의정에, 모친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정경부인에 각각 추증되었다.《陶谷集 卷21 議政府右議政金公諡狀》
[주09] 공이 …… 떠났다:
김우항(金宇杭)이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있을 적에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가 고을을 떠난 후에 생사당(生祠堂)을 세워서 제
사를 지냈다. 훗날 김우항이 선조의 묘소를 잘 꾸미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자 장정을 차출해 비석을 운반하여 세워 주었고, 그를 장사
지낼 때에 또 일제히 묘소 아래에 와서 눈물을 흘리며 발인을 돕고 떠났다. 《陶谷集 卷21 議政府右議政金公諡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