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학년 때 단체사진
56년 5학년이 됐다. 학교에선 공부 잘하는 모범생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나 역시 공부가 취미인양 되었다. 그때 공부는 원리를 이해하고 응용하는 능력 배양보다는 무조건 암기식이고 주입식이니 암기에 뛰어났던 내가 두각을 나타내는 게 당연했다.
어느 날 3.1일 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33인의 이름을 외어 오라는 숙제도 하룻밤사이에 암기해서 나만 칭찬을 들었다. 또 독립선언서를 외어오라는 숙제에 밤새 외우다 포기하고 울며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의 대학생들도 읽기 힘들고 난해한 독립선언서를 통째로 암기 시켰으니 지금 생각하면 무지막지한 교육방법이다. 그 선생님의 존함은 잊었지만 우리들 사이에서는 2차 세계대전의 원흉인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라고 불렀다. 외모도 역시 히틀러와 비슷하셨다..
이때부터 이상하게도 부끄럼과 수줍음이 몸에 배어 소극적인 성격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공부는 학급에서 1,2등인데 나서서 발표하거나 선두에 나서야 하는 일에 망설이는 내성적인 성격이 되었다. 아마 본 탕이 수줍음을 잘 타는 성격이었는지 모르겠다.
학교는 지금의 충무로 4가와 3가 사이에 있었고 우리 집은 장충동이라서 등하교 거리가 상당히 멀었으나 한 번도 결석하지 않았다. 등하교 길은 지금의 퇴계로거리인데 당시는 허허벌판과 다름없었다. 그때 지금의 대한극장과 샘표간장 공장이 길옆에 세워졌고 당시로서는 큰 건물이었다. 한 겨울에 그 앞을 지날 때면 긴 그늘이 들어 몹시 추웠던 기억이 난다.
57년 6학년이 됐다. 학교에서도 최고 상급반이 되었다. 1년 후면 상급학교인 중학교에 입학해야한다. 당시 중학교는 자유경쟁체제였고 입시경쟁이 치열했다. 그래서 입시지옥이니 과외열풍이니 치맛바람이니 하는 신조어들도 신문을 장식했다. 치맛바람은 자식의 입시공부에 과잉으로 간여하여 무리를 빗는 엄마들의 행태를 말한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본격적으로 입시를 위한 공부에 몰두하게 되었다. 학교 수업 형태는 온통 중학교 입시 대비식이고 저녁 늦도록 공부를 시켰다. 당시 각 초등학교에서도 세칭일류 중학교에 많이 입학시키는 것이 지상목표였다. 입시가 끝나면 도하 일간지에 일류 중학교 합격생 명단이 실릴 정도였다. 일류중학교에 많이 합격시킬수록 해당 교장선생님이나 담임선생님들을 행정상으로 상응하는 혜택도 주워졌다.
당시의 일류중학교는 서울 경기 경복 용산 경동중학교로 모두 공립학교가 우선이었다. 이들 학교 출신들이 아직도 시회지도층에서 활약하는 걸 보면 당시의 입시 열기는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사립학교로는 중앙 보성 배재 중학교가 손꼽혔고 여학교로는 공립은 경기 수도 무학 창덕 그리고 사립은 이화 진명 배화 풍문 정도가 알려졌다.
1류학교, 2류학교, 3류학교가 공공연하게 구분되고 또 인정되던 시절이었다. 깡패학교나 똥통학교라는 비속어도 통용됐다. 1류학교 학생들은 선망의 대상 이였고 그렇지 못한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의 열등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거다.
어린 학생들에게 까지도 입시가 과열되고 사회적 병폐가 되자 훗날 박정희 정부에서는 강력한 통제와 강압적인 방법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순차적으로 평준화 시켰다. 잘 한 일이다.
그러나 그 후 무시험 추천입학제도 속에서도 또 다른 제도적 지역별 우열이 생겨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강제로 평준화시켜 그 후유증을 없애긴 했으나 사람 사는 곳에는 어떤 식으로라도 우열과 경쟁이 있기 마련이니 어쩌랴......
첫댓글 모교의 앨범을 다시보니 그 엄하시고 무섭던 5학년 때 선생님 존함이 김영선 선생님이시네. 교육방법은 일제 시대식이었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요즘의 자율적인 민주식 교육보다는 더 효율적이었던 것 같해요. ㅎ
단체사진을 갖고 계시는군요 선배님...부럽습니다..
선배님 글을 읽으면서
당시 공부했던 모습이 조금씩 머리 속에 그려집니다..물론 공부도 못 했고
열심히 하는 모습도 없었던...초라한 모습이 말입니다..
다음 글을 기대해 보겠습니다....좋은 하루 되세요 선배님,,,!!
저의 어머님께서 90세로 아직 구존하고 계신데 자식들 어린시절 비품들을 30년전까지 보관하시다 보관하던 지하실에 누전화재가 발생해서 졸업장 상장 성적표 노트 필기장 당시 우리가쓴 일기장등등 거의소실됐습니다 당시를 회상할 수있는품목들인데 아깝기만 합니다ㅎ
충무로에 대한극장은 누구나 다 알겠지만~~ ~~
저의 국민학교 다닐때도 극장 건너편 일신학교쪽으로,
샘표간장 소규모 공장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방과후 퇴교길에 간장공장 앞에서 간장 냄새맡고 간 기억들이 납니다~~~!!
선배닝 말씀에 새롭게 기억이 살아 납니다~~~
입시경쟁, 과외열풍, 당시 학교별 랭킹, 그게이드 등은 비슷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글을 읽고 새록새록 정감이 드는 기억들이 줄곳 생겨 납니다~~~!!
감사 드립니다~~~~!
ㅎㅎ 그 대한극장 건축할때 쌓아놓은 자재들속을 헤집고 다녔고 샘표간장 보관 탱크에 올라가보니 죽은 줘가 둥둥 떠있던걸 본 기억도 납니다ㅎ 지금같으면 큰일 날일인데 ㅎ격세지감입니다 ㅎ
선배님 저희 여학생들도 선생님을 별명으로 부르던 생각이 나네요^^
저 위학년부터 일명 뺑뺑이로
중학교를 가게 되서
친구들과 부둥켜안고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ㅎㅎ
벌써 훌쩍 커버린 선배님 어린시절에
또 무슨 일들이 있을지 기대됩니다 ^_^
아~ 뺑뺑이 세대시구나 ㅎ 뺑뺑이~ㅎㅎ 한 동안 유행어였지요 ㅎ 그렇네 이 글 처음 시작할 때 4,5세부터 언급했는데 벌써 6학년이 됐군요 다음회엔 일신도 졸업이예요ㅡ ㅎ 세월 참 빠르다ㅎ
전 어린시절 놀기만 좋아했었지요. 1류중학교 입학 해야 한다는 중압감은 계속 귀로 못이 박히게 들었습니다. 놀면서도 거기(1류 중학교) 못들어가면 어떻하지..... 머릿속은 그러하면서 놀기만을 좋아 했담니다. 놀기 좋아하는 천성이 어딜 가나요?(^&^)
공부도 특기인데 전부강제로 일률적으로 시키니 멀마나 힘들었겠어요 요즘엔 자기가 좋아하는것만 해도 잘~살잖아요 ㅎ 세상은 지식보다는 지혜로 사는건데 놀다보면 알맞는 지식과 지혜가 함께 쌓이니 마총무님이 최고로 멋지게 살아 온겁니다ㅎ
국민학교 입학전에 인현동에 살았는데 엄마 심부름으로 노란 주전자들고 샘표간장 공장에서 간장 사오던 생각이 나네요 나무로 만든 커다란 통에서 네모로된 나무국자로 주전자에 담아주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선배님 글 재미있게 읽고있읍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좋은글 감사합니다
인현동! 충무로4가 파출소옆으로 골목길이 있었지요 그길로 내려가면 인현시장이 나오고요 눈에 선해요 그골목 중간쯤에 젤 친했던 친구가 살아서 거의 매일 다녔고 중학교 다닐때도 자주 다니던길입니다 그 친구는 이 글에서도 언급되는 단짝였는데 중학교시절까지 같이 다녔어요 암튼 인현동에 사셨다니 갑자기 그일대가 눈에 삼삼해요 지금은 그파출소 위쪽은 세운상가지만 아랫쪽 그골목은 어떻게 변했는지?그대로 옛흔적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반갑습니다
@구름정 지금도 그때의 모습은 아니지만 인현시장의 일부가 건재해있고 재개발 지역으로 수십년간 묶여있었기에 슬럼화된 예전의 집들이 인쇄계통 작업장들로 바뀌긴했지만 지금의 서울이 변화된 모습들에 비하면 정지화면을 보는것 같은 인현동의 모습이랍니다..
선배님께서 날잡으시고 그곳을 찾으신다면 아마도 깜짝 놀랄정도로 변하지 않은 지난날들의 골목과 집들을 만나실 수 있을꺼예요.. ㅎㅎ
@맨날청춘(최상호)14 의외로 변하지 않은 옛집 보면 반갑더라고요ㅡ 올봄에 옛날 국민학교때 살았던 장충동집에 갔더니 그때 그집이 그대로 있어 참 신기했어요 인현동도 언제 날잡아서 돌아봐야 겠어요 ㅎ
5학년때 독립선언문 암송, 햐 ~~~ 전 고등학교 국어책에 나왔던 걸루 생각됩니다만 생소한 한자어가 많이 있어 그 뜻 새기기가 쉽지않았습니다. 선명한 사진옆에 서 계신 선생님의 굳은 모습에서 시대의 아픔과 함께 노여움도 읽혀집니다. ~ ~ ~ ***
고3 국어 교과서에 실렸지요 그걸 국민학교 5학년 어린이보고 외어오라고 했으니ㅎ 그때 공약3장도 함께 읽어 봤어요ㅎ저 선생님을 당시 참고서인 동아전과와 교과서를 통채로 암기 시켰어요 옛날 서당서 훈장선생님이 천자문을 홰초리들고 암기시켰듯이 말입니다ㅎ 훗날보니 암기하면 그뜻도 언젠가 저절로 깨우쳐지니 그 선생님나름의 교육철학이었을 겁니다 ㅎ다 추억이지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