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하, 그 실낱같은 보도자료의 키워드를 붙들고 처절하게 인터뷰를. (웃음) 이게 또 다 되는구나. 가능하네. 그러네.” 인터뷰를 하다 말고 웃는 소리를 들으니 어떤 순간에도 좀체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는 봉준호 감독 그대로다. 반갑다. 지난해 5월 18일 크랭크인, 약 4개월간(9월 19일 크랭크업)의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을 마무리 짓는 단계에서 봉준호 감독을 만났다. <기생충>(제작 바른손이앤에이, 제공·배급 CJ엔터테인먼트)은 <설국열차>(2013), <옥자>(2017)로부터 8년, 전작 <마더>(2009) 이후 10년 만에 다시 충무로로 돌아와 만든 프로젝트로 국내뿐만 아니라 가까이는 5월 열리는 칸국제영화제 조직위, 세계 영화 팬들의 조급증을 증폭시켜온 작품이다. 자본주의사회, 서울 도심에서 살아가는 두 계급의 충돌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중년의 봉준호 감독이 보는 대한민국의 현재를 적나라하게 그리게 될 것이라는 짐작도 가능케 한다.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에서 각인된, 코믹한 모습 안에 페이소스를 갖춘 봉준호의 페르소나 ‘소시민 송강호’ 캐릭터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은 물론, <마더>로 이미 경험한, 지는 해와 부는 바람을 기어코 잡아내고야 마는 홍경표 촬영감독과 봉준호 감독이 만들어내는 극강의 비주얼을 다시 경험할 수 있다는 흥분도 감출 수 없다.
공개된 스틸 3장, 대여섯줄의 시놉시스가 지금까지 알려진 <기생충>의 전부. 충무로에서도 아직까지 <기생충>의 모든 것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있다. “참여한 스탭들이 몇명인데, 그래도 다 알겠죠”라고 봉준호 감독은 말하지만, 기실 비밀유지각서까지 있다는 소문이 돈 <기생충>에 관해 아직까지 알려진 단서는 거의 없다. 그러니 이번 인터뷰는, 짐작과 추측의 피스를 잔뜩 모아가서 맞추는 퍼즐에 가까울지 모른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장르의 법칙 안에서도 항상 그 법칙과 동떨어진 문법으로 완성되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다른 누군가의 작품이 아닌,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을 들여다볼 때 보다 정확한 해답이 나오는 구조다. 그와의 인터뷰는 그래서 영화라는 완성된 퍼즐을 보지 않고서도 충분히 추측하는 과정이 기꺼이 즐거운 조각 맞추기다. 전원 백수인 기택(송강호)의 집과 IT업계 박 사장(이선균)의 집. 어쩌다 두집 사이에 생긴 대결 구도. 연결고리는 기택의 장남 기우(최우식)가 하게 된 고액 과외. 이 키워드를 가지고 기생충을 해부하듯 들여다본 인터뷰 사이, <플란다스의 개>(2000)에서 강아지 실종사건에 연루된 아파트 주민들과 <괴물>의 한강매점 식구들, <옥자>의 산골 마을 식구들 같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속 얼굴이 다시금 떠올랐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이 지금까지 연출한 작품들과 굳이 비교하자면 “아주 잔잔한” 영화라고 말한다.
잔잔한 가운데, 거대한 사건. “그 부분이 바로 가까운 개봉관에서 확인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아무리 잔잔한 영화라고 해도 두 시간 내내 평온하게 갈 리가 있나. 계획했던 것과 계획하지 않았던 것, 예측하지 못했던 부분들로 영화는 결말을 향해 돌진해 가는 거니까.” 관객이 극장에서 확인할 ‘그것’을 제외하곤 거리낌 없이 <기생충> 설계의 모든 것을 말한 봉준호 감독과의 인터뷰를 옮긴다(4월 첫째주를 기준으로 <기생충>은 15세 관람가, 상영시간 132분으로 확정됐다).
● 시놉시스(영화사 제공 시놉시스를 그대로 옮긴다.)_ “같이 잘 살면 안 될까요?” 전원 백수로 살 길 막막하지만 사이는 좋은 기택(송강호) 가족. 장남 기우(최우식)에게 명문대생 친구가 연결시켜준 고액 과외 자리는 모처럼 싹튼 고정수입의 희망이다. 온 가족의 도움과 기대 속에 박사장(이선균) 집으로 향하는 기우. IT기업 오너인 박 사장의 저택에 도착하자 젊고 아름다운 안주인 연교(조여정)가 기우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두 가족의 만남 뒤로,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인터뷰를 후반작업 후로 몇 차례 미뤘다가 드디어 성사됐다. 현재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는 말로 여겨진다.
=후반작업도 이제 거의 끝났다. 아주 자잘한 수정 사항들 몇개만 하면 된다.
-한창 편집 중인 한 감독이 말하길, 본인 영화를 계속 보고 있으려니 ‘촬영 때 더 잘했어야 했다’ 후회되는 장면들이 보인다며, 그런 면에서 봉준호 감독은 얼마나 행복할까, 봉준호 감독 영화를 보니, 라고 하더라. 영화계에 이런 추측들이 팽배하다. (웃음)
=그리 상상해주니 고마우면서도 야속하네. 남의 타는 속도 모르고. 자기 영화 보면서 기분 좋고 만족스러운 감독은 아무도 없을 거다. 내가 보면서 스스로 즐거울 거라고 추측한다니 속절없네. (웃음)
-덧붙여 <씨네21>에서 연초에 각 투자·배급사 관계자들에게, 올해 가장 기대되는 경쟁사 작품을 꼽아달랬더니 거의 대부분 <기생충>을 언급한 것도 무관하지 않은 반응이다.
=큰 짐이다. 그 기대치를 어떻게 낮출 수 있을까 고민 중이다.
-기대하는 데에는 <마더> 이후 10년 만의 한국영화 프로젝트라는 데도 있다.
=<옥자>도 한국에서 찍었다. (웃음) 달러를 불태워서 한국 배우들과 한국에서 찍은 건데 ‘한국 귀환’, 이런 수식이 들린다. 막상 작업하는 나는 별 차이를 못 느낀다. 영화를 계속 찍었다는 것밖에는.
-<마더> 이후 한국영화계 프로덕션의 가장 큰 변화는 역시 표준근로기준법이 적용되는 현장이었다는 점일 텐데.
=그게 아주 좋더라. 나이 들면서 체력이 저하돼서 표준근로 계약이 아니면 어땠을까 싶다. <설국열차>와 <옥자>를 거치면서 미국식 조합 규정에 따라 찍는 걸 체득했다. <옥자>가 뉴욕 로케이션, 강원도 산속까지 가서 촬영하는 등 힘든 현장이었지만 77회차였고, <설국열차>는 기차 세트인 데다 도끼전투 같은 복잡한 장면이 많았지만 76회차에 찍었다. 지난 8년간 트레이닝되어 이번에 표준근로 계약에 맞춰서 하는 게 문제없고 편하더라. <기생충>도 후반부 눈 오는 장면을 포함해 77회차에 끝냈다. 예정된 스케줄에 오차 없이 마쳤다.
-제작사로서는 전반적인 제작비 상승에 따른 고충도 없지 않다.
=좋은 의미의 상승이라고 본다. 이번에 연출부 막내에게 슬쩍 급여를 물어보기도 했는데, 이제는 미국이나 일본 스탭에 뒤지지 않더라. 내가 고용관계에서 이들에게 갑은 아니지만, 이들의 노동을 이끌고 예술적인 위치에서 갑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나의 예술적 판단으로 근로시간과 일의 강도가 세지는 것이 항상 부담이었다. 이제야 ‘정상화’돼 간다는 생각이다.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플랫폼의 변화
-그사이 넷플릭스에서 <설국열차>를 드라마로 리메이크 중이다. 제안이 있었을 텐데 직접 연출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설국열차>는 미국 투모로 스튜디오와 스튜디오 T, 한국의 CJ엔터테인먼트가 참여하는데, 이미 시즌1 촬영은 끝났고 내년에 송출된다. 드라마와 관련해서 제안은 지난 3~4년간 넷플릭스 말고도 여기저기서 많이 왔다. 파일럿만 해볼 생각 없느냐는 제안도 있었는데, 계속 거절했고 그게 소문이 났는지 이제는 제안이 거의 안 온다. 박찬욱 감독님도 이번에 <리틀 드러머 걸> 하면서 속도 때문에 고생 좀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드라마 제작 속도나 템포를 못 따라가겠더라. 그 리듬에 맞는 분들이 따로 있는 것 같다.
-<기생충> 촬영하는 사이에 플랫폼의 변화도 요동쳤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2018)는 칸의 초청을 받지 못했지만 이후 베니스와 아카데미가 손을 들어주며, 넷플릭스가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안착하는 하나의 길을 열어줬다. 지지난해 역시 넷플릭스와 함께 했던 <옥자>가 작품 그 자체와 더불어 플랫폼으로 인한 이슈를 낳았던 당시와 또 다른 분위기다.
=<옥자> 개봉 당시에는 개봉, 배급 방식만 가지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니 피곤한 부분도 없지 않았다. 나도 좀 천천히 할걸 그랬다. 너무 앞서서 했다가 지뢰제거반처럼 온갖 지뢰를 다 밟은 것 같다. 지지난해 칸에서 알폰소 쿠아론 감독님을 만났는데 그때쯤 <로마>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을 거다. 얄미운 양반이다. (웃음) 그런데 <로마>는 정말 비할 데 없이 훌륭한 영화다. 뭔가 새로운 레벨의 작품을 본 것 같고, 넷플릭스냐 아니냐 이런 논의가 작품 앞에서 무색해지더라.
-<옥자>가 지금 현재도 전세계 신규 관람객이 유입되는 플랫폼에서 ‘상영 중’이라는 건 창작자에게는 한정 개봉되는 극장 상영과는 또 다른 자극이 될 것 같다.
=온라인 네트워크상에 디지털 방식으로 아카이빙되어 있다고 해야 할까. 다행히 넷플릭스가 기술적으로 4K나 애트모스 등 화질, 사운드에 대한 집착이 강한 편이라 좋은 퀄리티로 보존되어 있어서 그런 면이 나쁘지 않다. 대신 그들이 극장에 대해서 좀더 유연한 태도를 가졌으면 좋겠다. 그 당시에 나도 그 조건 때문에 밀고 당기고 실랑이를 많이 해야 했다. 영화는 극장에서 최상의 환경으로 보는 게 제일 좋긴 하다. 나도 <옥자> 때문에 집에 돌비 애트모스를 갖췄는데, 파주 명필름 아트센터의 상영 시스템을 따라갈 순 없지.
-<옥자> 상영 당시 관객과의 대화(GV) 행사를 명필름 아트센터에서 할 때, 감독님이 극장 상영 시스템의 퀄리티를 보면서 놀이공원에 간 어린아이처럼 흥분하던 걸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웃음) <옥자>로 경험한 기술 퀄리티의 향상은 지금의 <기생충> 제작에도 상당히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기생충>도 4K에 돌비 애트모스로 작업했다. 4K로 CG까지 최종 아웃풋을 한 건 <기생충>이 최초일 거다. 카메라도 <옥자> 때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이 고민 끝에 썼던 아리 알렉사65다. 홍경표 촬영감독님이 그 카메라에 크게 만족해서 다시 썼다.
-확실히 <옥자>를 거친 이후엔 기술적으로 타협의 기준점이 높아진 것 같다.
=거기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건 아니고 좀더 미래의 포맷이라는 생각이 든다. 육안으로 식별하지 못한다, 콘텐츠가 없다, 라는 이유로 뭣하러 저렇게까지 하냐는 말도 있지만 지금은 8K로 TV생산도 하고 있지 않나. 스마트폰에서도 4K 동영상을 찍고 있으니, 4K는 곧 일반화될 것 같다. <기생충>은 기술적인 사양을 과시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런 기술적 퀄리티 차이가 컸고 후반작업하면서 특히 많이 느꼈다. <로마>가 잔잔한 가운데 그 동네의 일상적인 소리를 잡아내는 것처럼 <기생충>도 인물들의 결을 살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동네의 느낌을 뒷받침해주는 그런 작업을 많이 했다. 인물들이 가진 결이나 감정을 잡고, 배우들이 말하는 섬세하면서도 뉘앙스가 풍부한 대사를 잡았다. 돌비 애트모스가 꼭 전쟁영화에서 때려부수고 하는 장면에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스펙터클한 액션, Si-Fi 장르가 아니지만 확실히 그 위력을 발휘하더라. 물론 이런 기술이 예산을 상승시키는 것은 불가피한데, 제작·투자사에서 그 부분을 서포트해줘서 나나 홍경표 촬영감독님, 사운드팀이 원없이 작업했다.
-감독님 필모그래피 안에서의 기술적 변환, 필름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은 그러니까 <옥자>가 기준점이 되겠다.
=<설국열차>까지 다 35m 필름영화였다. 충무로에서 가장 늦게까지 필름을 붙들고 있다가 <옥자>와 <기생충>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넘어온 거다. 홍경표 감독님과도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거창하게 말하면 테크놀로지에 맞는 미학을 찾아내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결국은 이 모든 게 스토리와 인물을 위한 거지 않나. 그런 면에서 접근하고 보니 현재의 디지털 기술, 카메라 성능 등 좋은 면이 많이 있더라. 그럼에도 역사적 유물을 보존하는 느낌으로 필름영화를 다시 찍어보고 싶긴 하다.
-지금은 그 작업이 더 어렵게 됐다.
=뉴욕과 LA에 필름 현상소가 하나씩 남아 있고 프랑스에도 하나 있다.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과 그 이야기를 한 적 있는데 최근에 필름 작업을 했다고 하더라. 필름으로 촬영한 후 그걸 4K, 8K로 전환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J. J. 에이브럼스, 쿠엔틴 타란티노, 크리스토퍼 놀란 등 감독 몇몇이 연합해서 코닥 본사에 보증서를 썼다고 들었다. ‘너네가 1년에 이만큼 생산하면 그건 우리가 책임지고 소비하겠다’고. 안 그래도 지지난해 칸에 코닥 관계자가 와서 한정 수량 필름을 생산한다며, 내게 ‘당신도 필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이 체인에 들어와라’라고 하더라. 나야 좋다고 했지. (웃음)
-감독 리스트로 볼 때 스튜디오에 필름 사용으로 인한 제작비 상승을 요구할 수 있을 만한 힘 있는 감독들의 집합체다.
=모두가 그리로 다시 돌아가자는 운동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한두곳 정도 남아 있는 것은 괜찮은 것 같다. 분명 보존시킬 필요는 있다. 또 동시에 <기생충>처럼 디지털 포맷으로 나름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작업도 할 수 있고. 어느 하나만 고집하는 게 아니라 같이하면 된다.
-<기생충>까지 더해보면 감독님 영화의 제목에 동물류가 적지 않다. <플란다스의 개> <옥자>에 이어 이번엔 <기생충>으로 넘어왔다.
=편충, 요충, 십이지장충, 회충. 요즘 세대들은 잘 모를 거다. (웃음) 채변검사 하지 않았나.
-채변검사를 모르는 세대가 더 많을 텐데. (웃음) 하여간 최근엔 비하의 의미로 널리 사용되는 단어다.
=영화에 기생충이 나오지는 않는다. 의사도 생물학자도 나오지 않고. 어떻게 보면 비유적인 표현인데 나쁜 비유다. 세상 누가 기생충이란 소리를 듣고 싶고, 또 누구를 기생충이라고 부르고 싶겠나. 글자 하나만 바꾸면 ‘상생’, ‘공생’에서 모든 형태의 리스펙트가 없어지고 말의 뉘앙스가 곤두박질친다. 한쪽 사이드를 비난하는 일방적인 관계가 되는 거다. 그 곤두박질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분법적인 사회를 비판하는 우회적인 제목도 많을 텐데 제목까지 끌어온 건 흥미롭다. 한국영화에서 ‘충’(蟲)이라는 센 글자는 김기영 감독의 <충녀>(1972) 이래 처음 아닌가. 장르적인 색깔이 도드라지는 제목이기도 하고.
=김기영 감독님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웃음) 더해서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일본 곤충기>(1963)도 함께 떠올렸고. 두분 다 ‘충’자를 한번씩 제목으로 썼다. 포스터도 한자를 강렬하게 써서 보여줬고. 내가 두 감독을 좋아하니 ‘충’자를 넣을 때 오는 이상한 영화적 쾌감이 있더라. 관객에겐 이게 좀 셀 수도 있을 테고, 그래서 결정 과정에서 이견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제목을 붙일 때 일부러 더 위악적인 느낌을 주고 싶더라. 돌이켜보면 <살인의 추억> 때도 그 제목을 반대하는 사람이 엄청 많았다. 살인이 어떻게 추억이 되냐, 제목부터 너무 세다, 무섭다, 부정적이다 그랬다. 그런데 개봉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익숙해진거지. <기생충>도 당혹스러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영화를 보면 수긍할 만한 제목이기도 하다.
-현재 공개된 세장의 스틸만으로 유추해보면 그런 센 이미지는 연상이 안 된다.
=그 스틸이 전부일까. (웃음) 아니, 아주 잔잔한 가족 드라마다. 잔잔하다, 아주.
-잔잔한 대사의 액션이 예상되었던 게, 올해 초 <씨네21>에서 <기생충> 홍경표 촬영감독과 <리틀 드러머 걸> 김우형 촬영감독의 대담을 진행한 적 있는데, 당시 홍 감독님이 <기생충>을 두고 ‘한국어를 뿜어내는 영화’라고 한 말은 의미심장하게 짚어볼 만하다. “<옥자>를 찍으면서 한국어를 쓰지 못해 한이 맺혔나”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분이 그냥 농담하신 거고. (웃음) 인물이 워낙 다채롭다. 두 가족, 구성원당 4명씩 총 8명의 메인 캐릭터가 있다. 누구 한명이 중심이 아니라 각각 풍성한 에피소드가 있다. 말의 잔치까지는 아니지만 각 인물의 상황을 쫓아가다보니 대사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자화자찬은 아니지만 웃긴 대사들을 포함해 다양한 대사들이 난무한다. 게다가 또 기우가 과외를 하지 않나. 과외를 하다보면 애한테도 말해야지, 학부모와도 의논해야지,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대사가 많아졌다.
-<설국열차> 이후 영어 대사를 써왔고 영어 대사가 들어갈 틈도 엿보인다. 가령 기우가 가르치는 과목이 영어가 아닐까 하는. (웃음)
=맞다. 영어 가르치고, 학부모 연교(조여정)의 기습적인 영어 대사가 있다. <기생충>에도 영어 대사가 꽤 나온다. 한국어, 영어가 혼용되는 영화를 계속 하고 있는 거지. 그래서 나에겐 더더욱 <설국열차>나 <옥자>나 다 마찬가지 작업처럼 보인다.
정신적 박탈감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까
-부모와 자식이 완벽하게 충족된 두 가족의 만남이란 점에서 전작들과 차별화되는 가족 구성원이다.
=전형적인 가족 구성원 형태를 띤 것은 이번이 최초다. <괴물>은 엄마가 없었고, <마더>도 엄마와 아들만 있고, <옥자>도 미자(안서현)의 부모가 무덤으로만 등장하고 할아버지와 손녀만 살았다. 사회에서 규정한 구성원 중 누군가가 없다는 게 나쁘다는게 아니라 상황이 늘 그랬다. 지금은 가족 구성원 자체는 완벽하게 두 세트로, 그들간에 재밌는 일들이 벌어진다. ‘가족’이라 뭉뚱그리면 전작의 연장선에 있지만 기존 작품들과는 기본 스트럭처(짜임새)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기존 작품에서 상당수 캐릭터가 직업을 가진 노동자였다면 <기생충>의 기택네는 전원 백수로 살 길이 막막한 가족이다. 청년, 중년 실업 문제를 앓는 지금의 사회문제가 단도직입적으로 응축된 설정이다.
=맞다. <괴물>에서는 멀쩡하게 매점을 해 호구지책이 확실했다. <마더>에서는 김혜자 선생님이 약도 썰고. 그런데 기택네는 일이 없다. 물론 수십년간 이 4인 가족이 다 일을 안 했겠나. 이들도 일했던 사람들이고 또 하려고 한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는 이 시점에 일이 없어서 아등바등하는 거다. 그 실낱같은 보도자료의 키워드를 붙들고 처절하게 인터뷰를 (웃음) 이게 다 또 되는구나. 가능하네. 그러네 전원 백수. 맞다, 전원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 전원이 무직인 상태에서 영화가 시작하지만 기우의 과외 자리가 생길 것 같으면서 부잣집으로 간다. 요즘 과외 자리 얻기가 만만치 않다. 네트워크도 있어야 하고. 대학 때 나도 과외 일을 해봤는데, 조금만 방심하고 긴장의 끈을 늦추면 한달을 못 채우고 해고된다. 고용관계 자체가 취약한데, 그마저도 자리가 귀하다. 전원 백수인 상태에서 아들이 처음으로, ‘좋은 균열’을 내면서 일하러 가는 거다.
-기우를 연기하는 배우 최우식은 <옥자>에서 ‘1종 면허는 있지만 4대 보험은 없다’는 대사로 비정규직의 부당함을 설파하던 글로벌 기업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트럭 운전사였다. 지금의 청년세대 고용 문제에 대한 관심사를 반영해 감독이 심어놓은 연결고리 같다는 생각도 든다.
=기우에게는 청년세대를 대변하는 듯한 느낌이 있다. 그런데 8명의 인물이 극 안에서 산술적으로는 균등한 비중이다. 거기는 배우 자체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존재감도 큰 역할을 한다. 아무리 그라운드에서 축구선수 11명 중 하나라도 메시에게서는 거대한 광이 뿜어져 나오지 않나. (송)강호 선배가 그 역할을 했고, 기우는 사건의 시작점에서 특히 큰 역할을 담당한다.
-기우가 과외를 하면서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왜 과외여야 했나.
=동선을 위해서였다. 가만보면 지금 사회에서 부자와 소시민의 동선이 일치되지 않는다. 특히 밀접하고 사적인 거리에서 그 두 계급이 함께 오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그렇지 않은 영역이 과외다. 평범한 중산층과 부자가 만날 수 있고, 요즘은 심지어 입주과외도 많다고 하더라. 그 접점이 주는 드라마틱한 재미가 상당하다고 봤다. 영화의 성격은 다르지만 모리타 요시미쓰의 <가족게임>(1983)을 보면 주인공이 과외하러 가면서 전혀 다른 인물들을 만난다. 이렇게 접점이 겹치지 않은 인물들이 스쳐가는 구도를 내가 워낙 좋아한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보자면, 아파트 관리사무소 경리 직원(배두나)이 대학강사(이성재)와 인생에서 스칠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 ‘강아지 사건’을 둘러싼 괴이한 일로 그들이 잠시 만나고, 그 순간을 보여주는 게 그 영화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몇십년간 그들이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다. 교수가 돼서 더 좋은 아파트로 이사 갔을 거고, 계속 남았다고 해도 둘이 지속적인 만남으로 이어질 일은 없다. 과외라는 설정을 그런 장치로 봤다.
-근작을 돌아보자면 <설국열차>에서 자본주의사회의 극단적인 캐릭터를 형상화하거나, <옥자>에서 글로벌 기업의 탐욕이 묘사되기도 했지만 이렇게 한국 사회의 현실적인, 현실의 부자를 묘사한 것은 처음이다. 기택 집과 대비되는 박 사장 집이 그 역할을 할텐데 이 두 가족의 계급적 차이는 어느 정도인가.
=IT기업의 사장을 떠올렸다. 이들은 전세계 500대 부자 안에 꼽히는 계층이다. 매너도 좋고 겉으로 드러나는 갑질도 하지 않는다. 세련되고 매너 있고 교양 있는 데다 엄청난 부까지 지녔다. 극중에서도 박 사장이 기택보다 나이는 어린데 돈은 훨씬 많다.
-나이나 경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거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게 신자본주의사회의 계급 설정 방식이기도 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재벌 이야기는 TV드라마에서 워낙 많이 보질 않았나. 여기는 심정적으로 나와 먼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은 있지만, 실제 동산과 부동산을 숫자로 확인하면 거리감이 더 크게 다가온다. 대를 이은 재벌가 가문이 주는 위화감보다 이런 거리에서 오는 차이가 더 흥미로웠다. 이선균, 조여정 두 배우에게 도회적이고, 돈이 많지만 유치하게 굴 것 같지 않은 면모가 있고, 두 배우가 그 느낌을 워낙 잘 살려줬다.
-<설국열차> <옥자>가 ‘먹다’라는 것의 문제에서 발생하는 계급의 충돌이었다면, <기생충>의 두 계급이 충돌하는 데 있어 1순위는 ‘기생충’이라는 단어의 발설로 인한 모욕감에서 유발된 정신적 박탈감 아닐까. 교양 있고 매너 있고 세련된 사람들이 돌변하거나,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속내를 내비칠 텐데.
=재밌는 건 찍을 때도 그랬고 후반작업하면서도 느낀 건데 이 영화에는 악인이 없다. 그런데도 무시무시한 사건들은 터진다.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사이코패스나 악한 의도로 수십년간 범행을 준비해온 사람만이 나쁜 사건을 터트리는 건 아니다. 다들 약간의 허점이 있다. 흔히 하는 말로, ‘애는 착해, 그런데 사람을 죽였어’, ‘애는 좋아, 그런데 사기를 쳤어’ 같은 것들. 일상생활에서 보면 천사와 악마가 이마에 이름 써서 다니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모두 회색,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소심하고 또 적당히 못됐고 적당히 비열하다. <기생충>의 인물들이 다 그렇다. 악한 의도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걷잡을 수 없는 사건들이 터진다.
-대여섯줄로 정리된 시놉시스로 그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을 추정해보자면, ‘박 사장네 저택에 도착하자 젊고 아름다운 안주인 연교가 기우를 맞이한다’가 사건의 단서다. 연교가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일찍 결혼한 부잣집 사모님인데, 대학 졸업하기 1년 전에 바로 첫사랑과 결혼한 느낌의 여자다. 아이가 여고생이니까.
-젊은 청년과 아름다운 안주인, 거기서 오는 거대한 사건은 치정극으로 치닫게 마련인데. 다시 <충녀>의 영향을 이야기해야 할 때인가. (웃음)
=은근히 섹슈얼한 구석도 있다. 티는 나지 않는데. <마더>가 어떤 성적 기반이 있지 않았나. 전문적인 평자가 아니더라도 잡힐 만큼의 성적 히스테리가 상당히 깔려 있었다. 내가 <옥자>를 사랑영화라고 말할 때는 약간의 농담이 가미된 거였지만, 둘 사이에 분명 사랑이 없지는 않았다. 엄청난 사랑이 있다, 거기. <기생충>에도 치정, 성적인 코드들이 없지는 않다. 그런데 단정할 수는 없다. 그걸 어느 정도로 느끼느냐는 보는 분들이 판단해야 할 것 같다.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잔잔하다, 영화는. (웃음)
‘봉테일’이 발견한 계단의 정서, 계단의 레퍼런스
-한국영화 제작이라는 외형적인 귀환 이후, <기생충>은 현재의 한국 사회를 감독 봉준호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더 궁금하다. 해외 프로젝트와 도심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마더> 이전의 작품들과 접점을 유추해보게 된다. <플란다스의 개>의 도심, <괴물>의 한강 이후 20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90년대와 현재, 서울이라는 도심의 변화가 준 영향이 컸을 것 같다.
=맞다. 이번엔 구체적인 시공간의 좌표가 있다. <플란다스의 개> 때 아파트 단지를 찍은 게 1999년이었다. 찍을 당시 배경을 가져온 거였으니까. <마더>는 사실 좀 묘하게 지정학적, 시대적으로 탈색되어 있다. 그걸 지우려고 의식을 많이 했다. 모자관계만 원형적으로 포커싱하고 싶어 의식적으로 지우려고 했다. 도시인지 시골인지, 2000년대 초반인지 후반인지, 사용하는 핸드폰을 제외하고는 모호해진다. 그런데 <기생충>은 명확하다. 오늘, 현재, 여기, 특정 도시가 연상되는 설정이다. 인물들이 사는 곳이 어느 동네인지 명시하지 않아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주로 북쪽, 현재의 서울 느낌을 담았다. 그런 공기를 호흡하며 촬영하니 좋더라.
-지금 관찰한 서울은 어떤 모습인가. <플란다스의 개>의 아파트, <괴물>의 한강이 눈에 익은 서울의 공간을 다른 시각에서 보게 해줬다면, <기생충>을 통해 주목하고 묘사하는 서울의 세부 지점도 궁금할 수밖에 없다.
=내가 공간에 대한 집착이 많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번 작품의 특색이라면 영화에 계단이 많이 나온다.
-역시 김기영 감독의 얼!
=김기영 감독의 얼을 이어받아 다채로운 계단이 나온다. (웃음) 계단을 찍는 쾌감이 상당히 컸다.
-‘봉테일’의 집착증이 발현되는 요소였겠다.
=그냥 일상적인 정도다. 가족들이 계단을 끊임없이 오르내린다. 그런데 찍다보니 오르내리는 데서 오는 느낌이 있더라. 어디를 가던 계단은 있기 마련인데, 영화에서 계속 누적되는 계단의 의미나 정서가 생길 거다. 작업하는 동안 옛날 영화들을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계단 장면이 뭐가 있었지, 그런 것들을 다시 봤다. 일부러 찾은 것은 아니고 영화를 보다보면 계단이 보인다. 차를 처음 사려고 할 때 2, 3기종 사이에서 고민하다보면 길을 걸을 때 그 차만 보이지 않나. 영화는 평소 보던 만큼 보는데, 보다가 계단이 나오면 주목하게 된다. 김기영 감독뿐 아니라 줄스 다신의 <리피피>(1955)에도 멋진 계단이 나온다. 조셉 로지의 영화를 아주 좋아하는데, <하인>(1963)에 나오는 계단의 느낌도 재밌다. 그런 걸 수집하는 게 이번 영화하면서 아주 즐거운 순간이었다.
-이번 작품의 계단 등장으로, 감독님 작품을 수직과 수평군으로 나눠보게 될 것 같다. 가령 <플란다스의 개>가 아파트를, <설국열차>가 기차를 수평으로 가로지른다면, 이번엔 <괴물>의 한강 다리에 이어 수직 비주얼의 구현이다. 화면비율에도 영향을 줬을 것 같다.
=<괴물>에서 한강 교각이 엄청나게 버티컬하다. 물 표면에서 보면 거의 10층 정도의 높이다. 아이가 수직적으로 감금되어 있는, 우물에 빠져 있는 아이 컨셉이다. 그걸 보여주려면 버티컬하게 가야 했고 1.85:1로 촬영했다. <설국열차>는 1.85:1을, <옥자>는 2.35:1을 썼다. 이번엔 캐릭터들이 중요했고, 또 가족들이 우르르 그룹지어 몰려 다닌다. 그래서 2.35:1로 담아내려고 했다. 배우들을 한 프레임에 담는 게 그만큼 중요했다.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를 함께한 송강호 배우와 재회라는 점에서도 기대를 모은다. 감독님의 촬영현장, 그리고 작품 안에서 배우 송강호가 가지는 의미는 어떤 건가.
=모여서 두손 맞잡고 마주앉아 ‘우리 이런 세계를 펼쳐보아요’ 반상회를 하는 건 아닌데 딸린 식구들이 많은 가운데, 강호 선배가 후배 배우들을 챙기면서 가족의 살가운 케미스트리가 형성된다. 굳이 나서서 부탁하지 않아도 이미 쓰윽 하고 있는. 내가 마차를 몰면 어느 순간 형님이 타고 계시고, 어 하고 돌아보면 어느새 내려서, ‘후반작업 잘돼요?’ 하고 체크하곤 한다. 대등한 비중의 많은 인물이 나오는데 강호 선배는 그런 상황도 즐기신 것 같다. 혼자만의 고독한 사투가 아니라 재능 있는 후배들과 어우러져서 하는 게 즐겁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앞서 언급했듯이, 최우식은 <옥자>를 통해 자기주장을 발칙하게 하는 지금 청년세대의 모습이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배우 최우식의 연이은 등장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
=내 시나리오는 너무 멋있는 배우들은 소화가 안 되더라. 내가 소화를 못한다. 원빈씨를 이상하게 만들고 이런 이야기를…. (웃음) <옥자>를 찍으면서 최우식 배우에 대한 신뢰가 뭉게뭉게 싹텄다. 귀엽고 앳된 외모인데, 영화에서도 그게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느낌으로 유지된다. 말하자면 요즘 길에서 보는 청년들의 모습이고 그게 그의 강점이다. 특히 <기생충>처럼 어떤 하나의 현실적인 스토리를 펼쳐나갈 때는, 이 배우의 느낌이 도움이 되고 좋았다.
-가족 구성원 중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송강호 배우였나.
=송강호 선배와 최우식 배우였다. 2017년 하반기에 시나리오를 썼는데, 혼자서 지문 쓰다보면 굉장히 고독한데 그 외로움을 풀어준 게 둘의 존재였다. 이미 육체를 가진 배우들이 머릿속에 있으면 배우들이 옆에서 지켜보는 것 같고 외로움이 해소되는 것 같다. 그다음이 기우의 여동생 기정 역을 맡은 박소담 배우였다. 워낙 연기 잘 하는 배우인 데다 덤으로 최우식 배우랑 얼굴이 비슷하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시각적으로 남매네 할 정도로 동일 유전자 느낌이 나더라. 시나리오 쓰면서 둘의 사진을 비슷한 표정별로 묶어보고 그랬다. 그 셋을 꾸리고, 8명의 주요 배우들을 차례로 꾸려나갔다.
-엄마가 둘 등장한다. 기우 엄마 역 배우도 감독님 영화에서는 새롭게 등장한다.
=장혜진 배우인데,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2016)에서 엄마 역을 했고, 그 작품을 보고 연락했다. 그런데 “감독님 17년 전에 저한테 연락하신 거 아세요?” 하더라. <살인의 추억> 때 순경 역할로 미팅을 했나 본데 기억에는 없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1기생이고 이선균, 오만석 배우와 동기인데, 잠깐 고향에 내려가느라 활동을 안 하던 시절이었던 거다.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하더라.
-박 사장네 가족은 감독님 영화에 완전히 새롭게 진입하는 배우군이다. 특히 이선균 배우는 오래 활동한 배우인데 감독님과의 작업은 처음이다.
=그동안 다양한 역할을 해왔지만 미리 짜여진 어떤 상투적인 틀에 가둘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박 사장 역할에 내가 주문하고 미리 상의한 모습도 있었지만, 그 이상을 보여준 순간들이 많았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정적인 순간에, 절묘하게 즉흥적인 무언가를 던져주어 숏의 분위기를 일거에 뒤집기도 하고. 재밌었다. 그리고 젊은 CEO로 고급차 세단 뒷자리에 앉아 있는데 그게 너무 잘 어울리더라. 최상류층을 연기한 걸 텐데 이선균 배우의 왼쪽 측면을 찍으면서 많은 쾌감을 느꼈다. 선균씨의 왼쪽 뺨이 너무 좋다. (웃음)
-감독님이 이렇게 본격적이고 디테일하게 부유층의 현재를 구현한 건 처음이지 않나.
=홍경표 감독님이 “준호야, 우리가 처음으로 부자를 찍어본다아~” 하더라. (웃음) 따져보니 지저분한 형사(<살인의 추억>), 한강매점(<괴물>),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는 꼬리칸에서 벼룩 잡고 있고(<설국열차>). 약제상 과부(<마더>)만 봐도, 그 영화 찍으면서 전국을 이 잡듯이 뒤졌는데 99%가 꼬질꼬질하잖나. 어디 하나 광택이 안 난다. 혜자 선생님이 들고 있는 골프채를 빼고는. (웃음) 유일하게 <옥자>의 루시(틸다 스윈튼)가 부자지만 그녀의 일상생활은 나오지 않으니 이번이 생활상을 보여주는 거로는 최초다. 부자들과 부잣집을 찍는 최초의 경험이었고, 그래서 아주 흥미로웠다. 잘 모르는 세계라 상의도 많이 하고 공부도 많이 했다. 이런 가구가, 이런 벽지가, 이런 쓰레기통이 있구나. 쓰레기통이 250만원인데, 페달을 내려도 뚜껑에서 소리가 안 난다. 나는 그런 세계가 있는지 몰랐는데 너무 신기하더라. (웃음) 그거 반납할 때도 달달달 떨면서 했다. 혹여 흠집날까 봐. 신기한 세계를 경험했다.
실내 신이 가장 많은 영화
-<마더>로 홍경표 감독과 2인1조로 전국 곳곳, 험한 데를 이 잡듯 로케이션하다가 실내공간을 세밀하게 탐색하는 것도 대비가 된다.
=내 영화 중에 대사가 가장 많다고 한 건 농담에 가깝고, ‘실내 신이 가장 많은 영화’라는 건 팩트다. <플란다스의 개>가 미시적으로 공간을 막 쪼갰듯이, <기생충>도 기택과 박 사장네 두집을 세밀하게 쪼개서 구석구석 다채롭게 나온다.
-박 사장의 부유한 저택은, 어떤 컨셉으로 구현했나.
=모던한 집, 기존에 생각하는 재벌가의 저택이 아니라 엣지 있는 혹은 엣지 있는 척하려는 젊은 부자의 쿨한 집이 나온다. 심지어 건축가 이야기가 대사에 나온다. 이게 어느 아키텍트의 작품인데… 하면서. 대사에 이렇게 직접 묘사할 정도니까 미술감독 입장에서 얼마나 신경이 쓰이겠나. 박 사장 집 세트에 이하준 미술감독이 공을 많이 들였다. 디자인, 외장재 하나하나 신경을 썼고, 실제 건축가들에게 자문도 많이 구했다. 부잣집이 실감나게 나오는 게 대전제였다. 사건의 대부분이 그 집에서 이루어지니 허술해 보이면 영화가 실감이 안 난다. 세트 규모도 상당했고 거기에 우리 제작비의 올바른 투입이 이루어졌다.
-각각의 공간을 가진 두 가족의 소동극이 연상되는데, 정재일 음악감독(<옥자>)과 또다시 만났다. 풍자적인 웃음을 전제한다면, 음악도 <괴물> <옥자>의 브라스밴드 음악을 연상하게 된다.
=웃기다가 무섭다가 슬프다가 또 웃기다가 섬뜩했다가 슬프다가, 그런 감정들이 다 뒤섞여 있다. 그런데 소동극이라는 데에는 지금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겠다. 그렇게 추측할 만하다는 생각은 든다. 음악도 <옥자> 때와는 결이 다르다. <옥자>가 음악 자체가 엇박으로 요란하게 쿵짝거린다면, 이 영화는 음악이 먼저 나서지 않는다. 오히려 클래식 음악 같은 느낌의 곡이 많다. 서정적이고 우수가 깃든 곡도 있고. 그런데 그 음악과 함께하는 배우들의 행동은 되게 웃기다. 기묘하게 웃긴, 부조화 같은 좌충우돌이 있다. 음악은 시치미를 뚝 떼고 시종 클래식한 톤이 깔린다.
-<플란다스의 개>로 데뷔한 청년 감독에서 이제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사이 감독님 영화에 거듭 등장하는 ‘가족’에 대한 생각도 변했을 텐데. <기생충>에 반영된 지점이 있다면 어떤 지점일까.
=무엇이 똑같고 무엇이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항상 매일매일이 혼란스럽다. 그래서 영화를 만들 시점에, 내가 가진 혼란한 상황이 작품에 반영되는 것 같다. 영화를 한 지 이제 24년이 됐지만, 나는 여전히 영화 작업이 버겁다. 왜 이렇게 힘들어하면서 한편 한편 완성하고 있지, 이걸 손안에 넣고 만만하게 요리하는 날이 오긴 오는 걸까. 우리가 흔히 거장이라고 불러왔던 이들은 어떻게 하나, 궁금증이 들 때도 많다. 최근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라스트 미션>을 오스카 투표용 블루레이로 봤는데 여러 생각이 들더라. <그랜 토리노>(2008) 때 배우 은퇴 선언을 했다가 왜 굳이 다시 출연했을까 하는데, 영화를 보니 알겠더라. 자신의 늙은 육체를 스크린에 전시하는데, 거기서 오는 이상한 감흥이 있다. 왕년에 <황야의 무법자>(1964)나 <더티 해리>(1971)에서 말 타고 총 쏘던 그 배우가 90대의 늙은 자기 육체를 솔직하게 보여주는데 그게 영화의 스토리다. 그 늙음이 없으면 성립이 안 되는 영화이자 그게 스토리나 주제와 불가피하게 맞닿아 있다.
-앞선 두 작품의 텀이 각각 4년이었다면, 빠른 차기작 연출이 반갑다.
=기차에 4년, 돼지에 4년, 도합 8년을 했다. <옥자>가 2017년 여름 개봉이고, <기생충>이 예정대로 5~6월쯤 개봉한다면 개봉에서 개봉 사이가 가장 빨라진 작품이다. 우디 앨런 같은 감독은 유니버설과 평생 일년에 한 작품씩 하는 종신계약을 했다. 3개월 시나리오 쓰고, 2개월 프리 프로덕션, 3개월 촬영, 4개월 후반작업하고, 그걸 1년 단위로 계속 반복한다고 하더라. 기적의 스케줄이다. 나는 그렇게는 못할 것 같다. 이후에도 또 계속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처럼 2년에 한편씩 찍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정도면 상당히 정상적인 템포가 아닐까 한다. 그러려면 누가 시나리오를 써줘야 하는데, <기생충>도 내가 다 붙잡고 썼지만, 지문 한줄 대사 한줄 내가 다 써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라 자주 하려면 그게 문제인 것 같다.
-<옥자> 때는 <기생충>을 이미 작업하고 있었던 걸로 안다.
=그땐 20페이지짜리 트리트먼트가 나온 거고. 사실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였다.
-지금도 있을 텐데. 몇 가지 이야기도 살짝 하셨고.
=몇개 있지만. (웃음)
-<기생충>이 이제 세상에 나온다. ‘기생충이 나온다’니 좀 어감이 이상하지만. (웃음)
=이 작품을 통해 현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한 거 같다. 가난한 자와 부자 사이의 드라마는 전세계 어디에나 다 있는데, 그 갭이 점점 벌어지면 벌어졌지 좁혀지질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아주 한국적인 영화고 한국적인 디테일로 가득한 영화지만 동시에 전세계 모두가 동일하게 처한 현 시대에 대한, 아주 보편적인 문제를 고민하고 이야기했다는 게, 나 스스로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첫댓글 너무나 궁금한 영화~
꼭 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