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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운동의 시대①고종 독살설 / 이덕일의 事思史
이장희 추천 0 조회 51 14.05.24 22: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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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망명 준비하던 고종, 이완용 대궐 숙직 다음 날 급서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대한제국을 강탈하고 난 일제에 고종은 골칫거리가 되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성격의 고종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일제와 친일파는 전전긍긍했다. 반면 독립운동가들은 고종의 가치를 높이 샀다.

일제와 친일파들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는 고종이 독립운동가들과 손잡고 해외로 망명하는 것이었다.

 

 

고종 장례식과 덕수궁 함녕전에 설치된 고종 빈소. 고종독살설은 3·1운동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운동의 시대
① 고종 독살설

황제로서 시종 기회주의적이고 무력한 모습을 보였던 고종은 망국 후에는 오히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중요도가 높아졌다. 고종이 갖고 있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황실을 복위시키려는 복벽파(復<8F9F>派)뿐만 아니라 민주공화파들도 고종 망명에 긍정적이었다.

고종의 해외 망명을 가장 먼저 추진한 세력은 1914년 이상설(李相卨)을 중심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였다. 이상설은 1915년 3월 상해 영국 조계 내의 배달(倍達)학원에서 박은식·신규식·조성환·유동열·이춘일 등 독립운동가들과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했다.

신한혁명단은 광복군을 조직해 무장투쟁을 계획하는 한편 고종 망명 계획을 수립했다. 신한혁명단 본부장 이상설은 외교부장 성낙형(成樂馨)을 국내로 잠입시켜 고종을 신한혁명단 당수(黨首)로 받들고 중국 정부와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을 체결하려 했다.

 

1 우당 이회영. 고종의 사돈이기도 했던 이회영은 고종 망명계획의 중심 인물이었다.

2 영친왕과 부인 이방자 여사. 일본의 왕족이었던 이방자 여사는 해방 후 한국 국적을 취득한 후 평생을 장애인 봉사활동으로 보냈다.

성낙형 등은 1915년 7월 26일 내관 염덕인(廉德仁·또는 염덕신)을 통해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에게 중·독·영·러가 연합해 일본을 공격할 것이 대세(大勢)라는 등의 보고서를 올리게 했다.

이 보고서를 보고 만족한 고종은 성낙형에게 ‘중한의방조약안’을 가지고 직접 알현하라면서 승낙의 징표로 과거 정조가 사용했던 ‘온여기옥(溫如其玉)’이란 인영(印影·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러나 고종 면담 직전 성낙형을 비롯해 김사준(金思濬)·김사홍(金思洪)·김승현(金勝鉉) 등 다수의 관련자가 검거됨으로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이 보안법 위반 사건이다.

고종의 해외 망명이 다시 추진된 해는 1918년이었다. 이번에는 우당 이회영이 중심 인물이었다.

이회영의 장남 규학의 아내 조계진(趙季珍)이 고종의 생질로서 고종과 사돈인 데다 이상설과 헤이그 밀사사건을 기획했던 경험을 갖고 있어 고종 망명 계획에 나서게 했다. 독립운동가 이정규(李丁奎)의 우당 이회영 약전(略傳)과 구 한국군 부위였던 이관직(李觀稙)의 우당 이회영 실기(實記)는 고종 망명 계획을 비교적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이회영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어서 이회영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두 기록은 모두 이회영이 고종의 시종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망명 의사를 타진하자 고종이 선뜻 승낙했다고 전한다.

고종이 해외 망명을 결심하게 된 외적인 조건은 1918년 초 미국 대통령 윌슨이 연두교서에서 발표한 민족자결주의였다. 여기에 피압박 민족들이 크게 고무되었다.

내적인 조건은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이때는 마침 영친왕 이은(李垠)과 왜(倭) 황실 방자(芳子) 여사의 혼담 결정으로 황제의 고민이 지극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시종이 (이회영) 선생의 생각을 상주하자 뜻밖에 쾌히 승낙하셨다”고 전하는 대로 국혼(國婚) 문제였다. 순종이 후사가 없는 판국에 왕세자 영친왕이 일본 여인과 혼인한다면 조선 왕실의 맥은 끊기는 것이었다.

이교영으로부터 고종의 승낙 의사를 전달받은 이회영이 홍증식(洪增植)과 함께 고종의 측근인 전 내부대신 민영달(閔泳達)을 만나 의사를 타진했다. 우당 이회영 약전에 따르면 망국 후 남작(男爵) 작위를 거부했던 민영달은 “황제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신하 된 나에게 무슨 이의가 있겠는가? 나는 분골쇄신(粉骨碎身)하더라도 황제의 뒤를 따르겠다”고 동의했다고 전한다.

이회영과 민영달은 육로 대신 수로(水路)를 이용하기로 하고 상해와 북경을 저울질하다가 우선 북경에 행궁(行宮)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민영달이 행궁 구입 자금으로 5만원(圓)을 내놓자 이회영은 1918년 말께 이득년(李得年)·홍증식(洪增植)에게 건네 북경의 동생 이시영에게 전달하게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고종이 급서했기 때문이다.

일제가 편찬한 순종실록 부록에 이태왕(李太王·고종)의 와병 기록이 나오는 것은 1919년 1월 20일이다. 그러나 병명도 기록하지 않은 채 그날 병이 깊어 동경(東京)에 있는 왕세자에게 전보로 알렸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문제는 그날 밤 고종의 병세가 깊다면서 숙직시킨 인물들이 자작(子爵) 이완용과 이기용(李琦鎔)이란 점이다. 고종은 그 다음날 묘시(오전 6시)에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는 것인데, 일제는 고종의 사망 사실을 하루 동안 숨겼다가 ‘신문 호외’라는 비공식적 방법으로 발표했다. 일제가 발표한 사인(死因)은 뇌일혈이었다.

김윤식이 속음청사(續陰晴史)에서 고종이 갑자기 승하해 아들들도 임종치 못했다고 기록하는 등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사망한 데 대해 의혹이 일면서 독살설이 널리 유포되었다.

가장 유력하게 퍼진 설은 이완용 등이 두 나인에게 독약 탄 식혜를 올려 독살했는데, 그 두 명도 입을 막기 위해 살해했다는 것이다.

이회영의 아들인 이규창은 자서전 운명의 여진에서 고종의 생질 조계진(형수)도 고종 사후 5일 후 운현궁에 갔다가 이런 내용을 듣고서 부친에게 전했다고 말하고 있듯이 왕실 사람들도 고종독살설을 믿었다.

의병장 곽종석(郭鍾錫)과 교류했던 송상도(宋相燾)는 기려수필(騎驢隨筆)에서 “역신 윤덕영(尹德榮)·한상학(韓相鶴)·이완용이 태황(太皇)을 독살했다”고 독살 가담자의 이름까지 명기하고 있다.

작자 미상의 대동칠십일갑사(大東七十一甲史)에는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전한다.

이완용이 어의 안상호(安相昊)로부터 집안에 미친 개를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무색무취(無色無臭)한 독약 두 통을 구해 큰 개에게 사용해보니 바로 죽었다는 것이다. 이완용이 이를 어주도감(御廚都監) 한상학에게 올리게 해 살해했다는 것이다.

우당 이회영 실기는 ‘(고종이) 밤중에 식혜를 드신 후 반 시각이 지나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괴로워하시다가 반 시간 만에 붕어하셨다’고 전하고 있다. 고종독살설은 고종의 인산일에 3·1운동이 일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에 당황한 일제는 1919년 3월 15, 16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이왕직(李王職) 명의의 해명 기사를 냈다. 그날 밤 고종이 식혜를 마시긴 했지만 여러 나인과 함께 마셨으며 그 후 안락의자에 앉아 자다가 새벽 1시15분쯤 갑자기 ‘어-’ 하는 소리와 함께 뇌일혈이 왔다는 것이다. 숙직사무관 한상학과 촉탁의(囑託醫) 안상호의 조치는 별 효과를 보지 못해 새벽 6시30분쯤 사망했다는 보도였다.

이 기사는 “또 모(某·이완용:괄호 필자)의 사주를 받아 식혜에 독약을 타 드렸다는 궁녀 2인도 함구(緘口)를 위해 독살했다 하지만 병사(病死)가 확실하다”면서 의문의 궁녀 두 명의 소식도 덧붙였다.

그중 한 명인 침방 나인 김춘형(79)은 감기에 걸려 동소문 밖 안장사에 있다가 1월 23일에 죽었으며, 덕수궁 나인 박완기(62)는 고종 사후 낙담하다가 2월 2일 기침을 하다 피를 토하고 사망했다는 것이다.

매일신보는 ‘이들은 미천한 궁녀이기 때문에 어선에 참여할 수 없고 입을 막기 위해 독살했다는 말은 근거가 없다’고 변명했다. 일제는 독살설을 부인하기 위해 이 기사를 게재했지만 고종이 식혜를 마셨다는 사실과 두 궁녀가 고종 사후 석연치 않게 사망했다는 사실을 입증했기 때문에 독살설은 증폭되었다.

3·1운동으로 체포된 오흥순(吳興順)에 대한 제2회 신문조서(1919년 4월 1일)는 3·1운동 때 뿌려진 국민회보에 “고종이 천명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여관(女官) 2명이 독살했는데, 그 여관도 비밀 누설 우려가 있어 죽여 버렸고, 독살 수모자는 이완용 외 1명”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한 의친왕 망명기도사건(대동단사건)에 관련되었던 이재호(李在浩) 신문조서(1919년 11월 14일)에도 고종독살설과 관련한 증언이 있다. 이재호는 “덕수궁에서 이태왕(李太王·고종) 전하의 훙거(薨去) 때 직접 모셨던 민영달 및 의사 안상호(安商浩), 아울러 간호부를 데려와서 미국에 보내 이태왕 전하 독살사건(毒殺ノ事)의 증인으로 널리 알리려는 방책까지 준비해서 민영달과 교섭 중”이라고 진술했다. 이회영이 민영달을 통해 고종을 망명시키려던 계획이 사실이었음은 이 증언으로서도 사실로 드러난다.

백성들에게 큰 비난을 샀던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되자 을미의병이 일어났듯이 고종도 왕위에 있을 때는 백성들의 큰 불만을 샀지만 그의 의문사는 3·1운동이 일어나는 주요한 동기가 되었다.

고종 부부는 죽음으로써 일제에 타격을 입히는 묘한 운명이었다.

 

 

 

 

 

 

 

'고종 독살' 언급한 일본인의 일기

 

 

 

고종 독살의 구체적 정보를 언급한 '구라토미 유자부로 일기'의 1919년 10월 30일 부분. / 이태진 교수 제공 2009.02.28

 

 

 

 

'구라토미 유자부로 일기'가 언급한 고종 독살 상황도

 

 

"일본이 高宗황제 독살 지시" 日 고위관료 문서 첫 발굴
● 서울대 이태진교수,
日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 일기' 사본 입수

"데라우치·하세가와 총독이 독살 배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 나서자 제거"

고종황제 죽음과 관련 구체적 정보 기록

 

꼭 90년 전 3·1 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고종(高宗) 황제의 죽음이 일본측의 지시에 의한 독살(毒殺)이었다는 정보를 기록한 당시 일본 고위 관료의 문서가 처음으로 발굴됐다. 이 문서는 1919년 당시 일본 궁내성(宮內省)의 제실(帝室) 회계심사국 장관이었던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1853~1948)가 쓴 일기로, ▲고종 독살의 배후에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1852~1919)와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가 있었으며 ▲독살의 이유는 고종이 독립운동에 관련됐기 때문이라는 궁내성 내의 정보를 기록했다. 고종 독살의 개연성을 언급한 국내 자료는 많았지만 일본 정부의 수뇌부가 개입했다는 구체적 정황과 실명을 기록한 일본측의 문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최근 일본 국회 헌정자료실이 소장하고 있는 '구라토미 유자부로 일기'의 해당 부분 사본을 입수하고 이 사실을 27일 본지에 공개했다. 이 교수는 일본 교토(京都)대 나가이 가즈(永井和) 교수의 홈페이지를 통해 문서의 내용을 알게 됐으며 이에 대한 연구 성과를 오는 4월 23일 미국 하와이대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서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말을 듣지 않아… 은폐하려 죽였다"

 

구라토미는 다이쇼(大正) 8년(1919) 10월 26일의 일기에서 도쿄(東京) 오오이마치(大井町)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아들 히로구니(博邦)의 집을 방문한 뒤 돌아오는 기차에서 송병준(宋秉畯)을 만났다고 적었다.

 

송병준은 '민병석(閔丙奭)과 윤덕영(尹德榮)의 (작위) 사직에 대해서 두 사람 모두 분노하고 있다'고 구라토미에게 말했다. 송병준·민병석·윤덕영은 모두 한일강제병합 뒤 일본으로부터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던 친일파였다.

 

4일 뒤인 30일, 구라토미는 궁내성의 한 부서인 종질료(宗秩寮)에 갔다. 종질료란 황족과 왕족, 작위, 조선 귀족 등에 대한 일들을 다루는 곳으로 조선의 종친부와 비슷한 관청이었다. 그는 종질료의 고위 관료 센고쿠 마사유키(仙石政敬)를 만나 민병석·윤덕영의 사직과 관련해 이런 질문을 했다.

 

"(전 총리)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뜻(意)을 전해, 하세가와로 하여금 이태왕(李太王·고종)에게 설명하게 했지만 태왕이 수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감추기 위해 윤덕영·민병석 등이 태왕을 독살했다는 풍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寺內正毅ヨリ長谷川好道ニ意ヲ傳ヘ長谷川ヲシテ李太王ニ說カシメタルコトアルモ太王ガ之ヲ諾セサリシ故其事ヲ秘スル爲メ尹德榮閔丙奭等ノ太王ヲ毒殺シタリトノ風說アリトノ話ヲ聞キタル)"

구라토미는 "데라우치가 얘기했다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듣지 못했다"고 말하고는 "당신은 이를 들은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초대 조선총독(1910~1916)이자 일본 총리대신(1916~1918)을 지낸 데라우치와 고종 승하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하세가와가 독살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정보가 언급된 것이다.

 

◆"고종, 파리 회의에 독립 청원 시도"

 

독살 건에 대한 구라토미의 문의는 집요했다. 10월 30일 센고쿠로부터 별다른 답변을 듣지 못하자 11월 1일 다시 종질료 관리 이시하라 겐조(石原健三)를 만나 "조선에서는 데라우치가 하세가와로 하여금 이태왕에게 얘기하게 한 것이 있었는데 태왕이 승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입을 막는 수단으로서 태왕을 독살한 것으로 얘기가 되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독살을 지시한 것이 데라우치였음이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 이시하라는 이에 대해 "그런 풍설이 있다고 한다"며 정보를 알고 있음을 시인했다.

 

이틀 뒤인 3일 구라토미는 종질료의 다른 관리인 다나카 우쓰루(田中遷)에게 또다시 고종 독살건에 대해 질문했다. 다나카는 여기서 더욱 구체적인 정보를 전달했다. "어떤 사람이 이태왕이 서명 날인한 문서를 얻어서 파리 강화회의에 가서 독립을 도모하려고 해, 민병석·윤덕영·송병준 등이 태왕으로 하여금 서명 날인하지 못하게 했지만 아주 독립이 될 듯하면 민 등이 입장이 곤란해질 것이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풍설이 있다고 한다"고 말한 것이다.

 

◆"독살 진상 실토한 사람은 송병준"

 

이태진 교수는 "구라토미는 고종 독살의 정보를 송병준으로부터 들은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민병석·윤덕영의 사직'이야기가 일기에서 처음 등장한 곳이 송병준을 만난 부분이며 다른 사람과 그 이야기를 나눴다는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구라토미 등은 이 정보를 '풍문'이나 '풍설'인 것으로 언급하지만, 이것은 '뜬소문'이 아니라 상당한 근거를 지니고 있는 정보로 봐야 한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송병준이 구라토미에게 전한 사실은 일본 국가 최고 수뇌부의 인물이 관련돼 있기 때문에 근거없이 쉽게 거론될 수 없는 사항"이라는 것이다. 지시자인 데라우치와 전달자인 하세가와, 하수인 역할을 한 민병석·윤덕영과 이들의 전달자인 송병준 외에는 전혀 알 수 없는 극비사항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라토미가 궁내성의 상급자로서 종질료 관리들에게 거듭 이 문제를 캐물었고, 복수의 관원들로부터 구체적인 답변을 얻은 것도 이것이 '풍문' 수준을 뛰어넘는 정보였음을 시사한다. 호사카 유지(保坂祐二) 세종대 교수는 "일본인들은 상당히 근거 있는 정보라 해도 자신에게 책임이 올 것을 우려해, 단정적인 표현을 피하려고 우회적으로 '풍문이 있다'는 식의 표현을 쓰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송병준은 왜 구라토미에게 그런 중요한 정보를 전했던 것일까? 법제국 장관(1913~1916)을 지낸 구라토미는 궁내대신 하타노 다카나오(波多野敬直)와 가까운 정계의 실력자였다. 송병준은 작위를 잃게 된 민·윤 두 사람을 구제하려는 목적에서 그에게 독살의 진상을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고 이태진 교수는 말했다. 구라토미는 군부를 배경으로 한 데라우치 등 당시 총리들의 노선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독살 정보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제, 민족자결주의 후폭풍 우려"

 

만약 구라토미가 기록한 정보가 정확한 것이라면, 일본은 왜 한국을 병합한 지 9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고종을 독살한 것일까? 이태진 교수는 기록에 등장한 '고종이 파리 강화회의에 문서를 보내려 했다'는 부분을 주목한다.

 

고종 승하 직전에 열리기 시작한 파리 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청산을 위한 국제회의로, 1917년부터 제창된 우드로 윌슨(Wilson)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가 대책을 세우던 중, 고종 황제가 독립을 호소하려 하는 것을 알고 협박 끝에 독살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국권 침탈의 두 주역인 데라우치와 하세가와가 독살의 주역으로 언급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미 총리대신에서 물러난 데라우치는 1919년 4월 12일 민족자결주의를 걱정하면서 3·1 운동에 대한 상세한 대책을 설파한 서신을 하세가와에게 보내기도 했다.

 

◆"시신의 팔다리가 붓고 혀가 닳았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한 직후 전국에 번졌던 '독살설'은 3·1 운동 발발의 큰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독살설을 적은 벽보가 나붙었고, 이를 믿은 국민들은 황제의 장례(3월 3일)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모여들어 시위를 벌였다. 이왕직 장시국장 한창수(韓昌洙)와 시종관 한상학(韓相鶴), 윤덕영 등이 혐의자로 거론됐으며, 일각에선 자살설도 돌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국내 학계에선 이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아 '3·1 운동 당시의 소문' 정도로 치부돼 왔다.

 

고종 독살에 대한 당시 국내 기록으로는 윤치호(尹致昊)의 일기가 구체적인데, 이것은 고종의 시신을 직접 본 명성황후의 사촌동생 민영달(閔泳達)이 중추원 참의 한진창(韓鎭昌)에게 한 말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 윤치호는 ▲건강하던 고종 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돼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고 ▲시신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크게 부어올라 황제의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옷을 찢어야 했으며 ▲이가 모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으며 ▲30㎝ 정도의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고 ▲승하 직후 궁녀 2명이 의문사했다고 적었다.

 

고종의 독살이 '해외 망명 기도'와 관련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독립운동가 선우훈(鮮于燻)은 광복 이후에 쓴 '사외비사(史外秘史)'에서 이지용(李址鎔)의 증언을 전했다. 고종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려던 황실 소유의 금괴 85만 냥을 12개의 항아리에 나눠 비밀 장소에 매장했고, 장소가 그려진 보물지도를 신하에게 맡기고 탈출하기 직전에 정보가 샌 탓에 일제의 사주를 받은 한상학과 이완용(李完用)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내용이다.

 

 

 

 

<고종 독살 입증 문건 발견>

 

 

 

 

(부산=연합뉴스) 김상현 기자 = 조선조 고종황제가 일본 총독부의 사주로 독살 당했다는 덕혜옹주의 주장을 기록한 문건이 발견됐다.

부산외국어대 일본어과 김문길 교수는 고종의 외동딸인 덕혜옹주가 고종 사인에 대해 공식적으로 알려진 뇌일혈이 아니라 황제 주치의에 의한 독살이라고 주장한 내용을 기록한 문건을 4일 공개했다.

 

이 문건은 덕혜옹주와 일본 소학교 친구였던 일본여성이 덕혜옹주로부터 들었던 내용을 딸에게 전하고 그 딸이 일본 오사카의 향토사학자에게 역사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구술한 것이라고 김 교수는 밝히고 있다.

이 문건에 따르면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총독부의 사주를 받은 전의(典醫) 안 상호가 만든 비소를 넣은 홍차를 먹고 독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또 고종은 독살 직전 대신들과 과거의 일에 대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 으며 궁녀가 가져온 문제의 홍차를 마시고 바로 절명했다는 것.

 

일제 총독부가 고종을 독살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고종이 이준 헤이그 밀사와 같은 밀사를 통해 일제의 강점사실을 계속해서 세계에 알리려는 시도를 함에 따라 일제가 이를 막기 위해 독살을 감행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이밖에도 이 문건에는 덕혜옹주의 일제 생활에 대한 기록도 상세히 적고 있는데 덕혜옹주가 일제에 의해 쓰시마 도주와 강제로 결혼한 뒤 도망을 가지 못하도록 전족을 차고 생활했으며 이같은 시달림에 정신병을 앓게 됐고 이혼후에도 정신적으로 온전한 생활을 하지 못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쓸쓸히 사망한 것으로 적고 있다. 일제 총독부는 당시 고종 사인에 대해 뇌일혈로 공식발표했다.

 

3.1운동을 촉발하기도 한 고종의 독살설은 사망 직후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으나 지금까지 뚜렷한 증거가 없어 학계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편 이 문건에 대해 역사학계에서는 고종이 사망한 1919년에 덕혜옹주의 나이 가 7세에 불과해 독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당시 파다하게 퍼졌던 독살설을 일본인 친구에게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 2004.06.04

 

 

 

 

“15년전 순종황제 날인 날조확인 순간 日人들도 탄식”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인터뷰

 

일이 벌어진 것은 1995년 어느 여름날. 일본 주오대(中央大) 강당에서 열린 을사늑약 90주년 학술대회장이었다. 연단에 자리한 수십명의 한·일 양국 학자들과 강당을 가득 메운 수백명의 일본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일본 통감부 직원 마에마 교사쿠가 남긴 글에서 따와 합자한 ‘척(?)’자가 제시됐다.

조금 뒤 순종 황제가 일본과의 외교문서에 서명한 ‘척(?)’자를 겹쳐 보였다. 딱 맞아떨어졌다.

 

대한제국 문서에 있는 순종 황제의 날인 서명이 실은 일본인 통감부 직원의 날조였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강당은 ‘아~’ 하는 낮고도 무거운 탄식으로 가득 찼다.

학술대회 뒷자리를 떠나는 학자와 청중은 물론 신문·방송 기자들까지 훌륭한 연구성과라며 악수를 청해 왔다. 건네받은 명함만 수백장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어느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이 얘기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경술국치 100년(29일)을 맞아 27일 서울 의주로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당시 기억을 이렇게 더듬었다. 이때의 주장은 차츰차츰 불어나 15년 만인 2010년 한·일병합 조약은 원천무효라는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을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어떻게 마에마 교사쿠의 필체라고 확신했습니까.

 

-말하자면 ‘표적 수사’였어요(웃음). 근거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마에마가 쓰시마 출신으로 한국어에 능통했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그가 일본의 한국사 연구 1세대라는 점이었습니다. 마침 제가 학부 시절에 마에마가 남긴 서얼 제도나 훈민정음 연구논문을 많이 봤어요. 때문에 순종 황제의 위조된 친필 서명을 봤을 때 마에마 글씨 같다는 감이 확 오더라고요. 그래서 넌지시 마에마 유품을 볼 수 있는 곳이 어디냐고 일본인들에게 수소문해 보니 규슈대학에 있다는 거예요. 바로 날아가서 척(?)자를 합자해 만들어본 뒤 비교했지요. 그 뒤 수사결과를 발표한 겁니다.

 

→일본 반응에 변화가 있었나요.

 

-주오대 때 반응이 워낙 열광적이었는데 다음날 언론보도가 하나도 없어서 이게 뭔가 했습니다. 나중에 들어 보니 우익 테러 같은 걸 두려워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요즘에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난해 10월 시민단체 초청으로 교토에 가서 설명했더니 모두들 “어떻게 이렇게 억지 조약을 맺을 수 있나. 부끄럽다.”고 하더군요

 

→그런 변화의 기미가 언제 감지됐나요.

 

-2000년대 들어 8년 동안 을사늑약 원천무효 주장을 펼쳤습니다. 관련해서 국제학술대회를 열고 그 결과를 2008년 ‘한국병합과 현대’라는 책으로 일본에 내놨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나왔고요. 일본어판이 나오면서부터 일본 학자들 사이에 “이제 우리도 양심적으로 뭔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목소리들이 나왔다고들 합니다. 학문적 사실만큼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본 학계의 높은 수준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변화 원인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탈아론(脫亞論)에 대한 반성이지요. 일본은 뭔가 특별한 존재니까 아시아를 벗어났고, 미개한 한국과 중국은 우리가 이끌어 줘야 한다는 게 탈아론입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과 중국이 눈부시게 성장하면서 일본만 특별히 우월하다는 얘기를 하기 어렵게 된 것이지요. 결국 예전 탈아론은 침략주의에 불과하지 않았느냐는 반성이 나오게 된 겁니다. 이 같은 반성은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특히 광범위하게 공감대를 얻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논쟁을 하다 보면 지식인들이 더 답답해서 뭔가 큰 정치적 계기가 없으면 일본의 변화가 힘든 게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지금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더 앞장서 주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연구가 고종 황제를 지나치게 미화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고종이 결국은 전제군주 아니었냐는 것이지요.

 

-그건 지금이 민주주의 시대다 보니 군주정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가령 민중사학적 시각에서는 고종의 근대화 계획보다는 동학혁명이 더 중요합니다. 동학혁명이 있었는데 고종 황제가 탄압했다, 그러니 전제군주는 나쁜 것 아니냐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은 머릿속으로 생각한 틀을 가지고 있을 뿐 구체적 사료를 세심히 보지 않았기에 나오는 겁니다. 당시 동학의 주장을 보면 고종을 비난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고종 역시 일본이 동학혁명을 핑계 삼아 개혁을 하라고 강요하자 농민군과 충분히 협상할 수 있으니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고 반박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사료를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나도 한때 고종이 무능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료를 보면서 인식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일제가 자신의 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채색했던 논리가 너무 상식처럼 퍼져 있다는 말이지요.

 

→탈민족론은 어떻게 보십니까. 그들 입장에서는 선생님의 연구가 결국 ‘강도’ 일본과 ‘피해자’ 조선이라는 이분법을 더 강화하는 것처럼 보일 텐데요. 얼마 전 내놓은 선생님 논문도 일본 정한론(征韓論)의 기원을 조슈(長州) 지역 파벌, 그러니까 결국 임진왜란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내용인데요.

 

-메이지유신을 추진한 조슈 세력은 한마디로 천황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서는 천황에게 조공을 바치는 국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조선이라는 논리입니다. 정한론이지요. 사실 일본이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들인 엄청난 노력과 어쨌든 그걸 성공적으로 이뤄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정한론과 친근할 수밖에 없는 메이지유신의 근본적인 한계도 지적해 줘야 합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굳이 남들을 침략할 필요까지 있느냐는 소일본주의가 나옴에도 이걸 무시해 버립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피해자라서 더 정확하게 지적해 줄 수 있는 겁니다.

 

→고종 시대사 연구가 얼마나 더 진행될 수 있을까요.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1995년 ‘무라야마 담화’ 이후 (한국 강제병합에 관한) 사료 공개 작업을 추진 중인데 국립공문서보관소의 목록상태가 아주 나빠요. (일본에) 장기체류하면서 눌러앉아 뒤져보지 않으면 뭐가 들었는지 잘 모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좀 더 정리가 되면 차근차근 둘러볼 여유가 더 많을 거예요. 요즘 들어 자료가 많이 올라오고 있으니 고종 시대사는 앞으로 분명 크게 바뀔 겁니다.

 

→고종이 독살됐다고 보는 소신에도 변화가 없으신 거지요.

 

-물론입니다. 얼마 전 (독살설 근거)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습니까.

1905년의 을사늑약 유효성을 인정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고종이 거부하자 독살한 겁니다.

 

→간도 협약에 대해서도 기대와 우려가 교차합니다

(일본이 간도를 청나라에 넘긴 간도협약은 1909년 체결됐다. 이 협약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제국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을사늑약 때문이다. 따라서 을사늑약이 원천무효라면 간도협약도 원천무효가 된다. 때문에 한쪽에서는 이번 기회에 간도까지 되찾자고 하는 반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느냐는 우려도 나온다).

 

-논리적으로는 무효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책임을 묻는 것도 힘겨운 싸움인데 중국과 또 싸울 수 있을까요. 힘을 분산하지 않았으면 해요.

조선과 중국은 간도협약 이전부터 영토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래서 맺은 게 1899년 한·청조약인데 이때 간도 문제를 빼버립니다. 고종은 중국과의 조공관계에서 벗어나는 것, 그래서 중국과 협상을 통해 대등하게 조약을 체결하는 것 자체를 독립국에 대한 하나의 징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간도 문제를 비워 두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런 원칙이 원용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다른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일본 일각에서는 한국도 베트남전에 대해 털어낼 것은 털어내라고 요구합니다.

 

-그쪽 연구자가 아니라 뭐라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문제가 있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다만, 일제의 한국 병합과 같은 수준의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체였느냐, 어느 정도 피해를 끼쳤느냐는 문제도 있고요. 그런데 그런 주장은 일본 쪽에서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 내놓는 성격이 짙습니다. 그런 부분은 조심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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