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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性戰)의 쟌다르크, 김강자
스타를 넘어서다 <16편> - 김강자 전 종암경찰서장
책상 너머에 앉은 여교수는 녹색 투피스를 입었다. 잘 다려진 옷엔 날이 바짝 섰다. 머리는 한 올의 흐트러짐 없이 곱게 빗어 넘겼다. 말을 하다 중요한 내용은 수첩에 메모를 했는데 오래된 습관으로 보였다. 그런 그녀가 말했다. “저는 범인 잡을 생각만 하면 너무 좋아서 온 몸이 떨려요.” 그녀의 이름은 김강자(63), 미아리 텍사스와 성매매 전쟁을 벌인 전 종암경찰서장이다. 한때 성전(性戰)의 쟌다르크로 불렸던 그녀는 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일에 미친 사람 일에 미친 사람은 아름답다. 동시에 치열하고 집요하다. 그녀가 그렇다. 서울경찰청 민원실장 당시 기억이다. 한 여학생이 그녀를 찾아와 울면서 호소했다. 어느 젊은 목회자를 혼인빙자간음으로 처벌해 달라고 했다. 사연을 들은 뒤 그녀는 밤잠을 설쳤다. 민원을 받았으니 다른 부서로 사건을 넘길까? 아니면 직접 범인을 잡을까? 고민 끝에 범인을 잡으러 나섰다. 여성의 어려움은 같은 여성이 더 잘 안다는 판단 때문이다. 나쁜 죄질을 가진 이는 재발의 위험이 많으니 확실히 수사해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도록 중형에 처해야 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혼인빙자간음으로는 크게 처벌이 불가능하니 다른 증거를 찾아야지.” 여학생을 통해 동거 중인 남자의 비디오테이프를 모두 들고 나오게 했다. 무려 300개가 넘었다. 며칠 밤을 VTR 앞에서 지샌 끝에 환호성을 질렀다. 젊은 목회자가 여고생을 비롯해 여러 여성과 성관계를 맺는 비디오를 찾은 것이다. 그것은 남자의 해괴한 취미였다. 미성년자를 건드리다니. 그녀의 분노가 끓어올랐다. 더 확실한 증거를 찾아야 한다.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세탁기 안에서 옷가지만 들추다 돌아왔다. 또다시 며칠 동안 밤새 고민했다. “분명히 다른 증거가 있을 거야.” 남자의 집에 다시 들어가 세탁기를 뜯었다. 그 안에서 007 가방이 나왔다. 가방을 열었더니 정액을 닦은 휴지들이 수십 개의 비닐봉투에 나눠 담겨 있었다. 각각의 비닐 봉투마다 작은 메모지가 붙었다. ‘○○○의 첫 순결을.’ 남자는 중형을 선고 받았다.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온 새벽. 그녀는 큰 양푼에 밥과 김치를 넣고 비빔밥을 만들어 실컷 먹었다. 그 동안 제대로 식사를 한 적이 없다. 다음날 그녀는 칭찬 대신 질책을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업무 외의 일을 하다니….’ 그것은 경찰조직의 기강을 해치는 행동으로 인식됐다. 기자는 물었다. “너무 야망이 큰 탓 아닌가요?” 그녀의 대답은 단순했다. “아니요. 그건 야망이 아니라 열정이예요. 성범죄를 없애야 한다는 순정 말이죠.”
◆타고난 경찰, 김강자 그녀처럼 자신의 일에 확신을 가진 이도 드물다. 어린 시절, 김강자에게 경찰은 의로운 존재였다. 대학을 졸업할 당시 여경 공채제도가 없었다. 결국 일반 사병으로 군입대를 했다. 경찰과 가장 비슷한 직업은 군인 아닌가. 덕분에 그녀의 이력서엔 군번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1970년, 10년 만에 여경 공채가 부활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그녀는 경찰학교에 수석으로 들어가 수석으로 나왔다. 이후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는 그녀의 이름 앞에 항상 따라 붙었다. 1982년엔 여자교통관리대장을 처음으로 맡았다. 조직에서 여경들에게 일을 주지 않아 직접 제안해 만든 자리였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에선 여성 VIP 경호업무 담당 여경관리대장을 맡았다. 1987년부터 7년 동안 서울경찰청 민원실장으로 일했다. 경찰 지휘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직접 범인을 잡으러 다닌 것으로 유명했다. “수뇌부에 민원실과 여경기동대를 함께 두자고 건의했어요. 피해자인 여성의 수치심을 줄이고 검거율을 높이자는 거죠. 하지만 거절 당했어요. 그래서 퇴근 후나 주말이나 쉬는 시간을 이용해 범인을 잡은 겁니다.” 1995년부터 노원경찰서, 양천경찰서, 남부경찰서에서 방범과장으로 일했다. 서울경찰청 산하 범죄예방실적에서 1~2위를 놓쳐본 적이 없다. 1998년엔 최초의 여성 총경으로 진급했다. 옥천경찰서장 재임시절 미성년자를 고용한 ‘티켓다방’을 손보면서 유명세를 탔다. “(농촌지역에서) 가출한 여고생은 티켓다방에 흘러가는 경우가 많아요. 업주는 잠을 재워주고 먹여준 뒤 큰 돈을 빚진 것처럼 차용증을 만들어요. 그러고도 옷값 20만원, 결근비 30만원, 지각비 5만원 등의 빚을 매일매일 추가하죠. 한달 간 웃음과 몸을 팔아 남는 건 700만원~800만원의 빚입니다. 견디다 못한 여성이 도망치면 업주는 사기죄로 경찰에 고소하죠. 죄 지은 자가 경찰을 이용해 피해자를 잡는 겁니다.” 그녀의 이름이 전 국민 뇌리에 남은 것은 2000년 서울 종암경찰서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 서울 시내 첫 여성 경찰서장으로 ‘미아리 텍사스’와 전쟁을 벌였다. 업주들은 서장의 두 딸을 겨냥해 보복을 다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굴복하지 않았다. 딸들에겐 집 근처에 얼씬 못하게 하고 업주들의 협박에 대항했다. 덕분에 그녀는 세간의 명성을 얻었다. 이후엔 내리막을 걸었다. 첫 여성경무관 진급을 앞두고 ‘공창(公娼)발언’으로 여성단체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경찰 상부에선 ‘지나치게 튄다’는 지적을 했다. 2004년 경찰을 떠나 새천년민주당으로 건너가 국회의원에 도전했다. 알려진 대로 결과는 참담했다. “저는 불쏘시개에 불과했어요. 유명하니까 나오면 무조건 당선이라고 전 정권 인사들이 추근댔는데. 정치는 돈이 많아야 하더군요.” 2005년부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경찰을 떠난 뒤 평생 모은 돈 5억원을 투자했다 사기를 당한 적도 있다. “저는 경찰 말고는 잘하는 게 없어요.” 그럼 앞으로도 정치는 하지 않을 것인가. “누가 돈 대준다고 하면 하지요. 거듭 말하지만 국회의원이 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니까요. 전 지금 돈이 없어요.”
◆공창(公娼), 규제주의의 필요성 그녀는 성매매 단속에 대해 철저한 원칙이 있다. 그것은 수십 년간 경찰에서 성전(性戰)을 치르며 몸으로 깨달은 지혜다. 동시에 대한민국 경찰이 직면한 한계를 알기에 내린 결론이기도 하다. 종암경찰서에 부임할 당시 그녀는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하나는 성매매 단속 전담 경찰이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많은 미성년자가 성매매에 종사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업주들을 불러 모아 채찍과 당근을 줬다. “미성년 종사자부터 단속할 겁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걸리면 문을 닫아야 합니다.” 다음날 미아리 텍사스 골목골목에는 업주들이 내보낸 미성년 여성 접대부들이 짐을 들고 나타났다. 많은 곳에선 10명까지 나왔다. 그 다음엔 관내에 있는 264개 업소를 6개 구역으로 나눴다. 업주를 다시 불러 모았다. “미성년자가 성매매를 하다 걸리거나, 성매매 여성에 대한 인권유린이 걸리면 불량구역으로 지정합니다. 그 구역 업소들은 혹독하게 처벌할 겁니다.” 업주들은 서로를 감시했다. 약속대로 불량구역을 골라 하루 종일 방범대가 지키게 했다. 덕분에 적은 경찰 인력으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찰 인력과 예산은 선진국에 비해 적습니다. 경찰 1인이 담당하는 시민의 수는 프랑스 273명, 독일 310명, 미국 354명입니다. 우리나라는 509명이지요. 성매매 단속에만 매달리면 치안이 구멍납니다. 때문에 저는 3단계로 나눠 성매매와 전쟁을 치러야 한다고 봅니다. 첫 단계는 업주가 미성년자를 고용하지 못하게 하고, 성매매 여성의 인권유린이 많은지 감시하는 겁니다. 다음엔 집창촌이 아닌 곳에 숨어서 이뤄지는 다양한 성매매를 단속하는 겁니다. 이때는 국가 예산을 늘여서 성매매 단속 전담 경찰을 둬야 합니다. 이후엔 집창촌도 없애는 완전한 성매매 단속을 해야죠. 물론 그 단계는 아주 먼 훗날이 되겠죠.”
그렇다면 공창이 필요하다는 것 아닌가?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공창이라고 하지 맙시다. 대신 규제주의라고 하죠. 공창이라는 말 덕분에 제 의도가 거꾸로 읽힙니다. 저는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성매매 단속을 하자는 겁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여성들이 성 노예로 살아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곤 한 호흡을 쉬었다 말을 이었다. “저는 이상주의자라기 보다 현실에 접한 이상을 따르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할 말을 참고 살아온 사람 같았다. 톡 하고 건드리면 하고픈 말이 주르륵하고 터져 나왔다. 그 가운데는 전 정권 고위 인사에 대한 섭섭함도 있었다. 또 경찰조직에 대한 애틋한 사랑도 있었다. 동시에 경찰 현역 시절에 겪은 무용담도 있었다. 덕분에 그녀와의 대화는 마치 한편의 첩보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했다. 그녀가 당황했던 질문은 단 한 가지다. 두 딸에 대한 것이다. 특히 자신을 닮았다는 둘째 딸에 대한 질문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기자가 “따님이 경찰에 지망한다는 기사를 본 적 있습니다”라고 운을 떼자, 그녀는 “거기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네요”라고 답했다. 그 목소리엔 차마 털어놓기 힘든 서운함이 가득했다. 마지막으로 딸들에게 하고픈 말을 남겨 달라고 했다. 그녀는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많이 미안하죠, 아주 많이.” ‘사랑한다’ 혹은 ‘기대가 크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 조금 더 닥달했더니, 그녀는 소녀처럼 까르륵 웃은 뒤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곤 금새 눈가에 물기가 고였다. “난 그런 걸 잘 못하겠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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