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독고전독서-시카고플랜] 7. 토크빌 - 《미국의 민주주의》
선진의 민주주의
《미국의 민주주의》는 출간이 되자마자 폭넓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것은 이 저서가 정부와 개인, 평등과 자유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병리적 현상과 그에 대한 해법을 유의미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장(章)마다 개별적이면서 전체적으로는 방대한 내용의 기저에 흐르는 일관된 주제는, 평등과 자유가 상충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토크빌은 평등보다 자유의 가치를 우위에 두고 있지만, 그 둘이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다.
베르사유의 배석 판사에 임명된 토크빌은 미국의 교도 시스템을 연구한다는 명분으로 미국 여행을 신청했다. 그가 미국을 여행하고자한 근본 목적은 당시 세계 어느 나라보다 선진적으로 민주주의를 확립한 미국을 배우고, 프랑스 사회에 적용시킬 방법을 고민해 보기 위해서였다. 시민 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는 혼돈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정치 체제의 구축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토크빌에게 있어 미국은 프랑스가 배워야 할 가장 이상적인 나라였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서 더욱 큰 희망의 이유들이나 더욱 훌륭한 교훈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이 수립한 제도를 비굴하게 답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최선의 정치 체제가 되어 줄 것에 대한 명확한 안목을 얻기 위해서 미국을 돌아보도록 하자.
토크빌은 한때 대중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도 표명을 한 적이 있으나, 이미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으로 간주하고, 소위 '잭슨 민주주의' 시대의 미국 사회에 대한 연구로 프랑스의 민주주의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에 관해 쓴 최초의 철학적 저술이라는 점에서, 이는 미국에 한정되는 인문적 가치만도 아니다. 반면 오늘날의 미국을 대변할 수 있는 저서인 것도 아니다. 당대의 유럽이 바라보는 당시의 미국이 그랬다는 전제 안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자유와 평등
토크빌은 정치적 자유와 평등이 양립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제기한다. 평등은 민주주의 정체를 이룩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그 자체로서 민주시대를 특징짓는 특수하고 우세한 사실은 바로 사회조건의 평등'이다. 하지만 평등은 도리어 민주주의 정체에서 요구되는 공공성을 도외시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다수에서 빗겨 서 있는 편차들에게 다수의 의견을 강권하는 폭력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다수의 만능과 그 영향>이라는 챕터에서는 미국의 민주적 사회에서 다수의 명분으로 개인의 독립성과 자유를 위협하고 '다수의 압제'로 발전할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같은 현상이 서구의 민주 사회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평등이란 것이 이 세상에 거대한 이익을 가져다주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아주 위험한 성향을 제공한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평등화는 인간을 고립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집중시키게 하는 경향이 있다.
토크빌에 따르면 평등은 개인주의를 유발한다. 민주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계급이 사라지고, 이에 따라 각 개인은 소속으로부터 분리되어 개인의 운명은 각자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주의를 키우지만, 역설적으로 개인주의는 민주주의의 기반을 흔든다. 이러한 개인주의가 자연스레 정치적 무관심으로 이어지고, 비판적인 정치의식이 결여된 대중이 다수의 형태를 띠게 된다면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 토크빌의 염려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전제정치가 만들어 내는 악덕은 평등에 의해 나타나는 악덕과 정확히 일치한다. 유감스럽게도 이 두 가지는 상호 보완적으로 발전한다. 평등이 인간을 아무런 공통적인 유대에 의해 연결되지 않은 상태로 개별화한다면, 전제정치는 인간을 분열 상태에 묶어 두기 위해 장벽을 쌓는다. 전자가 인간으로 하여금 동료 인간을 생각하지 않도록 만든다면, 후자는 일반적인 무관심을 일종의 미덕으로 삼는다.
평등의 가치는 자칫 사회적 평준화 운동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 평준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에게 힘을 실어 주게 된다. 그들이 모여 있는 중앙 집권화된 권력은 전제주의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 토크빌은 평등으로 인한 전제정치의 출현을 막기 위한 대응책으로 정치적 자유를 언급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평등에 의해 나타나는 악에 맞서기 위해서는 오직한 가지의 효과적인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곧 정치적 자유이다.
토크빌이 말하는 정치적 자유란 바로 공공결사를 의미하는데, 이는개인과 정치 체제의 중간 단계로 개인이 평등의 담론으로 인해 자유를독자적으로 유지할 수 없을 때, 그것을 유지할 목적으로 동료 시민과 결합하는 형태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마저도 허용되지 않은 사회, 전제적 정치 시스템을 제어할 모든 기능을 상실한 경우라면 어떨까? 토크빌은 발생 가능한 최악의 상황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정치 시스템을 구현하는가는 전적으로 시민 개개인의 의식 수준에 달린 문제임은 분명히 해두고 있다.
현대 국가는 인간의 조건이 평등화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이 평등의 원리가 인간으로 하여금 노예상태와 자유, 지혜와 야만, 번영과 고통 중에서 어느 길로 나아가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다.
토크빌은 보편적 평등의 민주주의가 비록 많은 문제를 야기하나, 소수만의 리그 방식으로 운영되는 정치보다야 나은 정체임을 역설한다. 그것이 비록 올바른 방향성을 잡아가는 데에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겠지만, 오히려 그런 시행착오로 터득된 경험이 민주주의의 귀중한 자산이라는 사실도 더불어 강조한다.
민주정치는 경험으로 쌓은 결과로써만 진실을 터득할 수 있다. 민주정치는 국민에게 가장 능란한 정부를 제공해 주지는 않지만, 가장 유능한 정부라도 흔히 이루어 놓을 수 없는 것을 만들어 낸다.
토크빌은 미국 민주주의의 불안 요소들을 경고하면서도, 평등과 자유의 조화 속에서 개인의 독립성과 개인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을 일련의 해법들을 제안한다. 그러나 토크빌의 대안들은 다소 추상적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때문에 한동안은 거의 잊혀지다시피 했던 그의 철학이 다시 대두된 것은 전체주의에 의해 발발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