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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박물관을 마치고 분주히 이동한 곳,
런던 타워( Tower of London)로 갔다.
축소 사진으로 찍었다
템즈강 북부에 위치한 성채, 박물관이다. 900여년 전,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설되었으며,
현재의 공식 명칭은 His Majesty's Royal Palace and Fortress of the Tower of London(국왕폐하의 궁전 및 요새인 런던 탑)이다.
건물 중 일부는 중세 말~근대초에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되었고 앤 블린이 여기서 처형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계탑 빅 벤과 함께 영국의 명물로 거론되는 타워 브리지가 런던 탑을 본떠서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타워 브리지 바로 북변에 위치하고 있다.
탑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의 규모를 가진 하나의 성채로, 일차적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막아 런던을 방어하기 위함이었고, 동시에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 전역에서 진행한 축성 사업의 일부이기도 하다. 노르만 왕조 자체가 정복왕조다보니 정복당한 앵글로색슨족의 반발을 막기 위해 여러 성을 쌓았는데, 그 중에 가장 대표격이다.
정복왕 윌리엄 1세,
아버지는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이고 정식 혼인이 아닌 사생아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집안이 미천한 출신으로 무두쟁이(가죽 가공하는 기술자)의 딸이였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 부친의 뒤를 이어 간신히 공작에 오르기는 했고 결혼에 골인 까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지체높은 프랑스 왕의 외손녀인 당시 19세쯤 된 플랑드르(오늘 날 벨기에 네델란드 지방으로 낮은 지대를 의미) 마틸다에게 청혼서를 보냈다.
하지만 마틸다가 "종년의 사생아 따위가 어딜 감히?"하면서 청혼을 거절한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윌리엄은 복수하겠답시고 플란데런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그러니까 노르망디 공국과 플란데르가 가까운 거리.
바로 집으로 쳐들어가서 머리채를 잡아 패댕이를 치고 몇 대 줘 갈겨 버렸단다.( 두 가지 썰이 있는데 교회 갔다 오는 길에서 만났다는 말과 침실로 찾아갔다는 이야기)
딸이 맞는 것을 눈앞에 보면서 눈이 뒤집힌 마틸다의 아버지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5세는 칼를 뽑아들고
이 호로놈의 새끼가 감히 내 딸을 때려 하면서 죽이려고 할 때,
마틸다가 " 이 남자가 아니면 결혼 안하겠다고 막아섯다".
거침없고 미쳐 날뛰는 종마 처럼 씩씩하게 달려드니 똑똑한 마틸다가 남자 보는 눈이 있는 것인지 대 반전이 일어나면서 이들의
이들의 결혼에는 많은 방해와 난관이 있었지만 결국 4년 뒤 결혼을 하고 부부는 금슬이 좋아 4남 4녀를 낳았다
젊은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은 1066년 잉글랜드를 침략해들어가 왕이 되는데 윌리엄 1세다
이때부터 잉글랜드 왕은 노르망디 공작을 겸하면서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되었다.
우리 시각으로 보기엔 이상할 수도 있지만, 이것이 봉건제도 특성이다.
잉글랜드의 왕으로서는 프랑스의 신하가 아니지만 노르망디 공작위는 잉글랜드 왕위와는 별개로 프랑스의 봉신이기 때문에 노르망디 공작으로서는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된 것이다.
즉, 평소에는 독립왕국인 잉글랜드 왕국의 왕이지만 노르망디 공국에 한해서는 프랑스 카페왕조의 봉신이었으므로 세금도 냈다.
또한 이때부터 런던이 본격적으로 잉글랜드의 수도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노르망디 공국은 프랑스 문화에 적응된 바이킹의 후예였고
이 공국이 영불 해협을 건너가 잉글랜드를 지배하고 오늘 날 영국의 왕조로 이어오는 결과다
다시 돌아와서 윌리엄 1세가 처음 세운 것은 사실은 성채고, 감옥이기 이전에 이 건물은 노르만 왕조의 첫번째 왕궁이었다. 중앙의 센터에 해당하는 화이트타워는 본래 정복왕 윌리엄이 자기 궁전으로 지은 것이고,
부속 건물들 중에도 헨리2세의 거처, 에드워드 1세의 거처 등이 보존되어 있다.
이후 국왕이 런던에서 주로 머무는 궁전은 웨스트민스터, 그 뒤에는 화이트홀 등으로 옮겨갔지만,
그래도 런던 탑은 왕권의 상징이었고 왕들은 웨스트민스터에서 대관식을 치른 뒤 반드시 상징적으로 런던 탑에 입성하는 예식을 치렀다.
처음부터 이렇게 성벽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요새의 형태를 하고있지는 않았다고 하며, 최초로 완성되었을 때는 , 화이트 타워(White Tower)만이 있었다고. 이 화이트 타워는 1070년 경에 정복자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이 건설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1270년경에 대대적으로 성벽을 둘러쌓고 탑 건물들을 추가했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된 것은 1547년경이라고 한다.
블러디 타워(Bloody Tower)라는 소름 끼치는 이름의 타워가 존재하는데 이 타워에 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인 요크 공작 리처드가 갇혀 있다가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에드워드 5세의 사망 추정 나이는 13살이다.
정치범 및 고위 귀족, 왕족의 수용소로 사용된 타워로 뷰챔프 타워(Beauchamp Tower)가 있다. 즉, 런던 타워에 유폐시켜라 하면 열에 아홉은 이 타워에 갇혔다는 말.
타워 내부로 들어가면 갇혀있던 사람들이 자신의 흔적으로 남긴 낙서와 자신의 문양이 가득한데 이에 아크릴 판을 씌워서 보존하고 있다.
오디오 가이드를 빌리면 한국어도 지원된다.
주로 처형이 이루어진 장소는 Green Tower인데 이름과는 달리 탑이 아니라 잔디밭이다.
그린 타워에 가면 쿠션 형상의 조형에 처형된 유명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이들을 기리는 시가 쓰여있다.
다만 여기는 왕실 일가거나 왕족의 피가 흘러서 일반 백성들의 눈에 노출되면 곤란한 사람들이 처형당한 곳이고, 나머지는 사형을 당할 경우 인근의 tower hill로 끌려나가서 참수당했다.
즉 내가 런던 탑으로 갈 때 하차하는 tower hill 역 부근이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런던 탑에 갇힌 이는 나치 전범인 루돌프 헤스다.
런던탑 입구 근처에 있는 유리벽 속의 손은 현대적인 조각 작품으로,
정식 명칭은 **"The Glass Pillow"**.
이 조각은 **콘라드 쇼크로스(Conrad Shawcross)**라는 현대 예술가가 2007년에 설치한 작품으로,
과거 런던탑에서 처형당한 수많은 사람들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유리벽 안의 손은 과거 처형된 사람들, 특히 런던탑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인물들의 존재를 상징합니다.
처형대에 놓인 고통받는 사람들의 손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그들의 죽음을 추모하고 역사적 사건들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이 작품은 런던탑의 처형과 관련된 어두운 역사를 현대 예술로 재해석한 것으로,
방문객들에게 그들 기억을 되살리고 감정적 울림을 주는 설치물이다
런던 탑의 중심부에 위치한 White Tower로 가로 32m, 세로 36m, 높이 27m의 건축물이다. 이름이 화이트 타워인 이유는 헨리 3세가 이것을 흰색으로 칠했었기 때문이다.
이 건물이 화이트 하우스
화이트 하우스 맞은편 건물이 보물로 차있는 박물관인데 촬령은 금지다
이 잔디밭에 있었든 건물에서 앤 블린이 재판을 받았고 며칠 후 참수가 되었다
헨리 8세 갑옷이고 엄청 많은 갑옷, 말, 무기들을 찍었으나 20장 내로 포스팅이 가능하기 때문에 줄이고 줄인다
모두 순금 덩어리들인데,
경비원에게 물었다
이게 전부 순금이냐고
전부 pure gold( 순금)란다.
조상들이 대부분 제국주의 시절에 약탈해온 것 아닌가 하고 묻고 싶었지만 말 안했다
순금 항아리,
살짝 찍느나고 흔들린다
순금 접시
영국 왕 찰스 3세가 대관식때 썻든 왕관
처음에는 사진을 안찍었는데 돌아보니 많이들 찍고 있어서 나도....
런던 타워 관광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여기 이 장소를 다 들리는데 그의 두 번째 아내 앤 블린이 처형 돼서 목이 잘린 장소다
이 야기를 하면서 헨리8세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전후 맥락을 많이 생략하더라도 이 신기한 왕의 이야기를 빼면 안될 것 같은 양심.
16세기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의 두 번째 왕,
절대군주이자 잉글랜드 해군의 아버지이다. 또한 두 번의 대승으로 북쪽의 숙적 스코틀랜드 왕국을 제압함으로서 훗날 브리튼 섬 통일의 기초를 닦았으며, 수장령으로 잉글랜드 국교회를 성립시켜 이후 잉글랜드 역사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즉, 단순히 호색한이나 난봉꾼 정도로 기억해서는 절대 안 될 잉글랜드인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친 잉글랜드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북쪽의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프랑스와 백년전쟁(1338 ~ 1347)을 일으키며 역사에 큰 획을 남긴 에드워드 3세 이후 벌어진 잉글랜드의 왕위쟁탈전,
위로 올라가면 결국 모두 에드워드 3세의 피를 받은 후손들이면서 피터지는 전투를 벌리게 되는데,
1455-1485년 동안의 싸움으로 영국의 명문 백장미 요크가와 흑장미 랭카스터 사이에서 일어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싸움인데,
양쪽 집안의 귀족들을 거의 절멸시킨 30년 동안의 장미전쟁을 종식시키고 튜더왕조를 개창한 헨리7세의 차남으로 태어나 형 웨일즈공 아스의 죽음으로 왕좌에 올랐고, 적자녀 셋은 모두 왕이 되었으며,
한 마디로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며 수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간 문제적 인물이다.
헨리8세는 장미전쟁으로 완전히 도륙난 플랜테즈넷계의 랭카스터와 요크왕조 양가의 피를 모두 이어 받았다.
왜냐면 아버지 헨리7세(헨리튜더)가 랭카스트 가문이나 요크 가문의 여인이며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랭커스터와 요크 두 가문의 대표자이자 상속인으로 자처하며 두 가문의 화합을 확고히 하게되는데 이로써 장미전쟁은 끝이 났다
상세히 읽어볼만한 내용들이 많으나 너무 길다고 생각하고 약술을 하자,
처음,헨리 8세는 자기 형 아서 투터의 약혼자였던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17살에 결혼했다.
그런데 사산으로 아들을 못낳고 딸 하나만 낳고 폐경기가 왔다
헨리 8세를 아들에 환장한 인간으로 봐서는 안되고 그 시대 잉글랜드 왕국의 사활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피의 메리로 불리게 되는 메리공주만 남기고 케서린은 쫒아내버린다.
두 번째 결혼이 케서린의 시녀( 이 시대 시녀는 조선의 경우처럼 무수리 차원이 아니고 귀족 집안에서 자라 교양과 학식을 두루 갖춘 말 상대였다)였고 한 때 자신의 애인이었든 메리 블린의 언니인 앤 블린을 유혹한다.
앤 블린은 이 멋지고 조건 좋은 남자에게 쉽게 허락하지 않고 왕비가 아니면 절대 잠을 자지 않겠다고 고집하는데 사생아인 아들을 아무리 낳아도 전혀 보장을 못받는 상황을 알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혼을 끌어내고 결혼하지만 이 또한 아들이 없다
그런데 그의 여섯번이나 반복되는 결혼은 이혼→ 처형→ 병사의 단계를 반복하는 패턴이 생긴다
처형당한 왕비들의 처형 명목은 둘 다 다른 남자와 놀아났다는 간통죄였다.
일반적으로 앤블린의 간통죄는 말도 안되는 덮어씌우기 죄명이었다고 하는데,
심지어 아들과 근친상관 까지 만들어내서 재판에 넘긴다.
병사한 아내들의 사망 원인은 모두 출산 후유증으로 인한 산욕열이었다.
단, 마지막 아내인 케서린 파는 헨리 8세가 사망한 후에 재혼했다가 출산한 것.
다만 이런 '패턴의 반복'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나 징크스라기 보다는 일정 부분에 대해서는 헨리 8세의 행동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다고 볼 여지가 있다.
말하자면 일국의 왕 답게 정략결혼을 한 상태에서 톡톡 튀는 매력을 가진 새 여자에게 빠져 새 장가를 들고 싶어진 것이다.
그런데 왕과 정략결혼을 할 정도로 강력한 정치적 배경을 가진 통치가문의 딸을 쉽게 치워버릴 수는 없다.
그나마 정치적인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정식으로 이혼하여 공식적으로 상황을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 난리법석을 벌여가며 맞이한 새 왕비의 파격적인 매력에 푹 빠져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 파격성이 오히려 피로감을 불러일으켜 관계가 파탄에 이르게 된다.
즉 속된 말로 하면 '질렸다'.
이는 동물들 중 모든 수컷들의 종족 보존적이고 태생적 문제지만 암컷도 더러는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또 이혼 소동을 벌이면 망신도 이만저만이 아니겠지만... 이번 왕비는 정치적 배경이 아니라 이성적 매력 덕분에 왕비가 된 케이스라 왕의 총애 이외에는 별 힘이 없으므로 정치적 부담 없이 치워버리는 것이 가능하다.
그 핑곗거리가 간통죄가 된 것.
역시 (왕비가 정말로 국왕 시해 음모라도 꾸민 것이 아닌 이상) 왕비의 간통은 곧 반역이나 다름없이 여기지므로 왕비를 한방에 날려버리는데는 간통죄만큼 효과적인 핑곗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앤 불린과 캐서린 하워드 모두 파격적이고 톡톡 튀는 매력으로 왕을 사로잡았는데, 이는 곧 두 사람 모두 당대 사회가 요구하는 정숙하고 얌전한 여성상의 통념에 맞게 행동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므로 혐의를 덮어씌우기에는 더욱 편리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래서 둘 다 간통죄로 한방에 날려버렸고,
자기가 자초한 일이지만 이쯤되면 본인도 꽤나 지쳤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 아내(왕비)는 사고 안 칠 얌전하고 조용한 사람으로 맞아들였고, 사고를 안 쳤으니 이혼도 처형도 안 당하고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제인 시모어가 병으로 일찍 죽은 것은 불운이지만,
저 난리를 쳐놓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또 똑 같은 짓을 반복한 결과 패턴의 반복이 나타난 것이다.
결국 헨리 8세에게는 양심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통찰력과 자기반성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덤으로 3의 배수 왕비의 사인이 두번 다 산후 질병인것 역시, 전근대에 출산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음을 의미하는 것.
하도 여자관계가 개판이다보니 나중에는 사교계에서도 알아주는 결혼 기피대상이 되기도 했다.
제인 시모어 사후 네 번째 왕비를 맞을 때 우여곡절이 많아서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의 어머니이기도 한 프랑스의 마리 드 기즈에게 청혼했더니 "제가 큰 여자인 건 맞지만 아쉽게도 제 목은 너무나도 가늘답니다."라는 답변( 목을 쳐서 마누라를 보냈으니)으로 차이고,
밀라노의 크리스티나에게 대사를 보내 청혼했다가 "나에게 목이 2개 있다면 기꺼이 귀국의 국왕께 하나를 드리겠지만, 불행하게도 나에게는 목이 하나밖에 없습니다!"라며 대놓고 헨리 8세의 과거를 끄집어내며 퇴짜를 놔버렸다.
헨리 8세의 전신 초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고간의 볼록 튀어나온 것은 코드피스라고 부르는 당대에 유행하던 패션이다.
본래 실용적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나중엔 저렇게 뽕처럼 쓰이게 되었다.
아들 에드워드 6세의 초상화에도 볼 수 있다.
당시 잉글랜드의 상류층이었던 왕족들과 귀족들은 육식 위주로 과식을 하는 과시적인 식사를 했는데,
당연히 이는 건강에 좋지 않았다.
헨리 8세도 그가 먹는 식단에서 야채가 20%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섬유질이 많은 야채, 생선, 빵을 먹던 서민층의 식사가 건강에 좋았다.
야채는 당시 상류층 사회에서는 '하층민이나 먹는 것'으로 취급당해 귀족들은 잘 먹지 않았지만,
사실 잉글랜드는 야채, 과일등의 생산도 부족하다 보니 야채와 과일을 충분히 먹을 수가 없었고 결과적으로 상류층의 영양 섭취의 불균형을 초래했다.
헨리 8세가 50대에 죽은 것도 잘못된 식습관이 큰 원인을 차지한다.
그의 키가 188cm로 엄청난 장신이다.
오늘날에도 저정도 키면 전세계 어디를 가도 장신 소리를 듣는데 저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다.
근대 이전 키 180센티 이상인 군주는 흔하지 않았다.
마상시합 관련 기록들의 경우, 신하들이 일부러 져 준 경우가 많다고 한다.심지어 프랑수와 1세와 연회를 열 때는 마상시합까지 열고 직접 참가하여 겨루었는데 두 왕이 쌍으로 지랄을 해서 신하들이 11번이나 연속으로 져 주느라 고생(?)했다는 기록도 있다.
헨리 8세와 왕비들의 생애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게 다음 표를 삽입한다.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의 생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만이 유일하게 왕비로서 국왕의 죽음을 볼 수 있었다.
1537년부터 1540년까지와 1541년부터 1543년까지 약 5년은 헨리 8세가 독신이었던 기간이다.
이름 | 키워드 | 생몰년도 (최종 연령) | 재위 기간 (년) | 재위 전 |
헨리 8세 | 국왕 | 1491 ~ 1547 (56) | 1509 ~ 1547 (38) | 왕위 계승자 |
아라곤의 카탈리나 | 이혼 | 1485 ~ 1536 (51) | 1509 ~ 1533 (24) | 아서 튜더[64]의 부인 |
앤 불린 | 참수 | 1501[65] ~ 1536 (35)[66] | 1533 ~ 1536 (3) |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시녀 |
제인 시모어 | 죽음 | 1508 ~ 1537 (29) | 1536 ~ 1537 (1) | 앤 불린의 시녀 |
클레베의 앤 | 이혼 | 1515 ~ 1557 (42) | 1540 ~ 1540 (0) | - |
캐서린 하워드 | 참수 | 1523 ~ 1542 (19) | 1540 ~ 1541 (1) | 클레베의 앤의 시녀 |
캐서린 파 | 생존 | 1512 ~ 1548 (36) | 1543 ~ 1547 (4) | - |
자세히 보면 인 남자는 주로 마누라의 시녀에 눈이 돌아가는 버전.
그가 그렇게 아들 아들 하며 노래를 부르고 장가를 여섯번이나 갔지만 남긴 아들은 단 한 명이었다
이혼 -참수-죽음-이혼-참수-생존의 패턴이 생긴다
그의 자녀들 상황인데,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메리 1세 (Mary I) | 1516년 2월 18일 | 1558년 11월 17일 | 펠리페 2세 |
2녀 |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 1533년 9월 7일 | 1603년 3월 24일 | |
1남 | 에드워드 6세 (Edward VI) | 1537년 10월 12일 | 1553년 7월 6일 |
위의 적자녀 셋은 모두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지만 비교적 천수를 누린 사람은 차녀 엘리자베스 1세 밖에 없다.
게다가 에드워드 6세와 엘리자베스 1세 모두 결혼하지 않은 채 죽었고,
적자녀 중 유일하게 결혼한 장녀 메리 1세도 자녀를 낳지 못하면서 헨리 8세의 직계는 끊어졌다
헨리 피츠로이(1519-1536년),
헨리 8세의 정부 엘리자베스 블런트(Elizabeth Blount)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아들이다.
사생아임에도 아버지 헨리 8세에 의해 리치몬드와 서머셋 공작에 봉해졌고, 3대노퍽공작의 딸 메리 하워드와 결혼했지만 17살에 자녀없이 요절했다.
우리나라는 지금 길거리 가다가도 사진 한 장 찍히면 초상권,
재수 없으면 형사 책임 까지 묻지만 이외로 유럽은 니야 찍든지 내가 찍히든지 무관심이다
첫댓글 길게 올려지다 보니 여기 저기 수정을 해야 할 곳이 많아 많이 고쳤지만 끝이 없네요
이제 그만 고치려고 합니다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