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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차라리 총이라도 있었으면
증 언 자 : 이관택(남)
생년월일 : 1948. 11. 14 (당시나이 33세)
직 업 : 세일즈맨(현재 세일즈맨)
조사일시 : 1989. 6
개 요
18일부터 계엄군 만행 목격. 20일부터 시위참여, 21일 이후 일행 6명과 총을 들고 외곽경비를 맡았고 도청을 드나들었다. 27일 새벽 연행된 이후 구속되어 1981년 4월 석방됨.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하고
1948년 나는 광주시 두암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그때만 해도 포도와 딸기를 경작하는 땅이 2천여 평 되었으므로 아버지께서 논농사를 지어보시겠다고 모두 팔고 담양 남면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흉년이 들어 망해 버리고 다시 광주로 이사올 수밖에 없었다.
내가 3살이 되던 해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맞이하셨다. 식구들 중 유일하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할머니뿐이었다. 가정형편상 중학교를 중퇴한 나는 집을 뛰쳐나갔다. 흔히 말하는 비행청소년들과 어울려 뒷골목생활을 하게 되었다. 주로 유흥업소의 상권장악을 통해 돈을 얻었고 뒷골목 선배들의 도움으로 숙식을 해결했다. 꿈이 없고 비참한 생활이었다.
몇 년 뒤엔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 보고자 그쪽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처음엔 남대문시장에서 과일행상을 했다. 그후 출판사에서 1년간 책 세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내가 본격적으로 책 세일을 시작한 것은 1974년부터였다. 한국일보 판촉과에 있으면서 여류세계대백과사전 등을 팔아 돈은 상당히 모았다. 1979년도엔 송정리로 내려와 잡지와 지방지를 취급했다. 바쁘게 살다보니 결혼도 못 한 채 송정리에서 자취를 하던중이었다.
1980년 5월 들어 대학생들이 거리를 누비며 데모를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 '공부나 열심히 할 일이제. 배가 따닸한께…….' 그렇게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으나 5월 17일을 기해 계엄이 확대됨에 따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18일 광주시내로 나와보았다. 양동 돌고개에 이르렀을 때 공수 몇 명이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잡아 워카발로 걷어차고 곤봉으로 머리를 내리치면서 길바닥에 꿇어앉혀놓고 있었다. 내가 갔을 땐 7, 8명 정도의 젊은이가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대부분 학생으로 보였다.
나는 걸어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까지 가게 되었다. 소방서 앞에 계엄군이 서 있으면서 지나는 젊은이만 보면 무조건 쫓아가 진압봉을 휘둘렀다. 대검을 착검한 그들의 위압적인 모습을 보니 울분이 느껴졌다.
하수구 속에서
그날 저녁 집에 들어간 나는 20일 저녁에 다시 나왔다. 양동 복개상가 앞에 시민 6백여 명이 모여 있었다. 시민들의 말에 의하면 광주역 앞에 계엄군이 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청장년 40여 명과 함께 시외버스를 타고 광주역으로 향했다. 우리들이 광주역 가까이 가자 광주역 쪽에서 최루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차에서 내린 우리들은 모두 도망을 갔다.
나는 어디가 어딘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뛰어 어느 골목으로 들어갔다. 숨이 차 한숨 돌리고 있는데 앞에서 남자 하나가 오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서두르는 것으로 보아 그도 방금 쫓겨온 사람인 것 같았다. 그를 따라 조금 큰 거리로 나왔지만 곧 그를 놓치고 말았다. 어디론가 자기 혼자만 급하게 가버렸기 때문이다.
혼자서 터덜터덜 걷고 있자니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으므로 시민들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서 소리쳤다.
"누구냐!"
계엄군이었다. 나는 순간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 되돌아 사생결단으로 뛰었다. 그런데 도망가다 미끄러져 열려진 하수구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썩은 물이 가득 차 있어 악취가 심했으나 그런 것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몸을 낮추어 하수구 물속에 넣은 뒤 고개만 뒤로 내놓았다. 곧 뒤쫓아온 계엄군이 손전등으로 하수구를 요리조리 비춰보며 나를 찾았다. 나는 너무도 긴장이 되어 숨이 멎는 듯했다. 한참 동안 하수구를 수색하던 계엄군은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갔다.
계엄군이 돌아간 뒤에도 선뜻 나올 수가 없어 계속 하수구 속에 있었다. 혹시 밖에서 지키고 있다가 잡으면 어쩌나 싶었기 때문이다. 2시간 정도 지나자 시민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서야 안심하고 밖으로 나왔다. 호주머니마다 더러운 물이 가득 들어 있어 몸이 무거웠다. 물을 털어내고 주위를 돌아보니 수많은 시민이 광주역 주위에 모여 있었다.
나는 얼른 옷을 갈아입고 싶었다. 생각 끝에 부근 주택가 골목의 어떤 열려진 대문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서니 어린 학생 하나가 나오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대충 사정을 얘기하고 나서 헌 옷이 있으면 아무것이라도 좋으니 좀 달라고 하였다. 그 학생이 런닝샤쓰와 바지 하나를 내주었다.
옷을 모두 벗고 비누로 몸을 씻었지만 악취는 여전했다. 그래도 씻고 나니 한결 나았다. 내가 입었던 옷을 세탁소에 맡기든지 아니면 버리라고 학생에게 말하고 런닝샤쓰 차림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광주역에서 발견된 시체
광주역 앞은 한산했다. 군인들도 물러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유동 삼거리로 나오니 시민 일부가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MBC 방송국 쪽으로 가보았다. MBC 방송국은 불이 붙은 지 오래되었는지 거의 다 타고 있었다. MBC 방송국 바로 옆에는 냉장고, 선풍기 등이 거리에 많이 나와 있었는데 전자상가에 불이 옮겨붙을까봐 내놓은 것이라고 했다. 시민들과 함께 MBC 방송국 앞에 있던 중 세무서 쪽에 계엄군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갔다. 그런데 도중에 시민들은 계엄군이 밀고 온다며 우르르 밀려왔으므로 다시 MBC 방송국 앞으로 밀려났다. 그날 저녁 대부분의 시민들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산발적으로 모여 시위를 벌였다. 나도 7, 8명의 시민들과 금남로와 제봉로 일대를 돌며 밤을 새웠다.
아침이 되자 어젯밤 군경이 지키고 있던 광주역의 상황이 궁금하여 그곳으로 갔다. 몇백의 시민이 역 앞에 모여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역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한쪽에서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는 게 아닌가? 시민들과 달려가 보니 그는 팬티 차림으로 허벅지가 찢어져 피범벅이 된 채 죽어 있었다. 대검에 찔린 것 같았다. 시민들과 그를 밖으로 끌어내어 리어커에 실었다. 그리고 함께 도청으로 갔다.
발포(21일)
도청 앞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곳에 갔을 땐 이미 시민들 사이에서 협상대표가 나와 계엄군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구사항을 내걸고 협상을 하고 있었다.
"신현확은 이번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지고 즉각 물러나라."
"전두환이 물러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지금까지 구속된 학생을 석방하라."
바로 그때 공중에서는 헬기가 떠다녔다.
"시민 여러분, 저는 도지사입니다. 빨리 해산하십시오. 시민 여러분, 어서 해산하십시오."
그러자 시민들은, "저놈, 죽여라"며 아우성을 쳤다.
협상대표가 계엄군과 협상을 하는 동안 시민들은 장갑차와 트럭, 버스 여러 대를 도청 앞에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만약 협상이 결렬되었을 경우 도청으로 돌진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협상이 오래 끌어지자 시민들은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때 협상대표가 돌아왔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협상의 결렬'이었다. 협상대표는 그래도 "5분만 더 기다리자"고 시민들을 달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민들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먼저 트럭 몇 대가 도청을 향해 질주했다. 그러자 계엄군이 우르르 밀리는 것 같더니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갔다. 나도 정신없이 뛰어 공사중인 충금지하상가 부근까지 갔다.
총성이 멈추고 한 시민이 총 맞은 학생 하나를 들쳐메고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학생이 흘린 피가 뚝뚝 떨어져 금남로를 수놓고 있었다. 그들은 중앙로를 지나 제일극장 부근의 어떤 병원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충장로 등으로 도망간 시민들은 고개를 내밀어 도청 쪽을 주시하곤 했는데, 그중에 몇 사람은 계엄군이 정조준한 총에 맞아 죽었다고 들었다. 이 외에도 총상 환자가 주변의 병원을 가득 메울 지경이었다. 이에 흥분한 시민들은 이렇게 맨손으로 당할 수만은 없다고 입을 모았다.
장성으로
시민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퍼져 있었다.
"학생들이 서울에서 내려왔는데 차가 없어서 장성에 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장성으로 내려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주위에 있던 20대 전후의 청년 6명이 나와 뜻을 같이하고 한번 가보자고 하였다. 우리들은 광주공원에서 2.5톤 트럭에 타게 되었다. 그후 장성으로 차를 몰았다.
한참을 가다 산동교에 이르자 시골 아주머니 두 분이 그릇에 밥과 반찬을 담아온 것을 차에 올려주며 광주 소식을 물었다. 우리들은 밥을 먹으면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고 말해주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다시 차를 타고 달렸다. 갈재에 이르니 길 가운데 도랑이 파져 있었다. 차의 출입을 막기 위함인 것 같았다.
우리들은 주변의 흙을 모아 얼마간 구덩이를 메운 다음 차를 몰아 장성으로 들어갔다. 이미 3시가 넘는 시각이었다.
장성읍을 한바퀴 빙 둘러보았으나 서울에서 내려온 듯한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주민들에게 물어봐도 모른다고 하였다. 대신 장성버스터미널 부근에서 국내외기자 50여 명을 만났다. 우리들이 광주에서 내려왔다는 걸 알고 나서 광주의 상황을 물었다.
"물어보는건 좋은데, 광주가 지금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전세계 만방에 알려야 해요."
"물론 그렇죠."
그들은 카메라까지 들이댔다.
"아니, 잠깐만요. 이것이 계엄사를 거치요. 안 거치요?"
"안 거치고 바로 나가요."
"그럼 얘기를 하것는데 오늘 아침 광주역에서 시체 하나가 나왔고, 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총을 쏴서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었소."
"숫자는 얼마나 돼요?"
"몇백 명이 될란가 몇천 명이 될란가 그건 모르것소."
이렇게 말하고 나서 같이 광주에 가자고 했으나 가지 않겠다고 했다.
무장
우리들이 다시 차를 타고 광주에 왔을 땐 시외곽에서 가져온 총이 일반시민들에게 나누어지고 있었다. 학동과 광주공원에서 총을 나눠준다는 말이 들렸다. 우리들은 학동으로 갔다. 시민군 몇이 주민등록증 등 신분증을 확인한 다음 총을 나눠주고 있었다. 우리들은 각각 카빈 1자루씩을 받았다. 도중에 총이 떨어져 늦게 온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총을 손에 쥔 우리들은 이번에는 광주공원으로 가보았다. 총을 든 시민 몇백 명이 각각 동별로 분류되어 줄 서 있었다. 지역방위를 담당한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것을 보고 우리들은 도청으로 향했다.
도청은 계엄군이 철수하고 대신 시민들이 장악한 상태였다. 도청 1층 민원실에서 여학있자 시민 한 분이 민원실로 들어 왔다.
"산수동에서 왔는데 여기서 학생들 밥 해먹고 할라면 반찬 같은 거 필요할 텐데 준비해 논 것이 좀 있응께 따라오시오."
우리 일행 6명이 그와 함께 차를 타고 산수동으로 갔다. 간장, 된장, 젓갈류를 이미 준비해 놓고 있었다. 우리들은 그것을 차에 싣고 와서 도청 식당에 넣어주었다. 들어가 얼마 있자 양동 삼익맨션 주민들이 쌀을 거둬놨다고 하여 일행들과 그곳으로 갔다. 주민들이 쌀 한 가마니를 모아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쌀도 역시 도청에 갖다주었다.
상무관의 통곡소리
그날 밤 도청에서 잠을 잤고, 아침에는 상황실에서 박남선을 만났다.
"우리 일행 6명이 있는데 뭣을 했으면 쓰것소?"
"아무것이나 하고 싶은 것 하세요."
"그러면 우리 자발적으로 일할라요."
이후 우리들은 모든 일을 자발적으로 처리했다. 주로 외곽지역을 돌며 경비를 맡았고 시체 확인을 위해 도청 앞에 몰려든 시민들을 정리하였다. 일행 중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으므로 실질적으로 리더격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19세, 20세 정도의 나이였고, 호텔 종업원, 운전수 등으로 일했던 애들이었다.
나는 22일 오전부터 시체를 확인하기 위해 도청에 몰려든 시민들을 정리하였다. 시민들로 하여금 줄을 서게 하여 차례대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당시 도청 1층 민원실 우측으로 30여 구의 시체가 있었고 상무관에는 70-80구가 있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짓이겨진 것 등 모두가 참혹한 모습이었다. 시체를 보러 온 시민들은 대부분 침통한 표정이었으나 간혹 구경거리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아가씨 둘이 킥킥 웃는 것을 보자 화가 치밀었다.
"여어, 아가씨, 여기가 지금 웃을 자리요? 이런 상황에서 지금 웃음이 나오요?"
상대방이 들으면 기분 상할 줄 알면서도 나는 기어이 한마디 하고 말았다. 상무관에서는 가족들의 시체를 부여잡고 통곡하는 소리가 요란한데 웃는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후에 차를 타고 계림동으로 갔다. 계림동 로터리에 차를 세워두고 잠깐 쉬고 있는데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애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어, 아저씨, 테레비에 나왔어요."
"언제야, 나 테레비 본 적도 없다."
내가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장면이 TV에 나왔다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이제 잡히면 죽는구나'고 생각했다. 조금은 겁이 났으나 차차 새로운 각오를 했다.
'언제 죽어도 죽을 것,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한번 해보는 거야.' 23일에도 시체를 확인하러 온 사람들을 정리하였다. 그날 학동에서 방위병 하나가 자기 가족을 몰살시킨 사건이 있었다. 이유인즉 계모인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를 소홀히 취급한 데 대해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민군이 그를 잡아서 상무대에 인계했다는 말이 들렸다.
차를 타고 돌며
24일 밤 극락강을 타고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시민의 제보에 따라 버스 1대와 트럭 1대에 시민군이 나눠타고 광천동으로 갔다. 송원전문대학 부근의 천변다리에서 모두 내린 다음 매복근무를 섰다. 부근 주택에서 아저씨 한 분이 나와 커피를 끓여놨다며 한 잔씩 하라고 했다. 우리들은 차례대로 몇 사람씩 교대로 커피를 마셨다.
한참 경비를 서고 있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군대에 가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어디서 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우리들은 그냥 정신없이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턱대고 달리다가 어느 열려진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시오?"
"시민군인데요. 계엄군한테 쫓기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얼른 이리 들어오시오.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오?"
"저쪽에서 근무 서다가 총소리가 나서 도망왔어요."
얘기를 해보니 주인은 노동하시는 분이었다. 불을 끄면서 오늘밤 여기서 자고 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주인이 제사날이다며 먹을 것을 많이 내주어서 맛있게 먹고 그집을 나왔다. 지나가는 차를 타고 도청으로 들어갔다. 도청은 독침사건이 나 발칵 뒤집혀진 상태였다. 간첩에 의해 독침을 맞은 사람이 병원에 실려갔다고 했다. 순간 나는 섬뜩함을 느꼈다. 누가 누군지도 모른 채 지내는 상황에서 그중 간첩이 없으라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도청으로부터 직접적인 지시를 받지는 않았으나 도청 드나드는 동안 도청 간부들 사이에 권력암투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로가 '장'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 같아 보기에 좋지 않았다.
26일 일행 6명과 광천동 지역의 경비를 돌던중 독일기자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자기 차에 기름이 없다며 기름을 넣을 데가 없겠느냐며 손짓 발짓을 써가며 물었다. 그를 부근의 주유소로 데리고 간 뒤 주인에게 사정얘기를 했다.
"독일기자라는데 차에 기름 좀 넣어주시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어주자 기자는 돈 만 원을 내밀었다. 그런 것 필요없다며 아껴두었다가 당신이 쓰라고 했더니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워했다.
그 후 우리들은 주위의 '구본식품'이라는 빵공장에 찾아갔다.
"도청에서 지금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빵 있으면 좀 주시오."
"아, 그렇게 하시오. 그런데 가동을 않기 때문에 재고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빵 몇 박스를 내주었다.
도청으로 돌아오는 길에 양동 청과물상회에서 불러 가보았더니 매우 궁금해 하며 물었다.
"시민이요? 학생이요?"
"시민입니다."
"고생이 많소."
그러더니 사과 한 궤짝을 차에 실어주었다.
새벽의 총성
그날 저녁 도청에 들어가니 도청 수위실에서 총을 회수하고 있었다. 이미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파다 했는데 어이없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오늘 저녁 계엄군이 들어오는데 이것이 뭔 일이요?"
"계엄군이 들어오면 총 나눠주것소."
우리들은 할 수 없이 총을 반납하였다.
"형님, 총도 없고 한디 쉬기나 합시다. 피곤해 죽것소."
"그래 어디 한번 알아보자."
우리들은 충장로 광주우체국 부근의 여관으로 들어갔다. 주인에게 사정얘기를 했더니 방 두 칸을 내주었다. 두 팀으로 나뉘어 방에 들어가 앉았으나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옆에 있는 애들은 금방 떨어져 코를 골았다.
자정이 넘어 얼핏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나를 불렀다.
"아저씨, 아저씨!"
"누구요?"
"저예요. 계엄군이 지금 들어왔어요."
일행 중 제일 나이 어린 놈이었다. 나는 문을 열고 그애를 안으로 들인 다음 물었다.
"계엄군이 어디로 들어오드냐?"
"창문을 막 부술라고 해요."
거리에 인접해 있는 옆방 창문을 누군가가 부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내 옆에서 자고 있던 애들을 깨웠다.
"야, 느그들 총 가진 것 없냐?"
한 애가 숨겨온 권총 하나를 내밀었다. 그 총을 들고 옆방으로 건너간 다음 창문으로 다가갔다. 누군가 창문을 급히 두드렸다. 아무래도 계엄군은 아닌 것 같았다.
"암호!"
"시민이에요. 문 좀 열어주세요."
창문을 열어보니 갓 스물이 될까말까 한 어린애가 서 있었다. 그를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 신분증을 조사해 보니 재수생이었다.
"어째 대문으로 들어오제. 이리로 들어올라고 했냐?" 그는 겁에 질린 듯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가까스로 말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가두방송을 듣고 나와 …… YWCA에서 총을 받고 도청 앞에 배치받았는데, 개미새끼 하나 없고 …… 도저히 무서워서 못 있겠길래 도망왔어요."
그애를 진정시킨 다음 내 방으로 와서 들어누웠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불안을 느끼며 엎치락뒤치락했다. 그러던 새벽 3-4시경 갑자기 도청 쪽에서 "땅!" 소리가 울렸다.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어 마치 콩볶는 듯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드륵, 드르륵, 드륵."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야, 계엄군이 들어온 것 같다. 어떻게 했으면 쓰것냐?"
아무 대책이 없었다. 30-40분 후 총소리가 멈추자 우리들은 여관 옥상으로 올라갔다.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거리를 내려다보니 계엄군이 노동청 쪽과 유동 삼거리 양쪽으로부터 도청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두워 잘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쓰고 있는 모자의 야광띠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마지막 결단
공중에서는 헬리콥터가 떠다니며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폭도들에게 알린다. 자수하라. 목숨만은 살려준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여자 목소리였다. 방송소리는 지긋지긋하도록 귓가에서 맴돌았다. 방송소리가 마음을 자극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자수를 해도 죽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여기를 빠져나가야 된다."
6시경 조선대부고 선생이라는 여관집 주인 아들이 올라왔다.
"우리가 숨을 데가 없겠소?"
"지하 보일러실로 내려갑시다."
지하 보일러실로 내려간 우리들은 그대로 있다간 안 될 것 같아 생각을 모았다.
"우리 전부 다 분장하고 각자 헤어져 배고픈다리서 만나자."
그때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나는 주인 아들에게 물었다.
"누가 저러요?"
"옆에서 술집하는 앤데, 저 애도 어제 저녁까지 데모하고 다녔어요."
어쩔까고 묻는 그에게 문을 열어주라고 했다. 이어 술집에 있다는 애가 보일러 실로 들어왔다.
"아저씨, 제가 가서 얘기할 테니까 자수하시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내게 그는 또 덧붙여 말했다.
"아저씨는 자수하면 바로 쏴부리니까 여기 남고 나머지 사람만 자수하면 쓰것소."
"그래 니들 자수할래?"
"……."
애들도 망설였다.
"그래 니들 자수해라. 우리는 앞으로 어디서 만나도 만날 것인디." 술집에 있다는 애가 자수하면 쏘지 않는다는 확답을 계엄군으로부터 받아오겠다며 밖으로 나갔고, 이어 우리 애들 6명도 밖으로 나갔다.
애들이 나가자 나는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창문에 귀를 대고 긴장을 했다.
바로 앞에 광주미문화원이 있어서인지 계엄군 1개 소대병력이 진주해 있었다.
"야, 이 새끼들아, 엎드려!"
"퍽! 퍽! 퍽! 퍽!"
"억! 억! 억!"
총개머리판으로 애들을 찍어버리는 것 같았다. 얼마 있자 잠잠해졌다.
'아, 차라리 총이라도 있었으면 한 놈이라도 쏴 죽이고 나도 죽는 것인데' 나는 총이 없는 것이 한스러웠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할 상황이다 보니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그때 술집에 있다는 놈이 내 옆으로 왔다.
"아저씨도 자수해야 쓰것소. 여기로 곧 수색 들어온다고 하니까 자수하시요."
순간 그가 비열한 놈이라 생각되어 한대 갈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럴 수도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뜻에 따를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나는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자수를 하되 죽어도 좋다고 생각을 하자 너무나 마음이 편해졌다. 여관 앞으로 나갔더니 계엄군이 총구를 겨누며 소리쳤다.
"손들어, 새끼야!"
그러면서 워카발로 짓이기고 총개머리판을 휘둘렀다. 내가 만신창이로 쓰러지자 포승줄을 이용해서 손을 뒤로 묶었다. 그후 전남대 신문사로 끌고 갔다.
그곳에 가서 보니 우리 애들이 있었다. 나도 그들 옆에서 '원산폭격'이라는 기합을 받았다. 계엄군은 계속해서 우리들을 때렸다. 상관이 나무라면 조금 멈췄다가 또 계속 발길질을 했다.
연행 후 상무대 생활
30분 후 우리들은 도청 앞으로 끌려나왔다. 도청 앞에는 탱크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도청 안으로 들어가니 현관 앞에 사람들이 손을 뒤로 묶인 채 배를 땅에 대고 엎드려 있었다. 우리도 곧 그들 옆에 엎드려졌다. 조금만 움직여도 여지없이 발길질을 당했으므로 죽은 듯이 엎드려 있어야 했다. 나는 TV에 나왔다는 사실이 걱정이 되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얼른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나 곧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을 본 계엄군이 총개머리판으로 안경을 사정없이 짓이겨버렸다. 이어 곤봉으로 내 안면 광대뼈를 때렸는데 지금까지 아프다. 내가 비명을 질렀더니 "이 새끼가 엄살을 부려" 하며 발길질을 해댔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들을 외진 곳으로 끌고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계엄군은 우리들이 등에 '총기소지', '극렬분자', '극렬난동' 등의 내용을 각각 적었다. 그후 대기해 놓은 차에 타라고 했다. 그러나 다리가 마비되어 걸을 수 없었다. 무릎으로 뿔뿔 기는 우리들을 계엄군 두 명이 양쪽에서 들고는 마치 짐짝을 다루 듯 버스에 던졌다.
버스 안에서는 고개를 숙이라며 진압봉으로 머리를 내리쳤다. 나는 버스에서 다시 애들을 만났다.
"형님, 절대 모른체 합시다. 어제 저녁에 만났다고 합시다."
"아, 알았다. 야, 모두 끌고 가서 어디 한반데다 쏴죽여버릴란갑다."
우리는 살짝 소근거렸다. 차가 멈춘 곳은 상무대 연병장이었다.
먼저 잡혀온 사람 2백여 명이 한쪽에 무릎꿇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흙과 피가 엉겨붙어 머리가 온통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우리들은 빙 둘러앉은 수사관들 앞에 앉혀졌다. 거기서는 무릎만 꿇린 채 손을 묶고 있는 포승줄을 풀어주어 살 것 같았다. 수사관 중에 TV를 보아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머리를 내려 얼굴을 가렸다. 그런데 내 차례가 되어 수사관 앞으로 나가자 수사관은 나를 금방 알아보았 다.
"이 새끼,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너, 테레비 나온 놈이지?"
"테레비 안 나왔습니다."
곡괭이 자루를 들고 계속 다그쳤다.
"이 새끼, 이리 와. 너 테레비에서 뭐라고 선동하고 다녔냐? 너, 간첩이지? 바른대로 얘기해. 바른대로 얘기할 때까지 맞는다."
모르겠다고 했더니 엎드리게 한 뒤 곡괭이 자루로 다섯대를 때렸다.
"아이고, 나 더 이상 매 못 맞것습니다. 그리고 내가 선동하고 다닌 것도 없고 테레비에 나온 것뿐입니다."
"들어가!"
이어 우리들은 영창으로 들여보내졌다. 내가 들어간 곳은 6소대였는데, 1백 20명이 꽉 들어차 있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군용 식기에 국에 만 밥이 들어왔는데 밥은 퉁퉁 불어 있었고 양도 적었다. 먹은 지 10분이 지나자 소화가 되어 배가 고플 정도였다. 낮에 헌병대 수사관들이 오더니 우리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이 안에 고정간첩이 있다. 간첩을 숨겨주면 어떻게 되는지들 알지?"
나는 특히 TV에 나왔다는 이유로 요주의인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조사를 할 때마다 같은 내용을 집중 추궁했다.
"너, 고정간첩이지?"
"김대중한테 얼마 받았어?"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송정리에 사는 내 친구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나의 행적을 캐려 했었다. 하지만 내 친구들을 추적할수록 나의 무죄만 입증될 뿐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수사의 목적은 진실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내게 고정간첩이라는 죄목을 씌우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고정간첩임을 시인하라며 세 놈이 달려들어 나를 구타하였다. 2시간 정도 맞고 나자 전신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 후 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물수건으로 습포를 해 주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유서를 쓰라고 했다.
"너, 이놈의 새끼, 정신이 드냐? 인제 니 애비한테 유서나 써라."
그러면서 유서의 내용까지 불러주었다.
"큰 죄 짓고 상무대로 끌려와서 이렇게 죽소."
나는 그날 이후 몸져 눕게 되었다. 내가 아무것도 먹지 못하자 배식을 담당한 헌병이 내게 밥을 먹이려고 애썼다. 그는 원래 현역군인이었으나 고된 군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탈영한 후로 상무대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교도소로, 그리고 이후 생활
나는 얼마 뒤에 통합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10월에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2백-3백명이 함께 담배를 피우고 들어갔더니 보안과장이 담배를 끄라고 야단이었다.
이어 우리들은 각각 방에 배치되었는데 나는 2층 14방에 수용되었다. 들어가자마자 교도관이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면회를 허용하지 않았고, 편지도 못하게 했다. 또 학생들과 따로 수감했기 때문에 우리들은 들어가서 이틀 만에 단식농성을 했다. 그랬더니 소장이 오더니 우리들이 주장하는 모든 문제가 자기 선에서 해결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부에 연락하여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며 밥을 먹으라고 했다. 그후 교도관들이 들어오더니 난리였다.
"이 새끼들아, 느그들이 무슨 투사냐?"
그들은 우리들에게 바께스로 물을 뿌리고 포승줄로 구타했다.
우리들은 또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 PT체조라는 것을 받았다. 오리걸음 걷기 등 매우 힘들었으므로 두 달째 접어들었을 때는 거부농성을 벌였다.
"우리는 폭도가 아니기 때문에 훈련받을 필요가 없다."
나는 고등군법회의에서 7년을 구형받았다가 계엄사 관할 확인에서 4년으로 감형받았다. 그리고 교도소로 이감된 지 5개월 정도가 지난 1981년 4월 3일 석방되었다. 같이 활동했던 애들은 대부분 1심에서 나왔다.
나는 석방 이후 서울과 부산 등지를 돌며 책 세일을 하였다. 2, 3년 뒤엔 광주로 내려왔다.
1987년엔 신문광고를 통게 알게 되어 '5·18 광주민중항쟁동지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지도위원, 수익사업을 관리하는 사업장 등을 맡아보았다.
그 일을 하는 동안 개인생활을 꾸리지 못했다. 생활이 쪼들려 양동시장 농가게에 들어가 일했고, 지금은 청화문화사에서 일하고 있다.
광주항쟁 이후 나는 항쟁 참여자들이 단체별, 부류별로 나뉘어지는 것을 보고 소외 내지 회의를 느꼈다. 광주항쟁 당시 광주시민이 목숨을 걸고 한마음으로 공동체를 형성했음을 생각할 때 뭔가 잘못돼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특히 광주항쟁의 주체인 양 떠벌리고 다니는 지식인들의 태도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사람들은 지난번 청문회를 통해 광주항쟁에 대한 진상이 어느 정도 규명되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책임자에 대한 책임추궁 여부가 아직 미지수로 남아 있는 한 확실한 진상규명이 되기엔 아직도 멀었다고 본다.(조사.정리 최정숙)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즐거운 점심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