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502초빙강사] 이삭목사 초청집회2
북한 지하교회와 이삭 목사 이야기 북한선교 이야기
1945년 태어나 부모와 함께 해방후 남한으로 옮겨왔다. 아빠는 목사, 그리고 엄마는 목사의 딸이었다. 어렸을 때 엄마가 미국을 거쳐 북한에 가도록 말씀하셨다. 그는 배운대로 <에, 엄마> 라고 답했다. 엄마는 병원에 가서 눈 한 쪽을 팔아 미국가는 비행기표를 사시려고 했으나 병원측에서 수술비가 눈보다 더 나간다고 눈을 못 팔았다. 당시 거지가 동냥하러 와서 어머니는 피를 팔아서 거지들을 먹이셨다. 어머니는 이삭이에게 동생들 모두 목사만들어라 하셔서 예 하였다.
아빠는 목회를 하는 중이었지만 돈이 없었느데, 어머니는 이삭을 중3년때 미국보내자고 하였는데 미국 가는 영어인터뷰시험에는 합격하였지만, 건강진단 결과 결핵에 걸린것이 판명되 못 갔다. 이런 가운데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미국에 보내드리고 막내 동생을 출산하였으나 곧 심장마비로 1963년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미국에 가셨고, 어머니는 하늘나라 가셨고 동생들은 이삭이가 키워야 했다. 이 후 약속대로 2째 3째 셋째 동생 모두 목사가 되었다. 외할어버진 시골에서 목회하셨고.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땐데 아버지 초청장 기지고도 여권을 받을 수 없었다.
미국에 들어가신 아버지기 미국 이민국 직원이 존 페프 케네디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불쌍해 보이고 가난해 보이고 못생긴 사람을 찾아 홍보용 영화제작을 하려고 사람을 찾는다고 소개해줘서, 이삭과 동생들은 한국에서 사는 곳을 전부 영화로 찍고나서, 비행기표, 여권들이 공짜로 받아 동생들과 미국으로 건너가 영화를 마저찍었다. 당시 이삭의 나이 18살.
미국에 간 후 1969-1971 미군에 입대해 한국 휴전선 근처 의정부에 배치되어 첩보를 담당하였다. 제대후 미국에 돌아와 신학교를 다니고 목사가 된 이삭 목사를 선교단체에서 불렀다. 한 미국인 선교사가 이 목사에게 자신들이 10년 동안 찾아 헤맸던 ‘북한 선교 적격자’를 드디어 찾았다 하였다. 북한에서 태어나,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고, 얼굴·피부색·언어가 같은 제가 북한 선교를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아내에게 북한에 선교사로 가야겠다고 하자 그것이 하나님의 뜻미면 가야지 하였다.
이삭 목사는 곧바로 중국·북한 선교 준비에 착수했다. 미국과 한국에 모퉁이돌선교회를 정식 등록하고, 중국을 드나들면서 성경 밀수 루트를 개발했다. 그의 설명이다.
1983년에 선교 훈련 과정 중 처음으로 중국에 ‘정탐’을 갔습니다. 그때 북·중 접경지에서 조선족들을 만났는데, 규모는 작지만 이미 나름의 방법으로 성경을 북한에 들여보내고 있더라고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제가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북한 선교는 일본, 독일, 중국 교회가 중심이 돼 일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조총련의 북송사업 당시 선교를 위해 함께 북한으로 들어간 민단 소속 기독교인들이 있었고, 동독 출신의 엔지니어들은 영국에서 인쇄된 ‘쪽복음 성경’을 북한에 보급했습니다. 중국 교회는 당시 1년에 합법적으로 드나드는 15만명이나 되는 조선족을 통해 성경뿐 아니라 양식과 의약품을 북한에 반입했습니다.”
중국을 여러곳을 여행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중국인들에게 성경를 전하고 영어방송도 해보고 여러가지를 해보는 가운데 1985년 10250권의 성경을 10가방에 가지고 갔다. 감사하다는 말은 없고 놓고 가라고. 그리고 조그만 성경 100권을 원했다. 그 분은 그 성경이 오면 북한에 간다고, 그리고 북한을 포기한 적이 없다고 하면서 땅에 털썩 앉아 울었다.
북한선교는 조선족들이 다 하였다. 135센티 89살의 함머니 그 가문은 28명의 순교자들을 배출한 분이었다. 기차가 크게 지나갈때 기도하였다. 공산당 노래에다 가사를 바꿔서 찬양을 한다. 톰슨주석 성경을 가지고 죽을 무릅쓰고 가겠다 하셨다.
미국에 와서 쉬려고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그래서 즉시 가자. 찬송한번 맘놓고 부르고 싶다고 하였다.
그리고 돌아와사 <내가 능력이 없어서 너희를 북한땅에 남겨놓았는지 아니?> 하고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그리고 천국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65명의 신자중 6명이 몽둥이를 맞아 죽었다. 그리고 59명은 질병과 매맞아 그리고 기근으로 모두가 순교하였다. 그 장면을 목격하였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그 운전수는 그 순교자들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게되었다.
이삭 목사도 중국에서 4주 동안 고문을 당하며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생각하고 고난을 받아들였다. 그 후 전기고문을 받아서 기억상실중에 빠졌다. 그 전기고문후 냉동실에 옮겨졌다. 똥을 �자 얼마후 얼자 그 것을 먹으라 하였다. 그래서 먹었다. 오줌도 얼은 것을 먹었다. 가장 그를 가장 악독하게 고문했던 사람과 함께 고문실을 나왔다. 그 사람의 말이 우리가 한달에 70명 고문하는데 모두가 욕하고 발악하는데 선생은 왜 화도 안내고 노래를 부르고합니까? 그는< 예수때문에>라고 대답한마디했다.
기억상실증에 걸렸던 그는 기적적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기억을 상실해 교회나 성경도 기억하지 못했다 셋째 주 성만착식떼 미친놈들이라고 생각하였다 한 4주 후에 기적적으로 기억력이 돌아왔다.
10년 동안 피똥을 놓았다.
한 10년 후 하나님이 중국에 들어가라고 하셨다,. 그러나 머뭇거리다 3년 후 중국에 갔다. 그런데 한 여자분이 이삭목자를 고문했던 그날 목사님 고문하고 돌아온 남편이 (여자는 조선족이었다. 남편은 중국인) 술 끊고 예배당에 가겠다고 하였다. 아들과 아내와 교회에 가보니 다른 모든 고문자들 가족 12명이 교회에 이미 와 있었다. 이삭 목사를 고문했던 사람들과 가족 모두가 교회에 와 있었다. 그리고 이 고문자 4면이 전부 목사가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
“미국서 선교 훈련을 받을 때 두 가지 배운 것이 있어요. 첫째는 ‘앞문으로 들어가라. 그게 불가능하면 뒷문으로 들어가라. 뒷문도 안되면 주위에 불을 질러라’입니다. 그땐 몰랐는데, 후에 보니 휴전선이 앞문, 중국은 뒷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불을 지르는 것은 조선족 교회의 활성화였죠.”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북한에서 할 수 있는 선교방법으로 ‘훔쳐보게 하라, 훔쳐 갖게 하라, 훔쳐 듣게 하라’예요. 훔쳐보는 것은 성경책, TV, DVD 등이고, 훔쳐 갖는 것은 삐라 등을 통해 뿌려 줍게 하는 것, 듣게 하는 것은 도청과 라디오죠.”
―도청은 어떤 방법을 말하는 겁니까.
“평양을 방문해 호텔에 들어가면 도청을 하는 게 뻔히 보입니다. 저는 도청장치 앞에다가 설교테이프를 반복해서 틀어놓습니다. 북한입장에선 항의할 수도 없어요. 항의 자체가 도청을 인정하는 거니까요. 외출할 땐 성경도 펼쳐놓고, 설교집과 기독교 관련 소책자들을 두고 갑니다.
영화 CD나 비디오도 많이 가져갔습니다. <벤허> <나사렛 예수> <십계명> 등 영화 테이프를 방 안에 꽂아놓고 나가면 2~3일 뒤에 다 없어져요. 그리고 나중에 떠날 때쯤다시 꽂혀 있습니다. 그들이 가져가서 복사하거나 봤다는 얘기죠.”
두리하나선교회 홈페이지 --> http://www.durihana.com/
1. 모퉁이돌 이삭목사 북한의 자유와 생명 회개 예배 남산팔각정 2012년 3월 1일
6.25 일어난 그날에 교회에서 성찬식 때 서로 마이크를 잡겠다고 싸웠다.
1. 한국 사회의 타락과 싸움.
2. 교회의 타락과 타툼 - 우리도 그 중의 하나이다.
3. 북한은 수용소 정치범을 해방하라. 수백만의 아사자가 있었고 2만 4천의 성도가 예수님 때문에 순교자가 되었다. 우상숭배를 중단하라. 원자탄 개발을 포기하고 도발을 중단하라. 이런 폭력은 망하고 있는 길이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정부는 무너진다.
예레미아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치었다.
한국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북한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한다.
우리는 북한으로 가야한다. 라디오로, 우편으로, 북으로 가야한다.
우리는 기도합시다.
이곳은 신사가 있던 곳이다. 이제 우리는 이곳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북한의 최소 1500개의 지하교회가 지상교회가 되기 기도한다. 나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기 기도합니다. 그 사람을 통해 만민이 살수 있다. 만수대가 무너지고 하나님을 섬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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