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역사드라마 ‘징비록’이 인기리에 방영되다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유성룡의 원작인 국보 제132호 ‘징비록’을 재구성한 대하드라마로, 원래 TV 방송극은 극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 원작을 개작하는 과정에서 많이 손질되기 마련이다. 또 극의 흐름의 자연스러움이나 재미를 더하기 위해 허구적인 에피소드가 삽입되기도 한다. 그래서 엉뚱하게도 원작의 내용이나 기본 정신이 훼손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많은 시청자들의 눈길을 끈 이유를 생각해 본다. 역사를 알면 현실을 직시하게 되고, 현실을 바로 알면 미래를 예견할 수 있어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나간 역사를 배우고 학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를 배우고, 인식함으로써 자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함은 물론 다시는 그 잘못된 역사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의지가 배어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학교에서 조선 역사를 배운 바 있지만 드라마 속의 왜(倭)가 일으킨 임진왜란·정유재란을 다시 영상으로 보면서 뼈를 깎는 듯한 아픔과 깊은 슬픔에 빠진다. 수없이 많은 백성들이 무참하게 죽어가고, 갖은 약탈과 비인간적 수모에 포로들은 굴비두릅에 엮이듯이 끈에 꿰어 대한해협 너머로 끌려갔다. 그 처참한 모습들은 우리를 자괴감에 빠지게 한다. 왜는 당시 신무기인 조총을 들고 조직적으로 조선 땅을 짓밟으면서, 우리를 겨냥하지 않고 명나라를 치러 갈 것이니 길을 비켜달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TV로 보는 드라마 차원이지만 임진왜란·정유재란의 모습을 영상으로 바라보면서 참담한 느낌이 드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덜 깨인 나라로만 얕잡아 보던 왜가 서양과 교류하면서 과학문명을 받아들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나라를 통일해 강국으로 만든 후 대륙인 명나라를 치려했다. 그런데도 우리네 양반들은 국제 정세에 눈을 돌리기는커녕 동인·서인, 남인·북인으로 나눠 정쟁을 일삼다 무참하게 짓밟혔다.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가는 선조를 따라가면서도 정쟁은 계속됐다. 왜가 명나라와 조선을 이분해 한강 이남의 땅을 내어달라는 논의를 하는데도 무력한 조선은 대처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 우리의 역사가 바로 정립되기는커녕 잘못된 전철을 밟았다는 사실이다. 운이 다한 명나라에 기대 명분만을 내세우는 외교를 펼치다 신흥국인 청나라에 의해 남한산성에서 수모를 당한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이전투구의 정쟁이 지속되면서 대두된 외척 세력에 의한 세도정치는 극도로 강화됐고, 결국 조선의 역사는 비운의 막을 내리게 된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틈에 짓눌리다가 일본에 의해 강점되는 비통한 종말을 맞으며 오욕의 역사는 되풀이돼 왔다.
언제 우리가 한번 나라다운 나라로 폼을 잡으며 위세를 떤 적이 있는가? 1945년 독립 이후에도 강국들에 의해 국토가 남북으로 갈렸고, 이데올로기의 최첨단에 서서 6·25라는 이름의 한국전쟁을 동서냉전의 대리전으로 치렀다. 하지만 지금도 통일의 길은 손에 잡히지 않고 있다. 그나마 참으로 다행인 것은 대한민국이 건국 이후 70년 동안 기적을 이뤘다는 사실이다. 단군 이래 최대의 부(富)를 쌓으며 우리는 위세를 떨 수 있었다. 조공만 바쳐오던 중국에 으스대기도 했고, 일본에 의존하기만 했던 우리가 제한적이긴 하지만 IT 강국이 돼 스마트폰 판매 세계 1위라는 신화를 낳았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세계인을 춤추게 했고, 지금도 한류는 동남아를 넘어 유럽과 미주로 뻗어나가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꽁꽁 갇혀 있는 이들이 있으니 그것이 문제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도 사색당쟁을 일삼던 무리들처럼 정치인들은 지금도 친박·비박, 친노·비노로 나뉘어 자기 입신양명과 정쟁에만 매달리고 있다. 중국이 G2 경제대국에서 머지않아 G1이 된다는데, 일본의 아베 정권은 군국주의 음모를 꾸미며 헌법을 개정하려 하는데, 정치인들의 의식은 아직도 ‘징비록’ 속 양반네들처럼 꽉 막힌 채 자기 틀에 갇혀 수천 년 동안 되풀이 해온 이전투구 정쟁을 되풀이 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가 지금도 그렇게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첫댓글 국장님 제게 관심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청송님이 올려주신 글 다시 한 번 더 읽습니다.
절대적으로 동의합니다.
역사는 잘못된 전철을 밟어서는 안되는데요.
참 답답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