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났던 볼리비아 사람
서 영 복
남미 여러 나라 여행 중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 사람들이 볼리비아사람들이다.
A: 택시기사
열흘이 넘는 일정을 페루에서 보내면서 한국음식이 그리워질 때 쯤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 숙소에서 며칠을 보내게 되었다. 어렵게 알아낸 한국식당을 찾으러 택시를 탔다. 숙소에서 상당히 먼 거리였지만 택시요금은 그리 비싸지 않았고 젊은 기사도 친절하였다. 저녁식사를 하려던 터라 거리는 퇴근시간과 맞물려 교통이 혼잡하였다. 신호대기를 하던 우리 택시 앞에 어디선지 10대로 보이는 소년하나가 나타나 택시의 앞 유리창과 뒤 유리창을 닦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택시기사와 눈도 안 마주치고 순식간에 앞뒤유리창을 말끔하게 닦아 주었다. 그러자 신호등이 켜지기 직전 기사는 미소와 함께 뭐라고 한마디를 하며 그 소년에게 동전 몇 개를 집어 주었다. 알고 보니 줘도 그만 안줘도 그만인 일을 그 아이가 했던 것이다.
또 얼마쯤 가다가 신호에 걸린 택시는 도로 가에서 껌과 초콜릿이 들어있는 상자를 내미는 아기 업은 아줌마에게서 껌을 사더니 뒷자리의 우리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택시가 출발했다. 우리는 제일 잘 하는 스페인어 그라시아스를 되풀이 하며 껌을 받았다.
그 뿐 아니었다. 한국음식점까지 가는 동안 또 한 차례를 목격했다. 이번에는 한쪽다리가 안 보이는 할아버지가 잠깐 서있는 택시에 눈길을 주자 창문을 내리고 역시 동전을 집어 건네는 모습을 보았다. 스페인어를 못해 젊은 택시기사를 마음껏 칭찬해주지 못한 게 안타까웠다. 겨우 “부에노 부에노”만을 연발하고 택시기사에게 엄지손가락을 쳐들어 보였다. 볼리비아의 첫날이어서 내 마음속에는 이미 볼리비아 사람들은 선한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B : 구둣방 아저씨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숙소 옆에 구두를 수선하는 작은 가게가 보였다. 마침 사막투어 할 때 망가졌던 신발이 생각나서 가지고 가보았다. 수선해줄 수 있다고 맡기고 가라는 것이다. 수선비는 10볼 우리나라 돈으로 고작 1500원이다. 한쪽신발만 망가졌는데 두 짝을 모두 놓고 가라했다. 다음날 아침 신발을 찾으러 갔더니 두 짝을 모두 야무지고 튼튼하게 고쳐놓은 것이다.
고마운 마음에 돈을 더 주어야 되느냐 물으니 한쪽은 다음에 곧 망가질 것 같아서 자기 임의로 수선해 준거라며 극구 사양하였다. 말을 주고받을 수 없지만 그냥 나오기 미안해서 들고 있던 바나나를 내밀었다. 그러나 두 쪽만 떼어가더니 대신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알 수 없는 스페인어만 뭐라 뭐라 하였다. 생면부지의 사람이고 절대 단골손님이 될 수 없는 동양에서 온 여행자임을 알면서도 순수한 마음으로 베푸는 친절이 남편과 나를 또 한번 감동 시켰다.
C : 라파스 초등학교 여선생님 에스더
우유니 소금사막으로 가려던 버스사정이 어긋나 비행기로 일정을 바꾸다 보니 라파스에서 이틀간의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이것도 일종의 직업병인지 낯선 나라에 가면 우리는 유명한 관광지보다 그 나라의 학교를 가 보고 싶었다. 남편과 내게는 늘 학교와 초등학교 아이들이 관심과 흥미를 끌었다.
아침에 호텔 직원에게 이 도시에서 가까운 학교 몇 개를 소개해 달라 부탁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지도에 네 개의 점으로 표시해주면서 학교방문은 사전에 교육청을 통하지 않으면 어려울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학교건물이라도 보겠다는 심산으로 간단히 하루 짐을 챙겨 작은 배낭을 메고 어느 때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관광지가 아닌 곳에서 영어는 무용지물이다. 여행자가 길을 묻는 것은 기본이지만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여행가이드는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다리가 떨어질 정도로 묻고 또 물어서 학교를 찾아내었다. 우리나라처럼 교문이 있고 넓은 운동장이 있어 누가 봐도 학교임을 알 수 있는 곳은 단 한곳도 없었다.
더구나 어렵사리 찾아낸 학교였지만 사전에 아무런 약속도 없이 찾아온 동양의 여행자를 반겨줄 리가 없었다. 먼저 찾은 두 곳의 학교에서는 경비실에서부터 보기 좋게 방문을 거절당해야했다. 내가 아무리 웃는 얼굴로 말하고 여권을 보여줘도 소용이 없었다. 경비실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고 나는 스페인어를 모르니 서로 동문서답만 하다가 돌아서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내가 아니다. 남편은 그만 포기하자는 말을 했지만 마지막으로 한군데만 더 찾아가보자는 내 의견을 따라주었다. 그리고 세 번째 찾아간 곳은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의 pando초등학교이다. 사정사정하여 간신히 경비실을 통과해 체육수업을 하던 젊은 남자선생님에게 영어 가능한 선생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선생님은 수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자기반 수업을 참관하게 해주었고 쉬는 시간이 되자 여자선생님 한분을 모시고 왔다. 47세 에스더선생님. 우리의 소개를 듣자 자기소개도 해주었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우리를 만나게 된 것이 자기 교사생활에 행운이라고 까지 말하면서 좋아했다. 내가 학생들을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친절하게도 4층까지 오르내리며 에스더 선생님은 곧 교장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우리를 자기교실로 안내하였다.
열 한살짜리 학생들이 40명 정도 교실 안에 가득하였다. 에스더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스페인어로 남편과 나를 소개했다. 아이들은 일제히 박수와 환호성을 지르며 우리를 반겼고 선생님의 부탁을 받아 나는 곧 대한민국을 알려주는 수업을 하게 되었다. 담임인 에스더는 서툰 나의 영어수업을 스페인어로 통역하며 아이들의 질문에도 일일이 답변해 주었다. 수업은 한국의 문화와 의.식.주에 대한 것으로 길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한국사람 자체가 학습자료(?)인 셈이었다. 한국글씨로 사인을 해 달라 해서 학급학생 모두에게 일일이 한글사인을 해주었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한글이 신기한지 무척 좋아라했다. 우리가 연예인도 아닌데 사인을 하는 기회가 있었다. 아이들을 하교시키고 에스더 선생님과 교내식당에서 볼리비아 음식으로 점심까지 함께 먹으며 볼리비아와 한국의 교육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사 후에는 에스더의 안내에 따라 학교의 여러 시설들을 구경하였다. 초등학교이지만 생활지도 선생님이 따로 계신 상담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상담선생님과 생활지도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고 휴대폰으로 사진도 찍었다. 그들과 작별하고 학교를 나와 한참을 걸어 나오다가 휴대폰을 상담실 책상에 깜박 잊고 그냥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걱정하면서 다시 학교를 향해 가는 도중 내 휴대폰을 들고 우리를 찾아 나오던 선생님을 중간에서 만났다.
우리는 길에서 다시 뜨거운 포옹을 하고 기념촬영을 하며 웃었다. 참 선하고 친절한 사람들이다.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교사라는 직업에 만족하고 있다는 에스더 선생님이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빌며 교단에서 보람 있는 삶을 계속 이어가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