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카왕의 중요한 업적으로 일컬어지곤 하는 것이 바로 재판의 공정성과 함께 보편적 법치(法治)를 시행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또한 그는 제국 각지에 새로운 도로를 건설하고 관개시설을 만들었으며, 의료시설도 확충했다. 더구나 이런 모든 시설을 이용하는 데 차별을 두지 않았다. 여기에서도 대제국을 운영하는 통치자로서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제국의 어느 지역에서나 누구에게나 일관되게 적용되는 보편적 법치를 시행하고, 인프라와 공공시설을 종족이나 지역에 따른 차별 없이 건설하고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아소카왕은 광대한 제국을 자아나파다, 즉 군(郡)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중요한 지역에는 왕족을 태수로 파견했지만, 그렇지 않은 지역에는 태수를 감시, 감독하는 관리나 밀정을 중앙에서 파견했다. 치안권, 행정권, 조세징수권을 지닌 태수 밑에는 다시 현(縣)을 다스리는 현령들이 있었다. 아소카왕 사후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태수와 현령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이었다. 아소카왕처럼 능력이 탁월한 강력한 군주가 중앙집권적 통제를 효과적으로 운용, 유지하지 못하자 분열과 쇠퇴가 빠르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제국의 꿈, 전륜성왕의 꿈은 스러지고
 아소카왕 사후 마우리아 왕조는 반세기 정도 지속됐다. 기원전 185년 마우리아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 브리하드라타가 군사령관 푸샤미트라 숭가에 의해 살해당했다. 브리하드라타 시대에 마우리아 제국의 판도는 크게 축소되어 사실상 수도 파탈리푸트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만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특히 북서부에는 그리스계 인도 세력이 강해졌다. 푸샤미트라 숭가가 세운 숭가 왕조는 한 세기 조금 넘게 유지됐지만 그 영향력은 전성기 마우리아 왕조에 비할 수 없이 약했다. 이후 인도는 기원후 320년경 북인도를 통일한 굽타 왕조가 들어서기까지 분열되었고, 굽타 왕조의 판도도 마우리아 왕조에는 크게 못 미쳤다.
아소카왕은 한문으로 번역된 불전(佛典)에는 아육왕(阿育王) 또는 아수가(阿輸迦)로 기록되어 있다. 아소카왕은 불사리를 8만4천 개로 나누어 제국 각지에 탑파(塔婆)를 세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8만4천 개라는 숫자에는 과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를 통해 아소카왕은 제국과 주변 지역으로까지 불교를 보급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불교 전설이나 설화의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하는 아소카왕은 고대 인도 종교와 신화에서 세계를 통일, 지배하는 이상적인 제왕, 즉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이상을 충족시킨 인물, 즉 세속의 전륜성왕으로도 일컬어졌다. 전륜성왕은 무력이 아닌 정의와 정법(正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제왕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