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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좋은 겉옷과 살진 송아지
천 영 대
성경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겉)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누가복음 15 :18∼24)」
제일 좋은 겉옷
타락한 인간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가운데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그 뜻을 이뤄 보려고 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이겠으며, 또한 얼마나 대단한 능력이랴!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높아져서 자신을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나, 능력적인 면에 있어서 대단한 자로 생각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야고보서 4장 13, 14절에서는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했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도 모르는 존재이면서도 대단한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또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하나 우리 주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면 안개와 같은 존재로서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위 성경 구절에서 언급한 사람도 아버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이뤄 보려고 했지만 모든 것들이 그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아니했다. 그는 굶어 죽게 된 지경에서 그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차마 아버지의 귀중한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탕진했지만, 비록 아들의 자격으로는 받아주지 아니할지라도 품군 중의 한 사람으로는 받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아버지께로 돌아갔다. 그 때에 아버지는 그 아들의 잘못된 삶에 대해 정죄하거나, 꾸짖거나 쫓아내는 대신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제일 좋은 겉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살진 송아지도 잡아서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했다. 겉옷은 우리 자신을 바깥으로 단장함으로 우리 자신을 외적으로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우리 육신의 눈은 바깥에 있는 것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제일 바깥에 나타난 것만 보고 사람을 판단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을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많은 돈을 지급하면서까지 좋은 옷을 사서 입으려고 한다. 성인이 되어서는 자신의 수고로 얻은 물질로 단장을 하려고 하지만, 어릴 때는 그러한 분별력도 없고,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때에는 그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위해 많은 값을 지불하고서라도 좋은 옷을 사서 입히려고 한다. 그 부모가 사준 좋은 옷을 입은 자녀가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 그것을 보는 부모 또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어린이들 스스로는 자신이 필요로 하고, 좋아하는 옷을 사서 입을 수 없다. 대신에 능력을 가진 부모가 그 일을 한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게 된 아들은 자신의 좋은 겉옷을 살 능력이 없었다. 그런데 비록 아버지의 귀중한 재산을 탕진했지만 아버지께로 돌아갔을 때 그 아버지는 그 아들을 측은히 여겼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게 되었고 바깥에 입을 좋은 옷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종들을 시켜 제일 좋은 겉옷을 입혔다. 이 옷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범죄 했을 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을 연상케 한다(창 3:6∼21).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들을 사하여 주심으로 의롭게 된 것과 의이신 주님 자신을 뜻한다(고전 1:30). 바깥의 겉옷은 안에 어떠한 것이 있던 상관치 않고 그 사람을 좋게 보이게 한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들이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었다. 로마서 5장 9절에서는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주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들이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었다고 했다. 예레미야 23장 5, 6절에서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여호와가 우리의 의라고 했다. 우리가 특별한 일을 해서 의롭게 된 것이 아니고 의로우신 주님 자신이 우리의 의가 된다고 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는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도 우리가 선한 일들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신다고 했다. 이것은 특별한 행위와 상관없이 주님의 은혜로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의가 되시는 주님이 계시면 우리 또한 의롭게 된 자가 되고, 그 주님이 없으면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게 된다. 상기에서 언급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나, 주 예수님이 우리에게 의가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앞에서 말하는 겉옷은 바깥에 입는 것으로서, 안에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 곧 의롭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외적인 것으로서, 객관적인 것으로서, 오직 우리 주님에 의해서만 이뤄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이미 이뤄졌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말할 때는 언제나 과거 시제로 말해진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미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루셨기 때문에 믿는 모든 자들에게 동일한 것이다. 로마서 3장 22절에서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다.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로서 차별이 없다고 했다. 우리에 의해서 이뤄지면 차별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고 했다. 그 의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미치는 의로서 차별이 없는 것으로서, 또한 일반적인 것이다. 차별이 있다면 일반적인 것이 아닌데 차별이 없음으로 일반적인 것이다. 유다서 1장 3절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것은 특별한 구원이다. 차별이 있는 구원이나, 다른 구원이 아니고 같은 구원이라는 것이다. 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 할 것 없이 얻는 같은 구원이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도 차별이 없는 것이며, 그를 믿음으로 받는 구원도 차별이 없으며, 같은 것으로서 일반적인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내적인 것이 아니고 외적인 것이며, 객관적인 적이다. 또한, 이러한 것들은 주님께서 죽으시므로 이미 이뤄졌기 때문에 언제나 과거 시제로 말해진다. 로마서 8장 30절에서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고 하셨다.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이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다.
주님께서는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하셨을 뿐만아니라 거룩하게도 하셨다. 히브리서 10장 10절에서는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 또한 우리가 특별한 일들을 행함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이뤄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자들은 다 거룩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 주님을 믿는 모두에게 이뤄진 것이기에 외적인 것이며, 객관적인 것이며, 일반적인 것이다. 고린도전서 1장 2절에서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라고 했다. 실제로는 많은 문제가 있었던 고린도에 있는 형제·자매들에 대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졌다고 했고, 또 성도라고 했다. 이것은 내적으로, 기질적으로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니고 외적으로, 객관적으로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 안에서, 영 안에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3장 17절에서는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성전이 그 금을 거룩하게 한다고 했다. 이것은 성분적인 면에서 그러한 것이 아니고 위치적인 면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하여 그가 보여준 식양을 따라 성막(장막)을 지으라고 했다. 그 성막 안에는 놋으로 마든 번제단이나 물두멍, 금으로 만든 촛대나, 떡상, 향단, 법궤 등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을 만든 재료, 곧 놋이나 금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그곳에서 가지고 온 것들이었다. 그 외 재료들도 그러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재료들의 성분은 애굽에 있는 것들과 같은 것들이었다. 애굽에 있는 놋이나, 금의 성분과 성막에 있는 기구들을 만들 때에 사용한 놋이나, 금의 성분은 각기 다른 것이 아니고 똑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성막 안에 있는 놋이나, 금으로 만든 기구들은 성물이라고 했으나, 성막 밖에 있는 것들은 같은 성분인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들로 만든 기구들은 성물이라고 하지 않았다. 성물과 아닌 것의 구별은 성분에 의해 이뤄지지 않고 위치적인 것, 곧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분별이 되었다. 같은 것이라도 성막 안에 있으면 성물로 말해지고, 성막 밖에 있으면 성물로 말해지지 아니했다. 곧, 거룩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거룩한 자들이 되고 그 밖에 있으면 거룩하지 아니한 자들이 되는 것이다. 골로새서 1장 13, 14절에서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했다. 우리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그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했다. 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 밖에 있었는데 이제는 주님의 나라 안으로 옮겨져서 그 안에 있는 자들이 되었다. 할렐루야! 요한복음 14장 20절에서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했다.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거룩하신 주님 안에 있는 자들, 곧 성도들이 되었다. 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외적으로, 혹은 객관적으로 거룩한 자들이 되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에서는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했다. 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거룩함을 얻게 되었다. 할렐루야!
주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광스럽게도 되었다. 로마서 8장 30절에서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다. 주님께서 예정하신 자들을 부르사 의롭다 하시고, 또한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셨다고 했다. 이것은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것은 주님에 의해 이뤄진 것이며, 우리의 수고나 노력과는 상관 없이 우리 밖에서 객관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즉,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의 수고와 노력과는 상관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외적으로, 객관적으로 놀라운 일을 이루셨고, 우리는 이러한 주님 안으로 믿어 들어감으로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것들을 우리 또한 누리게 하셨다. 곧, 우리가 수고하고 애쓰지도 아니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제일 좋은 겉옷을 입게 되었고 그로 인해 외적으로, 객관적으로 놀라운 자들이 되었다. (물론, 이 제일 좋은 겉옷은 우리의 의가 되시는 주님 자신이다.) 이것은 외적인 것만 꾸밈으로 외식하는 사람이 되거나, 위선적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내적으로도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살진 송아지
사랑이 많으신 주님께서는 굶어 죽게 된 상황 속에서 변변치 않은 옷을 입고 돌아온 아들에게 먼저 겉옷을 입혔고 그 후에는 살진 그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고 먹게 했다. 우리에게는 겉옷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먹는 음식도 중요하다. 겉옷은 외적인 것이고 음식은 내적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만 입힌 것이 아니라 그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하며 먹게 했다. 이것은 생명을 유지하게 하고 자라게 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외적으로만 이루시는 분이 아니시고 내적으로도 이루시는 분이시다. 주님 안에서만 이루시는 것이 아니시고 우리 안에서도 이루신다. 이에는 우리도 함께 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가 도와야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내적인 것으로, 주관적인 것으로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주체가 되어 일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역사를 따라 행함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살진 송아지를 먹는 것은 그것을 섭취함으로 그 성분으로 조성되고, 힘을 얻고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적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외적으로 이루신 것을 내적으로, 객관적으로 이루신 것을 주관적으로 이루게 하신다. 순서를 보면 먼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객관적으로 이루신 것을 그의 역사를 따름으로 우리 안에서도 이뤄지게 하는 것이다. 곧, 외적인 것, 객관적인 것이 먼저 있고 그 후에 내적인 것, 주관적인 것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1장 6절에서는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바깥에서 이루신 일을 우리 안에서도 이루신다. 그것은 이론적인 가르침에 의해서만 아니라 실제로 생명이요, 양식인 주님 자신을 음식으로(요 6:35) 제공함으로 주님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고 마심으로 주님의 성분으로 조성되게 하고, 또 힘을 얻고 자라게 하신다. 주님의 성분으로 조성되고 자라는 것은 주님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자라는 것, 곧 주님과 같이 되는 것을 말한다. 로마서 6장 16∼18절에서는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순종의 종이 되므로 의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주님께서 가르친 것,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따름으로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고 했다. 우리의 의가 되시는 주님의 역사를 따름으로 우리 또한 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외적인 것 이거나,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내적이며, 주관적인 것으로 실제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 내용에서는 외적으로, 객관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말하지 않고, 내적으로, 주관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객관적으로, 외적으로 거룩하게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주관적으로, 내적으로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위치적으로뿐만 아니라 성분 적으로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로마서 6장 19∼22절에서는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했다. 로마서 6장 19절에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했는데, 이것은 아직 거룩하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거룩함에 이르라는 것이다. 로마서 6장 22절에서는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라고 하여 이미 거룩함에 이른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다른 번역에서는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대한성서공회간:표준새번역)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니고 거룩하게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진행형으로 말하고 있다. 이렇게 외적으로, 객관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이미 이뤄졌지만 내적으로, 주관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의롭게 되는 것이든, 거룩하게 되는 것이든,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든 다 현재 진행형이다. 이것은 내적으로, 주관적으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전서 1장 15절에서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했다. 이것도 아직까지 온전히 거룩하게 되지 아니했기 때문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것이다. 영광스럽게 되는데 있어서도 그러하다. 로마서 8장 17, 18절에서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도 우리가 얻게 될 영광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라고 하여 아직까지 영광스럽게 되지 아니한 것을 말하고 있다. 디모데후서 2장 10절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구원도, 영광도 온전히 얻지 못했기 때문에 사도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구원과 영광을 얻도록 하기 위해 모든 것을 참는다고 했다. 이렇게 내적으로, 주관적으로는 구원을 얻는 것도, 영광스럽게 되는 것도 아직 이뤄지지 아니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12절에서는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살진 송아지를 먹는 것은 내적인 것, 주관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음으로 자라나야 한다.
상기의 내용에서, 곧 아버지께로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두 가지 방면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제일 좋은 겉옷으로 상징되는 외적이고 객관적인 구원과 살진 송아지로 상징되는 내적이고 주관적인 구원이다. 우리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는 제일 좋은 겉옷으로서 외적이고 객관적인 구원을 상징하는 데 이것은 이미 이뤄졌다. 반면에 살진 송아지로 예표 되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내적이고 주관적인 구원으로서 지금도 이뤄지고 있다. 베드로전서 2장 1, 2절에서는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부정적인 것들(모든 악독들)은 버리고 긍정적인 것인 신령한 젖인 말씀을 먹고 자라감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데, 이는 이방면의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가르침이나 훈련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고 마심으로 계속해서 자라나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의 구원이 아니고 혼의 구원이다. 베드로전서 1장 8, 9절에서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했다. 이렇게 믿음의 결국은 혼의 구원이다. 이 구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반면에 우리 몸의 구원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이뤄진다. 그것은 몸이 신령한 몸,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썩지도 아니하는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우리의 영의 구원은 이미 이뤄졌고 몸의 구원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이뤄질 것이다. 그러나 혼의 구원은 지금 이뤄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의 구원을 신경 써야 하고, 또 이를 위해 모든 부정적인 죄악들을 버리고 대신에 생명의 양식인 주님과 그의 말씀을 계속 먹음으로 주님과 같이 되는 데까지 자라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