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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태어나지 않은 마음의 본성을 탐구하라.
Primodial is perennial. Ancient & fundamental is ever fresh& new.
원초적인 것은 영원하다. 오래되고 근본적인 것은 늘 지금 여기에 새롭다.
神光不昧, 萬古徽猷. 신광불매, 만고휘유.
마음 빛은 어두워지지 않아, 시간이 없이 길이 빛난다.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1894~1963)라는 영국의 비평가이자 소설가가 ‘영원의 철학(Perennial Philosophy)을 말했다.
이는 모든 종교의 공통 핵심을 의미하며 세계 대부분의 종교적 전통들이 공유하고 있는 세계관, 인간관, 윤리관을 의미한다.
물질, 생명, 마음의 세계의 실체를 이루는 신적 현실을 인식하는 형이상학,
신적 실재에 유사한 것, 혹은 동일한 무엇인가를 인간 속에 찾아내는 심리학,
모든 존재에 초월하는 것과 동시에 내재하고 있는 근거를 아는 것을 궁극 목적으로 하는 윤리학을 통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철학적 관점이다. 이것이 미래의 문화를 이끌어 갈 영적인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동서양의 종교와 심리학을 통합시킨 사상가 켄 윌버(Ken Wilber, 1949~)는 그것을 위대한 영적 스승들이 선택한 공통적인 세계관이라 일컬은 바 있다. 켄 윌버는 참선을 하는 티베트불교 수행자이다. 그는 영원의 철학을 현대적 해석한다면 통합적 영성 Integral Spirituality이며 그것은 곧 불교이지 않겠느냐고 음으로 양으로 역설한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강의는 불교의 핵심이 되는 마음의 본성을 이야기한다. 모든 불교 전통에서 마음에 대해 가르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선불교와 티베트 불교 가운데 족첸과 마하무드라를 이야기할 것이다.
결과를 욕망하지 말라-히말라야의 성자를 찾아서
전통적으로 인도인은 인생 4주기를 이야기한다.
범행기(20세까지 학업을 연마한다), 가주기(20~50세까지, 가업을 승계하고 가정을 일으킨다), 임서기(50~60세까지, 영적인 스승을 찾아 세상과 숲을 오가며 가르침을 받는다), 유행기(60세 이후, 세속을 포기하고 출가하여 유행한다).
여기에 유행기에 든 한 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스승을 찾아서 인도 전역을 두루 돌아다녔다. 한 스승을 찾아가 그의 가르침을 듣고 따르며 함께 지내다가 일주일, 혹은 한 달, 혹은 일 년이 지나면, 스승의 모순됨과 허물이 눈에 띄면서 그를 떠난다. 한 스승을 떠나 또 다른 스승을 만났고 또 떠나고.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자기 자신도 백발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다짐을 한다. “가자, 히말라야 설산으로, 그곳엔 반드시 위대한 스승이 나를 기다리고 계실 거야.”
그래서 북인도 히말라야 설산을 찾아 계곡을 헤매면서 위대한 스승이 어디 계시는지 탐문을 계속했다. 어느 스승이 높은 봉우리 어디쯤 어느 동굴에 계신다고 들으면 거기를 향해 죽을힘을 다해 가본다. 그러나 스승은 떠났고 이미 거기에 없었다. 또 다른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스승이 거기를 떠난 지 벌써 몇 개월이 지난 다음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제 몸을 가누기가 힘들 만큼 늙었다. 하루는 높은 산 중턱의 한 동굴로 기어들었다. 너무 힘들고 지쳐서 벌렁 드러누웠다. “아, 이제는 그만두자. 찾는 짓을 그만두자.” 그랬더니 이상스럽게도 이제까지는 체험해보지 못한 희열과 평화가 온몸에 가득 차올랐다. 그때 동굴 밖에서 스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아, 바로 그렇다,”
깨달음이나 영적으로 고양된 상태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 추구하지 말라. 깨달음이란 결과를 욕망하면서 수행을 시작하지 말라. 그것은 수행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욕망 추구이다. 돈과 명예를 추구하다가 사회에서 낙오되면 도를 구하겠다고 산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들이 도를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또 다른 욕망을 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은다. 이번에 더 고상하고 영적인 명분까지 붙여서 말이다. 이런 짓을 ’영적인 물질주의(spiritual materialism)’라고 쵸감 트룽파(Chogyam Trungpa, 1940~1987., 티베트 스승, 미국에서 포교하여 붐을 일으켰다)가 비판했다.
욕망 추구를 단념하라. 찾으면 잃어버릴 것이요, 구하면 얻지 못할 것이다.
찾음을 멈추고 지금 여기에 쉬어라. 그러면 알리라. 시작하기 전 거기가 바로 돌아올 곳이었다는 것을. 자기 발밑이 바로 시작되는 자리요, 끝나는 자리라는 것을. 애초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기나긴 구도 행각이 없었을 것을. 그러나 돌아오기 위해선 반드시 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수행자의 파라독스다. 그렇다! 인생이란 파라독스다. 집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서는 집을 떠나 방랑해봐야 하고, 건강의 귀중함을 알기 위해서는 건강을 잃어봐야 한다. 지금 바로 이 자리가 불생불멸이며 무시무종이건만, 본래 완전함을 알기 위해선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면서 방황을 해봐야 한다. 오랜 방황 끝에 돌아와야만 비로소 ‘지금 여기’의 귀중함을 깨닫는다.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단호하게 떠났다, 장렬하게 죽어서 돌아와야 한다. 왜 장렬하게 죽는다 하는가? 진리에 몸을 바치겠다는 구도심, 진리를 향해 불타오르는 열정이 에고-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옛날의 자아를 완전히 태워버리고서야 진리 쪽으로 전환된 완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살 수 있기에 그렇다. 묵은 자아가 죽으면 새로운 생명이 약동하게 된다.
태어나지 않은 마음의 본성이란?
本不生(본불생, Originally Unborn), 不生不滅(Unborn & Undying), 무생법인(無生法忍):
보통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이것을 염념생멸 혹은 생멸심이라 한다. 생각에 생각이 이어지면서 그칠 사이가 없다는 말이다. 생멸하는 마음의 현상이다. 이것을 그냥 내버려 두면 맑은 창틀에 먼지가 낀 것 같아 불투명해져서 사물이나 풍경이 그대로 비치지 않아 흐릿하게 보인다. 그처럼 우리 마음에 생각이 제멋대로 일어났다 꺼졌다 하면 번거롭고 주의가 산만해져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능률이 오르지 않고,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온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 건성으로 보이게 된다. 한마디로 생각에 휘둘리면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살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생각의 흐름을 끊어서 그 틈새의 여백을 찾을 수 있을까? 처음엔 생각의 흐름이 끝없이 이어지는 일직선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생각의 흐름을 주의 깊게 지속적으로 관찰하면 생각과 생각 사이에 틈이 있음을 보게 된다. 개미가 줄지어 이동할 때 멀리서 보면 개미의 행렬이 일직선으로 보이다가도, 아주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개미와 개미 사이에 틈이 있음을 알게 된다. 생각의 흐름도 그와 같다. 앞생각이 지나가고 곧바로 뒷생각이 뒤따라 붙지만, 깜짝 놀라거나 아니면 어떤 충격을 받거나 하면, 앞생각이 문득 툭 끊어지면서 순간의 공백이 느껴진다. 그리고는 이내 뒷생각이 따라붙으면서, 그 공백이 메워져 버린다. 그런데 여기서 의도를 가지고 예민한 주시를 한다면 앞생각과 뒷생각 사이의 벌어진 틈을 포착할 수 있다. 그 틈새에 주의를 기울이라. 그렇다! 거기가 바로 우리 마음의 본래 상태이다. 짙은 구름이 하늘에 꽉 덮여 있다가 문득 구름이 찢어지면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이듯, 생각이 안개처럼 구름처럼 마음을 덮고 있다가 홀연히 생각이 멈추어지는 순간, 문득 텅 빈-맑고 고요한 마음의 공간-이 확 드러난다. 거기엔 그 순간 생각이 붙어 있질 않다. 그러므로 텅 빔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텅 빈 마음의 공간, 마치 허공처럼 느껴지는 그 상태를 무생(無生)이라 한다. 그것은 본디 그렇게 자연스럽게 늘 그렇게 있어 온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본래 성질은 생겨나지 않은 것(本不生, 無生)이라 한다. 그 자연스런 마음의 본성은 생겨난 것이 아니기에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한다. 마음의 본래 상태가 불생불멸이라는 진리를 크게 인정하고 수용하는 사람을 무생법인을 얻었다고 말한다.
결론은 생각이 끊어지면 생각이 없는 텅 빈 허공과 같은 본래 상태가 드러난다. 어떻게 하면 생각의 흐름을 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생각이 끊어지는 경험을 할 것인가? 이것이 관건이다.
파트룰 린포체(Patrul Rinpoche, 1808~1887)가 제자에게 마음을 전하다.
위대한 족첸 수행의 지도자 뇨술 룽톡(Nyoshul Lungtok,1829~1901)은 파트룰 린포체 스승에서 수년간 수행했으며, 하루도 스승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족첸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어느 고요한 밤 스승이 그를 데리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스승은 너럭바위 위에 벌렁 드러누우면서, 뇨술도 옆에 눕게 하고 물었다
그대는 마음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고 했지?
그렇다고 하자 스승이 말했다.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이 보이는가?
녜, 보입니다.
마을의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가?
녜, 들립니다.
그러자 스승은 말했다.
이것이 그것이다! 단지 이것뿐이다.
이에 뇨술은 그동안의 모호함을 깨치고 분명하게 알았다.
우리도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고 옆집에 개 짖는 소리를 듣는데 왜 마음의 본성을 알지 못하는가? 그분 스승들과 내가 보고 듣는 게 똑같은데 우리는 어찌하여 마음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가? 여기에서 진리를 알지 못함에 가슴이 후벼파지는 고통을 느끼고 진리를 향한 열정으로 몸이 부들부들 떨려야 비로소 입문하리라.
명상 가이드
똑바로 앉아서 횡경막을 펴고, 가슴을 세우고, 어깨의 긴장을 풀고, 배는 자연스레 두라. 얼굴의 모든 부위를 이완하되, 특히 눈 주위를 이완하라. 당신의 의식을 눈앞의 공간에 두고, 초점을 맞추지 말고 코의 선을 따라 시선의 방향을 돌리라. 시각의 의식을 티베트인들이 ‘여백(khata카타, 원초적 청정)’이라 부르는 것에 편하게 머무르게 하라. 1~2분 동안 주의를 내면으로 향하게 하라. 생각, 추억, 상상 또는 다른 어떤 정신적 현상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과 함께 있고 그것을 의식하라. 알아차림 없이 그것이 떠나지 않게 하라. 당신은 그것을 간섭하지 않고 즉시 알아챈다. 마음에서 무엇이 일어나든, 상상이나 기억으로 빠지지 말고 정신적 사건들이 일어나는 마음의 입구 지금현재에 머물라. 1~2분 동안 마음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놓아두고 거기에 휴식하라.
파드마삼바바의 구전(口傳, oral transmission)-1
꾸준히 응시를 유지하는 동안 어떤 대상에도 집중하지 말고 의식을 허공의 영역에 자유롭게 풀어 놓되, 그 의식을 흔들지 말고, 꾸준하고 명확하고 확 드러내어 머물라. 안정성이 깊어질 때 안정된 그 의식을 탐구하라. 그다음 휴식하고 쉬어라. 다시 의식을 꾸준히 허공의 영역에 두고, 굳건히 그 순간의 의식을 들여다보라. 그 마음의 본성은 무엇이냐? 마음이 마음 자체를 관찰하게 하라. 그것은 명확하고 안정된 그 무엇인가?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하나의 텅 빔인가? 거기에 인식할 무엇이 있는가? 다시 바라보고 나에게 그대의 경험을 말해달라.
덧붙이는 말: 눈을 뜨되 눈에 힘을 주지 말고 시선을 상방 15도 정도로 살짝 올려다보라. 주의를 어느 한 점이나 한 장소에 국한하여 집중하지 말고 그냥 전방 허공을 물끄러미 보라. 그러니까 단지 눈을 뜨고는 있되 특별히 눈앞의 무엇을 보는 게 아니라, 눈의 뒤쪽을 본다는 느낌으로 보라. 이것이 마음이 마음을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태어나지 않은 마음(無生心, 즉 無心)에 쉰다는 것이다.
주의력을 쥐었다 폈다 하기와 마음의 본성을 알아차리기:
attention과 metta-attention: attention은 주의력을 모으기, 집중이며, metta-attention은 주의를 기울이는 자가 누구인지 주의를 기울이는 것. 주의하는 놈이 누구인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①마음 다잡기: 안정적인 주의력을 계발하기 위해 호흡 같은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훈련. 집중훈련이다.
②풀어놓기: 마음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놓아두는 것. 주의를 어느 한 대상에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금 여기 이대로 존재하고 있음만 알아차리는 것. 지금 유행하는 ‘멍때리기’와 조금 비슷한 점이 있다.
③태어나지 않은 마음을 탐구하기: 관찰자를 관찰하기. 보는 놈은 누구인가? 알 줄 아는 놈은 누구인가? 선종에서 말하는 회광반조이다. 지금 이 글을 보는 놈은 누구인가? 주의를 안으로 돌려 ‘보는 그 마음’을 보라. 보는 놈과 보이는 것의 경계가 사라져 흔적이 없어진 ‘텅 빔’만이 감지되리라. 이 ‘텅 빔’은 그냥 허공이 아니라 ‘앎’이 있는 공성(空性)이다. 텅 비고 고요한 지혜라 해서 공적영지(空寂靈智)라 한다. 이것이 궁극의 위빠사나이다.
파드마삼바바의 구전-2
마음을 꾸준히 당신 앞의 허공에 두고 거기에 현존하게 하라. 잘 살펴보라. 당신이 지금 여기에 둔 이 마음은 무엇인가? 이 마음을 두는 자와 놓이는 마음이 하나인지 둘인지 알아보라. 하나밖에 없다면 그 하나는 마음인가, 아닌가? 살펴보라. 소위 마음의 실재는 무엇인가? 숙고하고 있는 그 마음을 관찰해보라. 그 마음은 무엇과 같은가? 바로 그 의식을 관찰하고 그것을 탐구하라. 꾸준히 명상하는 자의 의식을 살펴보고 그것을 들여다보라. 관찰하라. 소위 이 마음은 실재로 존재하는 그 무엇인가? 마음이 아무것도 없는 하나의 텅 빔인지 아닌지 관찰하라.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이 명상하는 법을 알 수 있겠는가? 당신이 그것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해 보아야 무슨 소용인가? 어쨌든 그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면 미움이나 짜증 같은 걸 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누군가 있지 않은가? 꾸준히 바로 그것을 탐구하라.
덧붙이는 말: 마음이란 생각과 감정, 기분 같은 것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 바탕이다. 혹은 이런 비유가 더 적당할지 모른다. 생각, 감정, 기분은 물방울이라면 마음은 바다라고. 바다에 물거품이 일어났다 사라지듯 생각, 감정, 기분은 마음(이란 바다)에 일어났다 사라진다. 그러니 생각, 감정, 기분은 제멋대로 왔다 갔다 하게 내버려 두고 허공 같은 마음, 바다 같은 마음에 머물러 쉬어라. 그런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어떤 생각의 건더기나 장애물이 없기에 ‘텅 비었다’라고 한다. 텅 비었다고 해도 아무것도 없다든지, 아무 일도 못 하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상태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생각 없는 곳에서 생각이 일어나기도 하고 생각이 소멸하기도 한다. 생각이 끊어진 곳에서 생각과 감정, 기분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보라. 생각이 일어나는 그곳을 보라. 거기가 바로 본불생의 마음이 아닌가?
우리 존재의 진실한 상태:
세상에 드러난 나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빙산 아래 물속에 숨겨져 아직 드러나지 않은 채 거대한 신비로 남아있는 나 아닌 나, 나 없는 나를 보라.
나를 함부로 정의하지 말라. 누구도 내게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나는 세상에서 나를 불러주는 그 모든 이름을 사양하고 거부한다.
나는 정의할 수 없는 고귀하고 신비한 그 무엇이다. 누가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가?
나를 멋대로 아는 척하지 말라. 너희들이 나에 대해 아는 것으로 나를 재단하지 말라.
나 자신조차 나에게 영원히 미지와 신비로 남아있는데, 어찌 너희들이 나를 알 수 있겠느냐?
나는 영원히 미지와 신비로 남을 것이다. 나는 나를 넘어있으면서도 동시에 지금의 나이다.
나는 나가 아닌 채 나이다. 나는 나가 아니므로 수많은 나가 될 수 있고, 수많은 나로 살 수 있기에 나는 항상 나가 아니다. 나라 하는 즉시 나는 벌써 그런 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나로부터 자유이다. 나는 나를 떠나있다.
나는 세상의 말로 정의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리하여 내가 100년 동안 세상에 거주했더라도 아침나절의 이슬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나는 흔적이 없고, 붙잡을 수 없으며, 형용할 수 없다.
나는 이미 여기에 없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없는 채 있고, 있는 채로 없다.
어젯밤의 나는 벌써 죽었다. 그리하여 오늘 아침 나는 새로 태어난다.
이제까지 습관에 끌려다니던 나는 죽었다. 예전처럼 세상에 끌려가는 나는 죽었다.
나는 과거의 나에게 죽음을 선포한다. 나는 새로 태어나리라.
나는 이제부터 새로운 나를 삶으로써 새로운 경험을 하리라.
명상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지금 여기에 존재하라.
이미 벌써 죽은 것처럼 지금 여기에 존재하라.
지금 죽어도 좋다는 자세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라.
지금 여기 이대로 하나도 건드리지 말고, 하나도 바꾸지 아니한 채,
그냥 이대로가 전부인 양 편히 쉬어라.
지금 여기 이미 잘 살아있음에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지금 이대로 살아있음에 만족하라.
지금 여기 이미 만물과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으니 이미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게 아닌가?
나 지금 여기 이대로 완전하며 대-안락이며,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
오, 함이 없는 위대한 성취여, 이루어졌도다!
첫댓글 이것이 그것이다!
마 하 반 야 바 라 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