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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왕을 만든 사람들, 그들을 읽는 열한 가지 코드) 왕과 나
저자: 이덕일, 1961년 아산 출생, 숭실대 사학과 및 대학원 석.박사, (현)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저서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사도세자의 고백>, <누가 왕을 죽였는가>,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유물로 보는 한국역사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정도전과 그의 시대> 등
*KBS역사 사극 <정도전>을 보면서 왕과 참모의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도전은 입헌군주제를 꿈꾸는데 반하여 이방원(태종)은 전제왕권을 생각하였고, 결국 충돌로 정도전이 죽음을 당하였지요. 반면 세종과 황희 정승 같은 경우는 서로의 역할 분담이 잘 되어 있었구요. 지금의 대통령중심제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대통령은 권력을 하부 이양하는데 인색하구요. 이 책은 2인자들의 삶의 궤적을 지나가며 왕과의 관계설정이 어떠하였는지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 건국에 앞장섰던 소서노와 고려 천추태후의 여성의 힘은 잘 몰랐던 사실이구요.
* 들어가는 말 (세상을 움직이는 본질을 꿰뚫은 사람들, 킹메이커): 중국사는 일종의 참모사다. 그런데 이런 참모사의 주역들은 보통 참모들이 아니었다. 항우조차도 한때 범증을 아보로 높인 것처럼 '스승 사師' 자가 붙는 왕사王師이고 '나라 국國' 자가 붙는 국사國師들이다.
그래서 중국사는 왕사사 또는 국사사다.
한국사와 중국사의 다른 점 중 하나는 참모사와 군주사다. 중국사는 참모사인데 비해 한국사는 장사長史, 즉 군주사이다. 장사는 수직으로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급전 낙하하기 일쑤다.
그 원인은 여럿있겠지만 이런 인물들에게는 '스승 사' 자로 높이는 참모가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長 혼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행한다. 그러니 자신의 날개가 밀랍으로 붙인 깃털인지도 모르고 태양 가까이 날다가 밀랍이 녹아 떨어져 죽는 이카로스의 사례가 반복되는 것이다. 그럼 왜 한국사의 장들은 참모들을 활용하지 못할까? 먼저 자신이 최고라는 자만심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참모들이 자신의 지위를 빼앗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기 때문이다.
*차례
1. (어젠다) 비주류, 주류사회를 바꾸다 김유신: 계급의 굴레에서 좌절 대신 품은 야망, 김유신의 냉혹한 승부 김춘추의 대오각성, 삽혈동맹과 삼국통일의 결의, 세 번의 시도 끝에 청병에 성공하다, 헌신과 희생으로 신라를 변화시키다
2. (헌신) 충심으로 고려를 세우다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 홍유: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난 왕건, 진골 카르텔이 가져온 천년왕국의 추락, 군웅할거의 시대, 왕건을 왕으로 추대한 네 명의 공신들, 겸손과 희생으로 쌓은 공로, 왕을 대신해 목숨까지 바치다
3. (시야) 내부의 지분 대신 더 넓은 곳을 바라보다 소서노: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고대사회, 주몽을 도와 고구려 개창의 주역이 되다, 내부 파쟁 대신 백제 건국을 선택하다, 백제를 지탱한 소서노의 힘
4. (사상) 생각의 힘으로 세상을 뒤집다 정도전: 소신 있게 선택한 유배길, 부곡에서 깨우친 혁명 사상, 붕괴된 고려의 지배 시스템, 혁명 사상과 혁명 무력의 결합, 토지제도의 개혁, 새 왕조의 개창에 정당성을 부여한 과전법, 토지문제를 해결할 마지막 기회 요동정벌
5. (시운) 평생 할 말 다 하면서 고종명하다 황희: 바른 말 때문에 거듭 파직되다, 40대에 비로소 출세가도를 달리다, 인사권을 둘러싼 공신들과의 갈등, 세자 폐위를 반대하다, 세종에 의해 다시 천거되다, 작은 과실보다 큰 역량을 인정받다, 의정부서사제의 부활과 세종의 신뢰
6. (정책) 보통의 군주 아래 삶의 변화를 이끌다 김육: 네 번의 상소를 올리다, 공납과 방납의 폐단을 없을 대안, 당론보다 백성의 안정이 우선이다, 대동법 반대론자들의 거센 항의, 대동법을 두고 두 파로 나뉘다, 경제활성화를 위한 화폐 유통의 필요성, 대동법이 가져온 삶의 변화
7. (기상) 전통을 지키려다 쿠데타를 맞다 천추태후: 왕건식 삼한통합이 남긴 폐해, 천하의 악녀설은 모함이었다, 유교식 정치이념을 수용한 성종과의 갈등, 전통 풍습마저 바꾼 사대주의 정책, 천추태후의 섭정을 둘러싼 수수께끼, 반대파의 쿠데타에 쫓기다,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최후
8. (악역) 나라를 위해 희생할 운명을 받아들이다 강홍립: 광해군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르다, 명청 교체기의 혼란에 흔들리는 조선, 문관 출신으로 조선군을 이끌다, 사면초가에 빠진 조선군, 후금의 복병을 만나 전멸하다, 후금의 화의 제의를 받고 항복하다, 외교정책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다
9. (실력) 성실과 기술로 한양도성을 쌓다 박자청: 토목건축의 대가로 태종의 신임을 받다, 우직한 충성과 성실함의 소유자, 조선의 마스터플랜을 현실로 만들다, 창의적인 방법으로 임무를 수행하다, 미천한 신분을 뛰어넘게 한 기술력
10. (맹목) 목적 잃은 권력을 탐하다 인수대비: 명나라에 누이를 팔아 명예를 산 한확, 황친의 지위를 탐한 대가, 정략결혼을 이용해 권력을 장악하다, 세자빈 한씨의 위기, 예종의 개혁정치 단행, 아들을 통해 꿈을 이루다, 권력의 시각으로 쓴 <내훈>의 이면
11. (역린) 참모는 참모일 뿐 선을 넘지 않는다 홍국영: 세손의 대리청정을 허하다, 정조에게 정치적 미래를 걸다, 정조와 홍국영의 동상이몽, 왕의 신임으로 권력을 장악하다, 후사를 둘러싼 계략과 실패, 역린을 건드린 야망 화를 부르다, 정조의 반격 홍국영의 퇴각
- 김유신은 단순한 킹메이커가 아니라 나라까지 바꾸고 역사까지 바꾼 인물이었다. 김유신의 출신 문제는 아직도 수수께끼다. 김유신은 자신의 실력으로 임금을 만드는 길을 택했다.
그래서 조부 진지왕이 폐위되어 하자가 있는 왕족 김춘추를 역전의 카드로 선택하였다.
- 국제적인 제국 당나라는 신분 보다는 능력을 중시했다. 그런 당나라를 추종하던 신라는 달랐다. 경주 진골에게 골품제와 남성 우위는 신앙이었다. 이들은 외부의 공세에는 약하지만 내부 기득권에는 강했다.
- 후삼국의 주인공은 궁예와 견훤이지 왕건은 아니었다. 그는 주인공은 커녕 궁예의 휘하 장수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왕건이 최후의 승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차이는 부하 장수들의 자발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데 있다. 그것도 목숨을 걸고 추대한 4명의 부하 장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귀족 출신도 아니고 직급이 높은 장수들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목숨을 걸고 왕건을 추대하자 후삼국의 승패가 결정났다. 그렇게 한순간의 거사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고 그들은 다시 음지로 돌아가 이름조차 희미해졌다.
- 신라는 삼국통일 후 사회 통합에 대한 전망을 마련하지 않았다. 고구려.백제 지역의 유민들을 화학적으로 통합해 신라인으로 만드는 대신 지배 대상으로만 보았다. 확장된 영토와 늘어난 인구에 걸맞은 통치이념과 사회체제를 수립해야 했지만 귀족들은 진골 카르텔에 취해서 이런 사회적 요구를 외면했다.
- 신라의 진골 카르텔은 자신들의 향락에 취해서 백성들의 곤궁에 둔갑했다. 양극화 현상이 팽배할 때 그 상부에 속한 소수는 더욱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체제의 위기를 맞는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는데 신라도 그러했다.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환락에 젖어 있던 신라사회는 한 번 균열이 생기자 급속도로 무너졌다. 백성들은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후백제와 후고구려에 몰려들었다.
- 한국사회는 전통적으로 여성들의 입김이 강했다. 유학이 지배 이념이 되면서 여성들의 지위는 낮아지지만 인조반정 이전까지만 해도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고대사회는 여성들의 역할이 더욱 강해서 정치 참여는 물론이고 나라도 건국할 수 있었다. 소서노는 백제 시조 온조왕의 어머니로 공동창업자이었지만 고구려 시조 주몽의 부인으로 고구려의 공동창업자이기도 했다. 연상의 과부 소서노는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망명한 주몽이라는 젊은 망명객을 선택하여 만주 전역의 정세를 바꾸어 놓았다. 소서노가 없었더라면 21세의 망명객이 토착세력의 텃세를 극복하고 고구려를 극복하기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 천하를 삼킬 듯한 황하의 거대한 물줄기도 처음에는 작은 한 방울의 물에서 시작하듯이, 역사에서도 사상가 한 명의 등장이 천하의 운명을 바꾼다. 역사를 바꾸는 사상가들은 스스로 낮은 곳에 처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가 낮은 자들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혁명의 씨앗이 잉태되고, 그 사상을 실천에 옮길 때 혁명의 꽃이 핀다. 정도전의 인생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근본적인 메시지는 한 사회가 내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 비등점으로 치달으면 체제 자체가 무너진다는 교훈일 것이다.
- 역사적 격동기에 제 한 몸을 건사하기는 어렵다. 그것도 고위직을 도맡아 일하면서 버티기는 더욱 어렵다. 거기에 평생 할 말을 다 하면서 고종명考終命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이는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능력은 기본이고, 군주를 잘 만나야 한다는 시운도 따라줘야 한다. 황희는 그런 점에서 행운아이다. 군주 세종과 신하 황희는 서로에 대한 무한한 신뢰 속에서 서로의 시각으로 국정을 바라보고 운영했다. 세종이 황희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황희의 일상업무를 덜어준 때는 황희가 만82세 때였고 만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황희는 아랫사람들에게는 늘 관대하게 대하였지만 김종서에게만은 유달리 엄격하게 대하였다. 정승 황희가 판서 김종서를 여러 차례 꾸짖자 정승 맹사성이 물었다.
"김종서는 당대의 명경名卿인데 대감은 어찌 그렇게도 허물을 잡으시오?"
"이는 내가 종서를 옥玉으로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종서가 훗날 우리 자리에 있게 될 때 일을 신중하게 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맹사성이 마음으로 복종했다고 한다.
황희가 아랫 사람들에게 늘 관대하게 대했던 것은 그가 서출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항상 권력자의 자리에 있었지만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으며, 스스로를 낮추면서 자신을 높였고, 자신이 섬기는 군주도 높아지게 만든 인물이었다.
- 군주를 보좌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좋은 정책으로 보좌하는 것은 그 어떤 보좌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인조 때부터 효종 때까지 벼슬에 있었던 김육이 그런 인물로, 김육은 공납을 쌀로 통일해서 납부받자는 대동법 시행에 정치 인생을 걸었다.
- 왕건의 신라포용정책과 호족융합정책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는 큰 효과를 발휘했지만 왕건 사후 고려가 나아갈 방향을 잡는데는 큰 장애요소가 되었다. 왕건은 삼한통합 후 평양을 국도로 삼아 고구려의 옛 강역을 수복하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으나, 경주세력과 유학세력들은 현실 안주를 주장했다. 이들은 고려를 황제국에서 제후국으로 격하시키고 국내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다. <고려사>가 천추태후를 시종 부정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이런 노선 투쟁에서 천추태후가 유학세력들과 다른 노선을 택했기 때문이다.
- 명나라에서 후금의 공격을 막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을 때 광해군은 응할 생각이 없었으나 모든 신하들이 당파에 관계없이 이구동성으로 파병을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강홍립을 도원수로 1만 명 규모의 군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군량미를 제대로 보내지 않아
굶주린 상태에서 후금군의 포위상태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던 중, 후금의 강화요청에 응하였고 국왕 누르하치를 만나 항복하였다.
즉 인조 반정 이후 서인들이 퍼트린 "강홍립이 광해군의 밀서를 받고 일부러 패전하고 항복했다"는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명나라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하면서 쿠데타를 일으킨 서인정권은 후금과 단절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는 인조 5년 후금군이 조선을 침략하는 정묘호란으로 나타났다. 후금군은 황해도 평산까지 남하하고 더 이상 내려오지는 않았는데 그 배후에는 강홍립이 후금에 화의를 종용하였기 때문으로, 두 나라가 형제의 의를 맺는 화약을 맺은 후 강홍립은 오랜 억류생활을 끝내고 석방되었으며 고국에 정착하자마자 그해 68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 조선 초기의 역동성은 사대부가 아닌 경우에도 전문 지식만으로 고위직까지 진출할 수 있었는데 조선 수도 서울의 마스터플랜을 짠 정도전을 도와 개국 초 서울의 거의 모든 건축물을 지어 1품의 지위까지 올랐던 박자청은 사대부에게 굽히지 않았던 대표적인 실무형 참모였다.
- 인수대비는 어려서부터 권력을 제일가치로 삼는 집안에서 자라나 평생 권력을 추구하였고, 남편인 의경세자가 젊은 나이에 죽으면서 왕비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둘째 아들을 왕(성종)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역전극을 이뤄냈다. 하지만 권력의 잣대로 세상과 사람을 평가한 결과는 비극적이었다. 권력의 화신에게 되돌아 온 것은 손자(연산군)의 증오였다.
- 군주와 참모의 관계처럼 어려운 것도 없다. 참모가 아무리 왕을 만들었어도 참모는 참모일 뿐이다. 그런데 어떤 참모는 자신의 역할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군신관계를 뛰어넘다가 대부분 제거된다. 정조와 홍국영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역린을 건드린 홍국영은 강릉으로 쫓겨나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