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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욥기-08 젊은 엘리후의 분노1(욥기 32장 1-5절)
성경 말씀은 욥기 32장 1절에서 5절까지 봉독합니다.
[욥기 32장]
1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2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3 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4 엘리후가 그들의 나이 자기보다 많으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5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를 발하니라
지난 시간까지 우리가 욥기 31장까지 하면, 욥의 큰 주장들은 마무리가 되었죠?
친구들은 진작 말이 그쳤고, 욥이 아주 강경하게 자기 의를 변백하는 그런 말씀을 지난 시간에 우리가 봤습니다.
사실 이야기가 다 끝난 것 같았는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고 나타난거죠.
이 사람은 젊은 사람인데, 여기 엘리후라는 사람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제가 찾아봐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욥보다는 나이가 많이 젊었을 것이라고 봐요.
욥의 아들쯤 된다든지 욥의 동생쯤 된다든지 연배가 그 정도 같아요.
그래서 위의 세 사람을 노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겠고, 자기는 연소하다 하는데, 나이를 밝히면 좋을건데, 몇살이라고..
그런데 여기 욥도 몇살인지 알 수가 없고, 단 여기 엘리바스만 욥의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다고 한 것을 볼 때, 엘리바스가 제일 나이가 많은 것 같고..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욥의 아버지 뻘 되는 사람, 욥의 형님 뻘 되는 사람, 욥의 나이와 비슷한 사람, 욥의 아들 뻘이나 동생 뻘 되는 사람.
이렇게 일부러 아마도 성경으로 기록된 만한 그런 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는 하나님의 준비가 있었겠죠.
그리고 늦게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바벨론 포로가서 기록된 걸로, 가장 늦게 잡는게 바벨론 포로기간으로 봅니다.
그러면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의 기록이란 말이죠.
2500년 그러면 우리는 그저 호랑이 담배도 안 피던 시절이예요. 까막득한 그런 때인데, 제가 놀라워하는 것은 그렇게 까마득한 옛날에 토론 문학이 발달되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욥기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식으로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얼른 이성으로 납득하지 못할 일을 두고 토론이 진행된 거예요.
그것도 어떤 토론 문학도 이것보다 일찌기 쓴 토론 문학이 있었다고는 보지 못해요.
그만큼 대단한 토론인데, 욥도 몇번이나 걸쳐서 얼마든지 자기 변백을 할 수 있게 했고, 다른 친구들도 엘리바스 소발 빌닷 할 것 없이 몇번이나 돌아가면서 자기가 가진 모든 지혜와 지식을 다 동원해서 토론 할 수 있는 그런 장이 마련되었다는 것만 해도 굉장하지 않습니까? 2500년 전인데..
여러분 우리 한국 역사에 방송도 80년 역사를 넘어섰습니다만 토론이라는게 심야토론이라든지 이런 토론이 나온게 채 10년이 안 될 거예요.
노태우 이후에 토론이 나왔을 겁니다. 10년 넘나요?
노태우 다음에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하니까 15년? 그래도 세월이 갔네요. 어떻든 노태우 이전에는 토론이 없었습니다.
토론은 무슨.. 토론하다가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죽게 맞고 한대 더 맞고 했는데, 전혀 그런 것이 없었는데, 어떻든 심야토론 한 것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2500년 전에 이런 격렬한 토론을 했다는 거예요.
그 사실만 가지고도 굉장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욥기 32장]
1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2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3 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4 엘리후가 그들의 나이 자기보다 많으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5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를 발하니라
여기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욥을 볼 때는, 욥은 끝까지 스스로 세 사람이 공격해도 3:1로 해도 여전히 자기 의를 굽힐 수 없다. 나는 내가 의롭다. 웃기지 마라. 너희의 말을 내가 수용할 수 없어 하고 끝까지 자기가 의롭다고 하는 것이고,
또 욥의 친구들 노인들은 욥이 무슨 죄를 범했는지도 대지도 못하면서 욥을 무대뽀로 정죄한다는 거야.
그래서 엘리후는 두 대상, 다시 말해 욥을 보고도 화를 내고 노를 발하고, 노인들을 보고도 노를 발하는 거예요..
그것도 참 대단하죠?
여러분 우리 유교사회에서는 젊은 사람이 노인들에게 노를 발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그런 일이 아예 없죠?
그런데 여기서는 젊은 사람이 노인들 앞에서 노를 발하고 자기 소신을 말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었다니까 이것도 2500년 전에..
여러분 그 내용은 놔두고 이 사실만 가지고지 욥기는 대단한 책이죠?
오늘 우리 교회에서는 이게 잘 안 돼요. 아직도..
예를 들어서 당회하는데 젊은 청년들이 와서 노를 발하면서 토론을 해 봅시다. 맞장을 뜹시다 하고 나와 봐. 뭬야?
그래서 그런 측면에서도 본다할지라도 욥기라는 책의 가치라는 것은 무한한 가치를 가지는 거예요.
심지어 오늘 일반교회에서는 질문도 못합니다. 목사님께 뭘 질문해봐. ‘뭘 따지기는 따져? 믿어 그냥..’ 따지는 걸로..
질문을 해도 이럴 정도인데, 2500년 전에 이렇게 격렬한 토론이 가능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어제 그제도 엘리후까지 이번주에 끝나잖아요. 수요일까지 하면 욥기가 끝날텐데..
그런 점이 새로운 거예요.
아직 우리 기독교 방송 CTS에도 토론이 없습니다.
무조건 선포만 있을 뿐이고, 토론도 없고 반론도 없고 질문도 안 돼.
여러분 지난번에 10년 전에 극동방송에 가니까 성경 상담이라고 제가 처음에 했어요.
아마 그것도 한반도 역사에 성경 상담 그것도 희귀한 일이죠.
성도들이 성경을 읽다가 모르는 것이 나오면 물어야 하는데, 물을 데가 없는 거예요.
저는 방송국 발도 안 대본 사람이 느닷없이 생방송에 가서, 바로 전화로 성경난제를 물어올 텐데, 참 무식하면 담대하다고 한번도 방송국 근방에도 안 가본 사람이 앉아가지고..
지금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는 일이예요.
질문했는데 몰라봐. ‘에~ 어~ 저~ 그러니까~’ 해 봐요.
그러면 방송국 사람이 일어납니다. 방송 사고났다고..
다행히 아무도 내가 모르는 것을 물었기 때문에 방송 사고는 없었죠.
그래서 묻고 대답하고 하는 것은 굉장히 아름다운 일인데, 이런 것이 2500년 전에 있었다는 것 때문에 제가 어제 하루종일 그 마음이 있어서 내용도 내용이지만 나는 이 사실 자체가 엄청난 사실이다..
우리 연말쯤 되거든 우리 성도들 하루 오후예배는 예배드리지 말고, 찬송 기도하고 묻는 시간을 가집시다. 대답이 나오든 말든 우리끼리만 하면 되니까..
그래서 어떻든 엘리후가 양비론(兩非論), 즉 욥도 옳지 않고 욥의 친구들도 옳지 않다. 그렇게 하는데,
저는 엘리후가 한 말이 다 옳다 그런게 아니라, 이렇게 젊은 사람이 자기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는 데 대해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제가 객관적으로 볼 때 저의 입장이 늙지도 젊지도 않았잖아요. 머리만 늙었지 사실은 마음은 늙은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무리 봐도 아직은 제가 젊은 사람들 편이예요. 어른들 죄송합니다.
장로님들에게 죄송한데, 어떻든 제가 사고방식은 젊은 사람들 편인데, 젊은 사람들 편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보면 나이 든 사람들이 지혜를 말하기보다 사고가 상당히 굳어 있는 것을 많이 봐요.
연세가 많아지면 지혜가 나와야 되는데, 사고가 경직된 것을 보는 거야.
그런데 젊은 사람을 보면 틀리기는 해요. 더러.. 틀린것도 많고 말도 채 못하고 감정부터 끓어오르고 하지만 사고가 유연하다는 거예요. 안 굳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 젊은 사람도 있고, 참 목회자가 설교하기 어렵습니다. 젊은 사람도 있고 연세 많은 사람도 있고 하니까.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항상 어른들에게 지혜를 구하는게 바른 자세예요.
어른들이 평생 쌓아서 비싼 댓가를 지불하고 쌓아 올린 지혜를 탐을 내야 돼요. 젊은 사람들이..
반대로 연세든 분은 젊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 사회를 보세요.
어른들이 젊은 애들이 뭘 안다고 해봐. 이렇게 하면 젊은 사람은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어른들은 몰라요.
이런 것을 보통 ‘소통의 부재’라고 해요.
어른들은 생각할 때 젊은 것들이 뭘 알아? 이렇게 하는데, 젊은 사람들은 어른들은 몰라요. 이렇게 나온다니까..
대화가 잘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욥기에서 한 젊은이가 나와서 자기 의견이 옳든 그릇든 그게 관철되든 말았든 간에 마음껏 개진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는 거죠.
그리고 항상 연세드신 분들이 젊은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주는 교회, 그리고 그런 사회는 열린 사회예요. 그리고 발전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어른들 말을 고분고분 듣고 어른들을 넘어서지 못하면 그 사회를 발전하지 않습니다.
젊은 사람들의 생각이 어른들의 생각보다 더 옳을 때가 있어야 그 사회가 발전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왜 젊은 사람편이라고 하느냐 하면, 젊은 사람들이 마음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회, 그리고 마음놓고 자기 뜻을 관철이 아니라, 자기 뜻을 개진할 수 있는 그런 교회라야 성장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대체로 양적인 성장이라는 것은 그렇게 하면 성장이 안 되는 수가 있어요.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목회자가 독재하면 제일 잘 성장해요.
아예 장로님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사님들도 청년들도 찍소리 않고 목사님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하는 교회는 양적으로는 성장합니다. 그러나 질적으로 성장한다고 볼 수 없어요.
양적으로 질적으로 고루 성장할려면 젊은 사람들은 어른들의 지혜를 탐을 내고, 또 어른들은 젊은 사람들의 유연한 사고에 대해서 이해가 되어야 돼요.
6절입니다.
6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발언하여 가로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참고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
7 내가 말하기를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으나
8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9 대인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11 ○내가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고 당신들이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 보는 동안에 그 변론에 내 귀를 기울였더니
12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 말을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13 당신들이 혹시라도 말하기를 우리가 지혜를 깨달았었구나 그를 이길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
그런 말 하지마. 얼마든지 아직도 있어. 그러면서..
14 그가 내게 말을 내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말처럼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리라
15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로구나
16 그들이 말이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17 나도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향을 보이리니
18 내게 말이 가득하고 내 심령이 나를 강박함이니라
19 보라 내 가슴은 봉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얼마나 가슴에 말이 찼는지 포도주 부대가 터질 것처럼 팽배해져서 그저 끈을 풀자마자 샴페인처럼 펑! 하면서..
이러면 실수 하죠?
여러분 충분히 익은 포도주는 부글부글 괴지 않습니다. 뻥 터지거나 하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 차분하게 나와야 되는데, 엘리후가 그렇게 설쳐대는 것 보니까 덜익은 거죠.
20절,
20 내가 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21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아첨하지 아니하나니
22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속히 나를 취하시리로다
좀 무례하죠?
[욥기 33장]
1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나의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
2 내가 입을 여니 내 혀가 입에서 동하는구나
3 내 말이 내 마음의 정직함을 나타내고 내 입술이 아는 바를 진실히 말하리라
4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5 네가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
6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7 내 위엄으로는 너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권세로는 너를 누르지 못하느니라
8 ○네가 실로 나의 듣는 데 말하였고 나는 네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이르기를
9 나는 깨끗하여 죄가 없고 허물이 없으며 불의도 없거늘
10 하나님이 나를 칠 틈을 찾으시며 나를 대적으로 여기사
11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12 내가 네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네가 의롭지 못하니,
그것부터 잘못되었다는 거야.
..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13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아니하시나니 네가 하나님과 변쟁함은 어찜이뇨
여기 보면 먼저 욥의 친구들에게 말하기보다 욥에게 말을 먼저 걸었는데, 이 사람 이야기는 무슨 얘기냐 하면, 욥이 하는 말을 가만히 분석해 볼 때 욥의 이야기가 자기는 깨끗하고 죄도 없고 허물도 없고 불의도 없는데, 하나님이 계속 자기를 칠 틈을 찾으신다.
그러면서 욥이 하나님께 대해서 하나님을 원망 내지는 하나님께 토로 기도 간구하는 내용을 볼 때, 자꾸 때리기만 하지 마시고 내가 왜 맞아야 하는지 알기나 알고 맞읍시다. 하고 하나님께 자기를 변쟁한다는 거야. 하나님과 변론하고 논쟁을 벌이고 하나님께 따지는데, 엘리후가 볼 때 그게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네 죄를 네가 알아서 회개해야지, 하나님께서 네 앞에 나타나셔서 다 진술하고 때리란 말이냐?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실 일 하면 되는 것이고, 네가 할 일은 네가 하라. 네가 맞을 짓을 해서 맞으면서 끝까지 억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이길려고 하면 되느냐? 말이죠?
여기 벌써 밑천이 드러난거죠?
여기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칠 틈을 찾으시는 것은 아니지만 욥이 하나님께 질문한 것에 대해 질문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하나님이 네게 와서 내가 너를 왜 때려야 하는지 그런 것을 꼭 진술해야 하느냐, 네 잘못은 네가 알 것이 아니냐 했는데, 무리한 거란 말입니다. 모릅니다. 욥은
이렇게 얻어맞아야 될만큼 잘못이 없기 때문에 욥은 실제로 모르는 거야.
그러니까 엘리후도 뭘 잘 모르고 있습니다.
14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15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16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
그러니까 너 앞에 하나님께서 찾아와서 내가 너를 이것 때문에 때려야 되겠다 진술하지는 않지만 혹시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잘들 때에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했을 텐데, 왜 모른다고 잡아떼느냐?
그런 얘기거든요.
그런데 욥이 안 찾았겠어요? 어떤 꿈에 그런 계시를 주면 욥이 그것을 몰랐겠어요?
준적도 없는데, 역시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계시하신다고 우기는 거죠.
17절에,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17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18 그는 사람의 혼으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으로 칼에 멸망치 않게 하시느니라
그러니까 때려도 깨닫지 못하면 꿈으로 이상으로 잠들 때 그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할 텐데, 왜 끝까지 모른다고 잡아떼느냐?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너를 망하지 않게 할려고, 왜냐하면 망하게 할려면 벌써 죽여버렸죠.
죽여버리지 않고 이렇게 오랜 기간 끌고 있을 때 틀림없이 네가 깨닫든지 깨닫지 못하면 꿈이나 이상이나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할 텐데, 그렇게 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잔꾀를 버리게 하려 하시는데,
이것은 바로 사람의 교만을 꺾으시는 거다.
너를 보니까 아직도 교만해..
이렇게 하면서 뭔가 네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거죠.
19 ○혹시는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20 그의 마음은 식물을 싫어하고 그의 혼은 별미를 싫어하며
21 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
22 그의 혼이 구덩이에, 그의 생명이 멸하는 자에게 가까와지느니라
그러니까 징벌 징계라고 보는 엘리바스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예요. 사실은..
23 ○그럴 때에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해석자로 함께 있어서 그 정당히 행할 것을 보일진대
24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그래서 본인이 못 깨달으면 꿈과 이상으로 그것도 아니면 어떤 천사가 와서 이 고난에 대한 해석을 해 줄 분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 건져낼 것이다.
25 그런즉 그 살이 어린아이보다 연하여져서 소년 때를 회복할 것이요
26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자기의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 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27 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전에 범죄하여 시비를 바꾸었으나 내게 무익하였었구나
28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하고 간증할 수 있겠다.
엘리후의 이야기는 세 가지로 깨닫게 한다는 거예요.
첫째는 본인이 깨달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것도 안되면 꿈과 이상으로 깨닫게 할 것이고, 아니면 천사가 와서 너에게 깨닫게 해서 어떻게든지 네 영혼이 멸망치 않게 한다면 네가 회복되어서 자기가 시비를 바꾸고 거꾸로 어거지로 썼다가 하나님께 혼쭐났다 하면서 사람들에게 간증하고 다니지 않겠는가? 이렇게 이야기는 하는 거예요.
굉장히 말이 어려운 말이죠?
29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30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것은 너를 망하게 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그 죄 가운데에서 끌어낼려고 하는 것이니까 그런 기회를 놓치지 말아라. 그런 얘기죠.
31 욥이여 귀를 기울여 내게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32 만일 할 말이 있거든 대답하라 내가 너를 의롭게 하려 하노니 말하라
33 만일 없으면 내 말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지혜로 너를 가르치리라
[욥기 34장]
1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2 지혜 있는 자들아 내 말을 들으며 지식 있는 자들아 내게 귀를 기울이라
3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4 우리가 스스로 옳은 것은 택하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
아직도 친구들 내지는 노인들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안돼 욥은 안돼. 이것은 하나님이나 이 사람을 가르칠 수 있지 우리는 안 되겠어. 포기하자.
이렇게 할 텐데, 엘리후는 한마디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니라는 거야.
욥을 가르칠 자는 하나님뿐이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이런 것은 나 혼자도 할 수 있어.
이것은 굉장한 교만이죠. 이 엘리후도..
욥에게도 노를 발하고 세 친구도 무시하면서 가만히 있으라고..
이런 것쯤이야 내 혼자도 얼마든지 설득할 수 있어.. 이렇게 하면서..
우리끼리 알아보자. 하나님까지 갈것 없어. 내 혼자 해도 할 수 있다.
자신만만하게 나옵니다.
다시 한번 욥에게 말할 때,
5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제하셨고
6 내가 정직하나 거짓말장이가 되었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내 상처가 낫지 못하게 되었노라 하니
그런 말이 되냐?
7 어느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훼방하기를 물 마시듯 하며
8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사귀며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9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
이것도 엘리후의 오해죠?
욥이 언제 악한 일을 하는 자와 사귀었으며 악인들과 함께 다녔으며, 전혀 없는 거예요.
없는 건데, 그냥 어거지 이론을 가지고 욥을 그저 윽박질러 보는 거죠.
그러면서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
그 말은 일리가 있어요. 욥의 생각속에 자기는 정말 하나님을 기뻐하고 잘 섬겼다 그런 말이 욥이 한 말 중에 있어요.
그런데 앞에 8절은 틀린 말이예요. 8절은 엘리후의 무리한 주장이죠.
언제 욥이 악한 일을 하는 자와 사귀며 악인과 함께 다녔겠는가.
그것은 네가 다녔겠지 하고 지레짐작이지 욥이 일절 그렇게 한 적이 없거든요.
10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11절에 줄을 그으세요.
11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나니
이것이 결론을 가지고 원인을 유추하는 거죠.
욥이 당한 고난이라는 결론을 볼 때 거기에 상응할 수 있는 그런 죄악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하고 현재를 보고 과거를 해석하는 거야.
우리가 현재를 보고 과거를 해석할 수 있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굉장히 위험해요. 무작위로 그렇게 하면 위험하다는 거예요.
그런 일이 있지만 모든 일이 다 이렇지 않다는 거예요.
현재를 보고 과거를 해석한다고 할 때, 여러분 현재를 보고 과거를 해석한다면 세례요한도 무슨 큰 죄를 범한 사람일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겠죠?
예수님도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 예수님도 저주받은 자가 되는 것이고, 사도바울은 전생에 무슨 업이 있는 거야.
오는 곳마다 가는 곳마다 얻어맞고..
그러니까 현재를 가지고 과거를 해석하는 방법이 이게 진화론적인 방법이고, 내지는 인과응보라는 경직된 틀 안에서만 하는 거죠.
12사도가 다 순교했는데 그들이 무슨 그런 업보가 있어서 정말 현재를 보고 과거를 무작위로 해석할 수 있느냐 말이죠..
그렇지 않은 거죠.
그러니까 적어도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같으면 욥기에 있는 이 정도 신학은 훨씬 넘어서야 돼요. 성도들이..
이런 저런 어려움에 대해서 그렇게 해석이 단순하지 않고 엘리바스나 엘리후나 빌닷이나 네 사람 다 이것을 못 넘어서거든.
하나님은 절대로 불의한 재판을 하시지 않는다. 억울한 재판도 하시지 않고, 네 벌 받은 것이 네 죄보다 경한 거야. 너 실제로 더 맞아야 돼. 이런 식으로 하는데, 전혀 아니거든요.
이런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제자들이 지나가다가 여전히 유대인들의 사고를 못 벗어나고, ‘예수님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인데,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 그 아비의 죄 때문입니까?’
아비의 죄 때문이라고 하면 대개 무슨 말이냐 하면, 성적으로 문란해가지고 성병 메독이나 임질로 아이의 시력이 가버렸다. 이런 식으로 덤태기를 씌우는 건데, 예수님께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거죠.
본인은 날 때부터 소경 되었으니까 본인 죄 때문이 아니죠.
조상 죄 때문에도 아니고,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라.
그렇게 한 거예요.
유대인들은 유대인들 전체가, 우리 한국사람도 마찬가지이고 인도도 마찬가지 온 세계 사람들이 다 자기 자신들의 죄가 있기 때문에 불행과 죄는 등식이 성립한다.
불행=죄. 불행의 뿌리가 죄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수도 있습니다.
그런 수가 있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욥기 처음 시작할 때 고난에 대한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어떻든 이 때 엘리후의 이야기는 옳지 않은 이야기죠.
12절,
12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13 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느냐 누가 온 세계를 정하였느냐
14 그가 만일 자기만 생각하시고 그 신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15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
16 ○만일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17 공의를 미워하는 자시면 어찌 치리하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자를 네가 정죄하겠느냐
그러니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공평과 정의를 챙기지 않는 자이시고 그것을 미워하시는 자시라면 어떻게 치리하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자를 네가 어떻게 정죄하겠느냐..
18 그는 왕에게라도 비루하다 하시며 귀인들에게라도 악하다 하시며
19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
20 그들은 밤중 순식간에 죽나니 백성은 떨며 없어지고 세력 있는 자도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제함을 당하느니라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공평으로만 재판하신다.
그렇죠? 하나님의 재판은 공평한 것 맞아요. 일부는 맞습니다.
우리가 이런 글을 읽을 때 어느 부분은 맞는 말하고 어느 부분은 틀린 말이고, 어느 부분은 반쯤 맞는 말이고, 이런 것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욥기를 50번 읽어봐야 토론을 할 수 있어요.
아주 굉장히 우리가 공부할 수 있는 문구가 많이 나옵니다.
21절,
21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22 악을 행한 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어두운 그늘이 없느니라
여전히 욥을 뭐라고 부르는 거예요? 악을 행한 자야. 악을 행한 자.
너 숨겨도 안되고 숨을 수도 없다.
23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
세상에 있는 판검사 이런 사람들은 심지어 변호사라 할지라도 변호사는 무조건 수임받은 사건을 이겨야 되니까 죄인이라도 끝까지 변호하죠.
어떤 데는 검사는 죄가 별로 확실치 않은 데도, 그냥 윽박질러서 그래서 나중에 사형을 집행하고 났는데 18년 후에 진범이 잡힌거야 .
그래가지고 판사가 머리깎고 스님이 되었잖아요.
그런 일이 있어요. 실제로 우리 역사에..
세상에 우리가 사람이 일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판사 검사 변호사 한다 할지라도 온전한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 가지고 오래 생각할 것 없습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재판하는데 ‘이것을 어찌해야 되는가’ 고민하는 것 없습니다.
네가 범죄하자마자 하나님이 고민할 것도 없이 즉각 심판하신 것이다 이렇게 하는데, 그것은 틀린 말이죠.
24 세력 있는 자를 조사할 것 없이 꺾으시고 다른 사람을 세워 그를 대신하게 하시느니라
25 이와 같이 그들의 행위를 아시고 그들을 밤 사이에 엎으신즉 멸망하나니
26 그들을 악한 자로 여겨 사람의 목전에서 치심은
27 그들이 그를 떠나고 그의 모든 길을 무관히 여김이라
전혀 욥이 하나님의 길을 떠난 적이 없는데, 하나님을 떠났다고 하는 거예요.
28 그들이 이와 같이 하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상달케 하며 환난받는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들리게 하느니라
29 주께서 사람에게 평강을 주실 때에 누가 감히 잘못하신다 하겠느냐 주께서 자기 얼굴을 가리우실 때에 누가 감히 뵈올 수 있으랴 나라에게나 사람에게나 일반이시니
그것은 일반적으로 맞는 말이예요.
맞는 말이 없으면 주장을 하지 않죠. 일부는 맞다니까..
그러나 이것이 욥에게는 해당이 안 돼.
30 이는 사특한 자로 권세를 잡아 백성을 함해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31 ○누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징계를 받았사오니 다시는 범죄치 아니하겠나이다
32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면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한 자가 있느냐
여러분 자신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징계를 받았으니까 한번 범죄하고 혼났으니까 다시는 범죄하지 않겠나이다..
자신이 있습니까? 잘 안 될텐데요.
그리 해야 되는데 쉽지 않다는 거야.
또,
32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면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한 자가 있느냐
그런데도 불구하고,
33 하나님이 네 뜻대로 갚으셔야 하겠다고 네가 그것을 싫어하느냐 그러면 네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너는 아는 대로 말하라
그러니까 지금 욥을 보고 엘리후가 하는 말은 너는 지금 하나님까지 이렇게 심판해야 되지 않겠느냐? 저렇게 심판하라고 가르칠려고 하는 자 같아..
되게 교만한 거야.
그것도 문제가 되죠. 엘리후가 볼 때는 하나님이라면 이렇게 해야 될 것이 아니냐, 저렇게 해야 될 것이 아니냐 하고 떠드는데,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거야.
범죄는 자기가 해놓고 심판하는 하나님을 지도할려고 하느냐? 이렇게 말하는 엘리후 말에도 일리가 있는 거죠.
34 총명한 자와 내 말을 듣는 모든 지혜 있는 자가 필연 내게 이르기를
35 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 말이 지혜 없다 하리라
그래서 아무나 들어도 내 말을 들으면 욥이 지혜가 있을 것이다 할 것이다.
내가 볼 때 자기도 지혜가 없는데..
그래서,
36 욥이 끝까지 시험받기를 내가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말하는 것 보니까 악한 놈과 똑 같아.. 너는 더 맞아야 돼. 끝까지 시험 더 쳐야 돼. 그러면서..
37 그가 그 죄 위에 패역을 더하며,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주제에 하나님께 대드는 패역을 더하고 있다는 거야. 엘리후의 평가는..
죄를 지어서 이런 천벌을 받아놓고 거기다가 하나님께 회개는 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드는 패역을 더하고 있다..
.. 우리 중에서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그래서 엘리후가 지금 욥을 징책하는데, 엘리후 자신은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앞에 사람보다 나이 많은 노인들 말보다 낫죠?
그러니까 연세 많은 분들이 젊은 사람의 말을 들어봐야 돼요. 유연한 사람 말을 들어봐야 돼요.
굳어버리게 되면 젊은 사람 말 보다 못한 소리를 많이 해요.
지금 우리 정치인들 하는 말을 볼 때 젊은 청년들이 하는 말이 옳아요.
그런 수가 많아..
어쩌면 우리 민족이 희망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에스라에 오신 몇 분이 그래요.
자기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는데, 빨리 더 열심히 공부해가지고 노우호 목사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 내가 기분 굉장히 안 좋았겠죠? 하하하.
제가 듣는 말 중에 가장 기쁜 말이예요. 정말 그 목사님은 자기가 성경을 잘 가르치겠다고 열심히 했는데 성경강좌를 들어보니까 순 엉터리로 했다는 거야.
그래서 교회 앞에 가서 정중히 사과했다는 거야. 자기는 사기꾼으로 여태까지 교회에서 살아왔다.
제대로 배운것도 없고 제대로 가르친 것도 없다 하고,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
그렇게 교회 앞에서 실토를 했는데, 그러면 자기가 당연히 쫓겨날 줄 알았는데, 안 쫓아내었을 뿐 아니라 온 성도들이 목사님의 용기에 대해서 정말 존경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그 교회를 사임하고 나왔어요.
그렇게 실토하고 얼마 있다가 나와서 개척을 새로 했습니다.
다시는 사기꾼처럼 하지 않고 제대로 하겠다고.
제가 그분을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존경해요.
나이가 저보다 아래이지만 50은 넘었는데, 50이 넘었는데도 그런 용기를 가지고 자기는 지금까지 사기꾼처럼 교회 앞에서 그대로 말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제대로 배워서 제대로 하고 하나님 앞에 서겠다. 그런 말을 하면서 마지막 하는 말이 ‘열심히 공부해서 노목사 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겠다.’
제가 참 사람을 사귀어 오다가 보람을 느끼는 거야.
우리 샤론교회에서도 그런 분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왜 아멘이 적어요?
여러분 어른들과 노인들과 스승을 넘어서지 못하면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교회도 사회도 희망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도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 하신 것이고, 엘리사가 ‘선생님의 영감의 갑절을 원합니다.’ 그렇게 한것 아녜요?
이게 제가 어제 오늘 한 얘기가 아니죠.
우리가 얼마든지 더 성장하고 더 발전하고 해서 특히 우리 교회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참 기대가 됩니다.
우리 어른되시는 분들은 이런 청소년들이 마음껏 자기 의견을 개진하고 유연할 때 우리가 울타리가 되어서, 영 잘못된 것만 바로 잡아주고 마음껏 생각하고 마음껏 이야기 하고 마음껏 발표할 수 있는, 그래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그런 터전을 마련해 주는 것이 우리 어른 된 사람의 의무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는 이 엘리후의 말 중에 지적했죠? 틀린 말 무리한 말이 있지만, 그래도 젊은 사람이 2500년 전에 어른들 앞에서 자기 소신을 이만큼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굉장히 감동이 됩니다.
샤론교회에서 자라나는 젊은 청년들은 순수하지만 용기와 기백을 가지고 노목사라 해도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말고, 잘못되면 신랄하게 냉철하게 그렇게 따지고 덤벼도 괜찮아요.
저도 사기를 친 것이 아닌가 돌아볼테니까..
염려하지 말고 옳고 바른 것을 찾아가는 일에는 우리가 혼신을 다하여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말고..
우리 한국교회가 잘못된 것이 지도자의 잘못된 길로 끌고 가는데 맹목적으로 따라갔다는 거예요.
그게 심하면 이단으로 갈 수 있어요.
항상 이것은 정말 참 진리인지 분별할 수 있는 냉철한 자세를 가지고, 우리가 믿음이 자라고 지혜와 키가 더 자라고 하나님 앞에 성장하고 성화되어서 성숙된 하나님의 사람들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후가 비록 젊고 미숙한데가 있지만, 어른들이라 할지라도 옳지 않은 것에 대해서 노를 발하면서 자기 의견을 소신껏 개진하는 그런 장면을 봤습니다.
그에게도 아직도 불안은 이론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젊은 사람이 노인들 앞에서 자기 의견을 그렇게 당당하게 개진하고 당대 최고의 의인이라고 하는 욥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위축되지 않고 자기의 소신을 밝히는 그런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샤론교회에서 자라는 청소년들이 은혜와 진리 안에서 성장하고 성화되어서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