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에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10번기(十番棋)’가 21세기에 재현됐다. 바로 ‘세기의 대결 이세돌-구리(古力)의 10번기’. 같은 시기 한국과 중국이 낳은 두 천재기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83년생 동갑내기인 두 사람에겐 ‘세기의 대결’이란 형용구가 걸맞다. 두 기사는 수많은 젊은 고수들이 반짝하고 나타났다 사라져간 지난 10여 년간 바둑천하를 놓고 용호상박의 혈투를 벌여왔다. 자연히 양국의 바둑 팬들은 ‘누가 진정한 1인자인가’를 궁금해 했다.
하지만 10번기의 재현에 두 영웅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뒷돈을 대고 싸움을 붙일 거간꾼, 즉 판을 마련해 줄 배짱 두둑한 조연이 필요했던 것. 때마침 중국의 젊은 기업인 헝캉(恒康) 그룹 니장건(倪張根) 회장(40)이 조연을 자처하고 나섰다.
아마추어 5단 실력에 구리의 ‘광(狂)팬’인 그는 2012년 삼성화재배 결승전에서 구리가 1-2로 패하는 것을 보고 10번기 후원을 결심했다고 한다. 수 개월간의 교섭 끝에 경기규칙이 마련됐고 2014년 마침내 ‘10번기 드라마’가 시작됐다. 어쩌면 이번 세기의 마지막 빅 이벤트일 수도 있는 10번기의 막전막후를 살펴보자.
10번기란 단어는 뭔가 처절하고 치열한 느낌을 준다. 역사에 기록된 첫 10번기부터 그랬다.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 때 ‘혈루십국(血淚十局)’. 근 400년 전이다. 가장 바둑을 잘 둬 국수(國手)로 불린 황룡사(黃龍士)와 그의 제자 서성우(徐星友) 간의 3점 접바둑. 워낙 치열해 ‘피가 터지는 싸움’으로 부르면서 ‘혈루’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중국 장쑤성 장옌시는 황룡사를 기려 매년 한중일 여자단체전을 열고 있다.
이후 청나라 최전성기를 이끈 건륭제 때인 1739년 범서병(範西屛)과 시양하(施襄夏)가 저장성 당호에서 둔 ‘당호십국(當湖十局)’도 유명하다. 당호십국은 기보가 전해 내려온다. 결과는 5-5.
근대 10번기는 우칭위안(吳淸源) 선생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우칭위안과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간 가마쿠라(鎌倉) 10번기가 본격적인 시작이다. 유서 깊은 도시 가마쿠라의 고찰 겐초사(建長寺)에서 이뤄졌다. 승패가 4승 이상 나면 치수를 고치는 승부였다. 프로기사에게는 치명적이다. 우칭위안과 기타니는 화점과 중앙에 힘을 불어넣은 ‘바둑혁명 신포석법’이란 책을 발간해 바둑의 지평을 넓힌 인물. 진검승부 결과 기타니가 선상선으로 내려앉았다. 승부에 패한 기타니는 제자를 키우는데 주력했고, 일가를 이뤘다. 한국 바둑의 기초를 세운 조남철, 김인도 기타니 문하다.
우칭위안은 1956년까지 가리가네 준이치(雁金擇一), 후지사와 구라노스케(藤擇庫之助), 하시모토 우타로(橋本宇太朗) 이와모토 가오루(岩本薰)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 다카가와 가쿠(高川格) 등 당대 고수들의 무릎을 꿇렸다.
이중 후지사와는 3차례나 패했다. 첫 번째 패하고 이름을 후지사와 호사이(藤擇明齋)로 바꾸고 세 번째 졌을 땐 일본기원에 사표를 내기도 했다. 우칭위안은 10차례 10번기에서 모두 이겨 불멸의 기성(棋聖) 칭호를 얻었다.
그리고 세기가 바뀌어 2014년 1월부터 이세돌-구리 10번기가 시작됐다. 필자는 그 현장을 오가며 두 기사를 인터뷰했고 더불어 100세 생일을 맞는 우칭위안 선생을 서면 인터뷰하는 행운도 잡았다. 우 선생은 불멸의 기성이라는 평가에 대해 “그렇게 말해주는 것은 기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임무에 힘썼을 뿐”이라고 소박하게 답변한 게 기억에 남는다. 그 몇 달 뒤인 11월 일본의 한 병원에서 타계했다.
이세돌과 구리가 처음 만난 것은 2004년 6월. 구이저우 안순에서 열린 중국 갑조리그 9라운드였다. 당시 중국 언론은 구리가 2월 3일생, 이세돌이 3월 2일생으로 사주가 서로 상극이어서 평생 맞수가 될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쪽에서 보자면 그 때까지 두 기사는 격이 달랐다. 이세돌이 이미 바둑 천하를 세 번이나 제패한 글로벌 스타였다면 구리는 중국에서만 이름난 국내용 스타였다. 이세돌은 후지쓰배와 LG배 등 세계대회 타이틀 3개를 따냈고, 구리는 중국 국내 기전인 천원전 2연패에 갑조리그에서 8연승을 하던 때였다.
이세돌은 그해 처음으로 중국 리그에 용병으로 진출해 구이저우 팀 주장으로 영입됐다. 계약 당시 ‘승리할 때는 8만 위안. 패할 때는 한 푼도 받지 않는다’는 계약으로 화제를 모았다. 이세돌의 승부근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뒷날 10번기 상금 배분과정에서도 그의 승부사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둘의 첫 만남은 이세돌에게 진한 아픔을 남긴다. 힘 한번 못쓰고 허망하게 구리에게 패했다. 이세돌은 이후 다른 2명의 중국 기사에게도 졌다. 중국리그 진출 초반 3연패, 이세돌에겐 수모였다.
그러나 이세돌이 누군가. 그해 11월 삼성화재배 준결승 3번기에서 보기 좋게 빚을 되갚아준다. 2-1 승리. 그전까지 구리는 9차례 번기 승부에서 모두 이겼을 때였다. 구리에게도 패배는 아팠다. 구리는 그날 혼자 묵묵히 침대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몇 시간 동안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두 기사는 서로 치고 받으며 라이벌로 성장한다. 2009년 둘은 LG배결승전에서 만났다. 결승전 첫 대결. 중국 인터넷 언론은 “두 기사의 이니셜을 보면 이세돌이 ‘L’, 구리가 ‘G’여서 LG배에서 만난 것은 운명”이라고 보도했다. 두 기사의 백담사 대국은 꼭 70년 전 우칭위안과 기타니의 겐초사 대국을 떠올리게 했다. 눈 내린 백담사의 대국이었다. 이세돌은 1국에 이어 2국에서도 패배했다. 당시 이세돌의 허망한 패배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두 번째 결승전은 2011년 4월에 열린 BC카드배. 그전까지 두 기사는 22차례 겨뤄 11-11의 동률이었다. 최종국까지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이세돌이 3-2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우칭위안-기타니 가마쿠라 10번기(1939년), 사카다 에이오-후지사와 슈코의 구 명인전 7번기(1962년), 조치훈-후지사와 슈코 기성전 7번기(1983년), 중일슈퍼대항전 녜웨이핑-후지사와 슈코(1985년), 조훈현-녜웨이핑 잉창치배 결승 5번기(1989년)에 이어 역사에 남을만한 명승부였다.
세 번째 결승전은 2012년 12월 상하이에서 열린 삼성화재배. 호텔 대국장 주변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결승전에서 만나 1-1 무승부인 상황에서 맞이한 세 번째 결승전이기도 했거니와 중국에 바둑 붐이 일던 탓이었다.
대국 전 열린 기자회견. 두 기사는 상대를 이렇게 평가했다.
“구리(古力) 9단이 없었으면 발전도 없었고, 지금과 같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항상 겨루고 싶은 기사이고, 술 한잔 같이하고 싶은 친구다.” - 이세돌
“이세돌 9단은 내게 ‘길을 안내해준 사람’이다. 2004년 삼성화재배 준결승 3번기에서 2-1로 지고 ‘이렇게 강한 상대가 있구나’라는 느낌에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구리 9단
둘은 싸우다 정이 든 사이였다. 결승 1국은 이세돌이 반집승, 2국은 구리가 불계승, 3국은 이세돌이 반집승. 결국 이세돌이 우승했다. 당시 ‘이세돌의 1집(반집+반집)이 구리의 만방을 이겼다’는 우스개 말이 나오기도 했다. 구리는 경기에서 패하고도 기자회견에서 이세돌에게 기꺼운 축하를 보내 대인(大人)다운 풍모를 보였다.
10번기의 씨앗은 바로 이 삼성화재배 결승전에서 뿌려졌다. 헝캉그룹 니장건 회장은 구리의 패배를 너무 아쉬워했다. 그는 유학시절 메모리 폼 베개에 눈을 떠 창업해 조 단위 매출을 일궈낸 인물. 니 회장은 구리의 실력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단기 승부는 몰라도 10번기에서는 구리가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바둑애호가 니 회장은 자신의 침구 상표 ‘MLILY(夢百合)’를 알릴 목적으로 세계대회를 새로 만드는 문제를 중국기원과 논의하면서 이세돌-구리 10번기도 후원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중국기원은 10번기에 소극적이었다. 구리의 패배가 미칠 파장을 우려했다는 것. 니 회장의 후원으로 10번기 논의는 급물살을 타게 됐다. 물론 중국기원도 구리가 이길 가능성이 조금 커졌다고 보았을 것이다.
10번기 성사과정에 참여한 이영호 씨(이창호의 동생)의 설명.
“니장건 회장이 10번기 비용으로 700만 위안을 쾌척했다. 그 중 상금은 500만 위안 정도고 나머지는 대회 운영비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상금 배분 방식을 놓고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하지만 세돌이 형이 ‘승자 독식’을 주장했다. 구리도 오케이했다. 결국 승자가 500만 위안을, 패자가 20만 위안을 받는 승자 독식으로 결론이 났다. 5-5가 됐을 때를 놓고도 논의가 있었다. 주최 측은 한 차례 대국하자고 했으나 세돌이 형이 ‘그러면 무슨 10번기냐’고 주장해 5-5일 경우 똑같이 반으로 나누는 것으로 합의했다.”
10번기 첫 대국은 2014년 1월 베이징(北京)에서 열렸다. 대국 얼마 전 이세돌과 구리가 각각 삼성화재배와 멍바이허배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둘 다 패배해 10번기가 약간은 김이 빠졌다. 베이징 대국에는 캐나다에 가 있던 이세돌의 부인 김현진 씨와 딸 혜림 양도 참석해 응원했다. 이세돌이 서전을 장식했다. 2국도 이겼다.
호사다마랄까. 이세돌은 이후 초상부동산배와 춘란배에서 구리에게 연속으로 패했다. 그러고는 10번기 3국에서도 졌다. 4국은 10번기 중 유일하게 한국에서 열렸다. 이세돌의 고향 전남 신안에서. 기자는 신안대국에 앞서 구리를 서면 인터뷰했다. 기억나는 대목은 2008년 후지쓰배에서 우승한 뒤 아버지 묘소에 트로피를 바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중국 남송 때의 시인 육유(陸游)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왕의 부대가 북방 중원을 평정한 날, 집의 제사에서 너의 부친에게 알리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내가 이름을 날릴 수 있게 된 것은 아버지의 가르침과 관심 때문이다. 당시 아버지 생전에 이루지 못한 꿈을 이뤘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다.”
이세돌은 신안군 증도에서 열린 4국에서도 패했다. 4연패. 그는 이날 통음했다. 구리와 니장건 회장과 술자리를 같이한 뒤 다시 이영호 씨와 술을 마시며 아픔을 달랬다. 이세돌의 음주 스타일은 본인 말대로 “과음하는 타입”이다. 주종을 불문하되 독주를 즐긴다. 특히 중국의 바이주가 맞는다고 했다. 반면 구리는 두주불사형. 특히 맥주를 좋아하는 데 끝이 없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승부의 분수령은 중국 윈난성 샹그릴라 고원지대에서 열린 5국이었다. 이세돌이 패할 경우 5연패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승부의 추가 기울 수도 있는 중요한 대국이었다. 이세돌은 그 짙은 어둠 속에서도 귀중한 1승을 건져 올렸다. 흐름을 바꾼 것이다. 유리한 바둑을 실수로 놓친 구리는 이어 6국, 7국에서도 졌다. 특히 티베트 라사에서 열린 7국 패배는 뼈아팠다. 이세돌 기준 5승 2패.
이세돌로서는 1승만 더 보태면 10번기 우승이다. 8국이 구리의 고향인 충칭에서 열린 것은 어쩌면 운명의 장난이었다. 한국 기자들 사이에선 이세돌이 그 마지막 한 칼을 충칭에서 휘두를까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이세돌이 구리의 고향인데 살살 두지 않겠느냐’-‘이세돌의 성격 상 밀어붙일 것’이란 의견이 팽팽했다. 기자는 매번 10번기를 취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충칭 취재를 놓고 주변의 의견을 참고했다. 바둑TV나 한국기원 관계자들은 “가는 게 낫겠다”는 쪽이었다. 결국 동행 취재 쪽에 베팅했다. 실패하면 최종국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각오였다.
충칭은 구리의 홈그라운드. 그곳에서 태어났고, 바둑을 배웠다. 스타가 됐고 결혼도 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충칭지구 1번 성화 주자를 맡을 정도다. 구리는 2013년 1월 초등학교 동창이자 베이징올림픽 리듬체조 단체 은메달리스트인 뤼위안양(呂遠洋)과 결혼했고, 이세돌도 참석해 축하했다.
2014년 9월 27일 대국 전날. 충칭의 바둑계 분위기는 그곳 날씨처럼 잔뜩 찌푸린 듯 했다. 충칭에서 구리가 패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서브 스폰서가 발을 빼는 바람에 급작스레 대타를 마련하느라 어수선했다. 그 바람에 대국 장소도 아파트 신축 공사장내 모델하우스 같은 곳으로 결정됐다.
신안 4국에서 보고 5개월 만에 본 구리의 모습은 초췌했다. 마음고생 탓인지 몇 달 새 흰머리도 보이고 폭삭 늙어 보였다.
백84까지 우상과 우변에서 흑백이 한차례씩 실착을 주고받은 가운데 78의 곳을 차지한 백이 약간 기분 좋은 형세.
흑85에 백86이 흑87을 깜박한 완착. 백88까지 중앙을 뚫었지만 흑89까지 좌변 흑의 실리가 커서 흑이 우세를 확립했다.
흑93이 승부를 서두른 수로 A로 받아뒀어야 할 자리. 백106까지 흑▲ 석점을 잡은 백의 실리가 크고, 좌하 백의 타개도 어렵지 않은 양상이라 백이 우세해졌다.
좌하 백말이 사는 과정에서 백120이 실착. 백126까지 후수로 사는 사이 흑125를 허용해서는 흐름이 다시 흑 쪽으로 넘어갔다.
흑131로는 132로 둬서 중앙 두터움을 살려나갔으면 흑이 계속 우세를 이어갈 수 있었다. 백132, 140으로 중앙 두터움을 지우고 상변을 납작하게 눌러가서는 백이 역전한 흐름이다.
백이 미세하게 우세한 가운데 백174의 최강수로 국면이 복잡해진다.
서로 어려운 모양에서 흑197이 패착. 백198이 좋은 수로 이 수를 당해서는 승부가 끝났다.
제8보(199~212) 213수 이하 줄임. 343수 끝, 백 2집반 승.
백212까지 중앙 흑말을 크게 잡아넣어서는 백승이 확정됐다. 이후 끝내기 과정에서 복잡한 패싸움 수순이 이어졌지만 승부와는 무관했다.
종국은 으레 한쪽은 즐겁고, 다른 한쪽은 조용하다. 이미 중국 쪽 프로 기사들은 자리를 떴다. 이세돌은 상기된 표정으로 한국기자들과 인터뷰를 했다. 그는 “구리에게는 샹그릴라와 티베트 두 고산대국이 아쉽고 억울할 것”이라고 배려했다. 자신은 두 대국 때 주최 측의 일정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구리는 행사에 이리저리 동원되느라 힘들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날 저녁 두 기사는 공식 만찬에서 서로 러브 샷을 했다. 만찬 뒤 호텔로비. 구리는 동료들과 하나둘씩 헤어진 뒤 덩그러니 혼자 남아있었다. 한동안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더니 전화를 건 뒤 사라졌다. 4국에서 패한 이세돌처럼 술이 부족해서였을 것이다.
이세돌은 호텔 방으로 돌아가 캐나다에 있는 아내와 딸에게 승리 소식을 전하고 TV를 보며 휴식을 취했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귀국길 승용차 안에서 이세돌과 추가로 인터뷰를 했다. ‘까칠하다는 평이 있다’고 물었다.
“내가 까칠하다기보다는 바둑계가 순하다. 나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다. 바둑계는 ‘둥글게 둥글게’ ‘좋은 게 좋다’는 식이 많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는 발전이 없다.”
30대 젊은 승부사가 하는 말은 곱씹어볼 만했다. ‘판을 엎는’ 그의 성격이 승부의 동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리는 칭화대 대학생이 된다고 한다. 일종의 대학 특례입학.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우며 병법에 심취했는데,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역사를 공부하고 싶다는 것. 구리는 6월초 세계대회인 춘란배에서 우승했다. 아픔을 딛고 다시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이다. 그로서는 8번째 세계타이틀(이세돌은 17차례)이다.
이세돌도 국내외 각종 기전을 비롯해 한국과 중국의 바둑리그 선수로 치열하게 승부의 세계를 누비고 있다. 두 기사가 다시 세계대회 결승에서 만날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천생 라이벌인 두 기사가 60세까지 멋진 승부로 겨룰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