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창제의 산파역할을 한 신미대사 信眉大師
그가 주지로 있던 복천암(福泉庵)은
한글 창제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도량이다.
복천암사적기(福泉庵事蹟記)에
"세종은 복천암에 주석하던
신미대사(信眉大師)로부터
한글 창제 중인 집현전 학자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복천암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5백미터 가면 신미대사부도탑(보물 제 1416호)이 있다.
세인의 관심을 다시 끌고 있는
세종(世宗)의 왕사(王師)였던
신미대사(信眉大師)가 한글 창제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설은 그동안 종종 제기되어 왔었다.
그동안의 정설은 세종대왕이 명령으로
집현전 학자들이 이의 실무 작업을 맡았고, 구체적으로는 우리 입의 발음기관을 본 떴다는 것이었다. 현재 가장 유력시 되는 설은
범자(梵字) 모방설이다.
조선초기 유학자인 성현(成俔)의 저서
용재총화(慵齋叢話)나 이수광(李睡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도 언문은 범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와같이 한글 창제의 주역인
신미대사 친동생인 집현전 학사
김수온이 쓴 복천보강, 효령대군 문집,
조선실록,
영산김씨 족보등 각종 자료를 근거로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산파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이 한글 창제 후 불경을 언해하기 시작한 것도 신미대사의 영향이며 언해할 서책이 많은데 굳이 불경부터 한 이유는 신미대사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세종이 한글 창제의 초석을 다진 고마움의 표시로 복천암에 삼존불을 조성, 시주했으며 죽기 전에 유생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유언으로 신미대사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者)
라는 긴 법호를 내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올라있지 않지만
신미대사의 속가 집안인 영산 김씨 족보에 스님이 집현전 학자로 세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러가지 문헌이나 기록으로 보아
한글 창제의 모델이 범어가 분명한데 그 당시 범어를 아는 스님은 신미대사 밖에 없었다고 한다.
신미대사가 실제 한글을 창제하였다는
그 사실을 밝힐 수 없었던 것은 숭유억불정책으로 집현전 학자들 중에 불교를 배척하는
학자들이 있었고,
세종이 한글을 오랫동안 지키고 스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미대사에 대한 세종의 신뢰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다.
ㅡ 충북 영동에서 부친 김훈(金訓)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유학자이며 숭불을 주장한 김수온(金守溫) 의 형님으로 본명이 수성(守省), 본관은 영산(永山)이다. 처음에 법주사에 출가하여 수미(守眉)와 함께 대장경과 율을 배웠다.
ㅡ 모친의 뱃속에서 나올적부터 왼손 손바닥에 임금왕(王)자가 손금에 있어 부모와 삼촌들은 크나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신라때부터 이조에 이르는 동안 그런 사람은 나라에 역적이 된다하여 국법에 의하여 죽이는 관습이 있었기에 죽음을 면할려고 배안 병신 노릇을 아니할 수 없어 항상 손가락을 오그려 주먹을 쥐고 살수 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인물이 잘나고 평소에 말을 잘하지 않았으나 한번 말을 내놓으면 청산유수 같았고 눈을 부리뜨면 안광이 눌리지 않는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이 될만한 기품이 있었고
관상학상으로 왕의 기상을 타고 났다고 한다.
두뇌가 총명하여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았는데 글을 읽어 집현전 학사로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벼슬에 마음이 없고 불가(佛家)에 뜻이 있어 자칭
신미(信眉)라하여 머리깍고 스님이 되었다.
세종은 세종26년에 五子 광평대군(廣平大君)을 잃고, 세종27년에 七子 평원대군(平原大君)을 잃었고, 세종28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잃는 등
3년동안에 세분을 잃고
인생의 허무함과 무상함을 뉘우치던 중 병환으로 고통할 적에 동생 김수온(金守溫)과 함께
세종을 도와 내원당을 짓고 법요를 주관했다.
또한 복천사를 중수하고 그곳에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했다.
이공으로 문종은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에 임명 하였다.
문종과 수양대군 등이 세종을 지성으로
시탕(侍湯)하였으나 효험이 없던바 신미대사로 하여금 약을 쓰게 하니 완쾌하였다.
그로부터 세종은 신미대사와 가까워 졌고
신미대사의 박식(博識)함에 감탄하고 인물됨에 매료되었다.
세종은 신미대사에게 혜존각자(慧覺尊者)의
호를 내리려 하였으나 병으로 내리지 못하고 문종에게 유교를 내리니 문종은 선왕의 뜻을 받드려
왕에 오르자 사호(賜號)하니 「慧覺尊者」라 했다. 특히 세조와는 수양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세조는 왕위에 올랐어도 꼭 尊者라 불렀고 국사로 모셨으며 세조7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신미대사를 우두머리로 효영대군(孝寧大君)과 김수온(金守溫) 등에게 불서를 언해하고 간행함에 100종에 이르렀다.
신미대사(信眉大師,1403~1480)
호: 혜각존자(慧覺尊子)
본명: 김수성(金守省) 조선전기의 승려, 유.불학자, 집현전학사, 한글학자, 실담어학자,불경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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