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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만지며 살아요 = 마태복음9;20-22(종려주일)
PW : 믿음 BIW : 겉옷을 만지라 AG : 혈루증여인
TS : 믿음이란 주님의 십자가를 만지는 것이다.
사실...나 붕어빵이야
빨강 붕어, 파랑 붕어, 노랑 붕어가 피검사를 하러 병원에 갔습니다.
빨강 붕어는 빨간 피가 나오고, 파랑 붕어는 파란 피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노랑 붕어는 노란 피가 나오지 않고 검은 피가 나왔습니다.
친구 붕어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자 노랑 붕어가 하는 말!
“사실...나 붕어빵이야...”
붕어빵에는 붕어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붕어빵에는 맛있는 팥고물이 들어 있습니다.
붕어빵에는 정성이 듬뿍 들어 있습니다.
붕어빵에는 먹는 이의 기쁨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붕어빵에는 나눠주는 이의 행복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믿음은 붕어빵입니다.
믿음은 붕어빵으로 기쁨도, 행복도, 삶의 여유도 나눠주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붕어빵으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붕어빵으로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P4.
전통유대인들이 통곡의 벽이나 회당에서 기도하거나 토라를 낭독할 때, 긴 숄로 온 몸을 감싸서 기도하는 모습을 사진이나 동영상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이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의 주간이기 때문에 TV에서 성화(聖畫)를 많이 방영하게 된다.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한 주간은 주님의 고난주간이고, 다음 주에는 부활주일이기 때문에 성화를 방영하게 된다.
영화에서 보면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긴 숄을 걸치고 있는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것을 ‘기도숄’ 또는 ‘찌찌트’라고 부른다.
이 찌찌트에는 네 개의 줄이 매달려 있다.
네 개의 줄이 매달려 있는 것을 옷단술이라고 부른다.
옷단술은 모세5경, 토라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드시 지켜야 된다고 가르치는 613개의 율법, 계명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옷단술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지키라고 하신 계명들을 묵상하면서 계명들을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한다.
이 찌찌트가 우리 한글성경에서는 겉옷이라고 해석되어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찌찌트는 그 사람의 신분을 상징한다.
그 사람의 신분에 따라서 찌찌트의 품질이 다르다.
왕이나 대제사장, 일반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일반 평민들이 입는 찌찌트가 어딘가 모르게 품질이 다르다.
유대인들이 찌찌트, 겉옷을 입으면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찌찌트, 겉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그래...너는 내 백성이구나. 내 자녀로다.”라고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 남자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반드시 찌찌트를, 겉옷을 입어야만 한다.
결혼하는 새신부가 새신랑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 바로 겉옷, 찌찌트, 기도숄이다.
성경에서 겉옷이라는 단어가 신구약을 통해서 수없이 등장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겉옷이라는 단어를 보게 되면 흔히 우리들이 입고 있는 외투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성경에서 등장하는 겉옷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외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 찌찌트는 그 사람의 신분을 상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함부로 만질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찌찌트를 만지게 되면 큰 실례와 수치가 된다.
가령 예를 들어서 옛날에 우리나라에 긴 수염을 기르신 어르신들이 많다.
사극에도 보면 왕을 비롯하여 대소신료들, 장군들은 긴 수염을 기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수염이 그 사람의 신분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대감님..., 어르신...수염이 참 멋지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러면서 그 수염을 만진다면 옳은 행위일까?
그런 행위는 있을 수 없는 행위이다.
수치와 수모를 가져다주는 행위이다.
절대로 남의 수염을 만져서는 안 되는 것이 올바른 예의이다.
그렇듯이 찌찌트도 다른 사람이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되는 것이 명예요 기본적인 예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찌찌트를 만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바로 가족이다.
가족은 얼마든지 만져도 된다.
어르신의 수염도 가족이면 만질 수 있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안고 있으면 손주가 ‘할아버지, 수염이 참 멋지다.’ 그러면서 할아버지의 수염을 만질 수 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허 허...고녀석!’ 하면서 좋아라 하신다.
그런 것처럼 유대인들에게도 찌찌트는 자기 가족은 만질 수 있다.
그러나 가족이 아닌 제삼자는 절대로 찌찌트를 만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요 이스라엘백성이기 때문에 항상 겉옷을 걸치고 다니신다.
특별히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신분을 상징하는 겉옷, 찌찌트를 걸치고 다니신다.
예수님께서 몇 몇 제자들을 데리고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고 있다.
회당장의 딸이 지금 죽을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함에 따라서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으로 가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야이로의 집으로 가고 있는데 어떤 여인이 등장한다.
이 여인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다.
혈루증은 여인에게만 있는 질병이다.
남성에게는 없는 질병이다.
여인들이 생리를 할 때 출혈하게 된다.
규칙적으로 생리할 때 출혈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부정하다고 여긴다.
하나님 앞에서는 피를 흘린다는 것 자체가 부정한 것이다.
피는 생명이기 때문에 절대로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입었거나 여인들이 생리를 할 때 피를 흘리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것, 정결한 것이 아니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규칙적인 출혈도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것이 되는데, 혈루증은 불규칙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출혈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여인이 되지 못하고, 부정한 여인이 되는 것이다.
혈루증을 앓게 되면 부정한 여인이 되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온전한 사람, 정결한 사람이 되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가서 제물을 드리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삶의 최대 목표이다.
그런데 혈루증을 앓기 때문에 부정한 여인이 되고, 성전에는 아예 들어갈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하고 심판받게 된다고 의식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인은 혈루증을 고침 받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하든지 혈루증을 고침 받으려고 노력한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여인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으면서 혈루증을 고치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던 여인이다.
가지고 있던 모든 재물을 오직 혈루증을 고치는데 사용했던 여인이다.
그런데 혈루증을 고치기는커녕 이제는 빈털터리가 된 여인이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병원에 가서 수술도 받고, 치료도 받는데, 치료되기는커녕 죽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저의 아버지도 무릎 수술을 하러 갔다가 이제는 천국으로 가야 되는 상황까지 되었다.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아주 흔한 일이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은 이제 질병을 고치려고 해도 더 이상 병원에 갈 비용도 없고, 약값도 없어서 고칠 수 없는 상황까지 된다.
여인은 이제는 이렇게 부정한 여인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하고 살다가 죽는 길밖에 없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성전으로 올라가서 제물을 드리면서 제사드리는 믿음의 여인이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제는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던 찰라에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기 마을을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유대인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찌찌트를 만져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유능한 사람, 유명한 사람의 찌찌트에 달려 있는 옷단술을 만지게 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옷단술을 만진 사람에게로 넘어온다는 미신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가령 승천하는 엘리야선지자의 겉옷을 받은 엘리사선지자에게 엘리야 선지자의 능력과 은혜가 넘어간 것처럼 유능한 사람의 옷단술을 만지게 되면, 그 능력이 옷단술을 만진 사람에게로 옮겨진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알고 있었던 여인에게 능력의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문이 들려오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여인의 마음속에 ‘혹시 내가 저 예수라는 사람의 찌찌트에 달려 있는 옷단술을 만질 수 있다면 저 유명한 사람의 능력이 나에게로 전달되어서 이 지긋지긋한 혈루증을 고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번쩍 든다.
그러면서 ‘한 번 만져볼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지만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에 달려 있는 옷단술을 만질 수 없다.
왜냐하면
① 난 부정한 여인이다.
부정한 여인이 다른 사람을 만지게 되면 다른 사람도 부정하게 된다.
나로 인해서 그 사람들이 부정하게 되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된다.
② 12년 동안 아무리 고치려고 용을 써도 안 되었는데...
예수님의 옷단술을 만진다고 뭐가 달라지기라도 할까?
확신할 수 없다.
③ 난 지금까지 12년 동안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한 여인이다.
버림당한 여인이 뭐라고 예수님의 옷단술을 만질 수 있단 말인가?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불편과 부정함을 안겨준다면 안 되는 것이다.
부정한 여인으로 사는 것은 나 혼자면 된다.
고생은 나 혼자면 충분하다.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까지 피해를 주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다.
D4.
① 소문이 되어 찾아오시는 예수님.
인류의 영혼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시는 예수님은 12병 동안 혈루증을 앓으면서 온 마음도, 몸도, 영혼도 지쳐버린 여인에게 여인이 머물고 있는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이 되어 찾아가신다.
예수님은 유명한 사람의 옷단술을 만지면 그 유명한 사람이 가진 능력과 권세가 병을 치료하는 능력이 된다는 생각이 되어 여인에게 찾아가신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유명한 사람, 넘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 지치고 주저 앉아버고 삶을 포기해 버린 여인에게 찾아가신다.
예수님은 여인을 믿음의 여인으로 세워주시기 위해서 찾아가신다.
예수님은 여인을 통해서 영광과 경배를 받으시기 위해서 찾아가신다.
예수님은 여인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고백을 듣고 싶어서 찾아가신다.
소문이 되어 찾아가시는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각종 소문이 되어 찾아오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소문은 소문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그 소문이 진짜 진실이 되어 찾아오는 경우도 많다.
우리들은 다른 소문은 듣지 않아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 하늘 아버지에 대한 소문, 하늘의 신령한 소문, 구원에 대한 소문,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소문은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에 대한 그 소문이 우리들이 가진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지름길이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② 능력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를 비롯하여 제자들과 따르는 많은 무리들 속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고 계신다.
여인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여인의 마음에 예수님의 옷단술을 붙잡으라고 감동을 주신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아무도 모르게 살짝 예수님의 옷단술을 붙잡으라고 감동을 주신다.
여인은 마음에 생긴 감동으로 아무도 모르게 수많은 무리들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여인은 아무도 모르게 믿음으로 살짝 예수님이 입고 계시는 겉옷에 매달려 있는 옷단술을 붙잡는다.
믿음으로 여인이 예수님의 옷단술을 붙잡았을 때, 여인은 순간 자신의 몸에 뜨거운 전율을 느낀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단술을 붙잡는 순간에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전율을 느낀다.
그러면서 12년 동안 자신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혔던 혈루증이 바짝 말라버리는 느낌을 받는다.
예수님의 능력은 12년 동안 앓아왔던 모든 혈루증 근원까지도 말라버리게 만들어주신다.
이제는 더 이상 혈루증이 재발되지 않겠나 하는 염려하고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완전히 혈루증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된다.
여인은 이제는 더 이상 혈루증 때문에 받아야 되는 수모와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
여인은 이제는 마음껏 자유인이 되고, 의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정결한 믿음의 여인이 된다.
이제는 더 이상 부정한 여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건, 누구앞에서건 정결한 하나님의 딸로 회복되어진다.
여인이 혈루증에서 온전히 치료받음으로서 남편을 비롯하여 자녀들, 온 가족들, 친족들, 이웃들이 좋아라 한다.
여인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신이 치료받은 능력을, 메시야아신 예수님을 전하는 여인이 된다.
밤낮으로 주님의 십자가와 복음을 전하는 여인이 된다.
혈루증 여인에게 능력이 되어 찾아가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능력이 되어 찾아오신다.
우리들의 질병에도 능력이 되어 찾아오신다.
우리들의 아픔에도 능력이 되어 찾아오신다.
우리들이 당하는 고통과 시련과 온갖 어려움에도 능력이 되어 찾아오신다.
이제 우리들도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단술을 붙잡으면 우리들에게 능력이 되어 찾아오신 예수님의 권능, 권세, 능력이 치료해 주신다. 해결해 주신다. 풀어주신다.
③ 가족으로 받아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의 능력으로 여인이 치료받았을 때, 예수님은 가시던 걸음을 멈추신다.
예수님은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신다.
아무 것도 모르는 제자들은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에워싸 있는 것을 보면서 “무리가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십니까?”라고 반문한다.
예수님은 여인으로 하여금 고백을 들으면서 영광과 경배를 받으시기 위해서 여인에게 물으신다.
여인은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의 옷단술을 만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예수님께서 알고 계시는 모습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두려움에 벌벌 떨게 된다.
여인은 예수님 앞에 엎드리면서 그 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을 고백한다.
여인은 자신이 혈루증 여인이었단 사실을 고백함으로서 이제는 돌에 맞아 죽는 일만 남았다고 두려워한다.
부정한 여인이 수많은 사람들을 밀치고 예수님의 옷단술을 만졌기 때문에 여인과 부딪친 모든 사람들은 부정하게 되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부정하게 된 사람들은 너무나 화가 치밀어서 부정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이다.
이럴 때에 예수님께서 여인을 향하여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 여인을 딸로 인정해 주신다.
다른 사람은 예수님의 옷단술을 만져서는 안 되지만, 딸은 얼마든지 예수님의 옷단술을 만질 수 있다.
비록 딸이 혈루증으로 인해서 부정한 여인이라 할지라도 딸이라는 신분으로 아버지의 옷단술을 만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인을 자신의 딸, 하나님의 딸로 인정하시면서 돌에 맞아 죽임 당할 위기에서 구해 주신다.
그러면서 온전히 하나님의 딸로서 구원받았다고 선포해 주신다.
인류의 메시야아신 예수님의 선포는 그 어떤 무리들도 여인을 해칠 수 없다.
악한 마귀들도, 흉악한 영들도 감히 예수님의 딸을 공격할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신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님으로, 구세주로, 메시야로 영접한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
우리들이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예수님의 가족이 된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 예수님의 가족이 된 권세, 영광, 능력을 누리며 살면 된다.
믿음으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 예수님의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끝까지 지켜주신다.
그 어떤 악한 세력들, 마귀, 사탄이 우리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온다 해도 우리들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근신걱정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 예수님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세상을 이기신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죄악을 이기셨고, 마귀, 사탄, 어둠의 세력들들을 이기셨고, 죽음의 권세까지도 이기신 분이기 때문에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거나 근심걱정할 필요가 없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면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 전화위복시키시는 하나님, 역전의 명수이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요,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승리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자부심, 자존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면 된다.
L4 & B4.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붙잡으려고 했던 예수님의 옷단술은 우리들에게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이다.
혈루증 여인이 붙잡으려고 했던 옷단술이 우리들에게는 주님의 십자가이다.
오늘은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위하여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으로 입성하시는 종려주일이다.
이제 한 주간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시기 위하여 가룟 유다가 은 30세겔에 예수님을 팔아넘기면서 예수님은 로마병사들에게 붙잡히고 온갖 고초를 당하시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주님의 고난주간이다.
우리 주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신 뜻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지상세계에 내려오셔서 온갖 고초와 시련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하늘 아버지의 구원을 온전하게 이루어내신 주님의 고난주간이다.
우리 주님의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오직 예수님만,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오직 주님의 십자가 복음만 묵상하면서 깊게 주님을 만나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한다.
주님의 고난주간에 우리들이 묵상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밖에 다른 것은 없다.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단술을 바라보며 만져서 온전히 주님의 거룩한 딸로 회복시켜주실 뿐만 아니라 12년 동안 지긋지긋했던 혈루증의 근원이 완벽하게 말라버리고 고침을 받은 것처럼, 우리들은 주님의 십자가만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세움을 입게 된다.
주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봄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권세와 권능으로 모든 허물과 죄악과 질병과 온갖 종류의 문제덩어리들이 한꺼번에 해결되어지는 은혜를 입게 된다.
주님의 십자가가 어떤 이들에게는 무익한 것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통나무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우리들에게는 유익하고, 모든 것이 되어주시고,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이다.
주님의 십자가만이 유일한 희망이요 소망이요 비전이요 능력이요 회복이요 모든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사람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가는 사람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를 품에 안고 가는 사람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면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사람이, 신앙인이라는 사람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주님의 십자가를 만지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주님의 십자가가 없다면 절대로 구원의 길은 열리지 않는다.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으면 신앙인이 될 수 없다.
십자가를 붙잡지 않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니다.
십자가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도, 예수님의 가족도 아니다.
이단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가장 싫어한다.
이단들은 자신들의 교주와 교리만을 쫓아간다.
주님의 십자가를 싫어하고 경멸하는 이들은 결코 주님의 가족이 될 수 없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붙잡고 묵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주님의 고난주간을 맞아서 우리는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을 붙잡고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주님의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우리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고 그 십자가를 만나야 한다.
그 십자가를 만지면서 우리들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우리의 불안과 초조함과 우울증과 모든 질병들을 그 예수님의 십자가에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들은 믿음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자.
믿음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품에 품고, 짊어지고, 주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우리들도 걸어가자.
믿음이란 주님의 십자가를 만지는 것이다.
믿음이란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것이다.
믿음이란 주님의 십자가 안에 살아가는 것이다.
와우리교회 http://cafe.daum.net/GRACEOF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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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출판되어진 책이 아니라 제본된 교재입니다.
① 프레임설교의 이론과 실제(1권, 2권)
② 청중마음열기(유머편, 예화편)
③ 감으로 읽는 성경이야기
④ 은혜로운 물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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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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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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