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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뫼님의 문화재탐사 스크랩 장안사(長安寺) - 부산광역시 기장군 불광산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85 14.08.02 11: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부산광역시 기장군 불광산의 장안사(長安寺)

 

 

우리 나라에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고 나서 국태민안을 염원하기 위해서 지은 장안사(長安寺)라는 절이 3곳에 있다. 부산 기장군 불광산의  "장안사(長安寺)" , 경북 예천 비룡산의  "장안사(長安寺)" , 그리고 북한 금강산 장경봉의  "장안사(長安寺)" 이다.

 

 

부산 기장 장안사

 

 

부산 기장의  "장안사(長安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673년(문무왕 16)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쌍계사(雙溪寺)라 하였으며, 신라 제40대 애장왕이 다녀간 뒤 장안사(長安寺)" 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장안사는 신라 문무왕 13년(673년) 원효대사가 척판암(擲板庵)과 함께 창건했다고 한다.  창건 당시는 쌍계사로 불리다가 신라 애장왕 10년에 장안사로 고쳐 불렸다. 애장왕은 세 개의 옥으로 만든 기와(玉瓦)를 장안사에 하사했다고 전한다. 이 옥와는 일제강점기까지 전해졌으나 절도범이 가져가 깨서 버렸다고 한다(1932년 4월 14일 자 동아일보 기사 내용).

고려시대의 역사는 분명하지 않으며,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1638년(인조 16) 태의(泰義)가 중건하였고, 1654년(효종 5) 원종·학능(學能)과 충묵(?默)이, 1948년에 각현(覺玄)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왼쪽 뒤편에 산신각(山神閣), 왼쪽에 응진전(應眞殿), 오른쪽에 명부전(冥府殿)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 앞쪽에 불광전과 해동전이 있다. 명부전과 불광전 뒷쪽에 극락전이 있으며 그 밖에 산신각과 종무소 등이 있다.

 

장안사에는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기장 장안사 대웅전(보물 제1771호)' '석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제1824호) 이외에도 '장안사 응진전 석조석가삼존십육나한상, '장안사 명부전 석조지장시왕상', '장안사 대웅전 석가영산회상도', '장안사 응진전 석가영산회상도', '장안사 명부전 지장보살', '장안사 명부전', '장안사 응진전'이 시지정유형문화재이며  '장안사연은 시지정 민속자료 제5호로 등록되어 있는 등 지정문화재가 많다

 

 

 

 

최근의 장안사 시굴조사(2012년)에서 통일신라시대에 건물을 세울 때 항아리를 매납한 지진구(건축물의 기단부를 조성할 때 땅속에 있는 나쁜 기운을 진압하려는 목적으로 넣어지는 진귀한 물건)가 발견되었고,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 전·중기에 이르는 건물지와 기단 등을 확인하여 장안사의 창건이 통일신라시대임을 명확하게 확인한바 있다. 지형을 평탄화 하기 위해 매립한 문화층이 발견되었는데 문화층 위에는 조선 초인 15세기로 추정되는 수동의 건물지와 기단이 확인되었고, 분청사기가 출토되었다.

 

장안사와 함께 건립된 척판암은 원효대사가 거처하던 중 중국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 대웅전이무너지는 것을 도력으로 알고  '해동원효 척판구중'(海東元曉 擲板救衆)이라 쓴 현판을 날려 사람을 구했다는 설화가 담긴 암자이다. 장안사에서 북쪽으로 1.3㎞.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척판암이 위치한다. 

 

 

천왕문 겸 종루

 

 

대문에 그려진 금강역사상

 

사천왕상

 

 

장안사(長安寺) 입구의 불광교 를 지나면 사찰 입구가 나오고 2층 지붕으로 만들어진 종각 겸 천왕문이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일주문은 없으며 누각의 대문에 금강역사상이 그려져 있고 안쪽 벽면에 사천왕상이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법당 앞의 정원에는 높이 2.5m 정도의 단풍나무가 있는데, 뿌리 부분의 둘레가 80㎝나 되는 특이한 나무로서 무수한 가지들이 불꽃이 피어오르듯 엉켜서 올라가는 모양을 취하고 있다. 오랜 세월 정성을 들여 분재한 뒤 이식한 것이라고 한다.

단풍나무 아래에는 입상의 달마대사상이 웃으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서 있다

 

 

 

대웅전 앞에는  3층석탑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리 하고 있다.

흰색의 화강암으로 근간에 만들어진 2층 기단의 삼층석탑으로 상륜부까지 완전히 갖춘 석탑이다

이 석탑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7과를 모시고 있는데, 불기 2523년 해경선사가 태국에서 모시고 와서 불기2535년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 보물 제1771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 모양이다. 다른 사찰의 대웅전에 비해 가로 폭은 조금 작아 보이지만 높이는 훨씬 높다. 이 절 관계자는 "대웅전 바닥에서 천장까지 족히 9m는 된다"고 한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여래삼존불과 후불탱화(後佛幀畵)·신중탱화(神衆幀畵) 등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2009년 두 번에 걸친 사전 조사가 있었는데 . 그때 중건 당시 건축 기록인 '순치십삼년기종도리묵서명(順治十三年記宗道理墨書銘)'을 발견해 정확한 건립연대(1657년·조선 효종 8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상량문 속에는 ‘청나라 순치 13년 기장군 북면 불광산 장안사 법당 대웅전을 정유년 2월4일 산에서 나무 베는 일을 끝냈고, 5월12일 기둥을 세웠으며, 6월7일 들보를 올렸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임진왜란 중 장안사는 모두 불타고 1657년에 대웅전을 중건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특히 고풍스러운 천장 단청은 중창 때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우물 천장에는 용문, 연화문, 태극문 등의 문양도 어렴풋이 보이는데  단청의 성분조사 결과, 건립 당시에 채색된 천연광물 위주의 전통안료가 잘 남아 있으며 적외선 조사에서도 덧칠(개칠)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대웅전은 부산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다포식 건축물로, 곡이 강한 지붕과 공포의 짜임새, 창호 구성 등도 독특한 건축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 주요 구조재와 단청이 중창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건축사적.학술적으로 가치가 높다고 한다.
절에서는 대웅전이 보물로 지정되고부터  화재 예방차원에서 사시(巳時) 예불을 제외하고는 촛불을 커지 않는다고 한다. LED를 제외하곤 일반 전기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겨울이면 내부가 춥지만, 방문객들도 이를 감내해야한다고 한다.

대웅전(1657년)은 2012년 8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771호로 지정되었다.

 

 

 

석조석가여래삼불좌상 - 보물 제1824호

 

 

 

2014년 4월 보물 제1824호로 지정된 '기장 장안사 석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17세기 중엽에 활약한 '녹원(鹿元)'이 수조각승(首彫刻僧)을 맡아 1659년에 불석(沸石)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삼세불은 방형의 수미단 위에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와 아미타불을 갖춘 석조삼세불좌상이다. 불상을 안치하고 있는 불단을 수미단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비와 지혜의 빛을 발하고 있다는 불교의 세계관을 상징하는 것이다.

 

삼세불의  보존 상태는 파손 또는 결실된 부분 없이 양호하며, 불상 전면은 최근에 도금하여 금색이 찬연하다. 
본존 석가여래상은 턱이 짧은 방형(方形, 네모반듯한 모양)의 얼굴에 콧날이 우뚝하고, 부드럽고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있는것이 특징이다. 

삼세불상의 재질은 조선 후기 19~20세기에 영남 지역에서 많이 사용하였던 경주불석(일명 옥석)으로 판단된다. 손은 나무로 별조하여 끼운 상태이다. 이마 중앙의 백호는 수정을 넣었다.

삼세불상 모두 좌상이며 석가여래상의 크기가 가장 크고, 우측의 아미타여래에 비해 좌측의 약사여래가 약간 큰 편이다.

 



현재까지 지정된 문화재 가운데 17세기 삼세불상은 20여 점 정도로 대부분 목조불상이며, 석조불상은 1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장안사 대웅전 석조삼세불상은 특징적인 표현기법 뿐만 아니라 대화원 녹원(鹿元)이 1659년에 조성한 절대연대를 가진 귀중한 작품으로 부산 지역 사찰에 있는 조선시대 기년명 불상 가운데 지금까지 순치 18년(1662)의 희장이 만든 동래 범어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보물 제1526호, 총높이 134.2㎝)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장안사 삼세불상은 이보다 3년이나 앞선 작품이며, 조성 연대와 작가가 밝혀져 있어 17세기 중후반 불교 조각사 연구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대웅전 마당의 광명대

 

대웅전 주련(柱聯)에는 '부처님의 몸은 법계에 충만해 널리 일체중생의 눈앞에 나타나시니 인연에 따르고 감동을 좇아 두루 계시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늘 이 보리좌에 계시다(佛身充滿於法界/普現一切衆生前/隨緣赴感靡不周/而恒處此菩提座)'란 글귀가 쓰여 있다.

 

 

응진전

 

 

맞배지붕애 정면 3칸 측면 2칸의 크기로 18세기에 지으진 건물이다

1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목조 석가여래삼존불을 비롯하여 16나한상 , 신상(?)  2위가 봉안되어 있다

가운데 삼존불이 있고 좌우에 8명씩의 나한상이 배치, 몸체 전체에 호분이 칠해져있고 법의는 다양한색깔로 치장되어 있다

응진전의 23구 조각상은 대웅전의 불상처럼  무른 불석을 사용한 것으로 보여지며 대웅전 불상보다 25년후에 조성된 것이라 한다. 

뒷벽의 후불탱화는 해인사에 화승으로 활약한 기전(琪銓)과 의관(宜官)에 의해  1882년(고종 19년)에 조성하여 봉안한 석가영산회상도(釋迦靈山會上圖)로서 화면 젼체를 붉게 칠한 뒤 흰색과 노란색으로 윤곽을 그리고 인물의 얼굴과 대좌 일부분만을 채색한 홍탱(紅탱)이다

 

 

 

 

중앙의 석가여래ㆍ제화갈라ㆍ미륵보살 등 석가삼세불좌상과 16나한상은 파손되거나 결실된 부분이 없이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불신(佛身) 전체에 호분이 칠해져 있으며, 16나한상과 권속들의 법의는 다양한 색깔로 채색되어 있다.

응진전 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들은 복장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하는 기문에 의해 1684년 (康熙 23)에 양공 승호(勝湖), 희연(熙衍), 천휘(天輝), 천담(天潭), 법자(法?), 법종(法宗), 수종(守宗), 허지(虛芝), 도신(道信) 등 9명이 관여하여 장안사에서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장안사 응진전 석가삼존불상과 16나한상 및 권속은 조성시기와 봉안처, 조성자 및 시주자 일원이 명확한 17세기의 중요한 작품이며, 조성자로 밝혀진 良工의 명단은 아직 작품이 밝혀진 바가 없으므로 부산,경남지역 불교조각승의 연구에도 도움이 된다.

 

명부전 출입문 기둥 옆의 석수

 

 

극락전

 

 

 

 

극락전에는 누워있는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흔히 '와불'이라고 하는 정확한 명칭은 '석거모니열반상'이라고 한다. 불기 2545년에 극락전 와불 부처님 복장에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봉안하였다.

 

이곳에 봉안된 부처님 진신사리는 미얀마 마운매이 사찰의 원로 의장인 고승 '우뚜리야 샤야도우' 스님이 장산스님께 봉정한 것을 열반상 복장에 봉안한 것이다

?

 

 

극락전 앞에 있는 석주

석주의 머리에는 해태로 보이는 동물이 앉아 있으며

사찰의 액운을 막기위한 비보사상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절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대나무밭이 이어지고 사이의 오솔길을 따라가면 5기의 부도와 파손이 심한 석불 1기가 앉아 있다

 

 

 

 

 

 

 

 

 

※ 예천 장안사

 

 

 

 

신라신라가 삼국을 통일한뒤 국태민안을 염원하여 전국 세곳의 명산에 장안사를 세웠으니, 금강산과 양산 그리고 이곳 국토의 중간인 예천군 용궁면 비룡산 장안사이다.

창건은 신라 경덕왕때(759) 운명조사이며, 그 후 고려 명종때의 지도림 화상, 조선 인조 5년(1627) 덕잠대사, 영조 31년(1755) 법림대사 등 고승 대덕들이 주석하면서 중창하였다.

근래에는 두타화상(頭咤和尙)이 약관의 나이로 수행정진차 전국을 행각 하던중 사세(寺勢)의 퇴락함을 보고 이곳 지역 신도들과 힘을 모아 오늘의 가람을 일으켰다고 한다(1984~1992),

과거에는 본당이 극락전이었으며 아미타삼존불을 모셨으나 지금은  대웅전이 본당(本堂)이며 석가여래,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모시고 있다,

고려의 문인 이규보선생이 장안사에 머무르면서 글을 지었으며, 또한 지역의 많은 인물들이 이 도량에서 원(願)을 성취하고 밖으로 역량을 발휘하기도한 유서깊은 도량이다.

 

 

 

※ 금강산 장안사

 

 

본전의 편액에는 사성지전(四聖之殿)이라고 적혀있다

 

강원도(북한) 금강군 내강리 금강산 장경봉(長慶峯) 아래에 있는 절로서 북한 국보96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금강 입구에서 만천을 따라 약 2km 가면 비홍교(만천다리) 건너편에 장안사터가 있다. 이곳은 내금강 만폭동에서도 명승지로 유명한 곳이다.

'동국여지승람' 회양군조에는 ‘표훈사 아래에 있고 법당과 불전과 불상은 다 중국의 기술자가 제작한 것이다.’고 하였고 신라(新羅) 법흥왕대 (514∼540년)에 창건하고 고려 성종대(981∼997년)에 중흥한 절임을 기술하고 있다.

'여지도서'에서는 ‘금강내산에 있고 비홍교가 있어 높고 장관을 이루고 건물이 300간(間)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 절은 금강산의 4대 사찰의 하나로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고려 때에 70여 채의 건물이 있었지만,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

사찰의 배치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구역과 사성전을 중심으로 한 구역의 두 영역으로 나뉘어 건물을 배치하였다.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구역에는 남향의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그 앞 좌우에 동서향으로 각각 한 채씩의 건물이 배치되고, 남쪽에는 정면 5칸 누문인 신선문이 서 있었다.

대웅보전 동편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란히 있는 사성전을 중심으로 한 배치도 대웅보전의 배치와 같고 앞에는 법왕문이 있었다. 이렇게 2개의 축을 갖고 2개의 중층 법당과 2개의 누각 건물을 둔 것은 특이한 점이다.
이 절의 중심 건물인 대웅보전은 2층으로 된 다포형식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장대석으로 된 기단 위에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상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층의 내진주를 고주로 올려 중층을 이루었다. 공포의 장식은 간결하게 처리하여 조선 중·후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상층에서도 이와 비슷한 기법을 보이지만 용머리를 조각하였고, 내부 충량 끝에도 용머리를 조각하는 등 표현이 화려하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하였고, 정면에는 꽃살문으로 창호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사성전은 대웅보전과 같이 2층으로 되어 있고, 주칸의 배열도 대웅보전과 같이 장대석으로 된 기단 위에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상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사성전은 2층의 기둥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낮추어, 밖에서는 창방과 평방 위에 포작이 바로 놓인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공포는 대웅보전보다도 더욱 견실하고 투박하게 깎아 밑으로 처지게 하였다. 이 건물은 대웅보전보다도 앞선 시기의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대웅보전과 사성전 내부에는 불단 위에 17포나 되는 화려한 닫집을 짜서 올리고 단청은 금단청으로 장식하였다. 두 건물의 특징은 양끝의 귀협칸의 폭이 어칸과 양협칸의 폭보다 월등히 적어 입면의 구성을 매우 다르게 하였다는 점이다.

두 건물 모두 한국전쟁 때에 소실되어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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