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초
양문규
처서 지나고
모깃소리 들릴락 말락 할 즈음
이별초 폈냐?
엄니 전화하신다
이별초라니,
여든 살 넘어도 이별은 늘 그리움이려니
무른 살과 아픈 뼈 마디마디 바쳐
여여산방 마당 귀퉁이
노란 상사화 핀다
한마음 잊을만하면
저녁노을 저 너머
젊은 엄니 홀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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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하였다> 양문규 2017 시에시선, 16-17쪽
강규의 시감상
1.이별초: 상사화의 딴이름이다. 불교경전 속의 인용빈도가 높은 식물이기도하다.
석산 또는 환금화, 가을가재무릇, 지옥꽃, 용조화, 중꽃 등의 이명에서 알 수 있듯이
가을에 잎이 올라와 월동을하고 봄에 잎이 지고난 후 추석 즈음에 붉은 꽃을 튀운다.
독신의 삶에 대한 신세에 빗대어 중꽃이라 불린다고 한다. 절에서 재배를 하였다고 하는데
경전의 제본, 탱화의 표구, 고승들의 진영을 붙이는데 접착제로 사용한다한다. 비늘줄기
부위는 약용으로 쓰일 때 석산이라고 한다. 알칼로이드계 독성을 가지며 제토나 창상에
쓴다고 한다.
2. 인도사람들은 천상계의 꽃, 만수사화, 피안화로 부르며 비장미를 가미하는 듯하다.
꽃말의 대략은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이른바 Sad Memories 이다.
물론 서양의 분류체계에 따르면 수선화과에 속한다.
3. 시감상의 즐거움은 허투루 본 대상을 재발견하게하고 재사유하는 단초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한 때 젊음의 시절에는 외양만 보다가 시인의 나이가 한 갑자가 될 때는 깊은 시선을
단숨에 포착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밤 공광규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시의 격이 한층 정중동과
'여여'의 미학에 더 높아진 한 절정을 본다는 데 심히 공감한다. 아마도 같이 노쇠해가며
성찰하는 동년배의 동병상련이라고 본다.
질풍노도의 시절의 계절을 다 보내고 한없는 지순과 묵음의 경지의 입도이기도 할 것이다.
4. 시어의 편안한 조율 또한 미덕이요, 미학이다.
젊은 시인들의 시어 선택이 현학적 대뇌를 희롱하는 데 가끔 지치는 독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한없는 편안함과 친근감(이영광 시인은 울림, 떨림, 으로 표현하지만)이 우리의 척수와 파토스를
쥐어짠다.
가을은 본시 일조량이 줄어들면서 뇌하수체의 시상하부에 조화를 작동시킨다. 일본 영화의 벚꽃
의 전체주의식 쇠락보다 외로운 꽃대가 피우는 가을 꽃, 그런데 붉은 꽃이 아니라 노란 꽃이다.
색은 이데올로기의 표상 혹은 재현의 복선이 되기도하고 개별적인 기억의 환유를 장악하기도
한다.
가을 노을을 볼랴치면 그 속에 붉음과 진노랑이 서로 보색을 이루며 시선과 마음을 붙잡는다.
그러나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제, 나 또한 젊은 날의 어머니를 어둠 속에서 본다.
5. 시집 한 권에 수작이 너무 많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나는 이별초를 흥얼거린다.
지난 밤의 과욕과 흥분을 반성하면서 숙취에 도움되는 감상을 기록한다.
노을처럼 부질없더라도 우리는 글쓰는 사람들 아닌가.
부디 새해 우리 회원 모두 즐거운 시쓰기, 가슴 아린 쏟아붇기, 서로 동병상련하는
해를 기원드린다.
<지난밤 창식형님께 응석부린 과욕을 하해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