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여요전쟁(麗遼戰爭, 고려-거란 전쟁)에 대해 ARABOZA
https://www.ilbe.com/view/11580149810#rs
2차 여요전쟁(麗遼戰爭, 고려-거란 전쟁)에 대해 ARABOZA
https://www.ilbe.com/view/11581075375#rs
<3차 여요전쟁 전개과정>
1. 거란 성종 야율융서(耶律隆緖)는 2차 여요전쟁 당시 고려에서 인질로 데려온 하공진이 마음에 듦.
아내를 얻어주고 연경(현재의 베이징)에 살도록 함.
2. 하지만 하공진은 준마를 여러 필 사서 고려로 돌아갈 궁리를 함. 눈치 챈 성종 앞으로 불려간 하공진.
하공진: 사실이옵니다. 제가 본국인 고려를 배반할 마음이 없으니 그 죄가 죽어 마땅하오나 살아서 폐하를 섬기고 싶은 생각은 읍사옵니다.
성종: (오 완전 충신인데, 저번에 강조도 그러더니...) 다시 한번 생각해보거라.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
하공진: 거 참 예의를 갖춰 말하니까 말귀 못말아듣네. 너님을 모실 생각 없다고요 전~혀!(실제로 성종을 단념시키기 위해 무례하게 말함).
성종: ...... 죽여라.
3. 성종은 생각할수록 짜증이 남. 하공진의 일도 그렇고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석달동안 고려를 쳤지만(2차 여요전쟁) 얻은게 없음.
모후(소태후)가 처음 군사를 일으켰을 때 서희의 세 치 혀에 강동 6주만 넘겨준 셈이 됨(1차 여요전쟁).
4. 고려 사신을 맞이한 성종.
성종: 친조(親朝, 제후국의 왕이 황제국의 황제를 직접 알현하러 감)하겠다던 고려 왕은 어째 소식이 없느냐? 고려 사신은 답해 보라.
고려 사신: 우리 전하께오선 오고 싶어 하시나 병을 얻어 먼거리 이동이 어렵사옵니다.
성종: 또 그 소리냐? 고려왕은 기어이 짐을 희롱하겠다는 것이냐?
5. 성종은 강동 6주를 되찾아야겠다고 마음 먹고 거듭 사신을 보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함.
고려가 들어줄 리 만무.
6. 이에 거란은 통주, 흥화진을 거듭해서 공격했고 그때마다 고려군은 막아 냄.
7. 거란은 다시 선화진, 정원진을 함락시켜 성을 쌓는 등 침략 의지를 거두지 않자 고려는 곽원을 송나라에 보내 단절됐던 외교관계를 회복함.
8. 고려 현종 9년(1018년) 겨울, 거란은 마침내 소배압(蕭排押, '고려사'에는 소손녕으로 나오나 오기로 보임)을 내세워 10만의 대군(황제 직속 중앙군 부대
최정예군이었던 우피실군 포함)을 이끌고 침략 함.
소배압은 1차 여요전쟁의 주역으로 서희와 담판을 벌인 소손녕(蕭遜寧)의 형으로서 2차 여요전쟁 때 거란 성종을 보좌해 개경(개성)까지 진입함.
9. 현종(顯宗) 왕순(王詢)은 평장사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고 20만 대군으로 이끌고 적을 막도록 함.
10. 첫 전투는 흥화진에서 벌어졌는데 고려군은 소가죽을 연결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거란군이 건너갈 때 터뜨림.
이어 미리 매복했던 기병 12,000명이 들이쳐서 대승을 거둠(삼교천 전투(三橋川戰鬪),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음).
*수공으로 쓰나미처럼 아예 적군을 쓸어버리는 것은 당시의 토목기술로 불가능하며 물이 갑자기 무릎 정도까지 차올라 적군이 당황할 때
날랜 기병으로 급습하는 것이 보통. 실제로 도하시에는 물을 건넌다는 긴장상태에다 병력이 분산되어 기습공격에 매우 취약함.
11. 소배압은 흥화진을 무시하고 바로 개경으로 진격함. 2차 여요전쟁 때처럼 함락하지 못한 성을 그대로 두고 곧장 개경으로 향하는 직도전략을 쓴 것임.
12. 기세가 오른 고려군은 적을 그냥 보내지 않았고 후미를 추격해 상당한 타격을 입힘.
13. 거란군은 가까스로 개경에 이르렀지만 지난번과 달랐는데 가옥들은 모두 철거되고 들판엔 아무것도 없었으며 고려 백성들은 모두 성안으로 들어가 버림.
고려의 이러한 청야전술(淸野戰術)로 거란군은 자칫하다간 모두 아사하거나 동사할 지경이 됨.
*개경은 평시에 수도로서의 기능을 하기엔 좋지만 사방이 뚫려있는 평야지대라 방어하기가 매우 불리함. 6.25 전쟁 때 국군이 끝내 개성을 포기하고
퇴각한 이유도 이 때문임. 이러한 불리한 조건으로 보통 서경이 뚫리고 적군이 개경 인근까지 진격하면 고려 조정은 강화도나 남쪽으로
피신했지만 이번엔 현종이 개경에 남아 항전을 결의 함.
14. 안되겠다 싶었던 소배압은 고려 측에 사자를 보내 철군하겠다고 알림. 한편으로 몰래 척후기병 300기를 금교역(金郊驛, 금천군)에 보내 숨겼으나
현종이 밤에 병사 100명을 보내 급습하여 오히려 이 300기를 전멸시킴.
15. 강감찬: 들어올 때는 니들 맘대로였지만 나가는 건 고렇게 안 되지.
강감찬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치기 위해 고려군을 국경으로 집결시킴.
16. 마침내, 거란군이 압록강으로 퇴각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요충지인 귀주성 앞 평원(평안북도 구성시)에서 양측 간 대회전이 벌어짐.
거란군도 죽기살기로 싸웠지만 아무래도 그들은 퇴각하는 처지였기에 강감찬과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의 총공세가 한층 격렬했음.
고려군의 대승이었고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수천에 불과(귀주대첩 또는 구주대첩(龜州大捷)).
17. 개빡친 성종, 노발대발 하며 소배압에게 상욕을 시전.
성종: 네가 적을 깔보고 깊이 들어갔다가 이 꼴이 되었는데 무슨 낯짝으로 돌아왔느냐, 앙? 내 너의 낯가죽을 벗긴 다음 죽일테다.
하지만 황제의 매부이기도 한 소배압을 파면하는 선에서 끝냄.
18. 현종은 개선군을 마중 나가 잔치를 베풀어 치하함.
성종: 장군이 나라를 구했습니다.
고려군을 승리로 이끈 총사령관 강감찬의 이때 나이는 72세.
<강감찬>
1. 강강찬(姜邯贊 또는 姜邯瓚, 948년 음력 11월 19일~1031년 음력 8월 20일)은 고려의 문관이며 본관은 금주(衿州).
*邯은 '조나라서울 한' 또는 '사람이름 감'이라는 한자로 강감찬인지 강한찬인지 논쟁이 있었으나 1446년 한글 반포 이후 姜邯贊에
독음을 단 기록을 보면 일관되게 강감찬으로 나오므로 강감찬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 정설임.
2. 고려 관내도 금주 낙성대(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낙성대) 출생. 젊은 시절의 이름은 강은천(姜殷川)이며 과거 급제 이후에 강감찬으로 개명.
서른여섯의 다소 늦은 나이에 장원으로 과거에 급제. 60대에 이르러서야 이부상서에 올랐을 만큼 출세는 빠르지 않았음.
3. 거란의 2차 침입(2차 여요전쟁) 때 현종에게 파천을 건의한 일로 나중에 현종은 강감찬을 평장사에 제수하면서 고신장에 직접 이렇게 씀.
-경술년에 거란 오랑캐가 전쟁을 일으켜 한강에까지 깊숙이 침범해왔노라. 당시에 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야만이 되었으리라.
4. 작고 못생겼으며 청렴한 탓에 차림은 늘 허름했음.
5. 그러나 나라에 대사가 생길 때마다 엄숙한 얼굴로 조정에 서서 정책을 결정지으며 나라의 우뚝한 초석 역할을 했다고 사관은 평함.
6. 전쟁 후 풍년이 들고 나라 안팎이 무사하자 사람들은 이게 다 강공 덕이라고 말함.
7. 재상으로 있을 때 송나라 사신이 저도 모르게 절을 올리며 *문곡성이 오래 보이지 않더니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함.
*문곡성(文曲星): 점성술로 운수를 점칠 때 활용하는 별 중 하나로, 학문과 필력을 관장하는 별.
8. 현종 21년(1030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인 문하시중에 제수됨.
9. 이듬해 현종이 죽고 석 달 뒤 강감찬도 여든네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떴음. 사관은 이렇게 평을 덧붙임.
-하늘이 이 나라 백성을 사랑해 나라의 화란과 패망의 때를 대비해 낳은 사람.
<세줄 요약>
1. 거란 성종이 강동 6주의 반환과 고려의 실질적인 복속을 위해 소배압에게 명해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함.
2. 삼교천 전투, 개경 청야전술, 귀주대첩 등으로 고려군이 대승하고 거란군은 압록강을 건너 퇴각 함.
3. 강감찬 짱짱맨.
<참고>
-박시백의 고려사(도서)
-나무위키(https://namu.wi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