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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문화산책] <3> 영화 (1)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 바리케이드 저 너머에 있는 것
이 시대 갇힌 이들을 위한 노래, 참된 자유의 의미를 묻다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원작가 : 빅토르위고(Victor- Marie Hugo, 1802~1885). 1851년 루이 나폴레옹 쿠데타를 반대해 19년 동안 망명 생활 중에 저술한 작품이다. 작품을 통해 도드라진 그의 목소리는 프랑스 민주주의 양심을 말해주는 희망이었다.
장르 : 뮤지컬(12살 관람가)
제작년도: 2012
감독 : 톰 후퍼
출연 : 휴 잭맨(장발장), 앤 해서웨이(판틴), 러셀 크로우(자베르)
영화속 복음읽기
하느님 나라, 참된 자유를 누리는 곳, 평등하고 사랑이 넘치는나라는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내가 변화되면 이웃이 변화되고 사회가 변화된다. 우리 모두 민중 속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사랑의 전사가 될 때 '자유' '평등' '사랑'의 나라는 건설될 것이다. 그날엔 우리 모두 '삶이 축복이었다'고 외칠 수 있을 것이다.
그룹대화 :
△ 줄거리를 나눈다.
△ 우리 사회에서 변화를 요청받는 것은 무엇인가?
△ 나는 이 변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잘못된 집착이 어떤 어둠을 가져다주는 지 체험을 나눠 본다.
복음말씀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줄거리
'레미제라블'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을 지닌다.
프랑스 대혁명 26년 후 1815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주인공 장발장은 굶어 죽어가는 조카를 위해 빵 한조각을 훔친 죗값으로 19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다 가석방된다. 장발장은 전과자라는 이유로 감시와 멸시, 천대를 받는다. 사회적응이 어려운 순간을 보내며 성당의 후미진 곳에 쓰러져 있던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에게서 뜻밖의 용서와 환대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의 쫓기는 파란만장한 삶은 불운의 주인공으로 살게 되지만 착한 양녀 코제트 곁에서 마지막 삶이 마감된다.
첫 장면
영화의 첫 장면은 전개될 암울한 미래의 분위기를 시사해준다. 죄수들의 강제노역을 부각시키면서 "Look Down (고개를 숙여)"를 부르며 세차게 밀어닥치는 파도와 맞서 난파선을 육지로 끌어 올리는 죄수들의 장면이 장엄하다. 높은 곳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채찍을 움켜쥔 경감 자베르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는데 이 두 거리의 차이는 엄청난 간극을 느끼게 한다. 극단적 대립구도 속에서 인간은 분열되고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억압과 핍박 속에 고통당하며 몸부림친다. 죄수들의 처절한 몸부림과 허덕임, 하느님의 눈에는 누가 어둠이고 누가 빛일까? 누가 진정 해방된 자유인이고 누가 갇힌 자일까?
"고개숙여… 똑바로 위를 쳐다 보지마… 우리에겐 희망이 없어…"
프랑스 대혁명의 대전제였던 자유ㆍ평등ㆍ사랑의 이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부유 지배층의 억압 속에서 들려오는 가난한 민중의 외침이 메아리친다.
가장 귀한 선물
죄수번호 24601로 불리던 장발장의 19년 복역이 가석방으로 끝나려는 그 순간 경감은 바닷가 진창에 처박힌 거대한 국기를 끌어 오라고 명령한다. 자유ㆍ평등ㆍ사랑의 상징인 프랑스 국기를 온 힘 다해 끌어 올린 장발장의 얼굴에 밝은 햇살이 비친다. 해방의 상징이다.
그는 감옥에서 살아온 19년을 저주하듯 분노와 증오 속에서 살아가려 하지만 전과자의 낙인 때문에 온갖 모욕과 천대를 받으며 헤매다 주교관 앞에 쓰러진다. 이를 발견한 주교는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해주며 환대한다. 그러나 장발장은 그 은혜를 저버리고 은그릇들을 훔쳐 달아나다 경관에게 잡혀온다. 주교는 경관 앞에서 그 은그릇들은 장발장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고 변호해 주며 은촛대 두 개를 더 준다. 여기서 장발장의 노래가 의미심장하다.
"그의 용서는 나를 사람으로 만들었다. 날 믿어주고 용서했어. 난 세상을 증오했는데 그는 내게 자유를 주었어… 내게 영혼이 있다고 했어 …."
그는 주교를 통해 구원의 은총을 체험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한 자는 변화되기 시작한다. 자신을 얽어매고 있던 증오와 복수의 사슬에서 풀려난 것이다. 카메라는 묘지에서 죄수 신분증을 날려 버리는 장발장 모습을 붐 업(Boom up)하며 종이 조각이 멀리 날아가는 풍경을 비춰준다. 진정 자유인이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상징이다.
찾아 온 행복
1823년 장면은 바뀌어 장발장은 사회에서 성공한 공장의 사장ㆍ시장의 신분으로 변모돼 살고 있다. 장발장 공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사람들 중 '판틴'은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욕망에 눈먼 남성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그는 딸 코제트의 양육비를 구하기 위해 창녀가 되고, 누명을 써 자베르 경관에게 체포되려던 순간 장발장이 구해준다. 고통과 악몽같은 삶이 되풀이 되던 판틴은 병들어 죽게 된다. 장발장은 온갖 희생을 치르며 판틴과 약속한 그의 딸 코제트를 구출해 양육하게 된다. 장발장에게 코제트는 새로운 삶의 전환기를 가져다 주는 존재다.
"네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은 뭔가의 새로운 시작, 갑자기 온 세상이 은총과 광명으로 가득차 큰 소망이 내 속에 있네. 넌 햇살처럼 내 마음을 녹여 주었어. 넌 생명과 사랑을 내게 선물했어." 그의 내면의 모습에 빛이 비치고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아간다.
법 너머의 사랑
장발장을 집요하게 뒤쫓는 자베르 경관, 그는 법치주의자, 아니 철저한 법의 노예였다.
혁명대원들에게 첩자로 숨어들었던 자베르가 잡혔을 때 장발장은 일생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자베르를 죽이지 않고 탈출시킨다. "난 자네를 원망하지 않아… 자넨 주어진 임무를 다했을 뿐이야." 장발장의 말에 새로운 메시지를 담는다. 반면 다시 끈질긴 추격을 시작한 자베르는 수녀원 성당 꼭대기 난간을 위태롭게 걸으며 장발장을 찾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카메라는 붐 업(Boom up)되고 십자가를 부각시켜 보여 주다가 붐 다운(Boom down)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눈여겨 봐야 할 것이다.
젊은 혁명군들은 다 죽게 되고 코제트의 애인 마리우스는 장발장의 도움으로 하수구를 통해 구출된다. 천신만고 끝에 부상당한 마리우스를 끌고 탈출하는 순간 경감 자베르가 버티고 서 있다. 장발장은 다급한 심정으로 한 인간 생명을 살리기 위해 시간을 달라고 애원한다. 자베르는 갈등하며 죽이지도 체포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높은 절벽 위 난간 끝에서 혼란의 노래를 부른다. 그의 양심과의 싸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놈과 나는 공존할 수 없어… 그는 천사인가 악마인가? …모든 게 혼란스럽구나. 그놈을 믿어도 되나. 그의 죄는 용서받을 수 있나? 그를 사면해도 되나… 돌 같은 내 마음이 떨고 있구나. 그는 나를 살려줌으로 내 영혼을 죽여버렸네."
그리고 거대한 바다의 파도 속에 자베르는 스스로 몸을 던진다.
바리케이드를 넘어서
마리우스 집안은 상류층의 귀족 가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혁명군에 가담했다.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사랑은 빈민계층의 딸과 부르조아적인 가문의 아들과의 결합이다. 이들의 결합은 서민과 특권층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고 평등을 살아갈 수 있는 긍정의 힘을 상징한다. 장발장은 자주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인간 실존을 묻는 철학적이자 형이상학적인 질문이다. 장발장은 이렇게 독백한다. "나는 장발장!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로 구원된 한 인간 장발장이다."
코제트 곁에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는 그의 마지막 말이 그것을 증명한다.
"축복받은 인생이었다"고….
끝을 장식하는 장면이 대서사적이다. "사랑은 영원한 것. 진리의 말은 서로 사랑하는 것.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얼굴을 보는 것."
"어둠 속에 사라진 민중들의 노래가 들리는가? 모두 사랑의 전사가 되리라. 바리케이드 저 너머 어딘가에 낙원이 있을까? 내일은 오리라.“
[가톨릭 문화산책] <8> 영화 (2) 7번방의 선물
잠자고 있던 '인간의 선함' 순박함으로 일깨워
우리는 주위 환경에서 수많은 영향을 받고 산다. 특히 함께 사는 사람들을 통해 상처받고 감동도 받으며 끊임없이 내면의 변화를 일으키도록 자극을 받으며 살아간다. 이 변화는 구체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는 과정으로 우리를 이끈다.
인간은 또한 누구나 절대자라는 신적 존재와 관계를 맺으려 한다. 아무리 끔찍한 흉악범이라 할지라도 선한 지향과 아름다운 사랑을 꿈꾼다. 순수한 마음을 어린이를 통해 자극받아 인간다움과 진실로 향하게 한다. 굳어지고 비뚤어졌던 영적 자아가 잠에서 깨어나 '나는 누구인가'하고 자문하며 하느님의 속성을 점차 알아보는 체험으로 들어가게 한다. 이 때문에 사랑ㆍ순수ㆍ일치ㆍ평화ㆍ연대를 이끌어내는 집단적 행동을 유발한다. <7번방의 선물>에서 주는 선물은 무엇인가? 그들은 어떤 체험을 했으며 어떻게 변화됐는가?
줄거리
지적 장애를 지닌 용구는 그의 딸 예승이에게 세일러문 가방을 사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한 개밖에 남지 않은 세일러문 가방을 경찰청장의 딸이 사버린다. 다음 날 경찰청장의 딸은 세일러문 가방 파는 곳을 알려준다며 용구를 데리고 앞서 뛰어가다가 돌연 죽음을 맞는다. 용구는 청장의 딸을 살리려다 누명을 쓰고 살인 혐의로 체포되고 사형판결을 받아 7번방에 입소한다.
바보같은 사람
교도소 7번 방에는 밀수범ㆍ사기전과 7범ㆍ간통범ㆍ부부 소매치기범ㆍ자해 공갈범등 다양한 범죄자들이 갇혀 있다. 이들은 비좁고 누추한 방에서 그동안 길들었던 것들을 자랑삼아 말하고 상징적 행동을 휘두르며 함께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놈이 7번 방에 들어왔다. 이놈은 아동유괴 강간살인범!! 죄질로 치면 극악범이다. 이들은 이 극악범에게 혹독한 폭력으로 신고식을 치르게 한다. 그러나 꼭지가 덜 떨어진 듯한 이상한 놈 용구는 대들거나 반항하지 않으며 미워하거나 증오할 줄도 모른 채 부당한 대우를 받기만 한다. 그는 7번 방의 험악한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들을 믿어주며 평범한 사람으로 대한다.
서로 위한 선물
어느 날 반대 패거리 두목이 방장을 뾰족한 흉기로 찌르려 하자 용구는 달려가 대신에 찔린다. 순박한 용구의 행위에 방장은 감동하며 고마움을 느낀다. 방장은 용구에게 필요한 뭔가를 해주고자 한다. 그러나 용구는 물질적인 욕심이나 방장이 되겠다는 야심도 없다. 오직 사랑하는 딸 예승이를 만나고 싶을 뿐이다.
7번 방 죄수들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이들은 용구에게 예승이를 만나게 해주려고 함께 머리를 짜낸다. 그동안 으르렁거리며 나쁜 짓을 위해 힘을 모았던 이들은 이제 뭔가 좋은 일을 하려는 실행에 옮긴다. 드디어 예승이를 교도소 7번 방으로 밀입시키는 데 성공하고 용구의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자기들도 진정한 그 기쁨에 서서히 동참하게 된다. 세파에 찌든 마음들이 정화되기 시작하고 단순해진다.
아내의 출산을 앞두고 특사로 나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신봉식! 그는 예승이의 반입을 반대했지만 우연히 들고 들어온 예승이의 휴대폰으로 순산한 아내와 급작스레 통화한다. 그는 갓 태어난 딸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살아갈 희망을 얻는다. 감방에서 세상과 소통을 이룬 것이다. 이는 범죄를 위한 소통이 아니라 생명과 기쁨을 나누는 소통이다. 예승이는 죄수들에게 생명을 전한 '선물'이다.
변화된 사람들
마지막 법정 공판에서 용구의 누명을 벗겨주려고 용구에게 사건을 재연하게 한 7번 방 식구들은 그가 무죄임을 입증하는 대본을 작성해 암기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어눌한 용구가 성공할 리가 없다. 사형 날짜가 결정되자 이들은 열기구를 만들어 용구와 예승을 탈출시키려고 단합한다. 반대 패거리 두목도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며 앞장선다. 악행으로 갇힌 이들이 자신들의 죄는 까마득히 잊고 어떻게든 예승이와 아빠 용구를 살리려는 간절한 심정으로 급박한 상황에 온 힘을 모은다. 그야말로 일치ㆍ연대ㆍ협력ㆍ사랑의 현장이 된다.
천진난만한 용구가 감방 식구가 되면서 사랑과 끈끈한 서로의 유대 관계를 체험하게 하고 웃음까지 선사한다. 여기에 인간 안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이미지인 선을 재발견하게 하는 메시지가 깔려 있다. 죄인들이 갇히는 곳이 보이는 천국이 됐다. 이것이 기적이다. 이상한 놈이 들어와 일으킨 기적이다. 용구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7번방의 죄수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갔어야 했는데…." 이제 이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고백한다.
이들은 출소해 사회에 적응하며 떳떳하게 살게 됐다. 용구와 예승이는 감방 사람들에게 과거의 악에 묶였던 끈을 끊게 해주었다. 예수님처럼 과거의 죄를 없애주고 새로운 삶을 살게 했다.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함께 사시면서 목숨을 바치심으로 사랑ㆍ소통ㆍ연대를 이룬 것이 이들 안에서 현실이 된 것이다.
불 속에 휩쓸린 보안과장
교도소 보안과장은 납치범에게 아들을 잃은 후 폐인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그에게 용구는 아동을 유괴ㆍ강간ㆍ살인한 극악범이다. 어느 날 7번 방 식구들은 예승이를 밀입하여 감방에 감추려 했지만 과장에게 들키고 만다. 용구는 다시 꽁꽁 묶여 과장에게 끌려간다. 비가 철철 내리고 번개와 천둥이 요란히 치는 한밤중에 용구는 독방으로 이송된다. 꽁꽁 묶여 갇힌 용구의 어둠침침한 독방! 용구는 홀로 저 깊은 밑바닥까지 버려진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린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8). 예승이는 인류를 상징한다. 용구는 인류를 위해 고통 속에서도 침묵하는 어린양이다.
그날 새벽 교도소에 화재가 발생한다. 불 속에서 석유통을 들고 소리치며 난동 부리는 화재범을 말리기 위해 과장은 문짝을 뜯고 불 속에 휩쓸려 들어간다. 용구는 과장을 구하려고 쓰러진 문짝을 밀어내고 과장을 끄집어낸다. 병상에서 과장은 용구가 눈물 콧물을 흐리며 "우리 과장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고 외쳤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바보 용구는 자기 목숨을 생각하지 않고 희생하며 과장을 살려줬다. 그는 자신을 때리는 자 앞에 반항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몸을 내던져 희생된 예수와 같은 사람이다.
의구심과 분노에서 차있던 과장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면 깊은 곳에서 영적 자아의 소리를 듣게 된 그는 용구의 죄상에 대해 의문을 품고 "왜 죽였느냐"고 물으며 용구의 누명을 벗기려고 경찰청장을 찾아가 사면을 요청한다.
그러나 마지막 법정 공판에서 용구는 전 날 경찰청장이 마구 때리며 "죄 값을 달게 받아. 그러지 않으면 내가 네 딸을 똑같이 만들어 줄 거야" 라는 말, 국선 변호사가 "당신이 죽어야 예승이가 살아, 당신 아빠지!" 라는 말이 떠올라 예승이를 살리기 위해 열심히 암기했던 대본과 다른 말을 한다. 그의 부성애가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자신이 소녀를 죽였다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예승이를 살려 달라고 한다.
용구가 딸 예승이를 위해 허위로 시인하자 과장은 "용구는 지금 정신적으로 위축된 상태"라며 "네가 무슨 사람을 죽이냐, 뭐가 미안하냐!"고 소리친다. 죄수들이 형을 다 받게하는 것이 책임인 과장 오히려 죄수의 형을 면해 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후 과장은 예승이를 자신의 딸처럼 키운다. 변호사가 된 예승이는 아빠 용구가 허위자백을 강요 받았음을, 그래서 무죄임을 어렵게 밝혀낸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교도소 담장 철망에 묶여 있던 노란 풍선이 자유로이 하늘로 날아가는 광경을 실제처럼 처리하면서 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갈망을 상징적으로 마무리 했다.
노랑 풍선은 이제 날아 갔을까?
이 영화는 코믹드라마로 개연성이 부족한 면도 있지만 슬픈 이야기를 밝게 묘사했다. 죄수복은 보통 푸른색이고 감방은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로 생각되지만 이 영화에서의 죄수복은 주황색이고 감방은 햇살이 비치는 따뜻한 분위기이다.
영화에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노랑 풍선, 노란 가방, 노랑 조끼, 노란 보자기…. 노란색의 의미는 태양과 성스러움을 상징한다. 또 감방 안에 있는 종교적 성물들이 시야게 들어오게 함으로써 간접적인 종교 메시지를 드러낸듯한데, 어쨌든 바보 같이 희생하는 사람이 있기에 7번 방 죄수들은 서서히 변화돼 간다.
7번 방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방일지도 모른다. 우리 가정과 공동체, 더 나아가 우리 사회, 국가가 쌓아 놓은 울타리 속의 방 말이다. 가난하고 아무런 기득권이 없어 죄인처럼 손가락질 당하는 이웃에 대한 나의 고착된 선입견, 부조리한 체제와 권력, 규범에 묶여 노랑 풍선처럼 자유롭게 날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이 우리를 방해하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가톨릭 문화산책] <13> 영화 (3)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
하느님을 목말라 하는 인간
우리는 늘 인생이라는 화두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내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그 삶을 살아온 시간과 공간 속 이야기는 흥미롭기 마련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2012, 감독 이안)는 그런 면에서 자기 자신과의 싸움 같은 시간성과 그만이 소유한 공간 체험이 무엇을 말해주는지에 대한 길고도 지루한 여정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영화 속 파이를 보고 있으면 '만약에 내가 저 주인공이 된다면…'이라는 가정법 상황에 묶이는 매력에 2시간 내내 빠져들게 된다. 죽음의 경지를 체험하고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을 수 있는 또 다른 산 자들의 처지도 결국은 주인공과 같은 삶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존재라는 아이러니한 진리를 수긍하게 한다. 인간 속에 낯설게 펼쳐 놓은 역동적인 하느님 마음이 드러나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줄거리
인도에서 자라 힌두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을 모두 믿는 소년 파이의 원래 이름은 '피신 몰리토 파텔'이다. 그 이름이 영어로 '오줌 싸다'라는 뜻의 '피싱'(Pissing)과 발음이 비슷해 '오줌싸개'라는 별명으로 놀림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피신 몰리토 파텔'이란 이름이 수학적으로 원주와 지름의 비율을 뜻하는 '파이', 곧 수학적으로 정의되지 않는 무한소수인 파이라는 뜻을 지닌다고 설득해 결국 '전설의 파이'로 불린다. 그의 부모는 동물원을 운영하던 중 정부 지원이 끊기자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 동물들을 싣고 캐나다로 항해하던 중 폭풍우에 화물선이 침몰하고 가까스로 구명보트에 탄 파이만 목숨을 건진다. 결국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파이만 보트에 남아 망망대해에서 천신만고의 기로에 서게 된다.
목마름
마마지에게서 하느님의 존재를 믿게 할 이야기라는 소개를 받은 캐나다 작가는 파이의 체험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은 생의 극한 상황 속에서 만난 하느님과 자신과의 이야기이다. 영화분석학적으로 말한다면 '라이프 오브 파이'는 보는 이들이 처한 현실과 맞물려 다양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어떤 사투 속에서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깨끗한 영혼을 갖고 싶다면 피신 몰리트 수영장에서 수영하라는 마마지의 말을 되새기며 어린 파이는 수영을 배우는 중에 해치는 것은 무엇이든 공포심을 갖게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를 통해 영화는 무한하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파이는 먼저 힌두교를 통해 하느님을 소개 받고 알라신을 통해 기도하는 법을 배운다. 어린 파이가 성당에서 성수(聖水)를 마실 때 신부님은 "목마르겠구나"하고 말하는데, 마실 물을 주는 장면에서 성수는 하느님 생명과 은혜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파이가 호랑이에게 지어준 이름이 '목마름'이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 복선으로 깔려 있다. 인간은 언제나 하느님에 대한 목마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시편구절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 왜 자기 아들을 보내서 인간의 죄 때문에 고통 받게 해요?
- 우릴 사랑하셔서 그런것이지. 인간 모습으로 오신 거야. 우리 인간들은 전능하신 주님을 이해할 순 없어도 예수님과 그분의 고통을 이해할 순 있으니까.
- 인간의 죄를 위해 아들을 희생시킨다구요? 무슨 사랑이 그래요?
(예수님이 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파이는 그 이후 예수님의 존재를 지울 수 없었다. 파이는 세례로 하느님 자녀가 돼 믿음의 여행, 하느님과 만나는 영적 여행을 떠난다.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
인간은 엄마의 아늑한 에덴과 같은 자궁 속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파이에게 더 이상 그 같은 낙원은 없다. 어둔 밤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 파이는 뱅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홀로 남겨진다. 작가는 파이와 호랑이가 자기 자신이었다고 말한다. 호랑이 눈에 비친 것은 파이의 욕망이고, 호랑이는 하느님께 나가는 영적 여정 중에 만나게 되는 내면의 투쟁이자 어둠이다. 끊임없이 일어서는 욕망은 살아남기 위한 자기와의 싸움, 어쩌면 프로이드가 말하는 무의식 속에 자리를 틀고 있던 이드(id)를 거세하고 훈련된 자아, 초자아에로 승화하는 내면의 작업을 뜻한다고도 보겠다. 무엇에 잡혀 먹히느냐에 따라 나는 참 자아의 성장과 평화라는 항구에 빨리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이 주시는 위로
폭풍우가 물러가고 바다 위엔 오렌지 빛 햇살이 찬란한 장면이다. 바다 위에 떠있는 보트를 버즈 아이 뷰(bird's eye view)로 보여준다. 하느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화의 상징이다. 우리는 고요 속에서만 진정한 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호랑이는 계속 으르렁 댄다. 아직 내면의 나는 욕망과 맞서고 있음을 직시하고 파이는 하느님과 대화한다. "하느님이시여 절 받아 주소서. 전 당신의 종입니다.… 보여 주세요."
나 자신 길들이기
파이는 서바이벌 가이드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배운다. 식사와 휴식, 마음의 여유 등 체력이 고갈되지 않도록 애쓰면서 무엇보다도 호랑이를 다루는 법, 소통 훈련에 심혈을 기울인다. 내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읽고 조절하는 비유적 훈련이다. 무조건 방어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호랑이와 교감하기 위해 호랑이를 달래기도 하고 때로는 엄한 조련사처럼 먹이를 낚는 법도 교육시킨다. '리처드 파커가 없었다면 난 죽었을 거다. 난 녀석을 보며 긴장했고 녀석을 돌보는 것에 삶의 의미를 뒀다. 무엇보다 희망을 잃어선 안 된다'며 파이는 그의 존재에 감사한다.
전부 다 내려놓고
그나마 잔잔하던 삶에 다시 폭풍우가 몰아치는 반전 상황이 벌어진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쓰고 있던 사투의 기록 쪽지가 날아가 버린다. 자신의 과거마저 놓아버린 파이는 하느님께 외친다. "하느님 전 가족을 잃었어요. 전부 다 잃었다고요. 굴복했잖아요.…"
폭풍 속 밤하늘엔 한 줄기 빛이 환하게 비추고 번개가 번쩍인다. "하느님이 우리한테 오셨어. 이건 기적이야." 파이의 고백이다. 우리의 영적 위기와 믿음의 시련 속에서도 당신을 보여주신다는 중요한 장면이다. 이제 의존할 것을 모두 잃은 파이를 버즈 아이 뷰(bird's eye view)로 망망대해의 아주 작은 보트에 떠있는 것을 연출한다. 무한한 하느님 앞에 놓인 인간 모습이다. 폭풍우가 지난 뒤 파이는 쓰러져 있는 호랑이 머리를 무릎에 올려놓고 쓰다듬는다. 영적 투쟁에서 포효하던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자기 힘에 의존했던 기운이 빠져나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납죽 엎드린 상태, 그제야 하느님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줌을 느낀다. "하느님 절 창조해주셔서 감사해요. 이젠 돌아갈 준비가 됐어요." 그리고 화면은 검은색으로 변한다. 죽음을 지나 하느님의 빛 속으로 옮겨 가는 순간이다.
지켜보고 계시는 하느님
보트 머리에 누워 있는 파이 얼굴에는 눈부신 햇살이 비치고 식충 섬에 도착한다. 파이는 이곳에서 사랑했던 아난디가 준 팔지를 풀어 나무에 묶어놓는다. 아난디와의 인연마저 놓아준다. "하느님이 날 버리셨다 생각했는데 지켜보셨던 거죠. 내 고통에 무심하다 생각했는데 지켜보신 거죠. 구조될 희망을 버렸을 때 휴식을 주시고 여행을 계속하라는 계시를 내리셨죠"하고 파이는 중얼거린다. 죽은 듯 늘어져 있던 파이는 멕시코 해변에 도착한다. 그의 험난한 여정은 끝나 보인다. 하느님의 따뜻한 품속에 안긴 듯한 마지막 그의 말이 여운을 남긴다. "나를 잡아먹으려던 잔인한 친구는 내 삶에서 영영 사라졌죠.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말았죠."
이젠 당신의 스토리
'라이프 오브 파이'는 얀 마텔의 원작 소설 '파이 이야기'를 리안 감독이 3D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줄거리 자체가 개연성과 일관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서사로, 이성과 마음, 동물과 식물이 공존하고 여러 종교와 우주가 공존하도록 펼쳐진다. 모든 것을 열어 놓은 채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한 소년이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다 구조된 사실 그대로의 이야기가 있고, 성장한 파이가 과거를 회상하며 재구성해 캐나다 작가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캐나다 작가는 다시 또 나름대로 재구성해 이야기를 할 것이고, 관객은 각자 나름대로 풀어내면서 자신의 일부분을 이야기할 것이다.
파이는 일본 보험조사단에게 서로 다른 두 이야기를 하며 캐나다 작가에게 어떤 이야기가 마음에 드냐고 묻는다. 영화는 관객의 결정에 그 결말을 맡겨 놓으며 끝을 맺는다. 세상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이 많은 이야기들을 신앙이라는 관점으로 다시 풀어 미디어가 던져주는 이야기에 나의 삶을 스토리텔링해보면 어떨까 한다.
[가톨릭 문화산책] <18> 영화 (4) 늑대아이 - 하느님의 모성성에 대하여
하느님 사랑 닮은 엄마 하나의 숭고한 자기희생적 모성 그려
늑대아이(2012)
감독 : 호소다 마모루
상영시간 : 117분
장르 : 판타지, 어드벤처, 애니메이션, 멜로ㆍ로맨스, 드라마
어머니의 고향을 찾아서
어머니라는 단어는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어머니라는 단어에는 그리움이 배어나온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는 얼굴이 엄마이고, 처음 듣는 것도 엄마 목소리다. 첫 마디도 엄마라는 말이다. 산고를 겪으며 '나'를 있게 하고,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절대적 대상이자 모든 것이다. 문학엔 그래선지 어머니를 소재로 한 작품이 수없이 많다. 애니메이션 '늑대아이'는 동화 같은 이야기이면서도 의인화한 메타포(Metaphor, 은유와 상징, 비유, 함축적 내포 등의 의미)가 뛰어난 영화다.
줄거리
대학생이던 하나는 우연히 들판에서 인간 모습으로 변한 '늑대 인간'과 운명적 사랑에 빠진다. 사랑의 결실로 두 아이를 낳는데, 눈이 내리던 날에 태어난 누나는 '유키', 비가 내리던 날에 태어난 남동생은 '아메'라고 이름을 붙인다. 이들 남매에게는 절대 비밀이 있었다. 인간이면서도 늑대인 두 모습이 내재된 생명을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유키와 아메는 '늑대 아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엄마, 아빠와 함께 도시 변두리에서 조용하지만 행복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그 행복은 아빠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한순간에 사라진다. 이에 엄마는 유키, 아메 남매가 인간들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방법을 찾는다.
너니까!(받아들이는 마음)
엄마가 운명적 사랑에 빠진 남자는 늑대 인간이다. 그녀는 '있는 그대로' 늑대 남편을 "너니까"하며 받아들이고 사랑한다. 그러나 두 남매를 남겨놓은 채 늑대 아빠는 세상을 떠난다. 죽음은 그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만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거나 한탄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딸 유키와 아들 아메가 늑대 아이의 징후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복잡하고 곤란한 상황에 부딪힌다. 딸 유키는 왕성한 식욕과 활달한 행동이 왈가닥이고, 남동생 아메는 적게 먹고 유약하다. 두 아이는 툭하면 늑대로 변해 집안 가구를 물어뜯고 난장판을 만들어 놓는 사고뭉치다. 아메의 끊이지 않는 울음소리에 이웃집에서는 불만이 커진다. 한밤중 아이들이 울어대는 늑대 소리에 이웃집 사람들은 이상한 애완용 동물 키운다며 아우성이다. 하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지 고심하던 끝에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 놀며 성장할 장소를 찾아 도시를 떠난다. 여기서 우리는 '받아들이는 마음'을 통해 하느님 섭리를 느껴볼 수 있겠다.
인간 할래, 늑대 할래?
엄마 하나는 유키와 아메가 자유롭게 자신들의 길을 선택하기를 바랐기에 첩첩산중 산골로 이사한다. 두 아이는 동물적 기질을 더 많이 드러내기 시작한다. 인적이 드문 산골에서는 늑대 아이라는 존재를 숨길 필요가 없기에 더 많은 자유를 만끽한다. 유키는 자주 늑대로 변해 거침없는 행동을 한다. 반면 아메는 여자아이처럼 유약하고 소심하다. 하나는 자주 아들 아메를 안심시키기 위해 "괜찮아"라는 말을 되뇐다. 반복되는 엄마의 말은 구강기의 유아적 욕망을 만족시키는 기제로 작용, 아메에게 안정감과 용기를 준다. 하느님의 모성성은 인간을 위로하는 원천(이사 66,11 참조)이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결국 유키와 아메는 인간과 늑대 사이에서 확실한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다. 학교를 가기 위해 마당을 나서면 두 갈래 길이 놓여 있다. 유키는 오른쪽 길로 가자고 당기고, 아메는 왼쪽 길로 가려 한다. 이 장면은 이분화된 자아상을 하나로 확립해야 하는 긴장감과 심리적 갈등을 보여주는 연영(Sequence)이다. 늑대가 되느냐, 인간이 되느냐 하는 결정의 장면에서,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유키와 아메를 교차 편집해 그 갈등을 고조시킨다. 폭설로 온 세상이 하얗게 덮인 날, 아메는 뿔 호반 새를 잡으려다 죽을 뻔한 체험을 한 뒤 늑대로서의 삶을 갈망한다. 그는 엄마가 자신의 길을 선택하도록 돕기 위해 일하는 자연관찰원에서 처음으로 실물 늑대를 봤고, 아빠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 안에 있던 늑대 본성이 살아나자 숲으로 들어가 늑대 선생에게 훈련을 받는다. 하나는 아메가 가는 길을 존중한다. 아이가 택한 삶을 믿어준 것이다. 활달했던 유키와 연약했던 아메는 이 과정을 거치며 상반된 길을 선택한다. 여기서 자녀의 가능성을 발견하면 기꺼이 그 길을 밀어주는 진정한 모성애를 보여준다. 어머니인 하느님은 인간을 키우고 성장시키고 양육한다. 그 본질은 사랑 자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선물로 줬고 그 선택을 언제나 존중했다는 깨우침을 우리에게 안긴다.
난 아직 너한테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어!
아이들 성장을 위해 선택했던 숲속의 집을 생각해 보자. 그 집은 낡고 척박하기 그지없다. 그런 집을 쓸고 닦고, 빗물이 새는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고치며 노동의 가치를 가르친다. 모성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마음이 조급하다고 해서 성장이 더 빨라지는 것도 아니고, 실패한 듯 보일 때에도 믿음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뜻하지 않은 사건의 발단이 된 태풍의 밤, 새롭게 전학 온 남학생 후지 소헤이는 유키의 심상치 않는 비밀 냄새를 맡는다. 심리적으로 위협을 느낀 유키는 방어와 함께 공격적 태도를 보인다. 유키는 자신도 모르게 늑대 손톱을 세워 소헤이에게 상처를 입힌다. 이 일로 유키는 소헤이에게 자신이 늑대임을 고백하고, 소헤이는 이미 그 사실을 알면서도 비밀로 지켜왔음을 알게 된다. 긴장과 위기를 극복한 유키는 인간으로 살아갈 희망을 품는다. 같은 밤에 아메는 늑대 선생이 다쳐 죽게 되자 누군가 대장 역할을 해야 한다며 폭우를 뚫고 산속으로 달려간다. 아메가 걱정돼 아들을 찾아 산속으로 간 하나의 처절한 모습은 십자가 위의 예수님과 겹쳐지는 듯하다. "난 아직 너한테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어 아무것도…. 기다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 마음은 하느님의 아가페적 사랑을 닮았다. 무상적 사랑, 돌려받을 것을 요구하지 않는 하느님의 순결한 사랑의 반영이다.
서로 돕고 살아야지
모성성은 원래 자기희생적이다. 옹졸하거나 이기적이지 않고 자기 세계에 갇혀 있지 않다. 하나는 언제나 무뚝뚝하고 엄격하다고 생각한 할아버지에게서 삶의 진수를 배운다. 이제 내면으로 깊어지고 성숙해진 하나는 엄격하고 무섭다고 생각한 할아버지와도 가까워진다. 처음으로 찾아온 나라사키 할머니 마음도 맞아들이고, 젊은 엄마들과 만나 어울리며 소통한다. 공동체성을 각인시키는 강인한 어머니로, 조화롭고 성숙한 어머니로 변모돼 간다.
마음의 고향을 찾아서
애니메이션 '늑대아이'는 수려한 수채화의 이미지로 펼쳐놓은 아름다운 영화다. 줄거리는 다소 느리고 진부하지만, 동물이 의인화되는 구성이 돋보인다. 어린이 세계에서 어른 세계로 넘어가는 영화다. 늑대는 일본 문화에서 외로움과 고독한 인간 내면의 상징이라고 한다. 인간 내면의 가장 자연스런 사랑을 말하라면 그것은 모성일 터이다. 하느님 사랑을 닮은 그 원천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어머니는 이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순수한 영화가 바로 '늑대아이'다.
[가톨릭 문화산책] <23> 영화 (5) 더 헌트 - 뒤틀린 소통의 관계
군중 심리에 가려진 '진실' 알아보는 헤안 필요
더 헌트(2012, 덴마크)
감독 : 토마스 빈터베르그
상영 시간 : 115분
장르 : 드라마(15세 관람가)
인간은 끊임없이 소통한다. 한순간도 소통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침묵도 하나의 언어로 뭔가를 계속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구두로, 몸의 언어로 소통하며 이웃과의 관계, 공동사회 전반과 관계를 맺으며 관계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소통이 없는 관계는 이미 생명을 포기한 관계이며 죽은 집단의 사회다. 살아있는 소통은 상대방을 읽어내는 것이자 건네지는 말에 대한 경청이다. 소통은 상대방을 인식하고 신뢰하는 타자 중심의 관계를 형성케 한다. 이것이 진정성을 동반하는 소통이며 생명을 살리는 소통이다. 사랑에 메말랐던 어린 아이의 즉흥적 거짓말이 한 사람을 이웃으로부터 매장시키는 '뒤틀린 소통'의 관계를 다룬 영화 '더 헌트' 속으로 들어가 보자.
줄거리
이혼 후, 고향으로 내려온 유치원 교사 루카스는 새 여자 친구를 사귀며 아들 마커스와 함께하는 행복한 삶을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루카스의 친구 딸 클라라의 사소한 거짓말이 들불처럼 소문으로 번지며 루카스는 유치원 원장과 마을사람들로부터 의심과 함께 누명을 뒤집어쓴다. 그것도 아동 성추행이라는 누명이었다. 루카스는 마을 사람들의 눈총과 집단 따돌림, 폭력을 견뎌내며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신화
루카스는 유치원 교사다. 원생들과 허물없이 놀아주고 대소변까지 닦아주는 이성적이고 따뜻한 감성을 지닌 균형 잡힌 사람이다. 루카스의 절친한 친구 테오의 다섯 살 된 딸 클라라는 부부싸움이 잦은 가정에서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외롭게 지낸다. 자기 생각에 자주 몰두하는 상상력이 풍부한 클라라는 가끔씩 길을 잃기까지 한다. 친절한 루카스는 그녀를 유치원과 집으로 데려다준다. 이런 루카스 아저씨에게 클라라는 애정을 품고 있다. 어느 날 클라라는 하트(♡) 모양을 만들어 루카스의 코트 주머니에 몰래 넣어두고 루카스에게 입맞춤을 한다. 루카스는 부드럽게 클라라를 타이른다. 하트는 엄마에게 주거나 만든 사람한테 돌려주고 입술 뽀뽀는 엄마, 아빠에게만 하는 거라고 분명한 가르침을 준다. 거절당한 클라라는 원장에게 루카스가 자신에게 하트를 선물했고 루카스의 성기를 봤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는 클라라 오빠들이 보여준 남성 성기 사진을 떠올리며 말한 것.
유치원 마당을 나오던 루카스는 아이들 놀이공에 뒤통수를 맞는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예고하는 상징적 장면이다. 원장은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신화적 믿음에 사로잡혀 루카스의 성추행을 의심한다. 루카스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가족과 마을, 학교 전체에서 진솔한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 일방적 단죄의 상황에 휘말린다. 원장은 이 거짓된 사건을 교사와 학부모들에게 확대시키고,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고자 클라라를 아동심리전문가와 인터뷰하게 한다. 심리전문가가 추궁하는 질문에 클라라는 어린아이로서의 불안과 억압충동을 느끼며 "그랬던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하며 그저 고개를 끄덕임으로 반응한다. 어리지만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의 영악한 태도가 섬뜩하다.
원장은 이 사건을 더 부풀려 성학대를 당했다고 단정한 뒤 다른 피해자가 있는지를 살핀다. 언제나 사회는 선과 악이 묘한 충돌을 일으켜 진실을 가리는 때가 많다. 중요한 사안일수록 그런 어리석음을 범한다.
하지만 인간은 군중심리에 휘말려 진실을 보지 못한다. 특히 어린이, 또는 통념적인 약자 편에 동조하기 마련이다. 진실은 그 뒤에 숨겨질 때가 종종 있다. 그것도 선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유치원을 찾아가던 날 아침, 햇살은 루카스의 얼굴을 환하게 비춘다. 루카스의 진실을 입증해 주는 상징적 햇살이다.
친구들이 뭐 이래, 친구도 아냐!
인간이 의사소통을 하는 데 비언어적 몸짓과 얼굴 표정, 눈 등은 많은 진실을 말해준다. 클라라의 아버지 테오는 맹세코 아무짓도 하지 않았다는 루카스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딸은 거짓말이라곤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며 루카스를 몰아부친다. 그러던 어느 날 클라라는 "아저씨는 잘 못 없어. 내가 바보 같은 말을 했는데, 이젠 다른 애들까지 이상한 말을 하고 있어"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지만, 엄마는 아이 말을 흘려듣는다. 인간은 들려오는 많은 말뿐 아니라 움직임에서 드러나는 많은 것을 관찰하고 사유하지 않는다.
아들 마쿠스의 외침 속에 진실한 메시지가 들어 있다. "친구들이 뭐 이래요. 친구도 아냐!"
철저히 아동 성범죄자로 내몰려 고립과 막막함, 슬픔이 배어나는 루카스의 얼굴이 압권이다. 인간은 저마다 자신의 잘못에는 관대하고 타인의 작은 잘못에 대해선 엄격히 단죄한다. 여럿의 잘못된 판단과 증언으로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들기는 순식간이다. 더구나 군중의 힘이 결집될 때는 더 깊고 큰 상처를 남긴다.
진실의 눈빛
마켓에서 부당한 모욕과 폭행을 당한 루카스는 돌아와 자신의 방에서 피를 흘리며 앉아 있다. 크게 부각된(big close up) 그의 두 눈은 죽은 자의 눈처럼 정지돼 있다. 거울 앞에서 옷과 핏자국을 닦아낸 루카스는 구두끈을 단단히 매고는 성탄 밤 마을 사람들이 모인 교회로 간다. 유치원 아이들이 부르는 캐럴을 들으며 그는 테오에게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보라고 소리친다. 슈퍼 직원들에게 폭행당해 부서진 안경은 이제 필요 없다. 진실된 눈, 거짓 없는 눈으로 테오에게 외친다.
"내 눈을 봐. 내 눈을 보라고. 뭐가 보여? 뭐가 보이기나 해? 없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그만 괴롭혀…." 가슴속 깊은 절규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그가 말하는 눈은 인간 내면을 반추하는 거울이자 오해와 편견으로 굽어진 사람들을 향한 양심의 외침이다.
그날 밤 테오는 결국 루카스에게 음식을 싸들고 찾아온다. 순간, 무겁고 깊은 침묵이 흐른다. 루카스가 먼저 테오가 들고 온 성탄절 음식을 맛본다. "맛있군…." 이 한 마디가 화해와 용서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마음을 추스른 루카스는 테오의 집으로 간다. 성탄 파티를 여는 가족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클라라를 본다. 여전히 바닥에 새겨진 복잡한 사선 무늬에 신경 증세를 보이며 계단 끝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클라라에게 루카스는 장난스럽게 말한다. "난이도가 높구나. 선이 얼키고 설켜 있네. 이 많은 선들을 어떻게 피하겠니?"하며 클라라를 안아 건네준다. 진실이 거짓까지도 끌어안아 선을 넘어가게 하는 포용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오늘의 희생양
1년 뒤, 루커스는 마을 사람들, 아들 마커스와 함께 사슴 사냥을 간다. 사슴을 쫓고 있는 그때, 누군가 루커스를 겨냥해 총을 쏜다. 갑작스런 상황을 피하며 산 위를 바라보지만 역광 속 언덕으로 사라지는 누군가는 아주 상징적이다. 거짓된 소문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일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암시를 주는 듯하다.
사회 공동체의 집단 본성을 과감하게 드러낸 '더 헌트'는 덴마크 어느 마을 이야기만을 소재로 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 주위에도 온라인 마녀사냥, 이른바 '네카시즘(Netizen+McCarthyism)'이 있지 않은가. 다수의 네티즌이 특정 개인이나 단체 등에 일방적으로 여론몰이를 통해 공공의 적으로 매도하는 현상에 대해 사회 정보윤리적 차원에서 깊이 새겨볼 일이다.
그룹대화 :
- 우리 가족이나 동네, 직장, 학교, 교회에서 누군가를 따돌린 체험이 없는지 대화 나누기.
- 검증되지 않은 뜬소문에 대해 우리의 반응은 어땠는지.
성경구절 :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가톨릭 문화산책] <28> 영화 (6) 맨 오브 스틸(Man of Steel) - 대중 문화 속 하느님 구원 역사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악 물리치는 '구원자' 그려
맨 오브 스틸(Man of Steel, 2013)
감독 : 잭 스나이더
상영 시간 : 148분
장르 : 액션ㆍ모험ㆍ판타지ㆍSF
등급 : 12세 이상
과학자들은 지구에 위기가 찾아왔다고 경고한다. 오존층이 파괴되고, 열대림은 소멸하며, 지구 온난화와 산성비 등 가시적 변화가 지구촌 도처에서 나타난다. 남극과 북극해를 뒤덮은 얼음은 예상보다 빠르게 녹아 해수면이 점점 상승한다. 홍수와 가뭄, 혹한이 정상적 기상 흐름을 잃은 지 오래다.
근대문명의 발달로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가 부상했고 자본과 권력은 신자유주의를 낳았다. 생명윤리를 외면한 유전자 조작과 생명 복제라는 비윤리적 생명공학이 현대 과학문명의 괴물로 자리를 틀고 있다.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인 '맨 오브 스틸'에서 말하고자 하는 파멸된 크립톤 행성 이야기는 이런 맥락에서 읽어내야 할 경고가 아닐까 싶다.
줄거리
무차별적 자원 개발로 멸망 위기에 처한 크립톤 행성. 이 행성 최고의 과학자 조엘은 그래서 갓 태어난 아들 칼엘을 지구로 보낸다. 자신의 존재를 모른 채 지구에서 클라크라는 이름으로 자란 칼엘은 남다른 능력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소외를 당한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탄생과 성장 과정의 비밀을 듣게 되면서 혼란에 빠진다.
한편 크립톤 행성의 반란군 조드 장군은 파괴된 행성을 다시 재건할 수 있는 모든 유전자 정보가 담긴 코덱스(codex)가 칼엘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찾아 부하들을 이끌고 지구에 온다. 이제 칼엘은 자신을 외면하던 사람들이 사는 지구의 보루가 돼 최강의 적 조드 장군과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전쟁을 시작한다.
새로운 시작
영화는 한 생명이 태어나는 장면에서 비롯된다. 수백 년 만에 산고를 겪으며 자연출산한 아이는 엘(EL) 가문의 아들이었다. 이름은 칼엘(Kal EL). 아버지 이름은 조엘(Jor EL)이었다. 'EL'은 엘로힘의 고대어로, 하느님과 같은 보통 명사이며 일반적으로 신성(神性)을 뜻하고, 동시에 고유명사로서 단 한 분뿐인 하느님을 지칭하기도 한다. 조엘과 칼엘은 하느님을 은유한다.
크립톤인들은 행성 표면의 자원을 모두 고갈시킨 후 그것도 모자라 행성의 중심핵까지 파내려가 결국 행성이 붕괴직전까지 간다. 이같은 급박함에도 조엘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크립톤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 지구인들이 자신의 행성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아들을 지구로 보낸다. 크립톤 행성의 파괴는 오늘날의 생태계와 환경호르몬으로 죽음의 위기를 겪는 지구를 보여주는 비유(metaphor)이기도 하다.
조엘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칼엘에게 말한다. "가슴의 'S' 마크는 '엘'가문의 상징인 '희망'을 의미하지. 그 안에 믿음이 있어. 선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네가 그들에게 가져다 줄 수 있음을 믿어라"하고 말한다. 어머니 라라도 칼엘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 새롭게 재생될 믿음과 희망을 암시하는 시작이다.
공존의 길
크립톤 행성의 대장 조드는 크립톤 행성만 살리는 데 목숨을 건다. 그는 힘을 앞세워 살상과 반란의 칼을 휘두른다. 조드는 자신의 종족을 구하고 영원히 번영하기 위해 열등한 혈족은 제거하고 우열족만을 살리려 한다.
한편 북극에서 만난 칼엘에게 조엘은 이렇게 말한다.
"10만 년 동안 번영했었지…. 기적을 일궈냈던 거지…. 인위적으로 인구 조절을 했고, 아이들은 사회에서의 역할이 정해졌지. 노동자와 군인, 지도자 전부 말이야. 네 어머니와 나는 뭔가 중요한 걸 잃었다고 생각했지. 선택의 자유와 기회의 평등, 소중한 가치를…."
태어난 아이가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칼엘이라고 말한다.
조엘은 모든 생명체의 공존, 크립톤 종족과 지구인, 모두의 중요성을 칼엘에게 말한다. "넌 크립톤의 자식이자 지구의 자식이기도 해. 네가 원한다면 두 세상의 자식이 되어 다오." 그리고 두 종족 간에 다리가 돼 구원자의 역할을 하길 바란 것이다. 지구인들은 또한 거대 문명의 지배 속에서 충분히 폭력적이었고, 생태계를 파괴한 결과로 멸망 위기를 겪고 있다. 새로운 지구 건설은 모든 생명체가 함께 나누고 누리며 숨 쉬는 세계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그는 던진다.
칼엘은 캔자스 주 스몰빌에 내려와 클라크라는 이름으로 산다. 신적 능력을 간직하고 있지만, 자신의 때를 기다리며 소박한 지구의 삶을 지구 부모에게 습득한다. 지구 아버지 켄트는 아들이 감정을 절제하고 분별력있게, 또 능력을 균형 있게 활용하라고 조언하며 신뢰로 동반한다.
그러나 칼엘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왜 지구에 살고 있는지 의문을 품는다. 켄트는 클라크에게 칼엘의 현존 자체가 기적이고, 지구 외에도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해준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이유를 알게 될 때를 기다리게 한다. 열등한 인종도, 우열한 인종도, 심지어 미생물까지도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칼엘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때가 도래해야 함을 말한다.
새로운 세상을 위한 투신
칼엘은 자신의 초능력을 감추고 살아가지만 위험에 처한 약자들을 위해 흘러넘치는 사랑을 숨기지 못한다. 통학버스가 강에 빠지자 어린이를 구해 주고, 유조선이 폭발하자 초능력으로 철근을 막아낸다. 그의 사명은 악만 빼고 누구든지 살리는 일이다.
드디어 그의 때가 왔다. 칼엘은 북극에 숨겨진 크립톤 비행선에서 아버지 조엘을 만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 뒤 그의 눈빛과 몸에서 초능력을 감지한다. 이때 조드 장군이 지구를 찾아와 크립톤 행성의 유전자 정보가 담긴 코덱스를 24시간 안에 찾아오라고 명령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를 멸망시키겠다고 위협한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칼엘은 "넌 평범하지 않아. 언젠가 선택의 날이 올 거야"라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다.
칼엘은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번민을 털어 놓는다. 등 뒤로 보이는 겟세마니 예수님 그림은 고뇌하는 칼엘의 심정과 겹치는 상징이다. 신부는 오로지 믿음에 따라 행동할 것을 권한다. 칼엘은 지구와 인류를 위해 투쟁할 것을 결심한다. 둘 중 하나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결전에 나선다. 싸움 중 조드가 칼엘에게 한 말을 기억해보자. "네가 받아들인 인간들을 고통받게 해 주마. 인간을 그렇게까지 사랑한다면 그들 죽음에 눈물이나 흘려." 불을 뿜어대는 악의 상징이다. 칼엘은 죽어가는 인간을 바라보며 그의 말대로 눈물을 흘린다. 천신만고 끝에 칼엘은 승리한다. 여기서 마지막 장면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다. 평범하지 않는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주시해야겠다.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는 칼엘의 모습. 드러나지 않지만 누룩과도 같은 존재, 오늘날 구석구석에서 선을 퍼뜨리는 또 다른 우리 중의 누구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맨 오브 스틸'은 전형적인 미국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다. 따라서 미국적 강인함과 불굴의 영웅상을 연출했다. 이 영웅상은 타 문화에 대한 개방과 위기를 극복하려는 미국의 노력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된 메시지가 도드라진다. 그래선지 웅장하고 화려한 서사 구조와 극적인 장면들은 다소 지루해 보이기도 하고, 무자비하게 그려진다. 진정한 관용이 어디쯤에서 발휘돼야 할지 묻고 싶어지는 부분이 적잖은 영화다.
그룹대화
1. 생명공학을 앞세워 파괴되는 지구 환경과 유전자 조작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2. 나는 주체적으로 지구 위기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3. 유전자 조작을 막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
성경구절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묵시 21,1).
[가톨릭 문화산책] <33> 영화 (7) '터치' - 생명을 살아가는 작은 숨결들
흔들리는 인간 마음을 터치하는 '그 손길'
터치(Touch, 2012)
감독 : 민병훈
상영시간 : 100분
장르 : 드라마
등급 : 18세 이상
몇 년째 자살률이 부동의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우리나라. 2011년 서울시에서 자살한 사람은 2722명으로, 하루 평균 7.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3시간마다 1명이 자살한 셈이다. 너무 빈번해 이제는 특별한 인물이 아니면 보도도 되지 않는다.
민병훈(바오로)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열심히 그날그날 세상을 살아가는 순박한 사람들, 자신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그저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의 낮고 작은 숨결이 모여 이룬 것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 신의 영역이라면, 그 생명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이런 메시지를 살리려고 애쓴, 소시민의 이야기 같은 영화 '터치' 속으로 들어가 보자.
줄거리
국가대표 사격 선수를 지냈지만 점차 알코올 중독자가 된 후 모든 걸 잃고 중학교 사격코치를 하는 남편 동식(유준상)과 간병인 일을 하며 쪼들리는 삶이지만 금실 좋은 부부로 살아가는 아내 수원(김지영)의 이야기다. 수원은 병원 몰래 돈을 받고 가족에게 버림받은 환자들을 무연고자로 속여 요양원에 입원시키기도 한다. 어느날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고 있는 동식은 코치 재계약 문제로 이사장이 주는 술을 어쩔 수 없이 마시고 음주 운전을 하다가 자신이 가르치던 사격부 학생 채빈을 치게 되자 당황한 나머지 뺑소니를 쳤다가 경찰에게 잡힌다. 동식의 교통사고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수원은 자신이 돌보는 노인환자의 끈질긴 성관계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하지만 이 사실이 발각돼 수원은 결국 병원에서 퇴출당한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수원은 딸 주미가 없어졌음을 알게 되고 수소문 끝에 낯선 집에서 주미를 발견하는데….
- 사슴을 죽인 동식이 두려움과 죄책감에 오열한다.
민초들의 삶
영화의 첫 장면은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 만신창이가 돼 흔들리는 들풀로 시작한다. 세파에 시달리며 가정을 지키는 소시민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장례미사를 드리는 성당 안 풍경이다. 검정색 포에 덮인 관, 아빠 품에 안긴 어린이의 해맑은 미소가 스쳐 가지만 수원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다. 사제는 강론을 계속한다. "…하지만 사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 나서야 합니다.… 영혼 속 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의 눈은 좀 더 밝아질 것입니다. 영혼 속 신과 연결된 끈을 놓지 않는다면…." 강론은 영화의 흐름을 암시한다.
장례미사 도중 돌아가신 할머니의 아들이 성당 밖으로 나와 고통스러워한다. 수원이 말을 건넨다. "어머님은 좋은 데로 가셨을 거예요." 그러나 아들의 질문은 날이 서 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습니까?" 그때 뭔가 수원의 양심을 건드린다. 사랑과 용기의 영이 그녀를 터치한 것이다.
- 무릎 끓은 동식을 창 밖으로 보며 수원은 따스한 미소를 보낸다.
수원은 몰려오는 피곤을 감수하며 간병 일에 힘을 소진한다. 먹고 살기 위해 불법 의료행위까지 하며 늘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래서 수원은 자신에게 불신의 눈길을 던지는 사제나 수녀의 눈길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 그녀의 긴장된 삶을 거친 숨소리와 함께 핸드 헬드 카메라로 클로즈업하며 따라가는데, 이들 장면 속에는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거나 이웃을 괴롭혀 상처를 주지 못하는 수원의 착한 심성과 강인함의 양면성을 겹쳐서 보여준다. 그녀는 간신히 남편을 출옥시킨 뒤 노인 복지센터를 그만둔다.
동식이 사격코치를 하던 부유한 집안 여학생 채빈은 자신의 속옷을 훔쳐 달아나는 남학생(장정원)을 사격용 총으로 쏜다. 정원이는 폐병에 따른 합병증으로 다리가 썩어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달동네 학생이다. 동식은 정원이를 쏜 채빈의 뺨을 때리며 야단친다. "빈총이라도 사람에겐 겨누지 않는다."
수원의 노력으로 출옥한 동식은 사냥 포수로 돈벌이를 한다. 그러던 어느날 덫에 걸려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어린 사슴을 보며 생명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 동식은 두려움과 신비로움의 체험을 사슴이라는 상징을 통해 하느님 영에 터치된다. 인간의 쓰러짐은 인간적인 것이고, 다시 일어섬은 신적인 것이다.
절망의 끝에서 찾아온 희망
주미의 행방불명을 알게 된 수원은 절규하며 딸을 찾아 나선다. 그때 딸의 생일선물 인형을 매달고 가는 남학생을 미행한다. 학생이 다다른 가난한 달동네 정원이의 집 벽장에서 주미를 발견한 수원은 두려움과 분노 속에 도망치듯 딸을 끌고 나온다. 그때 방바닥에서 방치된 한 여인을 본다. 더러운 오물 냄새 속에 다리가 썩어가는 여인의 꺼져가는 신음 소리가 수원의 양심을 건드린다. 그때 성당 마당에서 본 사슴이 떠오른다. 수원은 자신의 마음을 터치하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다. 그래서 다시 그 여인을 찾아간다. 더럽고 악취가 진동하는 어두운 방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어오는 햇살은 수원과 그녀를 비춘다. 어쩌면 우리 영혼 속에 깃들고 싶어 하는 하느님 빛의 초대인지도 모른다.
- 가톨릭노인복지센터에서 일하는 수원이 깨끗이 치유된 여인의 손을 잡아준다.
차가운 현실
죽음이 임박한 듯한 여인을 위해 수원은 주민센터도 찾아가고 병원 응급실도 찾아가지만 관료적인 그들의 태도는 답답하기만 하다. 수원은 소리친다. "그럼, 돈 없으면 치료도 받지 말라는 건가요?" 이 말은 사회에 던지는 절규다. 마지막으로 가톨릭노인복지센터에 전화 다이얼을 돌린다. 그러나 그동안 수원이 저지른 거짓에 속아온 사제는 그 여인의 입원을 거절한다. 수원은 가슴을 에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직접 여인에게 안락사 주사를 놓아주려 하지만 두려움이 엄습한다. 절망의 순간에 양심을 건드리는 하느님! 수원은 자신이 생명도, 죽음도 책임질 수 없는 존재임을 절감한다. 이때 죽음에 임박한 여인은 떨리는 손으로 수원의 볼을 조용히 건드린다. 그를 위해 애쓰는 수원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터치다. 그때 요양원 구급차가 도착한다.
요양원에 도착한 여인은 세례를 상징하는 물속에 잠긴다. 그동안 몸과 마음의 상처가 깨끗이 씻긴 것이다. 수원은 그의 손을 잡아준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여인은 아들 정원을 보살펴줄 것을 수원에게 부탁한다. 그의 고달픈 삶을 위로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한다. 은은한 성가를 뒤로한 채 수원은 지친 몸을 이끌고 밤차를 타고 집에 돌아온다.
한편 동식은 채빈의 사격 성공에 환성을 지르며 또 술을 마신다. 취중에 교통사고로 쓰러진 아이를 총으로 쏜 동식은 갓길에 쓰러진다. 아침 햇살이 동식이의 어깨를 환히 비춘다. 잠을 깬 동식은 몽롱한 눈으로 자동차 문을 여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다. 자신에게 생명의 경외감을 안겨준 사슴이다. 햇살은 동식의 눈과 사슴의 눈을 강하게 비춘다. 동식은 생명을 죽인 죄책감에 오열한다. 지친 몸으로 돌아온 수원을 밝고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비추고 수원 손에 들려진 생일 선물 인형이 클로즈업된다. 그때 원장신부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잘 들어갔니? 방금 자매님이 편안히 하늘나라로 가셨다. 안나야, 고생했다. 정말 수고했다. 편히 쉬거라." 수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불편함을 주는 영화
러시아에서 영화 공부를 한 민병훈 감독의 작품은 크쥐시토프 키에슬로브스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연출기법처럼 담백하고 함축적이다. 이 영화는 관객이 능동적으로 사유하게 하고, 곱씹으면서 깊은 의미를 끌어내게 한다. 영화 '터치'는 관객에게 불편함을 주는 영화다. 직면하고 싶지 않은 어둔 현실의 갖가지 문제에 질문을 던지는 진지한 영화이기에 재미로 감상하기에는 무겁고 감상하기 힘든 영화다. 이 영화는 각자의 현실 속에서 터치하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게 한다. 성찰적 예술성이 강한 작품이다.
그룹대화
1. 오늘을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사회의 부조리한 문제들은 무엇인가?
2. 이 영화에서 터치 받은 것은 무엇인가?
3.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께서 터치한다고 생각하는가?
성경구절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가톨릭 문화산책] <38> 영화 (8) 엔딩노트
죽음, 하느님께로 가는 아름다운 길
엔딩노트(Ending Note, 2011)
감독 : 스나다 마미(砂田麻美)
상영시간 : 90분
장르 : 다큐멘터리
등급 : 전체 관람가
인간은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일회적 삶을 사는 인간에게 죽음은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이기에 삶이 의미가 있다면 죽음 또한 분명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스나다 도모아키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 '엔딩노트' 속으로 들어가 보자.
줄거리
정년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준비하던 스나다 도모아키는 건강검진을 통해 말기암 판정을 받아든다. 예상치 못한 죽음 통보 앞에 망연자실해 하며 슬퍼하기보다 그는 성실하고도 꼼꼼하게 자신만의 '엔딩노트'를 준비한다. '평생 믿지 않았던 신을 믿어보기', '한 번도 찍어보지 않은 야당에 표 한 번 주기', '일만 하느라 소홀했던 가족들과 여행 가기' 등 목록을 작성하며 그는 가족들과 소중한 추억을 쌓는다. 그렇게 '엔딩노트'가 채워질수록 가족과의 긴 이별 시간은 점점 가까워진다.
죽음 준비는 내 일상의 일부
영화의 첫 장면은 카메라 파인더를 서서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기며 촬영하는 패닝(panning)기법으로 막을 올린다. 청명한 하늘에 정갈히 건축된 높은 빌딩을 낮은 데서 올려다보며 찍다가 장례식장인 성당으로 화면을 옮겨가며 오버랩(Overlap)한다.
그는 죽어서도 문상객을 자상히 챙긴다. "바쁘신 와중에도 저를 위해 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마실 건 충분한가요? 부족한 건 뭐든 말씀하세요.… 덕분에 이날을 맞을 수 있게 됐습니다."
대학에서 경제학부를 나와 민간 화학제조사 영업부에서 40년간 많은 프로젝트를 기획해온 그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일생일대의 마지막 프로젝트"라며 엔딩노트를 만든다.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무엇이든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는 꼼꼼한 그였기에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잘 죽을 수 있을까, 사람은 왜 죽을까?"하는 질문을 던지고 죽음을 적극적으로, 또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하나하나 준비해 나간다. 장례식장도 자신이 직접 답사해 빈틈없이 준비한 그는 94세 어머니께 알려드린다. "장례식은 조용하고 간단히 할 거예요. 노래도 부를 거예요. 지인들만 모시고, 부의금은 받지 않겠습니다.…"
밝은 성격과 심각한 일일수록 유머를 잊지 않았던 그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체력은 떨어지고 몸은 야위지만 부정하려고도 하지 않고 자포자기하지도 않으며 분노하지도 않고 오히려 유쾌하게 죽음을 맞는다. 장례식에 초대할 사람들을 미리 컴퓨터에 정리해 두고 혹시나 해서 여벌받기까지 해 둔 명단을 아들에게 넘겨주며 말한다. "장례식에서 주빈(Main guest)은 나니까." "…장례식 도중에 잘 모르겠으면 나한테 전화해"하며 늘 웃음을 잃지 않는다. 올해를 넘길지 모르니 연하장하고 부고장을 같이 보내겠다며 친구에게 전화한다.
잊고 있던 중요한 것들을 회복하기
자신의 부주의로 태어난 막내딸! 그러나 문제인 이 딸을 통해 그동안 무심했던 하느님과의 관계를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직접 사제를 찾아가 말한다. "마음이 평온해지는 곳을 찾다 보니 이렇게 의지하게 됐습니다. 이곳에서 세례를 받고 여기서 편안히 보내주신다면…." 그러고나서 사제가 권하는 기도문을 매일 정성들여 바친다.
"제가 세상을 뜰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가장 걸리는 건 가족이죠!" 그는 소홀했던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힘들지만 마지막 가족여행을 떠난다. 그동안 멀리서 홀로 살았던 어머니와 함께 여행하며 많은 대화를 나눈다. 대화 중에 가장 중요했던 건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것. 그리고 불교 신도인 그가 세례를 받기로 한 사실과 성당에서 장례식을 할 것이라는 소식 등이다. 바쁜 직장생활로 평소 소원했던 아내에게도 쑥스럽지만 사랑한다고 말한다. 아내 준코는 "같이 가고 싶어. 당신이 이렇게 좋은 사람인줄 너무 늦게 알았어. 더 많이 사랑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하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부인에게 "같이 살아줘 고맙다"고 자신의 노트에 기록한다.
가족들 역시 끝까지 온 힘을 다하는 그가 흔들리지 않고 남은 생을 편하게 보내도록 최선을 다한다. 모두 그의 둘레에 모여 행복한 옛 추억을 담은 비디오를 보며 아름다운 삶의 기억을 되살린다. 아버지 주위에 모인 가족들! 손녀들은 "할아버지 덕분에 많이 웃었어요.… 하늘나라에 가시게 됐지만 할아버지랑 굉장히 즐거웠어요.…"하며 할아버지가 아름다운 죽음을 맞도록 돕는다. 그는 어머니께도 작별 인사를 한다. "오랫동안 고마웠어요.… 어머니보다 먼저 가서 죄송해요.…" 가족들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기쁨을 느낀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관계가 있는 한 죽음은 끝이 아니다.
평소 스쳐 지나치던 일이지만 죽음 앞에서는 매시간이 소중하며 은총이었다. 방학 중 미국에서 찾아온 손녀들 앞에서 암에 걸렸다고 누워만 있을 순 없다며 손녀들 머슴노릇으로 재미있게 최선을 다해 놀아준다. 임종을 앞둔 그을 위해 미국에서 자신을 보러 찾아온 손녀들에게 애정을 표시하며 연신 "고맙다…. 감격스럽다! 할아버지 감격!! 만나서 감격!!"하며 두 손을 들어 올려 기쁨을 표현한다.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 삶이었기에 모든 것이 감사로울 뿐이어서 그는 끊임없이 그와 관계한 모든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는 죽기 하루 전 세례를 받는다. 그가 상상했던 장엄한 성당도, 오르간 음악도 없는 병실에서 막내딸에게 세례(대세)를 받는다. 온 가족이 모인 병실! 부인과 세 자녀, 큰 아들의 세 아이까지! 창가에 비치는 햇살 속에서 죽음에 대한 어린 손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렇게 웃고 있으니까 여기가 천국 같다. 정말 그러네"하고 말한다.
이어 그는 편안하게 죽음의 문을 넘어 영원한 나라로 간다. 죽음은 축복이자 은총이다.
그리고서 어둑어둑해지는 도시 하늘에 한 마리 새가 하늘로 훨훨 날아 사라진다. 장례차가 가족 곁을 지날 때 그는 손녀들에게 말한다. "할아버지 앞에 너희들이 나타나줘 정말 행복하단다. 하늘의 별이 돼 너희들 크는 걸 지켜볼게…."
영화에 대해서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노트'는 감독이자 주인공 막내딸인 스나다 마미 감독이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아버지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직접 카메라에 담은 작품이다. 다큐멘터리를 공부한 그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밑에서 배운 이후 데뷔작에서 아버지의 투병과 죽음 준비, 임종을 그렸다. '엔딩노트'는 최대한 인물에 가깝게 다가가면서도 거리를 두면서 잔잔한 감동을 주는 영화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의 모습을 습관처럼 계속 카메라에 담아온 스나다 마미 감독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 계획은 없었지만 촬영 과정에서 아버지가 죽음을 맞던 모습과 죽음을 함께 마주하는 가족을 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보여주고자 영화화를 했다고 밝힌다. 죽음은 관계의 회복이자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며, 하느님께 가는 아름다운 길임을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그룹대화
1. 인생을 마무리하는 주인공 죽음에 대해 느끼는 바는 무엇인가?
2. 주인공의 마지막 프로젝트, 엔딩노트는 무엇인가?
3. 나의 엔딩노트에 첫 번째는 무엇인가?
성경구절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끝이 좋고 죽음의 날에 복을 받으리라"(집회 1,13).
[가톨릭 문화산책] <43> 영화 (9) 크래쉬 - 불모의 땅은 은총의 장소
메마른 광야에도 사랑과 화해의 오아시스가 있기에
크래쉬(Crash, 2004년)
감독 : 폴 해기스
제작국가 : 미국ㆍ독일
등급 : 15세 이상
상영시간 : 112분
장르 : 드라마ㆍ범죄ㆍ미스터리
고도의 기술문명은 세상을 더 편리하고 광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변화시켰다. 그 휘황한 불빛의 뒷모습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다. 잔악한 폭력과 불신, 착취와 파괴의 거대한 암초가 숨어 있다. 예수회 송봉모 신부는 「광야에 선 인간」이라는 책에서 세상은 광야이며 그 속성은 두 얼굴을 지닌 장소라고 했다. 힘겨움과 황량함, 외로움 등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고통의 장소를 뜻하는 것이다. 놀라운 하느님의 섭리와 보살핌이 드러나는 장소이자 인간 갈등이 서로 부대끼는 도시를 광야에 비유한 영화 '크래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줄거리
여덟 쌍이 겪으며 보여주는 갈등과 충돌, 8색의 트라우마를 만나게 한다. 늦은 밤 LA 근교의 한 도로에서 시체가 발견된다. 현장에 도착한 흑인 수사관 그레이엄의 표정이 당혹과 슬픔으로 일그러진다. 그리고 이야기의 시작은 36시간 전, 15명의 삶, 8가지 사건의 얽힘, 8색의 상처를 교차시키며 무관한 듯하면서도 연결고리가 이어지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영화는 어둔 밤, 푸른 수은등과 함께 현란한 불빛들이 서로 겹쳐지면서 부딪쳤다 사라지고 다시 충돌해 검푸른 나뭇가지 상처를 빛 속에 남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밤은 위험과 위협을 암시하는 듯해 두렵다. 밤의 공포와 같은 8개의 충돌 이야기를 빛으로 암시했다.
백인 부부 릭과 진 : 지방검사 릭과 그의 아내 진이 두 흑인 청년에게 차를 강탈당한 밤, 두려운 진은 집 열쇠수리공 멕시코인 대니얼을 의심하고 가정부에겐 짜증을 내다 계단에서 구르는 사고를 당한다. 정치적 성공에 몰두한 남편 릭은 그녀의 외로움을 감싸줄 시간이 없다.
흑인 부부 카메론과 크리스틴 : 같은 시각, 흑인이자 방송국 PD인 카메론과 아내 크리스틴은 강탈당한 지방검사 릭의 차와 같은 차종이라는 이유로 백인 경찰 라이언과 핸슨에게 검문을 당한다. 크리스틴은 라이언의 몸수색으로 성적 모욕을 받는다. 그러나 카메론은 자신의 지위에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 오히려 수치를 당한 아내에게 짜증을 내며 아내를 피한다.
백인 경찰 라이언과 핸슨 : 라이언은 병든 아버지로부터 받는 아픔에 대한 화풀이로 흑인 크리스틴에게 수치심을 준다. 후배 경찰 핸슨은 선배 라이언의 행동에 격분하지만 자신도 역시 편견과 두려움에 순진한 흑인 피터를 살해한다.
이란인 파라드와 멕시코인 대니얼 : 서툰 영어와 중동인이라는 이유로 자주 멸시를 당한 파라드는 자신의 가게를 지키기 위해 사들인 총구를 무죄한 멕시코인 대니얼에게 들이대고 총을 쏜다.
흑인 형사 그레이엄 : 백인 사회에서 성공을 위해 가족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를 선택한 그이지만, 지금 그 앞엔 동생의 시체와 함께 "동생을 죽인 살인자는 너"라는 어머니의 비난만 남아 있다.
피부색ㆍ인종ㆍ계급ㆍ직업ㆍ성별이 서로 다른 이들이 부대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충돌한다. 이들은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이 누구인지, 왜 그래야 하는지 자문하지 않는다. 소통의 문을 닫고 편견과 관계의 단절 속에 갇혀 산다. "날마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나도 정말 모르겠어"라고 절규하는 진은 고독과 두려움에 진저리를 낸다. 분노ㆍ소외ㆍ편견ㆍ집착ㆍ두려움ㆍ외로움으로 꽉 들어찬 그들의 메마른 마음이 엿보인다.
"정이 그리워서 그러는 거야! 다른 도시에선 길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정 드는데…. LA는 삭막하잖아! 늘 차 안에 갇혀 살고 사람의 체취가 그리워 서로 충돌하고 상처 주고…."
교통사고 현장에서 흑인 형사 그레이엄이 애인에게 하는 말이다. 이들은 고통스럽고 힘겹게 사막을 걷고 있다. "인간의 절망은 하느님을 만나는 기회다"라는 말이 있듯이, 세상의 광야, 인생의 광야는 은총의 장소이기도 하다.
은총의 장소
인간이 접촉하거나 충돌하지 않는다면, 그 삶은 무인도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충돌은 갈등을 일으키지만 화해와 사랑의 꽃을 피운다.
태양은 LA를 밝게 비추며 이들 안에 감춰져 있던 선한 마음을 드러낸다. 백인 경찰 라이언은 온몸을 던져 위기에 처한 크리스틴을 극적으로 구출하고, 백인 경찰 핸슨은 위기에 처한 유색인 PD 카메론을 친구라며 목숨을 구해준다. 백인 경찰의 도움을 받은 카메론은 소홀했던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전화를 한다. 더운 지역인 LA에 눈이 내린다. 눈송이들이 쌓여 더러운 마음과 죄를 덮어주며 메마른 사막을 포근하게 적신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지방검사의 아내 진은 유색인 가정부의 정성스러운 보살핌에 고마움을 표현하며 그녀를 끌어안고 이렇게 고백한다. "난 바보였나 봐! 당신이 가장 좋은 친구란 걸 몰랐다니…." 편견의 벽을 허물고 화해하는 축복의 시간이다.
강탈범 앤서니는 탈취한 자동차에 실린 불법 이주민들을 풀어주며 자신의 모든 돈까지 털어 준다. 그가 구원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여는 순간이다.
이란인 파라드는 열쇠수리공인 멕시코인 대니얼을 도둑으로 단정하고 대니얼의 집으로 달려가 총을 쏘는데 대니얼의 어린 딸이 대신 총에 맞는다. 파라드의 총에 맞는 대니얼과 딸 뒤로 환한 빛이 비치며 기적과 같은 말이 이어진다. "아이를 쐈어! 애는 안 다쳤어. 애는 천사야! 나의 구세주…. 우릴 지키러 온거야"라고. 파라드는 자신의 하느님 체험을 딸에게 고백한다. 황량한 사막은 은총의 장소로 변화됐다.
시기는 성탄절. 아기 예수 구유 벽화와 모형 산타클로스, 크리스마스 트리, 그리고 성탄 캐럴이 흐른다. 편견의 벽을 허물고 인간을 만나러 하느님이 내려오신 성탄절이다. 구세주의 탄생으로 광야에 샘물이 흐른다. 서로에 대한 편견과 고립의 껍질을 깨고 나와 화해와 관용, 사랑과 이해의 새로운 길을 택한 것이다.
영화는 부감(high angle)기법으로 시내 한복판에서 다시 교통사고로 아귀다툼하는 현장을 빙 돌아 나오며 끝난다. 이 세상 삶의 장소가 광야이지만 그 안에 하느님의 은총이 깃들어 있음을 암시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 LA에 메마른 사막을 포근하게 적시는 축복 같은 눈이 내린다. 세상 삶은 광야지만, 그 안에는 하느님 은총이 깃든다.
광야는 하느님 섭리의 장소
2006년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본상, 편집상을 수상한 '크래쉬'는 폴 해기스 자신이 경험한 기억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자동차 강도를 당했던 그는 집 안의 자물쇠를 모두 바꿨고, 그 강도의 시점에서 LA를 바라보는 작품을 쓰기로 결심했다. '멜팅 팟(melting pot)'이라는 미국의 LA! 다양한 종족, 다양한 문화가 뒤섞인 이들은 함께 섞여 살며 선입견과 편견으로 서로 부딪치고 충돌한다. 이들은 인간 군상의 한 단면이다.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내 안의 광야는 무엇일까? 이 광야를 용감하게 직면하고 받아들인다면 이곳은 하느님 섭리의 장소가 될 것이다.
성경구절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며 승냥이가 살던 곳에는 풀 대신 왕골이 자라리라"(이사 35,1-7).
[가톨릭 문화산책] <48> 영화 (10) 도쿄 소나타
크고 작은 시련의 터널 끝에는 언제나 찬란한 빛이
도쿄 소나타(Tokyo Sonata, 2009년)
감독 : 구로사와 기요시
제작 국가 : 일본, 네덜란드
등급 : 12세 이상
상영시간 : 119분
장르 : 드라마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면서 많은 소시민들은 경제적으로 좀 더 삶이 나아지길 꿈꾼다. 소시민들에게는 화합과 소통을 꿈꾼다는 말은 어쩌면 사치스런 말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만큼 힘든 상황과 어려운 처지의 고통이 희망을 품을 힘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잠시 '인간이 넘어진다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고 다시 일어선다는 것은 신적인 것'이라는 말을 떠올려본다. 시작의 길은 언제나 열려 있다. 새롭게 걸어갈 용기를 가진 이들의 영화 '도쿄 소나타' 속에서 그 답을 찾는다.
줄거리
들리나요, 희망이 오는 소리가…. 며칠 전 실직 당한 아빠, 언제나 외로운 엄마, 갑자기 미군에 지원한 형, 남몰래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나. 우리 가족은 모두 '거짓말쟁이'라고 주인공은 고백한다. 초등학교 6학년 켄지에겐 꼭꼭 감춰둔 비밀 한 가지가 있다. 켄지의 천재적 재능을 발견한 선생님은 음악학교 오디션을 권하지만, 아빠의 반대 때문에 몰래 피아노학원을 다니던 켄지는 계속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 그런데 비밀은 켄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회사에서 해고된 아빠, 어느 날 사라진 엄마, 미군에 지원한 형까지 모두 숨겨둔 비밀이 있었는데…. 과연 켄지는 아름다운 꿈인 피아노 연주를 계속할 수 있을까? 거짓말쟁이 켄지 가족 불협화음의 조율이 시작된다!
폭풍우가 치네
세찬 폭풍우가 몰아치며 열린 거실 문으로 빗줄기가 들이치고 신문지와 잡지는 바람에 휘날려 뒹군다. 황급히 문을 닫으려던 엄마 메구미는 휘청거리는 나뭇가지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이어지는 장면은 아빠 류헤이의 사무실. 그는 "폭풍우가 치네" 하며 중얼거린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한다. 아니나 다를까 저임금 정책에 따라 중국인을 채용한 회사는 총무과장이었던 아빠를 권고 퇴직시킨다. 갑작스런 해고로 가장으로서 권위와 자존심이 무너지자 그는 이 사실을 가족에게 비밀에 부친다. 아침이면 넥타이에 양복을 차려 입고 출근하는 것처럼 집을 나선다. 노숙자들 틈에 끼어 무료급식소에서 끼니를 때우며 고용지원센터를 찾아다닌다.
가족만을 위해 헌신하던 엄마 메구미는 정성을 쏟아 도넛을 만들지만 식구들은 관심이 없다. 그녀는 어느 날 소파에 누워 "일으켜 줘, 누가 나 좀 일으켜 줘" 하며 외로움과 무료함에 절규해보지만 간절한 손짓은 그저 허공을 맴돌 뿐이다.
초등학교 6학년 켄지는 아빠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래 급식비를 피아노 레슨비로 사용하며 쓰레기통에서 고장난 전자 피아노를 주워 열심히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연습을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 평범한 사사키 가족이지만 일본 중산층 가족의 상징으로 보인다. 이들이 사는 집의 내부 역시 그들의 심리를 드러낸다. 집을 둘러싼 전깃줄, 집 뒤를 지나가는 전차가 내는 굉음과 진동은 삶의 굴곡을 의미한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공간인 식탁은 계단과 부엌의 선반이 가로질러 있어 꽉 막힌 느낌을 준다. 거리의 대형 쇼핑센터와 도쿄라는 도시 또한 생명력이 없어 보인다. 류헤이는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 쇼핑센터 화장실 청소 일을 하게 되는데, 가장으로서 권위를 지키느라 넥타이 차림으로 출ㆍ퇴근하는 위선적 태도를 드러낸다. 큰아들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세계평화를 지키겠다는 포부를 내세워 부모 반대를 무릅쓰고 미군에 자원 입대한다.
새로운 시작의 징검다리
시련의 어둡고 갑갑한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류헤이는 어느 날 쇼핑센터 화장실 청소를 하던 중 돈 봉투를 발견한다. 돈 봉투를 움켜쥔 그는 어디론가 달려가다 쓰레기더미에 부딪쳐 뒹굴며 외친다. "어떻게 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 다시 시작하고 싶어…." 일어나 뛰다가 그는 자동차에 부딪쳐 정신을 잃는다. 한밤중이었다.
한편 도둑의 인질로 잡힌 메구미는 도둑이 시키는 대로 훔친 차를 대리 운전해 먼 바닷가에 도착한다. 그 밤에 그녀는 도둑의 진실한 속내를 듣게 된다. 자신은 이제 구제불능이라며 자살하려는 도둑에게 "자기 자신은 하나뿐이에요"하며 용기를 주던 그녀는 눈을 들어 수평선을 바라보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라며 자문하듯 중얼거린다.
설상가상으로 켄지마저 아빠에 대한 반항으로 가출해 고속버스 짐칸에 몰래 숨어든 죄로 지하 감방에 갇힌다. 모든 상황은 무거운 침묵을 자아내는 분위기다.
혹독한 사회 현실, 실패와 좌절 속 사사키 가정은 분열되고 상처만 가득하다. 하지만 어둔 밤이 서서히 밝아올 무렵 이들 마음 안에도 서광의 동이 터 온다.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된 켄지도, 거친 파도가 밀려드는 바닷가에 있던 메구미도 새벽 햇살을 받으며 집으로 향할 결심을 한다. 만신창이가 돼 길 옆에 쓰러져 있던 류헤이도 정신을 차리고 주머니 속 돈뭉치를 유실물함에 넣고 집으로 돌아온다. 악몽 같은 어둔 터널을 체험한 이들은 집과 가족의 따뜻함을 느끼며 식탁에 둘러 앉아 함께 식사를 한다. 미군에 입대한 큰 아들만 빼고….
몇 개월 후 켄지는 음대부속중학교 실기시험에서 드뷔시의 '달빛'을 연주하게 되는데 심사위원들과 청중은 켄지의 연주에 심취한다. 권위와 자존심의 상징이던 넥타이도 없이 입시 시험장에 함께한 류헤이는 아들의 천부적 소질에 놀라 눈물을 글썽인다. 하느님의 영을 상징하는 빛은 연주장을 가득 채우며 생기를 돋운다. 연주를 마친 켄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류헤이와 메구미…. 세 식구가 연주장에서 걸어 나오는 영상 뒤로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이들의 발자국 소리만 특별한 음향으로 깔린다. 이 소리는 희망을 향해 계속 걸어갈 미래를 암시한다.
하느님은 언제나 다시 시작할 기회를 마련하신다. 어떤 처지에서도 실망하지 않은 이들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는 하느님을 떠올리라는 초대가 아닐까 한다.
꿈과 희망을 안고
'도쿄 소나타'는 2008년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 2009년 아시아 필름 어워드 최우수 각본상과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세계적 거장 구로사와 기요시감독은 이 영화는 꿈과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시나리오 작가 맥스 매닉스가 쓴 작품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각본을 수정한 작품이다. 엄마의 비중을 높이고 큰아들 캐릭터를 추가로 등장시켰다. 크고 작은 시련의 터널을 지나 '도쿄 소나타'의 가족들에게 찾아온 희망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용기의 메시지를 함축한 영화다.
성경구절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로마 8,24)
가톨릭 문화산책] <53> 영화 (11) 오만과 편견
오해와 편견이 이해와 사랑으로 바뀌는 만남의 은총
오만과 편견(Pride & Prejudice, 2005년)
감독 : 조 라이트
제작국가 : 프랑스ㆍ영국
등급 : 12세 이상
상영시간 : 127 분
장르 : 로맨스, 드라마
인간은 누구나 만남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되고 관계가 형성된다. 이 사이에 끼어드는 내면의 불청객이 있다면 오만과 편견이 아닐까?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는 「만남의 신비」에서 "만남이란 하나의 신비이며, 이 만남 안에는 진귀한 보물과도 같은 사랑ㆍ용서ㆍ구원ㆍ감사ㆍ생명ㆍ희망ㆍ평화ㆍ기쁨 등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남녀간 사랑 역시 만남에서 시작되고 헤어짐의 발단도 만남에서 비롯된다. 수많은 인간 군상들 속에 펼쳐지는 만남의 진실을 보여주는 영화 「오만과 편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줄거리
사랑이 싹틀 무렵 남자들이 빠지기 쉬운 실수는 '오만'이고, 여자들은 깨기 힘든 '편견'에 사로잡히기 일쑤다. 이 모든 것을 넘어선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진전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엘리자베스'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결혼까지 이어지는 것임을 굳게 믿고 있는 자존심 강하고 영리한 소녀다. 좋은 신랑감에게 다섯 딸을 시집보내는 것을 부모의 목표로 생각하는 극성스러운 어머니와 자식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너그러운 아버지를 중심으로 화목한 베넷가(家)의 다섯 자매 중 둘째 딸이다. 조용한 시골에 부유하고 명망 있는 가문의 신사 '빙글리'와 그의 친구 '다시'가 여름 동안 대저택에 머물게 되고, 그곳에서 열리는 댄스파티에서 처음 만난 '엘리자베스'와 '다시'는 서로에게 야릇한 호감을 품지만 자존심 강한 '엘리자베스'와 무뚝뚝한 '다시'는 만날 때마다 서로에게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저울질만 한다. '다시'는 아름답고 지적인 그녀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게 되는데…. 폭우가 쏟아지는 날, 비바람이 몰아치는 언덕에서 가슴속 깊은 곳에 담아둔 뜨거운 사랑을 그녀에게 고백한다. 결혼의 조건은 오직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는 '엘리자베스'는, '다시'가 그의 친구 '빙리'와 그녀의 언니 '제인'의 결혼을 앞두고 '제인'이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한 것을 알게 된다. 이로 인해 그를 오만하고 편견에 가득 찬 속물로 여기며 외면하고…. 서로에 대한 오해와 편견의 골이 깊어지는데 '엘리자베스'와 '다시'는 과연 서로의 진심을 알고 사랑을 키워갈 수 있을까….
첫 만남
영화의 첫 장면은 소설책을 읽으며 걷는 리지(엘리사베스를 엘리자나 리사, 리즈, 리지, 베스, 베티 등 애칭으로 부르기도 한다)를 클로즈업하며 시작된다. 그녀의 성격을 드러내는 단순하면서도 짙은 색감의 드레스! 아침 햇살이 그녀를 환히 비춘다. 자신의 선입견을 넘어가듯 다리를 건너 집으로 향하는 그녀를 따라 카메라는 롱테이크(long take)로 베넷 집안으로 들어간다. 천진한 모습으로 뛰어 다니는 딸들! 엉망인 집안! 거기에 개까지 집 안을 들락거린다. 집안으로 들어가려던 리지는 자기만의 창을 통해 타인을 바라보듯 창문을 통해 엄마, 아빠가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는다. 부각되는 장면은 베넷가 집 밖 전경으로 이어진다. 집 앞에는 연륜을 드러내는 깊게 주름진 표피의 큰 나무 밑둥치가 양쪽에 서 있다. 오만과 편견이라는 뿌리 깊은 인간 내면의 대결을 상징하듯이….
모든 남자들은 단순하면서도 멍청한 속물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리지는 무도회에서 다시와 첫 만남 때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런 그녀가 다시에게 용기를 내어 춤 파트너가 되어주길 신청하지만, 그는 무뚝뚝하게 정중하고도 냉정하게 거절한다. 더욱이 그가 친구에게 리지의 외모에 대해 폄하하는 말을 엿듣고는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친절한 구석이라곤 없어 보이는 무뚝뚝하고 잘난 척하는 다시, 언제나 검은 정장에 흐트러짐 없는 반듯함을 지닌 귀족의 풍모를 지닌 그는 고상함과 완벽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여자는 완벽해야 하고 그림이나 춤, 피아노도 할 줄 알고, 독서로 지성도 쌓아야 한다며 베넷 가문의 여자들을 속물로 바라본다. 그는 누구의 말에도 동요되지 않으며 쉽게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다시가 오만한 사람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히게 된 리지는 위크햄을 만나 다시와의 관계를 듣는다. 그의 거짓말을 진실로 믿는 리지는 다시에 대한 좋지 않은 편견을 더 굳힌다. 콜린즈의 청혼을 당당히 거절한 그녀는 맨발로 집 뒤뜰 그네에 앉아 빙글빙글 꼰다. 편견에 대한 집착에 가득 차 계속 주변의 모든 것들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느 날 다시의 숙모를 돕는 피츠윌리암을 만나게 되는데 리지는 언니 제인의 결혼을 파경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 다시라는 이야기를 듣고 분노와 실망의 어두움에 깊이 빠져든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 비에 흠뻑 젖은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들의 만남! 둘은 언성을 높이며 극한으로 치닫는다. 이 공방전을 통해 서로 간에 오해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다시는 자신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리지를 향해 사랑을 고백하며 청혼한다. 하지만 언니를 불행에 빠트린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하는 리지!
난 장님이었어
다시와 헤어진 리지는 아주 캄캄한 방안에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허공을 응시한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거울 이론과도 같은 심리적 갈등 속에서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바라보는 리지. 그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써 리지의 내면을 관객에게 들키는 효과와 함께 관객 또한 그녀와 같은 얼굴을 지니고 있음을 암묵적으로 상징했다.
인생이란 깨달아 가는 과정으로 점철된 역사라고 말하고 싶다. 이 역사는 언제나 만남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으로 이뤄진다. 리지는 언니 제인에게 고백한다. "난 장님이었어." 다시는 잠옷 바람으로 리지의 거실을 찾아와 오해를 풀기 위한 편지 한 통을 놓고 간다. 언니와 빙리와의 관계, 위크햄의 거짓말로 빚어진 오해가 얽혀 있었음을 깨닫는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새로운 마음의 시선으로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 그날 밤 오렌지색의 둥근 원과 어두운 그림자들이 빅 클로즈업(big closeup)된 리지의 눈동자 속에서 춤을 추며 스쳐지나 간다.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벌판을 지나 절벽에 올라 바람을 쏘이는 리지! 이제 편견에서 해방된 자유로움을 만끽한다.
은총의 만남
캐서린 부인의 방문으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리지는 다음날 새벽 안개 자욱한 벌판에 서 있다. 멀리 저편에서 풀어헤친 셔츠 바람으로 급하게 그녀를 향해 오고 있는 다시! 캐서린 부인의 무례함으로 고통 받았을 리지를 위로하며 사랑을 거듭 고백한다. 어두운 밤의 터널을 빠져나온 듯한 정화된 사랑의 순수함이 드러난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은 두 사람의 미래를 예고하듯 환히 비춘다. 오해에서 이해로, 교만에서 겸손으로, 용서와 사랑의 과정을 겪은 진솔한 만남이며, 은총의 시간이다.
다시는 오만했던 마음을 비운 겸손한 모습으로 리지를 기다리고, 청혼 허락을 받기 위해 리지 역시 진심을 말한다. "그분은 교만하지 않아요. 제가 오해한 거예요…. 우리 서로가 잘못 봤던 것이에요…. 제가 분별력을 잃었어요. 둘 다 고집이 센 점이 많이 닮았어요."
예수님은 인간 그 자체를 믿으셨기에 모든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으셨고 편견의 잣대로 저울질하지 않는 분임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모든 관계는 참된 만남에서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은 TV 미니시리즈로 네 번이나 영국 BBC에서 제작돼 인기를 모았고, 영화로도 제작됐다. 2005년 영상의 귀재이자 탐미적 낭만주의자인 감독 조 라이트는 이 영화를 맡기 전 오스틴의 작품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문학보다 시각예술과 그 문법에 익숙한 사람으로서 영화 「오만과 편견」 한 장면 한 장면에 정성을 기울였다. 사랑 받는 작품들은 모두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고, 세대를 초월해 공감할 수 있는 감동적인 진실을 담아내고 있다.
사랑의 관계는 남녀 관계뿐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이기도 하다. 이 만남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고 진실하려면 다음의 성경 말씀을 마음에 품어야 할 것이다.
[가톨릭 문화산책] <58> 영화 (12 · 끝) 요한 23세
새 시대를 연 요한 23세 교황, 그 인간적 삶을 엿보다
요한 23세(PAPA GIOVANNI XXIII, 2002년)
감독 : 조르지오 카피타니(Giorgio Capitani)
제작국가 : 이탈리아
등급 : 전체
상영시간 : 1부 102분ㆍ2부 106분
장르 : 드라마
사순시기 절정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과 성 주간이 멀지 않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인간들이 사는 땅에 태어나 평범한 인간으로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적응하며 사셨다. 그리고 인간들 손에 넘겨져 매질 당하고 십자나무 위에 못 박혀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셨다. 복자 교황 요한 23세의 삶을 조명한 이 영화는 요한 23세를 통해 또 다른 예수를 만나게 한다. 요한 23세 교황은 오는 27일 성인 반열에 오른다. 인간미 넘치는 그의 삶이 던져주는 에피소드와 사랑, 사목 정신을 눈여겨보자.
줄거리
1958년 베네치아 대주교 안젤로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추기경은 로마에서 소환 연락을 받는다. 론칼리 추기경은 베네치아로 돌아올 왕복 기차표를 들고 로마로 떠난다.
가난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공부하기를 좋아했지만 아버지는 시간만 나면 안젤로가 집안일을 돕도록 했다. 당시 생활고에 허덕이던 마을 사람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을 축복을 해주는 본당 신부와의 대화를 통해 안젤로는 가난한 시골의 신부가 되고픈 꿈을 품게 된다.
교황 비오 12세의 서거로 모든 추기경이 바티칸에 모인다. 교황 물망에 오른 추기경들은 라테라노 대성전 사제관에 짐을 풀었지만, 론칼리 추기경은 낡은 수도원에 여장을 푼다. 바티칸에서 오랜 만에 재회한 오타비아니 추기경은 보수적인 이탈리아인을 교황으로 추대하도록 그를 설득하지만, 론칼리 추기경은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몬티니(후에 바오로 6세 교황) 대주교를 추천한다. 드디어 교황 선출을 위한 투표가 시작되고, 오타비아니 추기경을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추기경들은 프랑스에 표를 주지 않기 위해 론칼리 추기경을 적극 밀게 된다.
"내 몸을 관에 맞춰보시지"
영화는 베니스 대주교 론칼리의 비서가 황급히 주교관을 나와 마을로 뛰어 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평화로운 마을에 비둘기들이 날아다니고, 대주교를 발견한 곳은 마을 한가운데 있는 아카데미아다. 푸근한 할아버지 론칼리 추기경은 석관에 누워 조각가에게 말한다. "이 안은 좁을 것 같아. 좀 더 넓게 만들 수 있어요." 더 넓히면, 옆면이 얇아져 깨질지도 모른다는 조각가의 말에 "내 몸을 관에 맞춰보시지. 옆으로 누워보던가." 이는 그의 전 생애를 특징짓는 융통성이자 적극적 적응력을 암시하는 상징으로 묘사된 장면이다.
추기경들은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의견을 나누기 시작한다. 프랑스 추기경들은 론칼리 추기경을 지지하지만, 보수적인 이탈리아 추기경들은 론칼리 추기경의 비밀 개인 서류를 열어본다. '1901년 베르가모에서 교회 권위를 손상시키는 행동을 했음. 사회주의와 기타 불온한 사상에 동조했음'이라는 기록 문서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주 베르가모 대주교 비서 시절의 장면으로 바뀐다.
극심한 착취에 시달리는 노동자들, 파업과 폭동의 한 가운데서 그들을 지지하는 대주교를 목격하게 되는데 론칼리는 노동자들 속에서 소리 지르던 젊은 엄마 로사가 갓난아기와 함께 경찰에 연행되는 것을 보고 어떻게든 그녀를 구해주려고 경찰청장을 찾아간다. "로사는 어리고 아무것도 몰라요. 어린 아기가 있잖아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는 노동자 대열에 서서 외치거나 그들을 부추기지는 않는다. 가능한 방법으로 충돌을 피하고 대화로 풀어갈 협력자를 찾아간다.
보수적 이탈리아 추기경들은 이탈리아인끼리 뭉치자며 설득한다. 하지만 론칼리 추기경은 "나는 하느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하느님 섭리에 맡길 뿐입니다"고 답한다.
장면은 다시 론칼리의 과거 교황대사 시절을 오버랩시킨다. 지혜롭고 현명하게 위험 상황에 대처한 사건들이 펼쳐진다. 1930년대 터키 주재 교황대사 시절의 일화다. 터키 대통령은 모든 종교 사제들에게 사제복 착용을 금하지만, 그는 이에 항거하지 않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선 수용해야지" 하며 사제들에게 양복으로 갈아입게 한다. 늘 상황에 순응하며 적응하는 그였다.
터키에서의 이스탄불 기차 사건 또한 잊지 못할 일화다. 유다인들을 트레불링카의 학살수용소로 보내기 위해 무장한 군인들이 기차를 포위하고 있는 삼엄한 긴장 속에서 그는 기지를 발휘해 독일 대사와 비밀 협상을 벌인다. 가톨릭 신자 순례객이라는 공문을 작성해 유다인들을 구해준 사건은 긴박한 상황속의 기적이나 다름없다.
1945년 프랑스 교황대사로 있을 때 일이다. 드골 장군은 가톨릭에 반감을 품고 주교들을 추방하려 한다. 만나주지도 않는 드골 장군을 그는 인내와 끈기로 설득시키려 하지만 실패하자, 교황대사관에 파리 최고의 요리사를 초청해 호의를 얻는 유연하고 재치 있는 지혜로 외교에 성공한다.
"이렇게 됐네!"
가난한 시골 신부가 되고 싶었던 론칼리! 교황 선출을 위한 열두 번이라는 지루하고도 긴 투표 기간 중 베네치아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그는 하루에 세 번 선거하자는 제안을 할 정도였다. 교황이 된 후 그는 비서관들에게 "결국 이렇게 됐네!" 하며 멋쩍게 웃는다. "주님 왜 접니까? 제게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도 당신은 아십니다.… 주님께서 절 택하셨으니 당신만 신뢰합니다. 주님께서 믿어주셨으니 저 요한은 최선을 다해 당신 뜻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다짐한다. 그의 심중은 늘 하느님의 뜻과 평화를 소중하게 간직했기에 그의 외침은 평화 자체였다. 회칙 「지상의 평화」를 발표할 수 있었던 것도 거기서 길어낸 영성 때문이었다. 보수파 이탈리아 추기경들은 냉소하며 임시 교황이라는 여론까지 부추기며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가기도 했지만, 온유와 재치로 난관을 극복하는 추진력이 뛰어났다. 그는 늘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뜻만을 찾아 실행시킨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상태로 핵전쟁의 일촉즉발의 대치상황이었을 때, 교황청 공보실 추기경들은 모든 공산주의자들을 파문시키려 했고, 소련으로부터의 방어를 강조했다. 하지만 교황은 대화와 이해로 노력하자고 설득했다. "끊임없이 누구하고든 대화해야 돼. 언제나"라고 대응한 것이다. 하느님을 닮은 놀라운 인내와 기다림은 효력을 발휘한다. 팽팽하게 맞선 두 세력의 위기를 넘기는 또 한 번의 기적이었다. 예수님이 당시 사람들과 문화에 적응하신 것처럼, 그는 언제나 상대를 부정하거나 방어하지 않고, 또 비난하거나 단죄하지도 않았다.
양팔을 벌리고 십자가에 계신 예수
바티칸 정원에 십자가 조각상을 세우고 그의 감탄사를 기대하는 추기경들에게 "예수님은 2000년 전부터 양팔을 벌리고 계시지요. 우린 예수님 말씀을 어떻게 전하고 있나요?" 하고 말한다. "…교회는 새로운 방법으로 인류에게 다가가야 돼.… 여러 문제에 교회가 어떻게 대처할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한 전 세계 공의회 소집을 요한 23세 교황은 요청한다. 공의회가 중요한 건 "교회가 세계를 향해 문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지.… 비난이나 처벌은 그만하고 대결이 아니라 화합을 추구해야 돼.… 모든 사람이 자기 의견을 말 할 수 있어야 돼.… 우린 모두 똑 같은 하느님 자녀니까"라고 한다. 성 베드로 대성전에는 루터교와 성공회, 그리스 정교회, 퀘이커교도, 감리교 신자까지 보편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첫 번째 회기를 마친 그는 위암 진단을 받는다. 숨을 거두기 전, 그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은 팔을 벌려 우리 모두를 환영하지"라고 말하며 마지막 숨을 거둔다.
마지막
당시 많은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요한 23세'는 이탈리아 국영TV에서 2부작으로 방영된 것을 바오로딸에서 DVD로 제작했다. 교황 요한 23세의 특징을 에피소드 중심으로 이끌어간 조르지오 카피타니 감독은 교황 23세를 사람들의 눈이 평상시 수평으로 볼 수 있는 각도인 '아이 레벨(eye level)'로 잡아 평범하고 다정하고 인자하며 정감 어린 할아버지라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반면 교황청 추기경들은 카메라가 피사체보다 낮은 데 위치해서 화면에는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는 느낌을 주는 '로우 앵글(low camera angle)'로 잡아 그들의 권위 의식과 당당함을 상징적으로 연출한다.
4월 27일 성인품에 오르시는 착한 할아버지 교황, 지구촌의 친근한 할아버지 교황 요한 23세는 우리 곁에서 오늘의 세상에서 교회가 나아갈 길을 비추어주고 계시리라 믿는다.
성경 구절 "나는…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1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