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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관유와 여호와를 위하여 향을 만들라
30: 22-38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또 일러 가라사대
23. 너는 상등 향품을 취하되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 오십 세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 오십 세겔과
24. 계피 오백 세겔을 성소의 세겔대로 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취하여
25.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들찌니 그것이 거룩한 관유가 될찌라
26. 너는 그것으로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27. 상과 그 모든 기구며 등대와 그 기구며 분향단과
28. 및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29. 그것들을 지성물로 구별하라 무릇 이것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
30.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기름을 발라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그들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고
31.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이것은 너희 대대로 내게 거룩한 관유니
32. 사람의 몸에 붓지 말며 이 방법대로 이와 같은 것을 만들지 말라 이는 거룩하니 너희는 거룩히 여기라
33. 무릇 이와 같은 것을 만드는 자나 무릇 이것을 타인에게 붓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하라
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36.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37.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38.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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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설립한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렇게 나라를 이루려고 하면 기본적으로 왕과 백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왕과 백성 사이에 맺는 언약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는 1장부터 18장까지 여호와께서 애굽에게 어떻게 행하였는가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을 말했습니다. 그 후에 19장-24장까지 언약을 말씀하고 그 언약을 체결한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언약이 체결되면 왕과 백성이 함께 하는 도성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5장부터 31장까지 여호와께서 회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회막이 완공되면 이 회막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고 교제합니다. 회막은 조선 시대의 경복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오늘 강론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보통 교회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먼저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간다, 또는 교회는 어떤 교회였으면 좋겠다는 말들을 자주 합니다. 또 교회 건물에 대하여, 교회 구성원에 대하여, 혹은 교회안의 친교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합니다. 이것 외에도 교회상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이야기들을 할 것입니다.
이처럼 그저 각자가 자기 생각으로 교회상에 대하여 말하는 것 보다는 성경이 기본적으로 교회의 모습이나 역할을 어떻게 말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특히 출애굽기와 마가복음에서 나라를 세울 때 그 도성의 모습이 무엇인지 알고서 교회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출애굽기에서 말하는 회막은 어떤 모습일까요? 회막은 이름의 뜻대로 만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회막과 비교하여 신약의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기록한 돌판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간 것을 배경으로 회막을 짓는 것을 말하고 있으니 이 회막을 ‘언약의 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지키며 함께 하는 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 회막을 어떻게 지으라고 명하셨습니까?
먼저 회막을 만드는 식양에 대하여, 곧 설계도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 회막을 봉사하는 제사장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명하신 것은 회막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제사장을 통해 만나실 것임을 나타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을 통하여 서로 만나고 교제하는 집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떻게 하고 나아가야 여호와 하나님을 회막에서 뵈올 수 있는 것일까요? 제사장이 분향단에서 향을 꺼지지 않게 사르므로 만납니다. 향을 사르는 것이 백성이 드리는 기도라면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그치지 않음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백성들이 임금님에게 항상 올렸던 상소문을 떠올리시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회막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배알하려면 성전세를 내고 나와야 합니다. 성전 속전세를 드림을 통해서 회막에 나아오는 자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백성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속전세를 드림으로 애굽에서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됩니다. 그 나라 왕께 속하지 않고 속전세를 내지 않는 백성을 어찌 왕이 만나고 함께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상소문을 올리며, 또한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다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서 서로 만나는 관계는 어떤 것인가? 물론 왕과 백성으로 서로 만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조금 더 그 관계를 말하려면 물두멍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는 물두멍에서 제사장이 수족을 씻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남편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이 물두멍에서 제사장이 수족을 씻으므로 정결한 신부처럼 곱게 단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옛날 조선 시대에 왕의 부인이나 궁녀들이 왕을 만나기 위해 자신을 깨끗케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회막에서의 만남과 교제가 최절정에 이르는 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관유와 향에 대한 것입니다. 보통 ‘방점을 찍는다’라고도 하지요.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함께 읽으신 것처럼 관유와 향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22절-33절까지는 거룩한 관유를 만드는 것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리고 34절-38절은 지극히 거룩한 향을 만드는 것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 본문을 조금 더 자세히 나누어 보면 22절-25절까지 거룩한 관유를 만드는 재료와 제조법에 대하여 말하고, 26절-33절은 관유를 사용하는 용도에 대하여 말합니다. 회막의 모든 기구에 발라 거룩하게 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도 발라서 그 직분을 거룩하게 합니다. 관유는 아무에게나 부어서는 안됩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부터 제외됩니다.
그런 다음 34절-36절에 향을 만드는 재료와 제조법을 말합니다. 그 향을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가 만나는 증거궤 앞에 두라고 했습니다. 이 향은 지극히 거룩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 방법대로 향을 제조해서는 안되고, 또 아무도 이 향 냄새를 맡아서는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성막과 성막의 모든 기구에는 관유를 발라 거룩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 앞에까지 성막을 만드는 것을 설명했다면, 이제 관유를 발라야만 회막으로서 거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회막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도 관유를 발라야 비로서 거룩하게 되어 자기 직무를 행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된다’는 의미는 갑자기 변하여 아주 깨끗하고 성결한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만화영화에 나오는 어떤 인물이 한 바퀴 돌면 아주 깨끗한 천사처럼 변화가 되는 것을 거룩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경부고속도로를 만든다고 했을 때, 실제로 고속도로를 만든 사람들은 건설노동자들입니다. 그런데 경부고속도로가 많은 사람이 오가는 실질적인 도로가 되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와서 테이프를 끊는 완공식을 한 다음에야 가능합니다. 테이프를 끊는 행위와 같이 거룩한 관유를 발라야만 비로서 성막으로서, 제사장으로서 구별되어 자기 기능을 다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속한 회막으로 구별되며, 여호와께 속한 제사장으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관유를 발라 거룩하게 한 일 다음에 32절-33절에 경고문을 붙이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에 붓지 말며 이 방법대로 이와 같은 것을 만들지 말라 이는 거룩하니 너희는 거룩히 여기라 이와 같은 것을 만드는 모든 자와 이것을 타인에게 붓는 모든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하라.”
다른 사람에게 관유를 붓지 말고 오직 제사장에게만 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부터 제외가 됩니다.
그 후에 34절 이하에 향을 만드는 법을 말합니다.
여러 가지 향을 섞고 독특하게 만드는 법이 있으며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합니다. 유명한 식당마다 맛난 요리를 만드는 비법이 있듯이 여기 향을 만드는 것이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아무도 모르는 제조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향을 지극히 거룩하다고 하는 이유는 아무도 이 방법대로 만들지 말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소금을 치는 이유는 성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향수나 향에다가 소금을 치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소금은 변하지 않는 언약의 의미가 성경에 있는데 그 의미인 것 같지만 우선적으로는 성결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향을 얼만큼 곱게 찧어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가 만날 곳인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향을 두는 장소가 지성소 안의 증거궤 앞입니다. 이 향은 관유를 말하는 것보다 더 거룩합니다. 이 향의 냄새를 맡으려고 향을 만드는 자는 여호와의 백성으로부터 끊어집니다.
이렇게 관유와 향을 만들고 그 사용법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관유와 향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관유와 향에 대하여 그런 것이 회막을 만들 때 있었다고 기억하거나, 하나의 지식을 더하기 위하여 아는 것으로 족한 것입니까? 이는 마치 12제자들의 이름을 암송한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편 40편 5절-9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내가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베푸신 은혜가 실로 많았습니다. 모든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 여호와께서는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감히 셀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라고 다윗은 생각하며, 여호와께서는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며 번제와 속죄제물을 요구하지 아니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럼 여호와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윗은 계속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가리켜 말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고 주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즉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물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더 기뻐하십니다. 이 언약의 법이 다윗의 심중에 있다고 합니다. 제사하는 것보다 주의 뜻을 행하고 주의 뜻을 많은 회중 가운데 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렇다면 관유와 향을 통해서 이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회막과 제사장에게 관유를 발라 거룩하게 하는 것과 증거궤 앞에 향을 두어 지극히 거룩하게 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즉 가장 거룩한 곳은 증거궤 앞입니다. 증거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이 들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가 만납니다. 이곳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시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회막의 모든 것을 다 지었을 때 어떤 장소보다 향을 두신 증거궤 앞이 가장 거룩한 곳입니다. 이것은 회막을 짓는 모든 목표가 바로 이 장소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향을 두고 그 냄새를 맡으며 여호와의 언약의 말씀이 나오는 곳입니다. 회막을 언약의 거처라고 표현한 것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모든 제사의 목표도 지성소 안에 들어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러 함께 교제함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외형적인 것보다 내면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를테면 부부가 결혼하여 신혼집에 함께 살 때 그 집이 얼마나 크고 화려한가, 또 어떤 진수성찬을 함께 먹는가, 또 무슨 옷을 입고 사는가 이런 점이 중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보다 부부간에 마땅히 있어야 할 사랑의 언약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부가 사랑으로 언약 가운데 함께 하는 것이 그 집으로서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부부가 나가서 일주일에 한 번씩 외식을 하고 영화를 보며 문화생활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보다 서로 사랑하여 사랑의 말로 함께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어떤 제물로 어떤 제사를 드려서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증거궤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만나고 함께 언약을 통해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건 당연히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포함된 것이겠지요.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가 사랑의 언약으로 교제하는 증거궤 앞이 가장 탁월한 향 냄새가 나는 곳입니다. 부부의 사랑을 표현하는 깨소금 맛이 바로 이 향을 둔 곳의 냄새가 가장 거룩하다고 하는 말입니다.
한 집에서 의례적으로 밥상을 차리고 아무런 의미나 마음도 없이 나누는 식사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무리 돈이 많고 훌륭한 지식이 있어도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좋은 옷을 사서 주고, 좋은 음식을 먹은들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부부가 함께 사는 집에서 나타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집을 지으라고 할 때 모든 회막의 기구와 제사장의 옷 등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회막에 속한 것들보다 제일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은 증거궤 앞 향의 냄새를 맡는 것을 통해 언약의 말씀이 가장 거룩하고 아름답다고 오늘 출애굽기 본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출애굽기 본문의 말씀을 정리하고 이해하면 마가복음의 말씀을 잘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12장 28절-34절입니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이런 저런 물음에 대하여 답변하신 것들이 마가복음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단지 예수님께서 현명하게 답변하셨다고만 할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난처한 질문들을 예수님께서 교묘하게 빠져 나가셨다고만 하면 성전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사건들에 대하여 아주 단순하게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 뒤에 나오는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내용과 성전에서 헌금함 앞에 앉으셔서 과부의 두 렙돈을 드린 것들도 모두 성전에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주 뛰어난 현명한 가르침과 아주 지혜롭게 처신하신 것을 나타내려고 이 말씀들이 성전을 배경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전체적으로 예수님이 지으실 성전이 어떤 성전이며 누구와 함께 만나고 교제하며 살 것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예를 들어 드렸던 바와 같이 조선 시대의 한양이라는 도성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4대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4대문이나 성곽을 만들 때 여러 가지 흙과 돌이나 건축재료들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또한 많은 인부들이 동원이 되어 일을 했을 것입니다. 이 도성을 만든 재료가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4대문에 새긴 이름이 무엇을 표방하는가를 아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이렇게 이름을 붙여 조선이라는 나라가 유교의 가르침을 중시하는 나라임을 알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조선은 인의예지를 지키며 살아가는 나라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회막을 지을 때 그 모양과 넓이, 사용된 재료에 대하여 아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보다 이 회막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만나고 교제하는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처럼 마가복음의 최고의 계명에 대한 말씀도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이 새롭게 지어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마가는 성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 나타내었습니다.
이제 오늘 마가복음 말씀의 끝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고 함으로 이제까지 모든 물음이 끝이 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말이 단순히 예수님이 질문공세를 잘 피하고 넘어간 것에 대하여 말하려고 마가가 기록을 했겠느냐 하는 점입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가 오늘 출애굽기와 시편을 통해서 여러분께 말씀드렸던 내용이 마가복음 12:33절에 나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증거궤 앞에 향을 두어 지극히 거룩한 곳을 말하는 것과 같고,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은 관유를 발라 거룩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본문을 그냥 형식을 원하지 않고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를 원한다는 것으로 단순하게 해석을 해버렸
습니다. 그래서 어찌 들으면 교회에 올 때 슬리퍼를 질질 끌며 와도 상관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이 됩니다. 왜요? 행위가 아니라 마음만 가지고 오면 가장 진실하다고 하니까요. 이렇게 해석함으로 마가복음 말씀이 아주 엉뚱한 교훈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여러분도 제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셔야 합니다. 왜 마가는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의 물음 뒤에 최고의 계명을 묻는 서기관들의 물음을 편집하여 배열하고 있느냐는 점입니다. 이런 순서로 마가가 기록을 왜 했는지에 대하여 아무도 답변을 주지 못합니다. 그냥 하나 하나 별개의 물음과 답변으로만 이해할 뿐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관유와 향에 대한 말씀을 가지고 본다면 왜 최고의 계명에 관한 말씀이 바로 이 자리에 나와야 하는지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관유를 바르는 것과 지극히 거룩한 향을 두는 출애굽기의 말씀을 이해할 때에 비로서 우리는 여기 마가가 배열한 최고의 계명에 관한 질문을 잘 해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새로 지으시는 성전은 어떤 성전이었습니까?
먼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성전을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시고 이방인들의 죄를 사하시면 이방인들이 이 성전에 나아올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전의 별명은 용서의 성전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은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자손들만이 기도하는 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이방인에게 빼앗겼어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70년의 포로생활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셔서 성전을 재건토록 했습니다. 돌아와 지은 성전은 열방의 모든 백성이 함께 들어오는 그런 성전이 될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예루살렘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루살렘 성전을 멸하고 예수님은 그의 몸으로 새 성전을 지으실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헐고 새 성전을 지으시면 천하만민이 이 성전에 들어와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는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 성전의 당국자들은 강도의 굴혈처럼 이 성전을 빼앗으려 하였습니다. 자기들만의 성전으로 만들어 버리고 이 성전의 상속자로 오신 하나님 아들을 죽여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포도원을 지어 놓고 농부들에게 맡겨 놓고 타국으로 떠나갔던 주인이 다시 돌아오면 이런 옛 성전의 건축자들을 다 내어쫓고 새 농부들에게 이 성전을 맡길 것입니다. 그 새 성전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돌이 되어 새롭게 지어질 것입니다.
이 새로운 성전에 참여하는 백성들은 옛 성막을 봉사했던 것으로 참여하지 않습니다. 즉 애굽에서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속전세를 드림으로 참여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다릅니다. 그 당시는 종으로 주인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회막을 봉사했지만, 이젠 아들로서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를 합니다. 종이 주인을 위하여 봉사하는 옛 성막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섬김과 다릅니다. 아들이 자기 기업을 봉사하듯이 이제 주님의 성전을 봉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새 성전은 가나안 땅의 왕 정도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에 로마의 황제에게 세를 바쳐도 곧 하나님 앞에 바친 셈이 됩니다.
여호와의 회막에서 교제하는 관계는 제사장이 물두멍에서 손을 씻음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제사장은 죽음의 권세 아래서 떨림으로 손을 씻고 여호와의 회막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교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비천한 막달라 마리아가 먼저 보았다고 말을 합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이들을 정결케 하셔서 자기 신부로 대면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럼 주님의 성전에서 우리가 주님과 누리는 교제 중 가장 최고의 것은 무엇입니까? 막달라 마리아처럼 일곱 귀신이 들렸던 아주 비천한 여인이,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하셔서 용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교제가 바로 주님의 몸된 성전에서 교회가 누리는 생명입니다. 이 주님의 성전에서 가장 최고의 만남과 교제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마가복음 12장 본문에서 말씀하는 최고의 계명으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와 다르게 마가복음은 첫째는, 둘째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첫 단계, 둘째 단계와 같이 계급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31절 끝에서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계명은 같은 하나의 계명입니다.
마가복음의 이런 말씀은 출애굽기가 없으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출애굽기에서는 관유를 바르되 제사장들에게만 발랐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바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제사장과 다른 사람을 구별되게 했습니다. 향을 만들 때도 같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만이 향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은 맡으면 안되었습니다. 회막을 만드는데 있어 최종적인 의미를 말하는 출애굽기의 관유와 향에서는 서로 차등이 있는 교제를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등이 있는 교제를 말하는 출애굽기의 말씀을 이해하면 마가복음의 최고의 계명은 어떻게 말하는지 이해할 수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째 계명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둘째 계명이 차등이 없습니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주일의 예배, 즉 성찬상에 둘러 앉아 함께 먹고 마시는 이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그냥 형식적으로 떡을 떼고 예배순서상 먹고 마시고 있는 것입니까? 떡과 잔을 먹고 마심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이, 이젠 좀 이 말이 남존여비와 같은 말이 될 수도 있겠네요. 하여튼 그 밥상에 밥과 김치 한 조각이 올려 있다 하더라도 그 밥상에 올라 있는 밥과 반찬이 무엇인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내가 남편을 사랑함으로 만든 밥상이란 점입니다. 또한 그 밥과 반찬이 어떤 특별한 맛이 있다고 하는 것보다 남편은 그 아내를 사랑함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가? 이러한 점들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제사장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곳,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구별되었던 이스라엘과 다릅니다. 주님의 상에서 12제자들이 함께 둘러 앉아 먹고 마셨던 것처럼 하나됨으로 먹고 마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 계명과 이웃을 사랑하는 둘째 계명이 서로 차등이 없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는 없었던 법이요 계명입니다. 유월절 최후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또한 요한일서 4: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막달라 마리아는 마가복음 14장에서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왜 이런 비싼 것을 허비하느냐고 여자를 책망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죄인을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셔 사랑하심으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사 새 영광의 몸을 입으실 주님의 몸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 일을 주님께서는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이 새 성전으로 세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회는 이 주님의 몸에서 그의 지체로 교제를 나눕니다. 주님의 몸이 거룩한 성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이 자기 몸을 죄인을 위한 제물로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셨습니다. 가장 값진 제물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신 희생제물이십니다. 아버지를 사랑하여 자기 몸을 순종함으로 드리신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역사나 왕조 가운데 이처럼 순종하신 아들이 없었습니다. 의인도 아닌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주심으로 세상을 사랑하신 일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하여 막달라 마리아보다 더 비천한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주님의 성전으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지극히 큰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아들의 사랑하심 안에서 교회는 주님의 상에 앉아 먹고 마시는 신령한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함께 하는 식탁이 주님이 함께 하신 유월절 최후 만찬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랑하신 주님을 따라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랑함으로 주님의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건물의 크기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모이는 유명한 사람들로 말해도 안됩니다. 이와 같은 외형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함으로 사는가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와 같이 교회가 나타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함을 이웃을 사랑함에서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님의 몸된 집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곳에서 가장 중요하게, 무엇을 최고의 계명으로 여길 것인가요? 하나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이 동일한 가치로 우리에게 보여질 때 교회는 정말 아름다운 향기를 나타내는 곳이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복음을 전하며 수많은 고난과 박해를 당할 때에 믿음에 있어 물러서지 말아라, 담대하라, 끝까지 견디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러한 외적인 핍박에 대하여 내적으로는 꼭 이 말씀을 반복하며 강조합니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형제 대접하기를 계속하라!
자기 집과 자기 가족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교회의 최고의 결정체입니다.
바로 이러한 집을 만들기 위하여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목표도 여기에 있습니다. 공동체의 나타남도 이 최고의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왜 부활하신 날에 교회로 모이는지 확실하게 정하시기 바랍니다.
죄인을 사랑하셔서 자기 몸에 연합시키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려고 모였습니다. 세상에 없는 최고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교회가 연합함이 교회가 이룰 최고의 목표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나오는, 주님의 몸에서 나오는 영광의 말씀으로 교제하면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건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계명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면 이방인들도 이 나라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이것을 기뻐하고 자랑하면 죄인들이 함께 이 자리에 참여할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이 사랑을 전해야 할 목표입니다.
절대로 교회는 경상도와 전라도로 나누어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차등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유식한 자와 무식한 자의 나눔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서로 사랑함으로 한 몸을 이루는 교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 일에 여러분이 함께 최고의 계명으로 주님의 몸된 성전을 이루어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