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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다시 세워야 할 때입니다 / 조상호 목사
우리교회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셨습니까? 지난 2000년도 중반에 처음 홈페이지를 만들었으니까, 어느새 11년이 넘었습니다. 누구나 들어와서 자료를 볼 수도 있고, 필요하면 아무나 홈페이지에 올린 자료들을 퍼갈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많은 분들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현재 출석하고 있는 우리교회 성도님들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고, 우리교회 출신으로서 한국이나 미국 등지에 있는 청년들이나 성도님들이 많이 방문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교회와 전혀 상관없는 분들도 찾아오시는 것 같습니다. 2년 전 선교대회 차 한국에 방문했다가 머무르고 있는 숙소 엘리베이터 안에서 저를 알아보는 분을 두 분이나 만났는데, 알고 보니 한 분은 미국에서 오신 목사님이고 또 한 분은 캐나다에서 오신 목사님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목사님들을 통해서 우리교회 홈페이지가 <순복음 미주총회> 사이트에 링크되어 있어서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목사님들이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자주 들어오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었고, 홈페이지에 올린 저의 설교를 자주 보신다고 합니다.
이처럼 많은 분들이 방문해서 드러내놓기에 부족한 저의 설교를 조회하시는데, 어떤 설교는 1주일 만에 200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들이나 전도사님들 중 제 설교 중에 소개한 예화 등을 사용한다고 답글을 남기는 분들도 계시고, 친절하게 개인적으로 저에게 이메일을 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 중에 기억이 나는 분이 몇 분이 계십니다.
‘왕명곤’이라는 분입니다. 저는 이 분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만, 전에 올린 답글에 보니까 아마 청각장애를 가지신 분으로서, 계속해서 우리교회 홈페이지에 들어오셔서 저의 설교를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6월27일자 설교 “무엇을 소원하고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설교를 올리자, 그 분이 이런 글을 답글을 써놓으셨습니다. “목사님! 소원이 있어요. 구약에 있는 말씀중 씨리즈로 말씀해 주신다면 구약 권별로 완벽하게 은혜 받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을부터는 성경 권별 씨리즈로 말씀해 주세요 소원합니다.” ‘무엇을 소원하고 있습니까‘라는 설교제목 밑에 구약성경을 시리즈로 말씀해달라고 답글을 다신 것입니다. 그래서 뒤늦게 답글 밑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이제야 답글을 보았습니다. 몇 달 전에도 답글을 올려주신 것 같은데 감사드립니다. 구약 시리즈는 기도하며 성령께서 영감을 주실 때 시작하도록 하지요... 기도해주세요.“
또 7월4일자 설교 ”무엇에 붙잡혀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설교를 올리자 ’8812‘라는 분이 이렇게 답글을 써놓으셨습니다. ”늘 조목사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신선한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멀리 태평양바다를 건너서 오는 말씀은 은혜 그자체입니다. 특별히 목사님의 성경 권별 씨리즈는 많은 감동이 있습니다.
또 목사님의 성경 권별 씨리즈가 시작되나요? 지난번 마가복음 씨리즈는 마가복음을 완전히 이해하는데 멋진 시간이었습니다. 또다시 기대하고 있는데 언제쯤 시작되시나요?“ 앞부분을 보면 그렇지 않은데, 답글의 뒷부분을 보면 부탁을 뛰어넘어 저의 마음에 굉장한 압박을 가하는 것 같은 느낌늘 갖게 합니다.
또 그 밑에 ’9191‘이라는 닉네임으로 다른 분이 이렇게 답글을 써놓았습니다.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 늘 주옥같은 말씀에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답글을 달아놓은 줄 아십니까? ”한 주 한 주를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넘어갈 수 없습니다. 참고로 '주옥'은 저의 아내 이름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주옥' 같은 말씀을 더 사모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제가 우리교회에 부임한 이래 연속식 강해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성경 권별 시리즈는 설교하는 목사에게는 압박이 심하지만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 동안 시리즈 설교를 통해 많은 은혜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대충 기억이 나는 것은 말라기, 로마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여호수아, 갈라디아서, 룻기(2부 예배에서), 요한복음을 시리즈로 살펴보며 은혜를 나눈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08년도에는 마가복음을 연속적으로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었고, 지난 상반기에는 성령의 열매 시리즈를 하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 후 성경 한 부분을 선택하여 연속식 강해설교를 하려고 했는데, 환경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상반기에 시작하려고 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못했고, 하반기에 시작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지진이 발생해서 또 시작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2~3주 전부터 성령님께서 저의 마음 가운데 느헤미야를 생각나게 해주셨습니다. 지난 9월4일에 이곳 크라이스트처치에 대지진이 나서 시내 곳곳에서 무너진 건물과 집들을 다시 세우려고 하는데, 느헤미야서를 보면 이곳 크라이스트처치 상황과 매우 비슷합니다. 느헤미야서의 주제는 ‘다시 세운다’는 의미의 ‘재건(再建)’ 영어로 ‘Rebuilding’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느헤미야서에 단순히 건물만 Rebuilding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도 Rebuilding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과 우리 가정들과 우리 교회와 더 나아가 이 도시가 Rebuilding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오늘부터 특별한 절기를 제외하고 연속으로 느헤미야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시간인 오늘은 “지금은 다시 세워야 할 때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눌까 합니다. 따라서 하시겠습니다. “지금은 다시 세워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다시 세워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살펴볼 느헤미야서는 포로시대 이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북왕국 이스라엘이 주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당했습니다. 그리고 남왕국 유다도 주전 586년에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멸망당하고 쓸만한 젊은이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 바벨론 제국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 망하고 페르시아가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스룹바벨은 고레스 왕의 도움을 받아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 일부를 데리고 1차 귀환을 하였습니다. 그 때가 주전 537년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의해 무너졌던 솔로몬 성전이 70년 만인 주전 516년에 스룹바벨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전만 재건하였을 뿐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은 완전히 재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전 458년 에스라의 인도 아래 2차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 재건공사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의 방해를 받았습니다. 르훔과 심새라는 사람이 아닥사스다 왕에게 반란의 위험이 있다고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갑자기 성벽재건 공사가 중단되고 맙니다. 그리고 약 14년이 지났을 때, 본문의 주인공인 느헤미야가 등장합니다.
본문 1절과 2절에 보면 아닥사스다왕 20년, 그러니까 주전 445년 어느 날 느헤미야는 고향을 다녀온 형제 하나니와 몇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상황이 어떤지 물었다가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같이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그 동안 느헤미야는 14여 년 전 에스라가 2차 귀환을 한 후 공사를 실시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에 타버렸으며,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때 느헤미야가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가 어떻게 행동을 했습니까?
1) 슬퍼하며 울었다
첫째로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다같이 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는 수일 동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왜 느헤미야가 슬퍼하며 울었을까요? 13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조국이 큰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기 동족들이 큰 환란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1세에게 신임을 받아 수산 궁에서 ‘술 관원’으로 있었습니다.
‘술 관원’은 왕이 마시는 술에 독이 들어있는지 없는지, 미리 술을 맛보는 사람입니다. 요즘의 경호실장이나 비서실장과 같은 직책으로서 독살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왕을 보호하고, 왕과 함께 앉아서 국정을 논하는 매우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당시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실세 중의 실세였습니다.
그는 이민자로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포로로 끌려간 사람으로서 출세하기 쉽지 않았지만,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페르시아 제국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조금도 아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떠나온 조국이 어려움에 처해 있건, 예루살렘 성이 허물어져 있건, 성문이 불타 버렸건, 그러한 것은 그의 삶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치인들에게는 모든 초점이 권력에 있습니다. 어떻게 권력을 잡을 것인가, 잡은 권력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술관원 역시 어떻게 왕의 신임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어렵게 오른 이 자리를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주인공인 느헤미야는 달랐습니다. 1,300Km나 떨어진 조국이 큰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잠깐 울다가 그친 것이 아니라, 수일 동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두고 온 조국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처럼 슬퍼하고 있습니까?
주위에서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을 보면서 함께 슬퍼하고 함께 울어주고 있습니까?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울다가 웃다가를 계속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왜 울다가 웃다가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 남자가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내가 어제 2억짜리 벤츠 자동차를 샀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아직 보험도 들지 않았는데, 아내가 타고 가다가 고속도로에서 굴러서 아내는 죽고 자동차는 못 쓰게 되었다는 연락을 방금 받았습니다.” “그러면 슬퍼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반문을 하자 다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사실 우리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이혼하려고 했는데 아내가 죽은 것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고, 2억이 넘는 벤츠가 폐차가 된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옵니다.“ 요즘 눈물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눈물을 보기 힘든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미국이 이라크와의 1차 전쟁에서 승리한 후 ABC 방송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군 사령관을 초청해서 대담을 했습니다. 진행자인 바버라 월터스가 사령관에게 “미국인들은 당신을 폭풍의 장군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고 질문을 하자,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가슴이 따뜻한 남자입니다” 진행자가 또 “오늘날 미국의 가장 큰 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사령관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라크 같은 외부의 적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눈물 없는 남자들이 많아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우리 살아가는 이 시대의 비극은 눈물이 메말라간다는 것입니다. 웃고 즐기는 일에는 적극적입니다. 그래서 깊게 생각하는 시사 프로그램이나 슬픈 내용의 드라마보다 웃고 즐기는 코메디나 개그 프로가 시청율이 높습니다.
말씀을 깊게 해석하며 설교하는 강해설교가보다 재미있고 웃기게 설교하는 설교가가 인기가 더 높습니다. 물론 복잡한 세상에서 웃으면서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기분도 전환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웃음도 필요하지만 눈물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8가지 복이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애통‘ 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여러분, 누구에게 복이 있습니까?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물 흘리며 애통하는 자를 위로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눈물의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2)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둘째로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킨 사람들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낳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삼상 1:7).
페르시아 왕비였던 에스더는 민족의 구원을 위해 3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에 4:3).
다윗은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저녁 때까지 슬퍼하며 금식했습니다(삼하 1:12).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기 전에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행 13:3).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의 돌판을 받을 때 4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금식했습니다(신 9:9).
예수님도 공생애를 앞두시고 친히 40일간 금식하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는 금식을 너무 자주해서 주변 사람들이 말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금식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 금식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까지 말했습니다.
존 칼빈 역시 “음식을 많이 먹으면 마음이 하나님께 향해지지 않고 기도도 되지 않는다. 열정적인 기도를 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한국 C.C.C 총재셨던 고 김준곤 목사님은 40년간 아침 금식을 하면서, 민족 복음화를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또한 크고 작은 중대한 일을 앞두고는 3일, 7일 등 금식 기도를 밥 먹듯 했는데, 이런 금식을 통해 영적 힘을 얻었고, 기도의 제목이 응답되었다고 간증했습니다.
고 최자실 목사님도 당신이 직접 금식기도를 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금식 3일’ ‘금식 7일’을 외치면서 금식기도운동을 벌린 끝에 여의도순복음교회 및 한국교회의 성령운동과 부흥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금식한다'는 것은 우리가 즐기는 것들을 포기하고 하나님께만 우리의 관심과 시선을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식욕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인데, 이 욕망까지 억누르고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은 힘이 들지만 그만큼 능력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58장 6절을 보면, 왜 우리가 금식기도를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여러분, 왜 우리가 금식기도를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금식하며 기도할 때, 빠르게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금식할 때 하나님께서는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시고, 멍에의 줄을 끌어주시고, 눌려있는 사람을 자유케 해주시고, 모든 멍에를 꺾어주십니다. 더 나아가 금식기도는 육체적으로도 매우 유익합니다.
한소망교회의 유영모목사님이 쓸 글에 보니까 현대인들이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동맥경화, 위장병, 각종 암, 성인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맛있다고 먹고, 영양분이 들어있다고 먹고, 건강에 좋다고 먹고, 미용에 좋다고 먹습니다.
보기 좋아서 먹고, 허영으로 먹고, 탐욕으로 먹습니다. 친구의 의리 때문에 먹고, 교제 때문에 먹고, 공무상 손님을 접대하다 보니 먹고, 음식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먹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먹어서 생기는 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프랭크 맥크 의사는 <건강을 위한 금식법>이란 책에서 적당한 금식은 건강을 회복하는 매우 유용한 방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금식은 몸의 기관들을 쉬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불필요한 체중이 줄어들고, 조직에 쌓인 독소가 제거 되며, 피는 맑아지고, 장은 깨끗이 청소가 되어, 간과 신장에 매우 유익하다고 합니다.
물론 단 하루, 한 번의 금식으로 이런 효과를 모두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금식을 정기적으로 하면 몸에 매우 유익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는 골방기도는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기 때문에 좋고, 육체적으로는 몸이 좋아지기 때문에 좋습니다.
우리교회 안에는 한 달에 하루씩 금식하는 골방기도팀이 있는데, 년말에는 팀원들 중 자녀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거나 호주 등지로 이주하는 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골방기도팀원들이 많이 부족한데, 지원하셔서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골방기도를 통해 육체적으로 유익을 얻고, 또한 기도응답의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는 금식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충격적인 고국 소식을 듣고 난 다음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하루에 한 끼씩 금식했는지, 아니면 야채만 먹으며 금식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여주시기까지 넉 달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물론 우리의 눈물은 고귀한 것입니다. 그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울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종종 슬픈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웁니다. 그러나 운다고 해서 드라마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수많은 사람들이 울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쓰나미로 인해 수십만 명이 죽은 것을 보고 울었고, 이라크 전쟁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울었고, 9.11 사태를 보면서 테러범에 대한 분노 때문에 울었고,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죽은 전사자들을 보고 울었습니다.
여러분, 안타까운 마음으로 울었을 때 역사가 뒤바뀌어지던가요?
아닙니다.
운다고 역사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역사가 달라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역사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재건을 소원하며 운다고 할지라도, 간절하게 부흥을 사모한다 할지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느헤미야처럼 금식하며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금식 기도는 비상수단으로서 완악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닫힌 문을 열게 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케 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수단과 방법에만 매달리지 말고, 느헤미야처럼 금식하고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미국의 링컨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링컨은 믿음이 좋은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링컨은 남북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1863년 4월3일을 ‘금식기도의 날’로 선포하며 국민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오늘의 무서운 재앙은 선조들의 죄에 대한 형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적인 성공과 부요 속에서 너무 교만해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신만만한 나머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잊고 지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빌어야 합니다. 이것이 미국 국민의 의무입니다.”
당시 남군에 속했던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든 미국 국민들은 이 날 하루 동안 금식하며 간절히 눈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남북전쟁을 끝내게 하시고 미국을 축복의 나라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십니까?
눈물에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흘리는 눈물과
남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두 가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눈물이 값진 눈물일까요?
어떤 눈물이 위대한 눈물일까요?
자기를 위해서 흘리는 눈물이 값진 눈물일까요?
아니면 남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이 값진 눈물일까요?
남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이 값진 눈물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느헤미야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조국을 위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무너진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으로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며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무너진 것들이 많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갈등하고, 부모와 자녀가 갈등하고 있는 무너진 가정들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무너져서 하나님 품을 떠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업이 무너져서 어려움을 당하고, 인간관계가 무너져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너진 것들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눈물입니다.
말라버린 우리의 눈에서 중보의 눈물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울기만 해서는 안 되고, 느헤미야처럼 무너진 것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사야 38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얼굴을 벽으로 향한 채 심히 통곡하며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 오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사 38:5,6)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무엇을 들으셨고, 무엇을 보셨습니까?
기도를 들으셨고, 눈물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주셨고, 앗수르의 손에서 나라를 보호해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물을 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비뚤어진 자녀를 보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물로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신앙생활을 멈춘 채 방황하고 있는 교우들을 보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물로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진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 크라이스트처치를 보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물로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빈자리가 많은 우리 교회를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물로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