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20-27
한 사람의 세 얼굴 / 백구영 목사
마태복음 26:47-50
47. 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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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시중에 "다중인격"이란 책이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24개의 인격을 가진 한 남자의 자서전적인 책입니다.
캐미론 웨스터란 이 사람은 자신의 다중인격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스스로 심리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자신의 인격을 통합시키는데 성공한 얘기입니다.
흔히 "속사람 다르고 겉사람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누구나 두 얼굴, 두 인격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람들은 이 두 인격을 통합할 수 있는 이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사람들은 이 두 인격을 통합할 수 있는 이성과 의지가 약해 더 심각하게 분열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이 두 인격에 대해 갈등하고 괴로워하나 비정상적인 사람들은 이 두 인격에 대해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해하고 가해하는 것입니다.
다중인격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특징은 인격이 바뀌었을 때 다른 인격이 한 언행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인도의 한 도시에서 강도 군수가 잡혀 화제가 된 일이 있습니다. 콜라프라는 곳의 군수인 마하라자씨는 존경받는 군수였습니다. 그런데 밤만 되면 강도로 변해서 심지어는 자기 사무실까지 털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낮에는 이 강도를 꼭잡겠다고 현상금까지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가 밤에 다른 인격이 되었을 때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를 가르켜 정신병의 하나인 해리성 정체 장애 혹은 다중인격장애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격이 바뀌었을 때 상황을 기억하면서도 다중인격을 가지고 사는 것은 양심이 병든 것이고 영혼이 병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들 중에도 이런 현상이 적지 않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도 이중인격입니다.
열왕기하 5장20-27절의 말씀은 엘리사의 종 게하시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게하시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섬기며 영적 특권을 누리던 종이었습니다.
요단강에서 문둥병을 고친 아람 장관 나아만이 고마운 마음에 엘리사에게 예물을 주려했으나 거절하므로 그냥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욕심이 생긴 게하시는 그들 일행을 뒤쫓아가 거짓말을 하고 은과 옷을 받아 가지고 와서 숨겼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투시할 수 있는 영의 사람 엘리사를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네가 어디서 오느냐?"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을 때냐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히 이르니라"고 저주를 받은 말씀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26장47-50절의 말씀은 주님의 제자 가룻유다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가룻유다도 주님의 곁에서 주님의 전대를 맡는 특권을 누리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그 마음속에 들어가자 스승을 은 삼십에 팔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랍비여 안녕하십니까?"하는 입맞춤으로 무리들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결국, 유다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자신도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우리는 본문말씀 가운데서 한 인격속에 있는 세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겉얼굴과 속얼굴과 뒷얼굴이 있습니다. 사람은 살다보면 환경과 상황에 따라 그 얼굴이나 인격을 둘, 셋, 넷으로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신앙의 이상은 이 다중인격이 하나가 되는데 있습니다. 오늘은 이 세 얼굴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전면의 얼굴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5장21 중반절에 보면,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아 가로되 평안이냐 저가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하였고, 마태복음 26장49절에 보면,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얼굴이 있습니다. 얼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잘생기고 못생긴 차이는 있어도 얼굴을 되도록 아름답게, 깨끗하게, 평안하게, 가지려는 것은 누구나 다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거울을 보는 것도 자기 얼굴이요 제일 먼저 단장하는 것도 자기 얼굴입니다.
게하시도 가룻유다도 전면의 얼굴은 평안이요 안녕이었습니다. 그러나 게하시의 전면의 얼굴 뒤에는 탐욕이 숨어 있었고, 가롯유다의 전면의 얼굴뒤에는 음모가 숨어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겉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속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영적생활이란 겉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속사람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시느니라"(삼하16:7) 하셨고, 바울사도는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2:28-29)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겉형식만 갖추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표면과 이면이 일치하지 않으면 그것이 죄요 불신앙이요 위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표면과 이면이 같지 않아 죽었고(행5:1-18), 게하시와 가롯유다도 표면와 이면이 같지 않아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표면과 이면이 같아 구원을 었었고(눅19:1-10), 나다니엘은 표면과 이면이 같아 "보라 이 사람은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는 주님의 칭찬을 받고 제자가 되었습니다.(요1:43)
표리가 다른 것은 그리스도인의 얼굴이 아닙니다. 표리가 다른 것은 영적 인격이 아닙니다.
흔히, 사람들은 양심을 따라 살든지 욕심을 따라 살든지 둘 중의 하나에 속해 살게 마련입니다.
양심을 따라 살면 평안이 있고 욕심을 따라 살면 불안이 있습니다.
양심을 따라 살면 표리가 같은 얼굴이 되고, 욕심을 따라 살면 표리가 다른 얼굴이 됩니다.
정신의학상으로 건강한 인격은 통합된 인격입니다. 이와같이 신앙적으로도 성숙한 인격은 통합된 인격인 것입니다.
둘째, 내면의 얼굴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5장22절 하반절에 보면 "청컨대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저희에게 주라 하더이다."하였고, 마태복음 26장50절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두 겉과 다른 내면의 모습들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게하시의 겉얼굴은 평안이었으나 속얼굴은 거짓의 얼굴이었고, 가룻유다의 겉얼굴은 안녕이었으나 속얼굴은 배신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래서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생긴 것입니다.
사람은 겉얼굴보다 속얼굴이 더 아름다워야 합니다. 겉얼굴이 인격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속얼굴이 인격을 비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11) 하셨습니다.
50년대에 부흥전도 협회에서 나온 "박군의 심정"이란 전도지가 있습니다.
박군의 캄캄하던 마음에 십자가의 빛이 비치니 마음속에 가득하던 돼지, 공작, 개구리, 뱀, 염소등이 달아나는 그림입니다.
돼지는 욕심, 더러움, 게으름을 뜻하는 내면의 얼굴입니다.
공작은 교만, 사치, 자랑을 뜻하는 내면의 얼굴입니다.
개구리는 수군수군거리고 함부로 말하는 수다를 뜻하는 내면의 얼굴입니다.
뱀은 거짓과 간교와 이간질을 뜻하는 내면의 얼굴입니다. 염소는 고집과 심술과 완고함을 뜻하는 내면의 얼굴입니다.
사람의 내면의 얼굴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전도지입니다.지금, 나의 속얼굴은 어떻습니까? 주님께서는 겉보기에 추하나 속이 순결한 문둥병자, 혈루병자, 앉은뱅이, 소경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시고 축복하셨으나 겉은 깨끗하나 속이 추한 외식하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책망하시고, 경계하시고, 저주하셨습니다.
적은 구멍이 큰 배를 침몰시키고, 적은 불씨가 큰 성을 태우고, 적은 상처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가듯이 속의 적은 거짓이 마침내는 영혼을 파멸시키기 때문입니다.
흔히, 신자들은 성령을 따라 살든지 악령을 따라 살든지 둘 중 하나에 속해 살게 마련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면 기쁨과 감사가 있고 악령을 따라 살면 두려움과 불평이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면 표리가 같은 얼굴이 되고 악령을 따라 살면 표리가 다른 얼굴이 됩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서 전면의 얼굴과 내면의 얼굴이 같은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후면의 얼굴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5장27절에 보면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하신 말씀이 있고, 마태복음 27장5절에 보면, "유다가 은을 성전에 던져 넣고 물러가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하였고, 사도행전 1장18절 후반절에 보면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후면의 얼굴이란 마지막 남은 얼굴입니다. 게하시의 후면의 얼굴은 문둥이의 얼굴이고, 가룻유다의 후면의 얼굴은 목매어 죽은 얼굴입니다.
사람은 전면의 얼굴도 아름다워야 하고 내면의 얼굴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후면의 얼굴은 더 아름다워야 합니다.
표리가 같아야 후면의 얼굴이 아름답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인간의 세 얼굴이 하나의 아름다운 얼굴이 될 수 있습니까?
양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이며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중인격인 우리를 하나의 얼굴이 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고 순종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허버트 죠지 웰스(H.G.Walls)의 "대주교의 죽음"이란 단편풍자소설이 있습니다.
한 대주교가 날마다 습관처럼 성당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늘 같은 기도를 반복하는 생활입니다. 하루는 그날도 늘 하듯이 성당에 들어가 "오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하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오냐! 무슨일이냐!"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이 소리에 대주교는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었다는 얘기입니다.
이 짧은 단편에는 날카로운 풍자가 실려있습니다. 대주교는 평생을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이 정말 응답하시리라는 것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후면의 얼굴을 남기시렵니까?
아무리 고귀하고 높은 신분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보다 못한 신분의 사람보다 영적으로 미숙할 수 있으며 자신이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할지라도 악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절대 순종하며 사는 사람만이 하나의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얼굴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과 영적 관계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다중인격이 만연해 가는 세상에서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기쁨과 평안속에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며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