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위의 남자 최우, 팔만대장경의 불가사의
발간일 2021.05.31 (월) 16:20
④ 선원면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 강화도는 선사 시대 이래 우리나라 역사의 아이콘을 모두 품은 ‘보물섬’입니다. 고인돌, 고려궁지, 외규장각, 광성보, 천주교성지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엔 지금 반만년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뚜껑 없는 박물관, 역사의 보고. 강화도를 얘기할 때면 언제나처럼 거창한 수식어가 붙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죠. 봄맞이 개편과 함께 i-View가 새 연재를 시작하는 ‘길 위의 강화도’는 5000년 강화도의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에피소드(episode) 중심으로 전개해 나갈 강화도의 신비로운 유적과 유물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
봄과 여름, 비와 햇살이 공존하는 어느 날 찾은 옛 절터는 파릇파릇한 풀잎들이 솟아나는 중이다. 풀잎 사이로 하얗고 노란 들꽃들이 피어났다. 야트막한 도감산 능선을 타고 아카시향이 흘러 내려온다. 산을 등진 채 선원사터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선원사가 있고 그 뒤로 논밭,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현재 인구 7,800여명, 쌀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땅에서 세계문화유산이 탄생했다는 사실은 경이롭고 신비로운 일이다.
▲인천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산 133 선원사터는 고려가 몽골을 물리치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제작한 성지이다. 몇 개의 석축과 평지로 이뤄진 선원사지는 사적 제259호로 지정됐다.
선원사지(禪源寺址). 인천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산133의 선원사터는 고려시대 국찰이던 ‘선원사’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절터다. 동국대학교 강화도학술조사단은 1976년 터를 발굴했고 이듬해 사적 259호로 지정됐다. 당시 대형 주춧돌과 석축이 나왔으며 ‘옴마니반메홈’처럼 불심을 표현하는 문자인 ‘범자문’과 연꽃문양을 새겨 넣은 암키와도 발견됐다.
선원사는 고려 무신정권의 수장 최우가 1245년(고종32) 창건한 절이다. 1232년 고려왕조가 몽골과의 항쟁을 위해 수도 개경을 떠나 강화로 천도한 13년 뒤, 최우가 팔만대장경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선원사를 창건했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최우는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1236년~1251년 팔만대장경을 완성했으며 이 과정에서 선원사를 지었다.
팔만대장경은 경판의 수가 8만여 장(8만1258장)에 이르러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시대에 제작해 ‘고려대장경’, 강도(江都)시기(고려가 도읍을 개성에서 강화로 천도했던 1232년~1270년)에 만들어져 ‘강화경판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팔만대장경은 1251년 강화도에서 제작돼 150년 동안 보관되다 조선초기인 1398년 현재의 합천 해인사로 이운됐다.
쌓으면 백두산보다 높은 불교지식과 최첨단 기술의 총체
대장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모은 ‘불교성전’이자 부처님의 근본교리라 할 수 있다. 기원전 544년쯤 석가모니 부처가 입적한 이후 제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모아 기록하기로 한다. 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經), 부처가 정한 교단의 규칙인 율(律), 경과 율을 해석한 논(論)의 삼장을 그러모은다. 이 경·율·논을 한 데 담아 세 개의 광주리(Tripitaka)라 하며, 손오공에 나오는 ‘삼장법사’는 경·율·논을 통달한 승려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팔만대장경 경판을 확대한 모습
쌓으면 백두산(3000m)보다 높고 한문을 잘 아는 사람이 매일 읽어도 30년 넘게 걸린다는 팔만대장경은 전란의 시기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사회대통합’의 대역사였다. 최우는 팔만대장경 판각을 통해 불력으로 몽골을 물리치고 백성들의 처참한 삶과 황폐해진 영혼을 수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고려는 앞서 대장경으로 오랑캐를 물리친 집단경험을 갖고 있었다. 중국 북방에서 발원한 거란족이 993년(성종12) 세 차례나 침략하자 고려는 1011년(현종2) 대장경 판각을 시작한다. 초조대장경이다. 이 대장경이 70여년 만에 완성되자 놀랍게도 거란은 물러갔다.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던 초조대장경은 그러나 몽골에 의해 소실되었고, 이후 대각국사 의천이 만든 속대장경 역시 몽골의 방화로 불에 타 버린다. 그로부터 4년 뒤 고려는 또다시 대장경 판각을 시작해 1251년 완성했으니 이게 바로 팔만대장경인 것이다.
인쇄술의 발달과 출판기술에 큰 공헌을 한 팔만대장경은 150년 간 강화도 ‘대장경판당’에 보관하다 조선 초기인 1398년(태조7) 지금의 경남 합천 해운사로 이운돼 지금까지 보관해오고 있다.
팔만대장경의 가치는 방대한 불교지식과 뛰어난 인쇄술의 결합이란 사실에 있다. 동아시아 불교사상과 지식을 집대성해 800년이 지나도 뒤틀림 하나 없는 목판인쇄술의 절정이 바로 팔만대장경이다. 국보32호이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까닭이다.
장어구이, 바다낚시 즐길 수 있는 강화교통요지에 위치, 선원사 사찰도 있어
팔만대장경 판각을 총 지휘한 선원사는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었다. 최우는 선원사에 오백불상을 모셨으며, 1246년 초대 주지로 임명된 진명국사 혼원은 승려 200명을 거느리고 1252년까지 선원사에 머물렀다.
▲선원사터 아래 있는 현재의 선원사는 성원스님이 지난 1988년 지은 사찰이다. 선원사 전경.
1246년 5월 고종임금이 행차했을 때 최우는 칠보로 장식한 그릇에 음식 여섯 상을 차려 성대하게 대접하기도 했다. 따라서 현재 사적으로 지정한 면적보다 훨씬 넓은 영역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선원사는 주지인 성원스님이 1988년 세운 절이다. 성원스님은 선원사터 아래 절을 지은 뒤 선원사란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아 팔만대장경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연(蓮)으로 박사학위를 딴 그는 연을 재배하고 연구하며 연의 대중화에도 힘쓰고 있다.
강화대교를 건너 10여분 가다보면 만나는 선원면은 강화군 교통 요지에 위치한다. 철종임금이 애용했다는 찬우물약수터가 있으며, 신정리 해안가에 장어구이 맛집이 많다. 바다낚시도 즐길 수 있다.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