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하나둘 사라지자 날아오던 벌 나비도 날아들지 않는다. 사시사철 피고 지던 꽃들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추었다. 정원에 꽃이 사라지는 것도 쓸쓸한데 문하생들마저 하나 둘 화담을 떠나갔고 허엽과 진이만 덜렁 남은 어느 늦가을 오후다.
진이도 스승을 잃은 슬픔이 하늘에 닿았는데 허엽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도 그럴 것이 20여명의 문하생들 중에서 가장 높은 사랑을 받았었다. 그러던 중 진이가 들어온 후 진이에게 사랑의 일부가 빼앗기긴 했으나 허엽은 석가가 가섭(迦葉·한자음 가엽)을 아끼듯 장남 서응기(徐應麒)보다 더 믿고 의지했었다.
그래서 그는 거동이 불편할 때에는 의례 태휘(太輝·허엽의 자)등에 업혀 자리를 옮겼다. 임종 직전 꽃 못에 가서 목욕할 때에도 태휘 등에 업혀 갔었던 것도 아들 등보다 편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토록 사랑을 독차지 했었던 태휘는 스승을 떠나 보내고 난 후엔 넋이 나간 모습이다. 보다 못한 진이는 위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바다로 치달아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중략... 진시황은 그 옛날 평락관에서 잔치 벌일 때/ 한 말에 만 냥 술로 맘껏 즐겼더라네. 여보시게 주인님 어서 돈이 모자란다 하시는가. 어서 술 사오시게나 함께 한잔하세. 오화마 천금주 따위 아이 시켜 들고 가서 술과 바꿔오게 우리 함께 만고의 시름 잊어나 보세.’
당나라 시인 주선(酒仙) 이백(李白)의 《장진주》(將進酒)를 떠올리며 술과 노래로 슬픔에 젖어 있는 태휘를 위로하였다.
진이는 비록 여자지만 여성 특유의 따뜻함과 호방함으로 화담뿐만이 아니라 문하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중에서도 태휘와 유독 가까웠다. 그런 그가 지금 어버이 같았던 스승을 잃은 슬픔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자 진이가 시기(詩妓) 모습으로 돌아가 술과 노래로 위로를 하여 주고 있다.
진이는 태휘와 헤어진 후 한동안 화담에 더 머물다 다시 송도로 내려왔다.
하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또 문득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을 회상하였다.
‘무슨 생각으로 푸른 산에 사느냐고요./ 글쎄올시다. 웃을 수밖에요./ 물 따라 복사꽃잎 아득히 흘러가는데/ 이곳이 딴 세상 속세가 아니라오.’
그랬다. 진이가 화담에 들어올 때 사실은 공부가 아니었었을 것이다.
진이의 기생 진출에 대한 두 가지 설이 있다. 이웃집 총각이 상사병에 걸려 결국 죽었는데 진이의 집 앞에 와 상여가 옴짝달싹 하지 않아 속옷을 덮어주자 떠나가 처녀가 속옷을 주었으니 순결에 흠결이 생겨 기생이 되었다는 얘기와 황진사의 딸인 사대부집에서 고이 커오다 청혼이 들어오자 서녀 주제에 소실이나 가야한다며 동생인 난(蘭)에게 청혼자리가 돌아가자 충격으로 기생이 되었다는 얘기가 그것이다.
아무튼 진이는 기생이 되었다. 숱한 사내들을 품었으나 성에 차지 않아 오매불망 마음속에 두었던 화담을 공략하였으나 실패하여 제자로 주저앉았던 것이다. 화담은 순순히 진이를 제자로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진이가 문하생으로 들어오는데 태휘의 공이 컸다. 그런 사연이 있는 그들은 같이 있으면 연인 같은 부부 모습으로 보이고 부부 같은 연인 같이 비쳐 동료 문하생들로부터 질투를 받기도 하였다. 그런 그들이 이젠 헤어져 각자 갈 길을 가고 있다.
진이도 어느새 불혹(不惑)의 나이가 되었다. 그녀가 비록 기생의 신분이었으나 학문의 수준은 어느 사대부 못지않은 경지의 수준이었다. 시·서·화 속칭 3절(三節)을 넘어 노래·거문고·가야금·춤에 이르기까지 무불통지(無不通知)의 경지라고나 할까?
조선의 3대 여류시인 이매창(李梅窓:1573~1610) · 김부용(金芙蓉:1812~1851) · 황진이(黃眞伊)를 꼽는다.
이매창과 김부용도 뛰어난 시기였으나 황진이가 단연 으뜸일 것이다. 그러하여 송도와 한양을 넘어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까지 소문이 퍼져 사신들이 오면 송도 유수에 청을 넣어 자고 가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는 풍문까지 나돌았다.
진이는 기생 이전에 국제적으로 여류시인으로 예우를 받았던 것이다. 한양의 이름께나 있는 사대부들은 송도를 찾지 않은 이가 없다. 중국과는 외교관계로 주청사(奏請使)와 접반사(接伴使)로 왔다 예외 없이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처럼 송도를 지날 때 진이를 거쳐 가는 것을 사나이들의 자랑같이 되었다.
하지만 진이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남자면 누구나 품을 수 있는 기생이지만 누구나 품을 수 있는 기생이 아니었다. 기명(妓名)인 명월(明月)처럼 하늘 높이 두둥실 떠 있는 명월을 어찌 마음대로 품을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오히려 명월이 하늘에서 내려와 마음에 드는 사내들을 뜨겁게 품었으리라...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무쳣나니./ 잔(盞) 잡아 권(勸)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
임제(林悌:1549~1587)의 시다.
서도 병마사로 부임하던 길에 생전에 교분이 있던 황진이 무덤을 찾아 시조를 읊으며 명복을 빌어주었다.
사실 남녀 간의 교분은 사랑이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조선사회에서 다 자란 사내와 계집이 오가는 사이는 사랑이란 다리가 놓여있는 관계다. 임제와 진이도 그러한 사이였을 것이다.
진이의 유언은 《어우야담》에 전해진다.
“나는 살아서 성품이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소. 죽은 후에도 나를 산골짜기에 장사 지내지 말고 마땅히 큰길가에 장사 지내주오.”
라고 하였다.
현재 진이는 평양성 칠성문 밖에 있는 선연동 기생들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진이는 죽어서도 사나이들의 가슴을 끝없이 흔들었다.
‘거친 무덤에도 해마다 봄꽃은 찾아와 꽃으로 단장하고 풀로 치마 둘렀네. 이 많은 꽃다운 혼들 아직 흩어지지 않고 오늘도 비되고 구름이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