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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제의 복(시편 133:1~3)
옛날부터 동양에서는 복을 중요시했는데, 복 중에서도 다섯가지 복을 으뜸으로 여겼습니다. 첫째는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것(천수天壽), 둘째는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사는 것(부·富) 셋째는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편안하게 사는 것(강령康寧), 넷째 남을 도우며 사는 복(유호덕,攸好愿), 다섯째는 죽을 때에 편안히 죽는 것(고종명考終命)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오복(五福)이라고 부르는 것들인데 물론 사람이 이 다섯 가지 복을 다 받으면 좋겠지만 그중에서 한 가지 복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저는 네 번째, 다른 사람을 돕고 사는 복을 택하겠습니다. 제가 네 번째 유호덕의 복을 택한 이유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리면 다른 사람과 관계를 잘 맺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잘 만나야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고, 사람을 잘 만나야 하는 일들이 잘 풀립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 세상에서 꼭 받아야할 복이 있다면 그것은 교제의 복입니다. 사람들은 교제의 복을 얻기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사람이 이 교제의 복을 받기가 참 힘듭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아주 친한 두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 거의 대부분은 싸움으로 끝이 납니다. 또 부끄럽지만 한국 사람은 셋 이상 모이면 꼭 패가 갈린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대립하며 반목하는 모습을 보고 철학자 사르트르는 타인을 가리켜 “지옥”이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이후에 하와를 지으신 목적은 아담을 돕기 위해서 입니다. 즉, 사람은 서로 돕고 서로 보살펴주는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우리가 이웃에게 괴로움을 주는 원수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적과의 동침이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가 늘 가까이 지내는 옆에 있는 사람이 원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보면 부모의 마음이 편안하고 기쁨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 쪽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도 아름답고 선한 것입니다. 시편 113편은 말씀은 짧은 말씀이지만 각 절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방법론, 즉 교제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첫째 방법은 서로 마음과 생각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시편 113편 말씀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또 이와 비슷한 구절이 아모스 3장 3절에도 있습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여기 아모스 3장에 나오는 뜻은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는데 사람이 서로의 생각이 어느 정도 같고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야 의사소통이 될 수 있고 또 교제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경험한 것인데 신자들 중에는 결혼 생활을 잘하는 가정이 있지만 그렇지 못한 가정도 있습니다. 제가 유심 한 살펴본 결과 결혼 생활을 잘 하는 가정은 남편과 아내가 조금씩 서로를 위해 자신의 관점과 생각을 양보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해 조금씩 배려하고 양보하면 그 가정이 아름다워지는데 반대로 배우자 중 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 그 가정은 sweet home 이 아니라 약육강식(羽肉强食)이 벌어지는 정글이 되고 합니다. 우리의 관계가 아름다운 관계가 되어야지 피비린내 나는 정글이 되어서는 안 튑니다.
사람이 사는 공동체에서 생각에 관해 교제를 방해하는 요소로 대략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생각의 관성(慣性)입니다. 관성온 물리학 용어로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하면 사람의 몸이 앞으로 쏠리는 이유는 물체는 가던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힘, 즉 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관성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도 마치 하나의 물체처럼 자기의 주관을 버리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가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밀고 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기거나 의견 교환을 할 때 자기의 생각을 주장하며 고집을 부립니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남기심 교수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한국국어연구회 회장도 지내신 분인데 이분이 자신의 인생에서 고소를 20번 넘게 당한 경험을 이야기 하신 일이 있습니다. 물론 이 분이 무슨 범법행위를 저질러서 고소를 당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나이 드신 할아버지 한 분이 20번이 넘도록 남기심 교수님을 고소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고소의 내용이 기가 막힙니다. 일본의 도시인 오사카는 한글 맞춤법에 따라 표기할 때 오사카가 맞습니다. 그런데 그 고소하신 할아버지는 오사카가 아니라 오사까가 맞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사까를 오사카로 표기한다고 해서 고소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모든 고소는 판사에게 기각 당했습니다. 남기심 교수가 그 할아버지의 자녀들을 만나 제발 아버지를 말려달라고 했더니 자식들도 아버지에게 손을 들었다고 하면서 자기 아버지는 그 일을 목숨 걸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각의 관성에 관한 좋은 예입니다. 우리가 잘 모르지만 이 생각의 관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발생합니다. 신자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자기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보다 우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방해됩니다. 내 뜻, 내 경험이 맞는다고 생각하면 이런 결과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떻게 유한한 사람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에게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은 있을 수도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교제의 복을 받기 위해 신자는 이 생각의 관성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간들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생각의 다른 하나는 생각의 당파성입니다. 생각의 당파성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어느 당儻, party)을 지지하듯이 생각도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객관성을 띠어야 합니다. 만약 생각이 당파성을 가지게 되면, 생각은 우리에게 이익을 주기보다는 독을 주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사람이 생각의 당파성을 띠게 되면 편협해지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생각의 당파성을 넘어서 진리를 향한 의지와 권력을 향한 의지가 합쳐지면 대책이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진리에 대한 의지는 있었지만 권력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회의 큰 해악을 끼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형제가 동거함이 얼마나 아름다운고”라는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뜻을 같이하는 것, 생각을 양보하여 조율해 갈 수 있는 능력 있어야 다른 사람과 관계가 좋아지고 교제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서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둘 이상의 사람이 모일 때에 필요한 것은 서로를 배려하며 뜻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교제의 복을 주시기 원하시는데 그러기 위해 신자는 먼저 뜻을 같이하고, 생각을 양보하는 미덕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 교제의 복을 받기 위해 신자에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마음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다른 사람과 아름다운 교제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시편 113편 2절 말씀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2절 말씀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제사장의 머리에 바른 기름이 사람을 휘감고 있는 모습입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30장 3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발라 그들을 거틋하게 하고
그들이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고“
이 말씀은 아론이 제사장 직분을 받을 때의 말씀으로 제사장의 거룩함을 위해 머리에 기름을 받는 장면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때부터 거룩해집니다. 오늘 2절 말씀은 제사장이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그 기름이 머리에 넘쳐나서 아론의 수염으로 흐르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의 옷깃 즉 사람의 온 몸을 적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왕, 제사장, 션지자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사람만이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을 현재적으로 해석을 해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쿡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예수를 믿는 모든 신자들은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리고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 모든 신자는 다 제사장이기 때문에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악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형제와 동거하며 아름다운 삶을 실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교제의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미래학자 존 네이스빗(J. Naisbitt)이 쓴 책 중에-하이테크 하이터치”가 있습니다. 지금은 하이 테크놀로지의 시대입니다. 저는 가끔 어디를 다니기 위해 교통수단으로 주로 지하철을 이용하는데 요즘 지하철을 이용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이유는 지하철에 앉은 모든 사람이 스마트 폰을 붙잡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고 스마트폰을 붙잡고 음악을 듣거나 게임을 하거나 혹은 채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고 그러다보니 교제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합니다. 네이스빗은 이런 시대일수록 하이터치가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이터치는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랑을 주어야 하고, 더 많은 감격스러운 순간을 만들어야 하고, 더 많은 관심욜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진정한 교제를 나누려면 우리 마음에 성령의 터치를 받아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늘 죄 지을 경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사이좋게 지낼 능력보다는 다른 사람과 불화하며 살 본성이 더 큽니다. 한마디로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만나면 일단 탐색전을 하다 비난하는 생활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가파른 경사를 오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너무 힘이 드신지 애교 섞인 목소리로 할아버지에게 "영감~ 나 좀 업어줘!"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할아버지도 무지 힘들었지만 남자 체면에 할 수 없이 할머니를 업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얄밉게 “무거워?"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담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럼~ 무겁지! 얼굴 철판이지, 머리 돌이지. 간은 부었지~ 많이 무겁지” 그러자 할머니의 기분이 팍 상하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내려놓고 길을 가다가 너무 지친 할아버지가 “할멈~ 나두 좀 업어줘!"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아까의 빚이 있어 할 수 없이 할아버지를 업었습니다. 이때 할아버지가 약 올리는 목소리로-그래도 생각보다 가볍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아주 자상한 목소리로 입가에 미소까지 띄우며 "그럼~ 가볍지~ 머리 비었지. 허파에 바람들어갔지 양심 없지, 싸가지 없지~ 너~무 가볍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어느 누가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대화를 보면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고 또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보복하는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되로 받으면 말로 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열 대를 맞으면 백대, 천대로 보복하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며 본성입니다. 그런데 이 본성을 역행하게 만드는 것이 성령님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교제의 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신자에게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띨요하고, 성령의 터치가 있어야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교제힐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보복심이 없어지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고 미움의 감정이 사라지고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를 다니지만 교제를 오해하기도 합니다. 제 기억을 더듬어 보면 제가 어릴 때에 교회가면 맨날 게임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게임을 한다고 해서 사람 사이가 좋아지지 않습니다. 골프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은데 골프를 자주 친다고 해서 관계가 좋아지지 않습니다. 가끔 제가 듣는 이야기인데 골프 치면서 내기 골프를 치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 분들이 내기 골프를 친다고 해서 수 백, 수천 달러 내기를 하지 않습니다. 기껏 25센트인데, 사람 마음이 참 묘한 것이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지면 기분 나쁩니다. 그래서 관계를 좋게 하려고 골프를 치는데 결과는 사이가 더 나빠지게 됩니다. 이런 것은 참된 교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교회 안에 만연되어 있는 세상적인 교제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가 교제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도 간의 참된 교제는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 간에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 하는 것은 참다운 교제 중에 하나입니다. 목사는 성도를 위해 기도하고, 성도는 목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교제입니다. 성도가 성도를 위해 서로 기도하는 것이 성도들 간의 참된 교제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몸이 많이 아파서 한국에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나이 많은 권사님이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저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마음을 주셔서 권사님이 3일 밤낮을 자지 않고 기도했다고 저에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그 권사님은 하나님이 시켜서 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 권사님과 제가 서로 교제를 나눈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교제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매개로 해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이 교제의 복을 받으려면 먼저 성령 충만을 받고 서로 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내 가족, 내 옆에 있는 사람, 내가 만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교제의 복을 받게 됩니다.
교제의 복을 받기 위한 세 번째는 우리가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가 교제를 나눌 때 우리는 완성된 의인으로 사귀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으로 사귀는 것입니다. 말씀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지금 말씀은 교제에 대한 말씀인데 왜 갑자기 헐몬 산이 나오는 것일까요? 그러면서 왜 영생이 튀어나오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교제에 대한 깊은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3절에 나오는 헐몬산은 높이가 2,850미터로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헐몬산은 백두산에 해당하는 산인데 이 산에서 봄에 눈이 높기 시작하면 그 물이 흘러내려 먼저는 갈릴리 호수를 채우고 이 물이 다시 요단강을 통해 내려와서 사해까지 채웁니다. 즉 이스라엘 온 땅은 헐몬 산에서 내려온 물로 적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하나님은 복을 주시 는 데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받아야 할 복 중의 하나가 영생인데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이 영생의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 신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의 소망을 갖습니다. 다시 말하면 헐몬의 물이 온 이스라엘을 촉촉이 적시듯이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은혜가 강물처럼 흘러가며 우리 온 사람들을 적서야 거기에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구절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관점으로 해석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사귐은 완성된 인간의 사귐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이미 용서받은 죄인으로서의 사귐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에게 완전함을 요구하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불완전하면서도 상대방에게는 완전함을 요구할 때 분쟁이 생기고 그 결과 교제의 복은 저 멀리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류 분석(Transactional Analysis)' 이론을 세운 미국의 정신의학자 에릭 번(Eric Bern)은 사람이 교제의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약점은 숨기고 남의 약점을 캐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를 포장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의 약점은 파고들기 때문에 사이가 나빠지고 결국 싸움으로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에릭 번은 게임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진실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게임을 하기 때문에 서로 참된 교제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사귄 친구는 지금까지 사이좋게 잘 지냅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너무 잘 알고 숨기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되어서 사귄 친구는 헤어질 때가 더 많습니다. 서로 간에 심리적인 게임을 하기 때문입니다.
숨을 쉬며 살아가는 사람 중에 완전한 사람은 절대 없습니다. 아무리 미국의 대통령, 교황청의 교황, 영국의 여왕이라고 해도 결점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신자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만약 상대방이 미워지기 시작하면 자신이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사람도 불완전하고 나도 불완전합니다. 그 사람도 용서받은 사람이고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 자기도 똑같은 잘못을 범하면서 같은 잘못을 범한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입니다. 미국에 강그리치라는 유명한 정치가가 있었습니다. 제가 시카고에서 공부할 때, 그 유명한 클린턴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그 때 미국 공화당에서 앞장서서 클린턴 대통령의 부도덕을 비난한 사람이 강그리치입니다. 요즘 미국 언론에서 이 사람에 대해서 집중조명을 하다 보니 과거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이 보도되면서 이 사람이 참 뻔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세 번째 부인과 살고 있는데 첫 번째 부인이 암으로 입원했을 때 강그리치가 병원까지 찾아가서 투병 중인 부인에게 이혼장에 싸인하라고 강요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두 번째 부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사실 이 문제만 이야기해도 비도덕적이라고 욕을 먹 을 판인데 이 사람이 두 번째 결혼 생활 중에 부인을 속이면서 자신의 여보좌관과 몰래 연애생활을 하다가 이것이 발각 나서 결국 두 번째 부인과도 이혼을 했는데 이 과정도 매우 말이 많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고 허물이 많은데 누가 누구를 비난하겠습니까? 우리는 다 헐몬산에서 내려오는 예수님의 피에 몸과 마음을 적셔야 합니다. 그래야 용서받은 죄인으로 영생을 얻고 교제의 복의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가나의 혼인잔치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부족했고,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습니다. 하마터면 불완전할 뻔 했던 혼인 잔치가 기쁨의 잔치가 되었습니다. 이 불완전을 완전으로 바꾼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이 기적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상대방을 사귈 때 서로가 다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붙잡을 때 우리가 완전해질 수 있듯이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붙잡으면 서로 사랑하며 지낼 수 있습니다.
교제의 복은 자신이 죄인,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만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늘 겸손한 마음, 가난한 마음이 되어야 하고, 또 헐몬에서 내려오는 물이 온 이스라엘을 적시듯이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를 적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신자는 교제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뜻을 같이 해야 하며, 둘째로 성령의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용서받은 죄인이며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신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교제의 복을 주십니다. 우리의 평생에 이런 교제의 복이 풍성히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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