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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숙론
호네트의 인정투쟁, 밝음과 어둠의 미학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세계적인 팝 아티스트 키스 해링은 “Art is life, life is art, 예술은 삶, 삶은 곧 예술이다.”라고 말했다. 사치는 학문이나 예술 없이도 증진할 수 있으나, 학문이나 예술은 사치 없이는 결코 진보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 삶과 예술 그리고 사치는 트라이앵글을 이루는 것 같다. 약간의 사치와 여유는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현대 예술가에게 찐빵에 앙코 같은 것이 아닐까. 조경숙 작가의 말에서 사치론의 의미를 추론해보자. “이 시대의 진정한 사치 놀이는 글쓰기가 아닌가 합니다. 세상 무엇이든 상대할 수 있으니 이미 범상치 않음이라, 가장 힘겹게 얻고 가장 쾌감을 얻을 수 있는 것, 진정한 글은 애타게 쫓고 이성으로 사유해야 가슴에 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생의 밝음과 어둠 속에서 나 또한 한껏 사치를 부리고자 합니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루소의 ‘과학과 예술은 일종의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라거나, 장자의 ‘사치는 애정을 수반한다.’ 생텍쥐베리의 ‘진정한 사치는 한 가지밖에 없으니,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다.’와 같은 선인들의 어록은 작가의 견해를 뒷받침한다.
문학은 사치일까? 단연코 ‘사치’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하나의 단어가 단독적으로 쓰일 때 특히 그렇다. 사치라는 말이 예술과 함께 쓰일 때는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대부분의 문인들이 책을 내는 방법으로 활용하는 것이 자비출판이다. ‘자출’은 일종의 사치다. 사치도 사치 나름이다. 독일의 3세대 프랑크푸르트 학파 철학자 호네트가 세상에 내어놓은, ‘개인에 대한 사회의 인정 부재가 개인의 자아실현을 막고, 이러한 개인의 자아실현 좌절은 사회 갈등을 유발시킨다’는 '인정투쟁' 이론은 푸코의 '투쟁'과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을 종합하는 개념이다. 호네트는 현대 사회에서의 사회 갈등은 개인의 자아실현 좌절에 달려 있으며, 이러한 개인의 자아실현의 여부는 '사회의 인정'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아침의 꿈은 저녁이 되는 데 있고, 나무의 꿈은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우는 데 있다. 문인의 꿈도 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내 이름이 기억되길 바라고, 내 작품이 인구에 회자되는 게 꿈이다.
조경숙론이 출발점은 호네트의 ‘인정투쟁’으로부터 시작한다. 호네트는 상호 인정 관계에서, 개인이 정서적 욕구를 충족하거나 법적 권리를 존중받거나 구성원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을 때, 성공적인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상호 인정 관계에서 '무시'에 의해 개인의 긍정적인 자기의식이 파괴된다면 개인은 자아실현의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고 하였다. 호네트의 '인정투쟁' 이념은 푸코와 하버마스를 연결하고 있는 개념이다. 푸코는 자기 보존 즉 권력을 위한 투쟁을 주장했지만 소통에 대한 논의는 소홀했고, 하버마스는 의사소통모델이 있지만 갈등이론과 충분히 결합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호네트의 주장이다. 따라서 호네트는 자신의 '인정 투쟁 개념은 푸코의 이론적 성과를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이론 속에 통합시키는 개념 장치'라고 말한다. 호네트에게 있어서 '인정투쟁'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인정'과 '인정투쟁'이다. 전자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개념을 확장시킨 것이고, 후자는 푸코의 투쟁 개념을 보충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경숙론은 호네트의 인쟁투쟁이론을 바탕으로 그녀가 그려낸 어둠과 밝음의 서사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책의 홍수시대에 출판 자체가 공해가 될까 하는 우려도 망서림도 있었지만, 그녀가 내린 결론은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피알시대이기에 슬쩍 묻어갈까나.’에 귀착된다. ‘받아 온 책에 대한 보답으로, 갚아야 할 채무가 있지 않느냐는 그럴 듯한 변명’이 결단을 부추긴 것으로 보인다. 어떤 문인이 출판기념회 자리에서 문인과 문사는 같은 말이면서도 다른 말인데, 그 변별척도는 책을 내었느냐 안 내었느냐에 있다고 한 바 있다. 일단 자기 저서를 1권이라도 가진 문인에게 문사의 칭호를 붙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문장화국지인’이 이상적 인간상이었던 조선시대였으니, 저서의 유무는 당시 선비의 품격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조경숙은 수필집을 통해 자신의 이름이 여타 동명이인인 다른 수필가 ‘조경숙’보다 더 나은 평가를 기대하며, 살아온 궤적에 한 점 한 점 꾸준히 아름다운 점을 찍어왔던 터다.
Ⅱ.
김진섭은 ‘수필문학소고’에서 ‘수필은 달관과 통찰과 깊은 이해가 인격화된 평정한 심경이 무심히 생활 주변의 대상에, 혹은 회고와 추억에 부딪쳐 스스로 붓을 잡음에서 제작되는 형식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조경숙 수필집을 완독하고 나서 떠오른 것은 수필에 대한 김진섭의 어록이었다. 수필은 의식적 동기에서가 아니라 회고와 추억에 부딪친 결과적 현상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수필을 창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경험을 쓴다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발견은 수필쓰기의 첫 번째 과정일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글감을 찾아내는 정도의 발견으로 좋은 수필쓰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 즉, 인식을 통해 의미부여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조경숙의 수필들은 하나같이 참신한 인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개미집 이야기>에서 작가는 생명이란 것에 주목한다. 거실을 차지한 개미들을 퇴치하고 난 이후의 내면 풍경 보여주기를 통해 그녀는 바이오필리아의 가치로 사고의 폭을 넓혀나간다.
베란다의 문을 숨어 지내듯 이틀 동안 굳게 닫았다. 완벽한 퇴치였다. 죽음의 돔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데 왕성했던 많은 생명은 저항 한번 못하고 사라졌다. 터전 싸움을 미물인 개미와 한 꼴이라니, 인간과 같이 사는 동•식물의 삶은 정말 위태롭구나. 살아있음을 상징하는 화초의 초록 잎은 그들을 거름 삼아 빛나 보여 얄밉기까지 하다. 우울한 승리였다. 급기야 그날 한나절은 거실을 바삐 다니던 개미의 빈자리로 사물이 정지된 화면 같아 적막하기까지 하였다.
한순간 화분 속 어딘가에 숨어 지내다 활짝 핀 꽃들 사이로 숨바꼭질하듯 살금거리는 개미를 상상해 보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은 또 무엇인지. 한낱 개미 몇 마리 죽인 것 때문에 호들갑이냐 하겠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에 대한 치열한 애정이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가슴을 두드리니 어쩌랴.
-<개미집 이야기> 중에서-
어느 날 베란다 화분 속에 있던 개미가 거실로 영역을 확대하자, 작가는 개미가 ‘베란다에서만 생활하고 집안을 탐하지 않는다면 손자가 올 때마다 같이 놀아주는 친구이니 설탕을 뿌려주며 공생하는 것도 좋으련만, 내치기’로 한다. 남다른 탐구와 관찰을 통해 작가는 드디어 ‘개미퇴치’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자신의 삶보다는 며느리의 삶을 걱정해주는 차원에서 거사를 하기에 이른다. 이 수필의 관전 포인트는 거사를 이루고 난 이후 생성되는 작가의 마음 속 풍경이다. 좋은 수필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른 사람보다 먼저 발견하는 데서 생성된다. 조경숙 수필의 위대성은 쓰기의 출발점을 인식에 둔다는 점에 있다. 진실을 찾아내기 위한 작가의 노력은 참신한 발견에서 빛을 발하고, 문학적 형상화에서 그 꽃을 피운다. 삶의 한 가운데 위치한 그녀가 쏟아내는 언어들의 내포에는 생명에 대한 존중이 피어 있다. 그 바이오필리아는 삶을 관통하고 있어 더욱 향기를 품어낸다. 그녀는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에 대한 치열한 애정이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다’는 어느 작가의 말로 주제의식을 의미화하는 전략을 펴서 주제의 간접적 제시라는 우회적 담론화에 성공했다. 수필을 읽는 매력이 작가의 내면 풍경을 읽는 데서 나온다고 볼 때, 명징한 삶의 사유로 빛나는 그녀의 수필은 매력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넓은 세상사에 한 점 아름다운 흔적을 남겨준 선배가 고맙고 그립다. 한 생명이 끝난 후 그녀와의 만남 속에 남겨진 의미를 찾아본다. 요양원 어르신을 모시며 그들의 인생의 끝에 존재하는 나는 어찌해야 하나 화두였다. 노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혼자 죽는 것’이라고 한다. 죽음은 막을 수 없지만 혼자라는 느낌은 감소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멘토, “혼자라는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들의 처지 속에 들어가 아름다움을 남겨보아라”라고 하는 듯하다.
납골당을 벗어나 돌아가는 길, 하늘은 검은 구름에 가려지고 빗줄기는 머리카락같이 가늘다. 비 뒤에 맑음은 따를 터, 오늘같이 짙은 음영이 드리우는 날 간 사람이 남겨준 애달픈 마음을 모아 다시 찾으리니. 허무 속에 차분한 평화가 깃든다.
- <한 생명이 끝난 후> 중에서-
생명에 대한 화두는 요양원 운영할 때 만났던 선배의 추모로 이어진다. 작가는 자신에게 멘토였고, 특히 요양원 운영이 어려울 때 많은 도움 말을 주었던 그녀의 이름을 납골당에서 발견하고, 그녀와의 만남 속에서 남겨진 의미를 찾아나간다. 조경숙 수필의 쾌미는 이런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헤아려 본다는 것에서 나온다. 누구나 한 번 죽는 길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는 누구에게나 과제다. 그 선배나 작가나 쉽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한 생명이 끝난 후’에 자신에게 안겨든 ‘허무 속의 차분한 평화’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작가는 지난 삶을 반성의 눈으로 재어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비 뒤에 맑음은 따를 터’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그녀는 희망이라는 긍정적 사고 속에서 주춤거리지 않고 순리를 택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는 수필을 인간학으로 구성한 것이다. 자신을 삶의 반성대 위에 세우고 자신을 향해 채찍질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조경숙은 이런 노력을 승화시켜 ‘허무’ 속에 차분한 ‘평화’라는 삶의 방정식을 안고, 세파에 꺾이지 않는 짙은 음영이 드리운 날이면 다시 선배가 묻힌 곳을 다시 찾아가리라 한다. 조경숙 수필을 읽는 매력은 위의 수필처럼 발견, 상관화, 동화, 성찰, 결속성이란 단계적 층위를 가지며, 특히 발견의 단계에서 참신한 인식을 맛보게 한다는 점이다.
어느 날 아들이 찾아오고 면회가 끝나 돌아간 이후 그 행동이 멎었다. 몇 년 긴 출장으로 아들 식구 모두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들으신 모양이다. 애써 찾던 신발에 대한 집착을 떨구고 죽은 듯이 누워 눈을 감고 드리는 밥만 거르지 않고 드셨다. ‘대접해다오. 순화할 것이다. 지금 나는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이미 오래 살아온 사람일 뿐, 고난과 부딪치며 여기까지 온 것이고 그 가치는 귀한 것이다.’ 무언의 절규는 그런 것이 아닐까. 침상에서 내려오는 근력은 그나마 일 년을 버티지 못했다. 이후 누워서 지내는 동안 사람을 만지고자 하는 행동으로 바뀌었다. 수발하는 이의 손길이 닿으면 팔을 끌어가 귀한 보석 만지듯 쓰다듬는다. ‘늙음을 어쩌겠니. 누구 탓을 하랴. 받아들이마. 익숙해질 때까지 옹색하게 몰아치지만 말아다오.’ 눈자위에 머문 간절한 소원으로 하루가 또 흐른다.
-<순응> 중에서-
수필 <순응>에서 작가의 운명론적 인식은 크게 빛을 발한다. 작가는 발단부에 ‘노년에 들어서며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순한 노인이 되는 것이다. 어떤 일을 겪어도 받아들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세월에 비례해 조금씩 순해지다가 촛불처럼 꺼지듯 사라지는 것. 빛나는 노년이 아니더라도 소란스럽지 않고 인생의 그윽함을 지키며 운명에 순응할 줄 아는 노인이 되고 싶다.’고 적고 있다. 이런 그녀의 바람은 어디에서 어떻게 온 것인지 훌륭한 독자라면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욕심, 고집, 수선스러움 없이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며 세월이 갈수록 까다롭지 않은 분이 있다. 7년 전 치매로 요양원에 입소하신 분이다. 당시에 80세이건만 근력이 떨어져 걷기 힘들어 엉덩이로 밀고 다니셨다.” 는 80 노인의 모습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삶을 단순한 제자리걸음이 아니라 삶의 담금질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참신한 발견으로 인해 이 수필은 독자에게 문학적 쾌락을 주며 본격수필로 탄생한 것이다. 이런 인생순응 철학은 결말 단계에서 삶에 대한 성찰로 연결되어 형상 미학으로 빛난다. ‘받아들임은 편안함에 일보 다가가는 것이리니. 애원의 답이 아닐는지.’라는 말은 삶에 대한 고도의 세련된 지적 통찰이 아닐 수 없다. ‘무언의 절규’란 문구를 통해 우리는 조경숙 작가가 얼마나 순리적 삶에 대한 열망으로 영혼의 순수를 지켜내려고 노력하는가를 엿볼 수 있다.
장마가 후렴처럼 따라붙었다, 6월의 마지막 주, 한해가 반이 꺽이며 여름을 시작한다. 베란다 창에 둥글게 맺혀 눈물처럼 구르는 물방울이 아슬하게 곡예 중이다. ‘창밖은 오월인데 너는 미적분을 풀고 있다’는 피천득의 시구가 떠올라, 반反하며 비의 우울한 정서에 맞설 하루를 꿈꾼다.
‘빗속의 여행은 어떨까’하고 인터넷을 뒤지다가 브런치콘서트로 낙착을 본다. 빗물이 온 세상을 덮칠 때 음악에 빠져 유영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콘서트의 소제목은 ‘낭만, 너는 자유다’다. 언제는 자유가 아니었던가. 혼자 살기에 언제나 제 마음대로였으면서 ‘낭만’ ‘자유’라는 말에 금지된 장난에 발을 들인 듯 들뜬 기대로 숨을 깊게 마신다. 비와 클래식 그리고 두 대의 피아노 협연, 이들의 조합은 미궁에 빠진 미적분에서 벗어나 기지개 켜는 몸짓이 아닐는지. 공연 후 커피와 케익을 준다니 이만한 대접이면 울음이 긴 아이도 달래줄 만한 유혹이 아니겠는가
- <낭만, 너는 자유다> 중에서
조경숙 수필의 빛나는 성취는 문장미학에서 맛볼 수 있는데, 조경숙 수필의 최대 장점은 무엇보다도 손맛이 내는 멋이다. 이 수필집을 읽고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어떻게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이토록 훌륭하게 나타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문학이 언어예술이고, 변형과 보수라는 말은 조경숙 수필을 읽으면 금방 이해된다. ‘장마가 후렴처럼 따라붙었다,’ ‘비의 우울한 정서에 맞설 하루를 꿈꾼다.’ ‘금지된 장난에 발을 들인 듯 들뜬 기대로 숨을 깊게 마신다.’ ‘이들의 조합은 미궁에 빠진 미적분에서 벗어나 기지개 켜는 몸짓이 아닐는지.’ ‘이만한 대접이면 울음이 긴 아이도 달래줄 만한 유혹이 아니겠는가’ 당장 위 수필의 발단부만 들어도 이렇다.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이라서 그럴까 싶지만, 모든 여성수필가들이 다 이런 문장을 쓰는 건 아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글을 다듬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준다. 그녀의 문장은 감각기능을 동원한 실념주의를 바탕으로 존재의 탐구이거나 발견이고자 하는 일종의 물화를 근간으로 한다. 감각에 의해 체화된 사상은 우리의 노리에 인화되기 마련이다. 정서는 물론 사상이나 감정, 심지어는 의식까지도 의미의 고정화를 거부하고 철저하게 즉물적으로 표현된다. 이는 작가의 ‘다시 보기’, ‘새로 보기’라는 발견에의 천착이 없었다면, 생성이 불가능한 문장이다. 문장을 쫓는 작가의 눈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낯설게 하기’인 것이다.
구성상의 참신함 역시 조경숙 수필의 큰 강점이다. 작가가 내용과 사건을 어떻게 서술하느냐에 따라 독자의 감동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배열을 거꾸로 한다거나 시간과 공간을 병행한다거나 체험과 인식을 교차시킨다거나 두 개의 체험을 함께 엮는다거나 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작가는 시도한다. 문학의 아름다움은 탄탄한 구성에서 나옴을 알고 있음이다. 탄력성에의 질주다. “더할 나위 없이 늙음과 낭만은 안타까운 사랑처럼 서로 부조화된 면이 있으리라. 세월의 무게를 내려놓고 젊은 정서를 조금만 끌어오자. 활화산 같은 열정은 모양새가 아니기에 모닥불을 염원하는 겸손한 자세로 군불 지피는 듯한 정성을 가져야겠지. 나이 든 이가 낭만을 갖고자 한다면 지나온 세속의 미련과 변辯을 줄이고 용기 있게 마음 가는 대로 한발씩 다가서야 하지 않을까.”라는 인생 후반기 낭만전략이 얼마나 설득적인가. 인생에 대한 깊고 담담한 관조와 거리를 두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조망,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혀주는 위안과 인간의 정신을 고원한 곳으로 이끌어주는 깊이, 인생을 보는 작가의 세련된 고도의 성찰과 정연한 논리는 그녀의 탁월한 구성 미학에 힘입어 비장한 손맛을 풍긴다. <낭만, 너는 자유다>는 문장면에서 또는 구성적 측면에서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십 년 넘게 계속해 온 동창 모임이 있다. 오랫동안 의미를 찾지 못해 나무의 가지치기처럼 과감히 밀어냈다. 그저 같은 반이었다는 이유로 긴 세월 엄벙덤벙 이어 나간 것이 전부인 모임이었다. 뒤돌아서면 아무런 생각과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공허하기까지 한 만남이었다. 그들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에둘러 비교하며 질투와 자랑을 일삼았고 식상한 수다에 질려가고 있었다. 계속 이어가야 하나. 지날수록 회의가 컸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가지를 가지고 어리석게 긴 세월 끌고 왔던 것, 얼마 전 분별없는 행동에 선을 긋고 돌아섰다. 뜻밖에 그들도 미련, 미움, 소소한 관심이 제로 상태로 보였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랜 시간 드리웠던 그늘을 걷은 기분이었고 여유와 공백이 선물처럼 나타났다.
- <가지치기> 중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오래된 모임이나 사람과의 단절을 시도할 때, ‘정리’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조경숙은 알려진 이런 방법들과는 다른 참신한 시도로 정리를 하고 있다. ‘가지치기’에 견줌으로써 이중구조로 짠 것이다. 봄이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도로에 사다리 스카이차가 멈추고 현대판 가위손이 등장한다. 소도 잡을 듯한 묵직한 가위가 나뭇가지 사이로 과감하게 넘나든다. 가로수의 줄기가 꺾여 땅으로 곤두박질친다. 작가는 이런 가로수 가지치기의 장면을 보고, ‘추운 겨울을 견뎌왔는데 식물들이 아프다고, 억울하다고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한다. <가지치기>의 발단부와 전개부는 가지치기가 나오고, 중간쯤에서 가지치기는 사람사는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하면서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는데, 이 수필은 이런 이중적인 층위를 도모하면서도 전체적인 통일성과 변용미학을 획득하였기에 주제와 구성이 잘 매치된 좋은 작품이 되었다.
‘가지치기’는 ‘정리’에 맞대응되는 적재가 아닐 수 없다. 일물일어설에 따라 적절한 제재를 찾아낸 것도 또 그것을 제목으로 내세운 것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가지치기에서 사람의 정리로 글을 전개해 나간 것도 좋았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려는 끈질긴 시선과 보이지 않는 것도 꼭 보고야말겠다는 의지가 돋보이고, 중심사상을 새롭게 보기를 통해 구체화시키는 단락 구성이 눈길을 끈다. 결말부 담론층의 주제의식이 의미화된 부분도 압권이다. “인생 하반기다. 쓸모를 구별해야 그나마 지탱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닌가. 외출도 버거워져 간다. 나이 듦에 충분치 않은 에너지를 지혜롭게 쓰고자 한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다. 돈 명예 남과 비교하며 열망하고 인기에 연연하는 생활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고나 할까. 만약 당신 언저리에 거추장스러운 내가 있다면 서슴없이 쳐내어 나에게서 벗어나기를 희망해 본다.”에서 마지막 말, 조건절, ‘만약 당신 언저리에 거추장스런 내가 있다면’은 훌륭한 전제다. ‘가지치기’에서 ‘가치치기를 당하는’ 나를 상정하고, 그것을 흔쾌히 수용하리라는 자세는 멋지다. 작은 거인, 선비다운 풍모를 보여준다. 문학은 형상과 인식의 복합체다. 전략화된 수필문장 구성의 원리를 통해 보이지 않는 관념을 구체적으로 감각화하는 기법은 조경숙의 문학적 기량을 말해준다.
다섯 번째 검사 결과 전원 음성이 나온 후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냈다. 하루가 백 년처럼 시간이 멈춘 환경 속에서 저항할 수 없는 반복적인 생활이 이어졌다. 연속적으로 네 차례의 전원 음성이 나왔다. 드디어 해냈구나. 심장이 뛰었다. 기쁨의 눈물 속에 코호트 격리는 24일 만에 해제되었다. 봉쇄가 연장되어도 끝까지 함께 싸워준 직원들의 희생으로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병원에서 치료받던 어르신들이 건강히 돌아왔다. 그들의 손발이 되고 밥에 반찬을 얹어주는 수발이 일상이 되었다. 인간 승리였다. 치열하게 얻은 계속된 생명은 평범한 삶에서 반짝였다. 돌아보건대, 우리가 대견한 일을 해냈구나 하고 자족하는 순간 고통은 보상되었다.
시행착오 속에 삶은 흐른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앞날을 모색하면 시련은 반드시 끝이 난다. 그러나 코호트 격리는 내 생애에 한 번이면 차고 넘치는 경험이다. 같은 시련이 다시 온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우주 밖으로 도망가리라.
-<24일간의 코호트격리> 중에서-
사람은 누구나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란다. 그래서 끊임없이 삶을 뒤돌아보고 반성하고 음미하려고 한다. 조경숙 역시 지나온 세월 속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을 보며, 진정한 자기 찾기를 시도한다. 그것이 문학적 방식으로 변용되어 나타났을 때 작가에게나 독자에게나 그 감동이 증폭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필이 작가의 인품과 융화되어 문학성을 가질 때 현대인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확고한 자리매김을 할 수 있기에 본격수필창작의 네 번째 원리로 필자는 성찰의 원리를 들고 있다. 조경숙의 수필집 에 실린 수필들은 대체로 이 원리에 충실한 편이다. 어떤 수필도 성찰의 단계를 그치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중에서 성찰의 원리가 돋보이는 수필을 뽑아보자면 <24일간의 코호트격리>를 고를 수 있다. 조경숙의 수필은 진솔하기에 감동을 준다. 자기 고백과 성찰을 통해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고 그 빈 자리에 긍정적이고 신선한 삶의 활력을 심는다.
‘시궁이후궁’이라는 말이 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앞날을 모색하면 시련은 반드시 끝이 난다.’는 생각으로 전 직원이 일심 단결로 전원 음성 판결을 이끌어낸 24일간의 사투를 스스로 ‘인간승리’라고 자평하는 배경에는 ‘그 무엇’의 밖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요양원 원장의 내부에 책임과 사명을 머물게 해 그 정신적 에너지를 바이러스 방역에 쏟아붓게 만든다는 것이다. 요양원을 운영하는 동안에 코호트격리라는 환경을 맞아 병원 안에서 환자들과 함께 코로나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즐길 여유를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결말부에서 그 어려워던 24일간의 사투를 “시행착오 속에 삶은 흐른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앞날을 모색하면 시련은 반드시 끝이 난다. 그러나 코호트 격리는 내 생애에 한 번이면 차고 넘치는 경험이다. 같은 시련이 다시 온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우주 밖으로 도망가리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시행착오 속에 삶은 흐른다.’ 이처럼 조경숙의 수필은 자조나 고백적 성격보다는 관조적 성격으로 해서 문학적 향취를 가진다. 그만큼 수필 창작에 있어서 작가는 관조를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코호트격리를 통해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혜안, 즉 관조가 빛나는 작품이다.
나무와 꽃이 우거지고 대문과 벽에 담쟁이가 엉기는 집을 보면서 내 나라가 아닌 타국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창문 베란다에 걸쳐진 이름 모를 야생화에 점수를 후하게 주며 유럽 스위스 어디쯤 와 있는 사치스러운 생각으로 내 입꼬리가 위로 올라갑니다. 기억하나요. 프라하의 카를교에서 손잡고 거니는 노부부를 보자 당신은 보란 듯이 왁자하게 내 어깨에 손을 얹고 포옹하듯 감싸며 장난스럽게 웃었지요. 저편 세계로 가버린 당신, 기꺼이 돌아와 나를 안아줄런지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당신과 마주할 수 있는 몽리, 찰나만 허락되었나요. 모퉁이 집 층계마다 도열하고 있는 고무 함지와 그 속의 식물이 지금 여기를 깨우칩니다. 가느다란 고춧대가 듬성히 꽂혀 색바랜 고추를 섬기느라 애쓰고 있습니다.
-<백량금> 중에서
작가는 매서운 바람을 견디는 꽃과 나무들처럼 외로움을 견디며 살면서도 어느 순간 사라져가는 남편과의 추억을 떠올려 보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태풍 뒤에도 여전히 세상은 정돈되고 변화를 겪더라도 새로운 꽃이 피고 싹이 돋는 법이다. 꽃과 나무가 우거지고 대문과 담쟁이가 엉기는 집을 보면서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한국이 아니라 외국이라는 사실을 느끼는 작가의 태도는 확실히 그 느낌부터 남다르다. ‘저편 세계로 가버린 당신, 기꺼이 돌아와 나를 안아줄런지요.’라는 대목에서 그녀의 사생관을 확인할 수가 있다. 남편과 함께했던 유럽여행의 추억소환은 삶에 대한 사색이며 음미다. 그녀는 삶을 천천히 맛본다. 수필은 시간을 좇아가지 않고 느리게 순간을 즐기며 주위를 돌아보는 진지한 성찰 작업이어야 한다. 훌륭한 수필가는 방랑가요, 게으름뱅이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화분에 물을 주다가 먼 곳으로 가버린 남편 생각에 난 눈물 때문에 차를 몰라 어디론가를 달려가서 작가는 프라하 카를교에서 어깨에 손을 얹고 가볍게 포옹하듯 감싸며 장난스럽게 웃던 남편을 떠올린다. 층계에 도열한 식물이 ‘지금 여기’를 깨우쳐주기에 다시 정신을 차린다.
우리가 문학을 하는 이유는 ‘구원성’에 있다. 수필을 씀으로써 자신을 구원하고 작가를 구원한 작품은 작가의 품을 떠나 독자의 지친 영혼을 달래준다. 조경숙은 저 세상에 있는 수신인에게 ‘습니다체’로 편지를 쓴다. 그러나 내 안에 피어나는 아집과 헛된 욕망의 실체를 ‘보이지 않는다’의 눈으로 보게 되면 언젠가 작가의 마음자리는 안정될 것이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날들을 함께한 당신이 늘 나에게 주었던 말에 매달립니다. 주워 온 화분에 백량금을 옮겨 심었지요. 자춤거리던 생의 고비가 너그럽게 지나갑니다.’라는 대목에서 우리는 여물디 여문 지워지지 않는 사랑의 무게를 본다. 그것이 기억해줌으로써 작가가 받는 보답이며 글을 읽음으로써 독자가 얻는 이득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자아의 노력으로 극복해나가는 것이 삶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일 터, 그것을 작가는 ‘너그럽게 지나간다’는 간단한 어구로 제시하였다. 이 수필은 부부 사이의 ‘인연’이 중심이 된 추억을 그리는 글이다. 수필의 존재 가치는 인간의 삶과 함께 빛을 발한다. 문학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문학은 사회 현실 속 서로의 공유체험을 형상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인간 구원'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지루한 일상에 보편적 사물 하나가 안위를 주는 경우가 있다. 지난겨울부터 어머니가 주신 손수건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 코로나로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 입김이 서려 코와 입 주위가 콧물로 젖어 있는 느낌이다. 휴지를 마다하고 손수건을 사용하는 것은 환경을 생각하여 일회용 제품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작은 실천도 있다. 장롱에 파묻혀 있는 것보다 가방과 주머니에서 생활필수품으로 쓰며 가끔이나마 어머니의 현존을 체면 걸듯 우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
세월이란 멈출 줄 모르고 지나간 일은 그 시점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대부분의 사물은 사연을 갖는다. 당신도 손수건처럼 과거와 닿아있는 물건을 찾아내어 조우해 보는 것은 어떨까. 너그러운 용서와 위안이 필요한 것이라면 더욱 말이다.
- <손수건> 중에서
이 수필은 인간의 끊임없는 탐심을 경계하는 수필이다. 인간은 ‘비움’보다도 ‘채움’에 매달린다는 것이다. 이 수필은 비워내야 채울 수 있다는 교훈을 말해준다. 그 비어 있음의 공간은 무욕을 나타내고 있으나, 불필요를 의미하기도 한다. 작가는 필요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공존할 수 있음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다. 비움으로써 수용의 미학이 싹튼다는 진리는 누구나 안다. 이 수필의 매력은 비움의 가치를 ‘당신도 손수건처럼 과거와 닿아있는 물건을 찾아내어 조우해 보는 것은 어떨까. 너그러운 용서와 위안이 필요한 것이라면 더욱 말이다.‘라는 진술을 통해 용서의 미학을 손수건으로 연결시킨 데서 찾을 수 있다. 발견을 통한 상관화 그리고 성찰로 이어지는 창작 과정이 문학성을 구축해주기에 좋은 수필이라는 것이다. 삶의 질적 변화가 인간에게 반드시 행복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 부의 획득만큼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잊고 잃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작가가 ’슬픔이든 기쁨이든 대부분의 사물은 사연을 갖는다.‘는 입장을 통해 말하려는 궁극적 가치는 ’사물과의 사연‘으로 화해를 도모하는 데 있다.
기억의 뿌리를 움켜지고 살 수 있다는 사실은 행복한 일이다. 수필은 잊을 수 없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추억을 글로 그리는 그림이다. 잊고 있던, 기억의 저편 모습을 드러내는 여러 일들을 서정어린 그림으로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은 조경숙 수필<손수건>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묘미다. 그러나 협의로 보면, 문학은 미를 추구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수필을 쓰는 데 있어 '미의 추구'는 첫 번째 본질로 중요시되고 있다. 일상성 또한 문학의 밑바탕이 되는 요소로서 문학의 성패를 좌우한다. 대상에 대해 인정을 흘리는 일, 그리움을 갖는 일, 추억의 세계 속으로 빠져 인생을 주관적으로 바라보는 일 등이 조경숙의 주된 작업이다. 수필적 미학은 화려한 문장에 있지도 않고, 거창한 주제나 경이로운 소재에 있지도 않다. 대상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관조의 눈 속에 배어 있는 따스한 정이 독자의 누선을 자극할 때 완성되는 것이 수필미학이다. 그래서 조경숙은 정이 풍부한 사람이다. 물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볼 줄 알아야 글에 공감이 묻어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논리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수필이 <손수건>다. ‘사물과의 인연’을 맺는 자세에서 우리는 또 한 번 가슴을 매만지게 된다.
J야, 기어코 떠났단다.
어제 낮부터 갈까 말까 망설이며 준비한 짐을 들고 단호하게 집을 나섰어. 사람이 세상을 등지면 그쪽으로 가려나. 해가 지는 곳, 서해로 가기로 했지. 세상이 험악해져 여자 혼자는 무리라고 말리는데 고집을 부렸어. 당일에 돌아오지 않고 잠자고 오는 여행을 해보리라는 나와의 약속을 실행하고 싶었단다. 남편은 떠났고 이제 생을 홀로 감내해야 하잖아. 안타까워하는 이들의 눈에서 벗어나고 싶다고나 할까. 타인의 생각은 부서질 것이고 실천은 어떤 말보다 강력한 언어니깐.
창을 열고 운전하며 쏟아져 들어오는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지. 시원한 바람이 필요했어. 불안했거든. 늦가을 바람이 형상도 없이 차 안으로 들어와 퍼지고 망설임 없이 사라지네. 지금 듣는 음악 같아. 감정의 선을 올리려고 비트가 강한 음악을 틀었어. 리듬 따라 고개를 까딱이며 즐거운 여행을 하겠다고 나 자신에게 주문했지. 너도 알 거야. 외로움을 떨치고 싶은 의식적인 행위라는 것. 당진에 진입하면서 음악을 바꾸었단다.
- <속아도 꿈결> 중에서
계절의 순환과 함께 홀로 여행을 통해서 ‘외로움을 떨치고 싶은’ 모습을 보여주는 일은 자신의 입장에서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내는 큰 기쁨이기도 하다. 그 누군가의 절대적 사랑을 주었거나 받은 것은 기쁨일 수 있지만, 그분에 대한 기대에 미치지 못했거나 다시 볼 수 없는 것은 아픔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경숙의 글에 등장하는 J야는 호칭으로 보아 친구인 듯하다. ‘녹슨 낙엽이 엉겨 붙어 굴러가면 빈 들에 버려진 듯한 한기가 갑자기 몰려들기도 해. 홀로 남은 자의 쓸쓸함이겠지. 애달픈 그리움을 꾹꾹 누루고 있었던 게야. 부드럽게 휘어지는 길에 창을 열고 바람을 동무로 갈무리하니 남편이 달려들어 왁자하게 안아주는 느낌, 애욕이 남아있나. 육신이 짜르르하네.’하는 대목에서 역시 극한의 외로움 속에서 그녀는 남편을 불러내곤 한다. 그것은 그녀의 가슴 안에 그 분의 존재가 너무나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그 분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남편이 더욱 눈에 밟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달려드는 바람에 사랑하는 이의 손길을 느끼며 가슴 속에 온기를 채우는 것은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이고, 자신도 언젠가는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에 대한 준비이자 연습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보여준 작가의 그분 생각은 강한 호소력을 갖는다. 이는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종전의 광경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을 그리워하고 있음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옷가게의 스피커에서 전에 듣던 ‘옛이야기’에 잠시 숨을 멈춘다. ‘손수건만큼만 울고 반갑게 날 맞아 줘’라는 노랫말에 눈자위가 젖는다. 따뜻한 위안의 말에 감정은 한없이 펄럭인다. 세월과 함께 만성질환이 되어버린 감정의 고갈이 잠시 치유되는 짧은 시간이다. 감고당길로 매일 등교하던 때였다. 박계영 작가의 ‘머무르고 싶은 순간들’을 읽고 또 읽었다.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에 흠뻑 빠져서 현실 대부분이 낭만투성인 줄 알았다. 연애의 시작은 뜻하지 않게, 사랑은 운명적으로 오는 것이라고, 애태우는 사람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어처구니없게 동경한 때가 있었다. 감정의 확산을 막을 수 없는 십대는 그랬다.
길 끝에 정독도서관이 보인다. 인재들이 모여 학구를 불태우던 경기고등학교는 현대식 도서관으로 바뀌었다. 교정을 잠식한 나무의 연두 잎은 마음껏 흐드러지고 분수대 옆 등나무는 새순을 준비하며 엉켜있다. 오늘의 여정, 감고당길이 끝이 났다. 파란 하늘을 반사하는 햇살이 머리에 앉는다. 찰라, 어느 한순간도 머물 수 없으리니 의식할 수 있는 한, 빛을 볼 수 있는 쪽으로 몸과 마음을 두고 싶다. 가방에서 김금희의 『복자에게』를 꺼내 들고 나무 밑 의자로 향한다.
- <감고당길> 중에서 -
감고당길은 조경숙 작가가 행복한 순간을 기억하며 걸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길 중 하나다. 조경숙 수필들의 특징 중에서 가장 강한 색채를 가지는 것은 그리움의 서정성이다. 감고당은 숙종의 부인 인현왕후의 친정이었고 비운의 왕비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가 입궐할 때까지 지냈던 곳이다. 여걸들이 지냈던 터전에 세워진 학교, 덕성여중 고는 6년의 청소년기를 지낸 조경숙 작가의 모교다. 작가가 감고당길 주변에 있는 정독도서관 등나무 새순을 보면서 여고시절을 그리워하는 글이다. 그녀의 글에는 한결같이 다정다감한 인정이 녹아 있고, 그 인정으로부터 삶의 의의를 깨닫는 작가의 인간적 체취가 드러난다. 한 마디로 그녀의 작품은 인간의 내면을 흐르는 인정의 강물이다. 멋진 수필가는 제재를 가지고 주제를 겨냥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조경숙은 제재를 가지고 주제를 겨냥하는 솜씨가 보통이 넘는다. 이 작품의 결말부 마지막 멘트, ‘오늘처럼 청승이 찾아올 때, 약간의 파격을 꿈꾸는 여인으로 생의 언덕을 넘고자 한다.’는 표현은 ‘감고당길’로 상징화된 것이 젊은 시절의 추억이기 때문에 이 진술을 보면, 금방이라도 어떤 내용인지 잘 알 수 없을 것 같지만 실상 글을 전체로 소화하고 나면, 제재란 하나의 비유나 상징으로써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문학적 장치로서의 수단이나 도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입시 준비를 위한 것도, 밥벌이로 쫓기는 것도 아니니 애태울 것 없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하는 구속도 없다. 결국은 즐거워서 하는 일이다. 뒤 마려운 사람처럼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두고 끝까지 해보리라. 좋아하는 글을 계속 쓰고 또 쓰면서 노력하는 사람, 이런 이를 당해낼 재간이 있을까.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위로의 시간을 가져도 막힘은 시원스레 뚫리지 않는다.
스산한 기온 탓인가, 나는 글의 앙상함을 견디고 있다. 쓰기에 대한 혼란과 갈등의 시점을 건너는 중이다. 마음은 초조해지고 시간은 멀리 달아나기만 한다. 바라건대, 나의 라이터스 블럭Writer’s Block이 머지않아 맞을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닮았으면 좋겠다.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나단 스위프트가 늙어서 자기 작품을 다시 읽다가 ‘어느 천재가 이런 글을 썼지’ 라고 했다고 한다. 감히 그런 욕심은 없다. 다만 막힘 없이 자연스럽게 써 내려 억지스럽지 않은 글이 되었으면 싶다. 노트북을 닫는다.
- <라이터스 블럭> 중에서 -
작가들의 무서운 적, 라이터스 블록은 writer’s block·은 글이 전혀 써지지 않는 상황을 의미한다. 다만 조경숙 작가가 걱정하는 것은 막힘 없이 자연스럽게 써 내려 억지스럽지 않은 글이 되었으면 싶다는 것이다. 중고교 시간에 전통 수필이론을 배운 사람들은 거의 ‘사실대로 써야 한다’는 수필에 대한 강박증을 가지고 있다. 조경숙 작가도 약간은 그런 강박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자연스럽게 써내려 간다는 것은 강력한 제작성이나 의도성을 갖는다는 현대수필의 작법과는 약간 거리감이 들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대로, ‘좋아하는 글을 계속 쓰고 또 쓰면서 노력하는 사람, 이런 이를 당해낼 재간’은 없다.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글을 쓰는 동안에는 그 어떤 외부의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는 용기를 얻는다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의 꿈을 표현하고, 타인의 꿈과 나의 꿈이 이어지기를 소망하는 자신의 간절함을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운 비상구를 얻는 길이다. 글을 쓰는 동안만은 온갖 고통 속에서도 결코 부서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다. 막힘이 시원스레 풀리는 법은 누구에게도 없다. 이 수필의 축을 이루는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자기 응시’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수필을 통해 자기를 응시하고, 나아가 성찰을 도모한다. 종국에는 작가정신을 바로 세워 그 중심에 서고자 한다. 이러한 성찰적 태도야말로 조경숙의 가장 큰 자산임은 강조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막힘이 시원스레 풀리지 않는다’는 자기 고백적인 말이며, 이것이 결여되면 진정한 독자와의 공감대가 생기지 않는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수필이라면 조경숙의 라이터스 블록은 이런 조건에 아주 부합한다. 생각의 풍경에 담긴 작가의 수필 라이터스 블럭 안에는 수필가다운 삶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표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작가정신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해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충분한 사고와 선택의 여과 과정 속에서 진솔한 자기 노출의 호소성이 있어 성찰의 글로써 수필의 향기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하루를 시간의 관성에 의해 살아가는 데 반해 조경숙은 하루의 가치를 위해 산다. 라이터스 블럭은 사실이나 글쓰기 체험에 따른 자신의 생각이나 상념, 느낌 견해 등과 같은 감정이 문학적인 언어와 함께 나타나 있어 읽는 맛을 준다. 각각의 수필에서 보이는 조형적 특성은 조경숙 수필의 가장 강한 매력이다. 이를테면 감동을 위한 형식상의 전략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조형미 구축을 위한 전략화는 구성미학 차원에서 멋을 내고, 서두와 결말부에 놓인 비유적인 문장은 연상과 상상의 통로로 연결되어 문학의 맛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형식미를 통해 멋을 내고, 문학적인 장치 활용으로 맛을 우려내는 감동의 배가 전략은 그녀의 수필적 기량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녀의 문학적 행보에 아낌없는 지지를 보낸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또한 그녀의 향후 가능성에 대해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지도교수로서, 필자는 조경숙 작가가 자기 나름의 개성적인 색깔을 수필 속에 축성하기를 소망한다.
Ⅲ.
어쨌거나 본격수필 창작법을 익혀 구성적, 전략적, 미학적 조형성을 중시하고, 수필에 문학성을 주기 위해 일반적인 형식으로부터 탈피하여, 수필의 조형적 차원에서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 점 등은 높이 평가된다. 좋은 작품은 어떤 글이라도 복합적 통일성이라는 형식적 특성을 공유한다는 점을 전제해서 볼 때, 그녀의 이 수필집은 언어의 조직적 구조면에서 특이성을 확보, 나름의 미학적 가치를 획득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녀의 삶과 사유는 위에 열거한 가치에 따라 원칙적으로 영위되기에, 이 수필집은 카타르시스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훈훈한 향기를 안겨준다고 하겠다. 서평에서 다룬 작품만 보더라도 그녀가 얼마나 솔직하고 우아한 교양미를 풍기는 문사인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실감의 유리와 보수, 즉 프리즘의 눈으로 읽어내어야 할 개인적, 사회적, 시대적 삶의 바람직한 방향을 훌륭하게 모자이크해 내는 솜씨로 볼 때, 이 수필집은 우리 수필을 한 단계 업그래이드시킨 작품집으로 기록되어도 손색이 없겠다. 수필이 안식과 위안을 주는 데 목적이 있는 만큼 조경숙은 이런 수필의 기능과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수필의 결말부는 언제나 구도자적 자세로 반성적 성찰이 나타나고, 미학적 차원에서 반전이나 여운이 끼어든다. 그 방법은 고백 아니면 여백이다. 이 수필집이 주는 또 다른 강점 중의 하나는 개인적 체험을 보여 주는 데 있어서 가공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를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수필의 최대 매력인 고백성을 힘껏 활용하는 것은 독자를 감동의 고지로 끌어올리겠다는 강한 의지의 발로로 보인다. 작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나 단점까지도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과감하게 노출시킴으로써 이 수필집은 독자들로부터 공감을 끌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하겠다. 자연을 끌어들여 순수하고 아름다운 꿈의 세계를 아련히 그리워하는 낭만적 분위기도 연출하면서, 자연 자체에 눈길을 고정시키지 않는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연을 관조하고 거기서 깊은 명상의 세계를 얻는다. 이를테면 자연의 대상 앞에 선 작가는 자연의 완상을 즐기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라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진지한 모습의 철학자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수필은 전혀 교시적인 분위기를 주지 않으면서도 결과적으로 교시라는 문학적 기능을 손색없이 수행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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