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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37편 40절-38편 4절.
37편 40절: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38편. 다윗의 기념케 하는 시.
1절-4절: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37편 40절: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의인은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면서 깨달으면서 만들어지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산다. 이런 사람이 의인이다. 그런데 악인은 이런 삶이 없다. 환난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돕겠느냐? 그리고 환난 때 의인들은 누구의 도움을 바라겠느냐? 악인이 환난 때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겠느냐? 악인은 환난 때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의 도움을 바란다.
예수 믿는 사람이 평소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만들어지며 살면 환난 때 도와주시고 악한 자들에게서 건져주신다. 그런데 건져주신다고 하는 것을 평소에는 자기 멋대로 살다가 환난이 닥치니까 그때서야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오니 도와주소서’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도와준다는 게 아니다. 평소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사니 말씀의 힘이, 능력이, 지혜가, 도덕성이 자기 속에서 닥친 환난을 어떻게 이겨나갈 수 있는지를 알아서 그 환난을 이기게 되니 이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거다.
믿는 사람이 깨달아야 하겠는데, 교인들이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설교 한 번 듣고 제 멋대로 살다가 환난이 왔을 때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으로 알면 안 된다. 이런 사람은 육적인 면이나 물질적인 면의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오는 환난밖에 모른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과 의사적으로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 모른 채 사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육적인 환난에 놓여진 상태가 되는 거다.
우리는 평소에 말씀을 깨달으면서 자기가 태어날 때 가지고 나왔던 기존의 성질과 성격을 하나님의 것으로 고쳐나가면서 진리 자체화로 만들어 나갈 때 여기에는 하나님의 모든 지혜지식과 도덕성이 들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환난이 왔을 때 그걸 잘 대처하며 그 가운데서도 구원을 잘 이뤄갈 수가 있는 거다. 이게 하나님께서 환난 때 도우시는 거다.
‘환난’이라고 할 때 육적인 환난과, 영적 차원으로 오는 신앙적 환난이 있는데, 성도가 영적 차원으로 나간다면 여기에서는 지혜가 나오고 지식이 있기 때문에 상황에 대처하는 지혜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영적인 환난을 아는 사람은 지역적으로 환난이 오거나, 또는 국가적으로, 이를테면 전쟁이 일어난다거나, 지진이 일어난다거나 하는 외부로부터의 환난이 왔을 때 이것을 지혜롭게 잘 대처해 나갈 수 있는 거다. 예수님의 정신을 가졌으니까 사람이 부지런하지, 지혜롭지, 자기를 잘 다스리지. 그러니까 자기에게 닥친 환난을 잘 이길 수 있는 거다.
누가 이렇게 살았느냐? 아브라함이다. 그런데 롯의 경우는 소돔 성 쪽에 물질이 얼마나 풍부하냐? 그런 곳에 살면서도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로 살았다. 이게 환난이다. 하나님과 의사성을 좁히지 못한 상태는 환난이다. 이런 상태에 있을 때 이 사람에게 외부적으로 사건 환경을 몰아붙이면 그걸 못 이기는 거다. 사람이 미련하면 평화롭고 부요한 환경도 환난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의 생각과 마음을 잘 다듬고, 도덕성적으로 지혜지식성적으로 하나님의 옳은 것으로 잘 다듬어 나가면 외적인 환경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그걸 여하히 지혜롭게 이겨나간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평소에 자기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못하면 부요가 와도 넘어지고, 환난을 만나도, 가난이 와도 자기 감정폭발이 나와서 스스로 환난을 만든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어려우면 부르짖어라. 그러면 들어주신다’ 라고 하는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신앙정신 사상이 어디에 있는 거냐? 세상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를 들어주시겠느냐? 의사적으로 친근하지 못하고 친밀하지 못한데 그런 기도를 들어주시겠느냐?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의인과 ‘악인’을 말할 때 의인들은 일반적인 좋은 행동만 하고, 악인은 나쁜 행동만 하는 것으로 알면 안 된다. 교훈적인 측면에서, 정신 사상적인 측면에서 진리본질의 교훈을 받으면서 생명 길,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은 의인이다. 이 길에서 이탈해서 세상을 목적하며 넓은 길로 인도하고 그 길로 가는 사람은 악인이다. ‘의인과 악인’을 일반기준으로 생각을 하면 성경을 깨닫기가 힘들어진다. 성경을 못 깨달으면 자기를 못 보기 때문에 자기 마음을 못 고친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성경을 가르쳤다. 그런데 이들이 가르친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것과는 다르다. 예수님께서 이런 그들을 향해서 선한 자들이라고 했느냐, 악한 자들이라고 했느냐? 악한 자들이라고 했다. 얼마나 악한지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했다. 바리새파 교인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을 가지고 말을 했고, 예수님 역시 성경말씀을 하신 것인데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무엇이 달라서 그런 저주의 말씀을 하셨을까? 세례요한은 ‘독사의 새끼들아’ 그랬다. 그러니까 신앙의 세계에서는 제일 중요한 것이 교훈이다. 교훈분별을 잘 해야 한다.
일반 세상 사람들을 보면 ‘너는 네 방식대로 살고 나는 내 방식대로 살자’ 라고 하기도 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에도 진리본질의 옳은 말씀을 주면 이걸 받으려고 하지 않고 ‘너는 네 방식대로 믿고 나는 내 방식대로 믿으면 서로 편하지 않느냐?’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가 진리본질에서 많이 이탈이 되었다. 예수를 믿는다면 진리본질로 바로 믿어야 한다’ 라고 하면 ‘왜 그렇게 골치 아프게 믿느냐? 너만 잘 믿는 거냐? 네 말대로라면 오늘날 교회가 다 잘못됐다는 거냐?’ 라고 한다. 이 말을 생각을 해 봐라. 이게 진리이치의 말씀을 바로 들은 거냐, 잘못 들은 거냐? 잘못 들은 거다.
진리본질의 말씀을 들을 때 자기의 신앙양심에서 ‘옳다’ 라는 생각이 들면 ‘내가 그동안 잘못 믿어왔구나. 지금부터라도 다시 믿어야 되겠구나. 고쳐야 되겠구나’ 이렇게 해야 되겠는데, 옳은 진리말씀을 들어보니 자기 교회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교회들이 딴판으로 나가는 것이 보여지거든. 그러니까 ‘네 말대로라면 오늘날 교회가 다 잘못됐다는 말이냐?’ 라고 하면서 반발을 한다. 생각을 해 봐라. 한 사람이던, 전체 교회이던 진리본질에서 이탈이 되었으면 잘못된 거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이다. 자기가 진리에 대해 반발을 한다고 해서 자기는 진리와 상관이 없게 되는 거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더냐? 교훈의 목적이 무엇이더냐? 우리에게 기본구원을 입힌 것도 하나님의 본질로 만드심이고, 우리를 하나님의 온전으로 만드시는 것도 하나님의 본질로 만드시는 거고, 성도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훈련 연단을 시키시는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온전으로, 하나님의 단일성으로 만드시기 위함이다. 이 모두가 하늘나라의 신령한 성질 성격 성분들이다.
마지막 시대의 많은 교회들이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자’ 라고 하면서 세상에 소원 목적을 두고 믿고 있는데, 이런 세상 물질성에 속한 정신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너는 네 식대로 믿고 나는 내 식으로 믿고 천국에 가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면 이 말이 예수님께 통하겠느냐? 자기의 신앙의 질이 예수님과 통하면 선이고, 안 통하면 악이 분명한 거다. 하나님의 것과 질적으로 통하면 선이고, 안 통한다면 악이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신앙지식이 분명해야 한다. 먼저는 옳은 이치, 옳은 신앙지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옳은 신앙지식을 기초로 해서 열심이 나오기도 하고, 부지런이 나오기도 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신행(信行)이다. 이렇게 진리에서 나온 행동이 진실이다. 이게 신앙이다. 이게 아니면 아무리 ‘믿사오니’ 해도 신앙이 아니다. 이방 신을 믿는 것과 같은 정신밖에 안 된다.
이방 신을 믿는 데는 바른 기준이 없다. 그러면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 인간 자기 행동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것은 자기 행동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의 언행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춰 들어가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에 맞춰 들어가는 것만큼 신앙이고 옳은 거다.
38편. 다윗의 기념케 하는 시.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는 기념을 하는 것이 있다. 국가적인 기념일이 있고, 학교 개교기념일도 있고, 결혼기념일도 있다. 좋은 기념이던 슬픈 기념이던 왜 기념을 하는 거냐? 그 이유는 그 날을 상기해서 잊지 말자는 거다.
그런데 38편은 ‘다윗의 기념케 하는 시’라고 되어있는데, 이 시를 쓰는 다윗은 자기가 죄를 지어서 대책 없이 얻어맞고 발발 기면서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을 기념한다는 거다. 그러면 다윗이 이 기념을 하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무슨 마음으로 이 기념을 하고 있을까?
다윗의 이 기념 시를 읽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슨 마음이 들까? 1. 나도 다윗과 같은 죄를 짓고 다윗과 같이 기념을 해아 되겠다? 2. 다윗이 잘 얻어맞았다고 본다? 3. 나도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러니 삼가 조심하고 나를 진리로 잘 다스려야지? 4. 나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 어느 거냐? 3번째냐?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눈이 글자를 따라가듯이 마음도 그 내용을 따라가야 한다.
1절: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노하시고 징계를 하실까? 우리가 영과 육으로 무슨 죄를 짓든지 하나님께서 가만히 내버려 두시지 왜 일일이 꼬치꼬치 따지고 간섭을 하고, 때로는 불간섭하기도 하고, 병도 주고, 사건도 주고, 또 어떤 사람은 죽여서 데리고 가는 걸까? 나와 여호와 하나님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렇게 하시는 걸까? 일단 태어났다면 그냥 두지 왜 간섭일까?
자기는 하나님의 간섭을 받는 게 싫으냐? 짐승들은 간섭을 안 받느냐? 간섭을 받는다. 본능적으로 간섭을 받는다. 짐승들에게는 우리 인간들처럼 하나님을 닮으라고 간섭을 하는 것은 아니로되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잡아먹는 세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약한 짐승은 본능적인 어떤 꾀를 내도록 해 놓으셨다. 그러나 인간 자기는 짐승과 다르다. 인격성을 가진 자로, 도덕성을 가진 자로, 자유자로 지었다. 그러면 자기를 왜 짐승과 다르게 지었을까?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보면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는데, 왜 하나님을 닮은 자로 만들었으며,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오셔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하늘로 올라가시고, ‘다시 오마’ 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믿는 우리는 분명히 천국에 갈 자다. 우리가 갈 신령세계는 공의의 세계이고 공평의 세계다. 행한 대로 거두는 세계다. 영능의 실력대로 존귀영광에 격자가 나는 세계다. 이것을 염려하셔서 당신의 백성이 이 땅에 살면서 이룰구원에 게으름을 피면 분노하고 징계를 하신다. 이는 아이가 자랄 때 부모가 간섭을 하는 것과 같다. 부모는 어린아이에게 간섭을 많이 해야 한다. 간섭을 하되 부모 자기 기준에 맞추려고 하지 말아라. 어린아이를 마마보이로 만들어 놓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요즘 젊은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것을 보면 개성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도무지 간섭을 안 하고 제 멋대로 자라게 하는 걸 본다. 이거 못 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간섭을 하시는 것은 ‘너는 나와 영원히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요 사랑의 제 1 목적물’이라고 하는 사상이 들어있다. 이것이 아니라면 여호와 하나님은 폭군이 되는 거고 악마밖에 안 되는 거다.
2절: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사람의 살을 찌르면 어떤 반응이 나타나느냐? 찌르는 것이 사람의 배를 뚫으면 그 사람이 죽을 것이고, 안 죽을 만큼 찌르면 상처가 나고 그 고통이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약하게 찌르면 깜짝 놀라면서 움찔 움찔 할 거다. 우리가 살면서 깜짝 깜짝 놀라는 일이 없느냐? 우리는 하나님께서 찌르는 것에 민감해야 한다.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사람을 누르면 어떻게 되느냐? 찌그러진다. 숨이 막힐 것이고 답답해서 몸부림을 치게 된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가 어떤 연유로 해서 몸부림을 치는 일이 없느냐? 사건과 환경이 와서 사람을 누르는 것도 있고, 빚쟁이가 와서 사람을 누르는 것도 있고, 많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3절: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아마도 다윗이 종기로 인하여 진물이 나오고, 고름이 나오고, 온 뼈마디가 쑤시고 아파서 신음소리가 나오는 것인데, 이것이 다윗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하여 온 것이라고 실토를 하는 거다. 우리도 살면서 한 번도 안 아파 본 사람이 없을 텐데, 자기가 몸이 아플 때 ‘내 죄로 인하여 이 병이 왔구나’ 라고 한 번이라도 느꼈느냐?
우리가 다윗이 범죄를 한 후에 많은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고 있다. 솔로몬이 태어나기 전에 솔로몬의 형이 죽어나갔고, 배 다른 형제들끼리 강간이 있었고, 그 강간으로 또 배 다른 형제끼리 살인이 일어났고, 아들의 반역이 있었는데, 이런 일들이 있은 후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몸을 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윗은 고통 중에 빠져버렸다. 다윗이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것을 볼 때 아마도 다윗에게는 몸 밖의 사건도 왔고, 몸 안의 사건도 왔을 거다. 다윗의 머릿속에는 이 고통을 평생토록 기억하고 있었을 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왜 이렇게 심하게 치실까?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냐? 사랑이 아니라면 죄를 짓는 즉시에 그 자리에서 쳐서 죽일 거다. 그런데 살려두고 징계를 하시는 것은 고치게 하려는 거다. 그 이유는 신령천국의 누림성이 있기 때문이요, 이 누림성은 영인성장과 영능의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성화구원으로 나가게 하려고 강력한 사랑을 쏟으심이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알아야 한다. 자기에게 환난과 고통이 왔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징계를 하시는구나’ 하고 깨닫는다면 원망이 나오겠느냐, 감사가 나오겠느냐? 감사가 나온다. 계속 두들겨 패도? 그런데 이런 게 있다. 어린아이가 잘못을 해서 엄마가 두들겨 패면 ‘아야, 아야’ 하면서도 잘못했다는 말을 안 하고 있으면 엄마가 더 세게 두들겨 팬다. 그러면 아이가 말로는 잘못했다고 하지만 그 마음 속에는 독을 품는 일이 있는 것처럼 교인들 속에도 이런 게 없느냐?
자기가 고통을 당할 때 신앙 양심적으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도 지금보다 좀 더 형편이 나아지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하는데도 이 고통이 계속되면 기도를 해도 안 들어주시는 것 같고 해서 자기 속에서 뭔가가 올라오는 게 없느냐? 그래서 속으로 ‘에이, 교회에 나가기도 싫고, 예수 믿어봐야 소용이 없다’ 한 일이 없느냐?
이런 차에 자기 몸이 아프면 교회에 나올 수 있을 정도인데도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에이, 몸이 아파서 오늘 교회에 안 나가야겠다’ 한 때가 없었느냐? 이럴 때 아닌 말로 하나님께서 교회에 나오지 못할 정도로 자기 몸을 두들겨 패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러잖아도 교회에 나가기 싫은데 잘 됐다’ 하면서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떳떳하게 교회에 안 나올 게 아니냐? 이렇게 하며 이런 저런 핑계로 몇 주 동안 교회에 안 나오게 되면 ‘마침 잘 됐다’ 라는 식으로 교회와 멀어지게 된다.
이렇게 하다가 하나님께서 정말로 아예 교회에 못 나오도록 만들면 어떻게 하려느냐? 이게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거다. 그때서야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 라고 하면서 교회에 나가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못 나가게 하시면 어떻게 되는 거냐? 이러는 사이에 시간이 지나갔지, 나이는 더 먹었지, 이룰구원에 손해만 봤지. 정말 힘들어지는 거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빠지면 안 된다. 하나님 앞에 늘 솔직해야 한다.
4절: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죄를 지으면 마음이 무겁다. 머리 위에 무거운 짐을 올려놓으면 혓바닥이 눌리는 것 같다. 눈알이 튀어나오는 것 같다. 목이 옆으로 휘어지기 시작한다.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터질 것 같다. 그래서 팍 주저앉아 버린다. 이럴 때 자기가 편해지려면 계속 그러고 있어야 하겠느냐, 짐을 내던져 버려야 하겠느냐? 내던져 버려야 한다. 무거운 짐을 이고 그대로 그 무게의 의해서 주저앉게 되면 사람이 어떻게 되겠느냐?
다윗이 자기를 생각할수록 죄 투성이다. 죄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다윗이 스스로 생각해 보니 죄가 아닌 것이 없다. 단순히 행동에서 죄를 찾는다면 선하게 보여지는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사 단일성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기준해서 볼 때는 다윗이 생각하고, 마음먹고, 가치판단 평가한 것이 죄가 아닌 것이 없으니 머릿속에 온통 죄가 가득하다. 그래서 머리가 그렇게 무겁다는 거다.
사람의 머릿속에 세상성, 물질성, 욕심, 탐욕, 시기질투, 누림성 등이 가득 들어있으면 걱정 근심 속에 빠지게 되고, 이렇게 되면 머릿속이 터져 나가는 거다. 뭐가 그렇게 속에서 난리를 치는지 머릿속이 터져 나간다. 이런 일로 인해서 밤새 잠도 못 자고 머릿속이 터져 나가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겪어봤느냐? 겪어봐야 한다. 겪으면서 고치면서 사람이 발전이 되게 되어있다. 겪고 고치고, 겪고 고치고 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바로 서는 거다.
사람이 날 때부터 의로운 사람으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죄를 안 짓느냐? 이런 건 없다. 겪어야 자기를 살피고, 또 넘어진 사람을 보고도 깨닫고, 남이 얻어맞는 것을 보고도 깨닫고 해야 한다. 이럴 때 진리를 아는 중에 겪는 것과, 모르는 중에 겪는 것과는 천지차이가 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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