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에서 시민으로 강등된 이후, 어릴적에 앉았던 옥좌를 바라보며 회상에 젖는 노인 溥義...
이 씬(scene)은 영화 '마지막 황제'의 마지막 장면으로서, 감동 만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그의 삶을 되돌아 보도록 하자!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義-부의)...
그는 1908년 불과 3세의 나이에 서태후에 의해 황제에 등극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모두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교육을 받고 신처럼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3년 후 신해혁명으로 인해 청조는 붕괴하고 중화민국이 성립된다. 그러나, 갑작스런 변화는 사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 중화민국 정부는 푸이에게 황제에 대한 예우 조건으로 일정한 돈을 주면서 황실을 유지해나갈 수 있도록 해주어 푸이는 계속 자금성 안에서는 황제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어린 푸이의 삶은 그리 큰 변화가 없어 푸이는 밖의 정세를 거의 알지 못하고, 계속 중국의 황제인 줄로만 알게 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된 푸이는 중국의 국내외 정세에 관심을 갖고 각종 신문의 사설을 읽어가며 사정을 파악하게 된다. 푸이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가정교사 죤스톤이었으며, 결혼 후에 죤스톤은 그의 보좌관 역할을 한다.(참고로, 죤스톤이 친일파였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1924년에 당시 군벌이었던 풍옥상의 부대가 자금성을 포위하고 푸이에게 자금성에서 떠날 것을 요구한다.
자금성에서 쫓겨난 푸이는 명목상 평민으로 돌아가지만 풍옥상 부대의 감시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끼고 죤스톤의 도움으로 천진의 일본 영사관으로 피신을 하게 된다.
하지만 만주사변(滿洲事變) 때 일본군에 의해 몰래 끌려나와 1932년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집정(執政), 1934년 왕이 되었다. 푸이는 1935년과 1940년에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일본에서 일본황제를 만나고 돌아와서는 만주국이 허울만 좋은 꼭두각시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고립된 만주국, 일본군은 푸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비행기로 탈출을 꾀한다. 하지만 황후로 인해 우왕좌왕하는 순간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하바로프스크에 억류되었으며,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 때 증인으로 출두하였다. 1950년 공산정권하의 중국에 송환, 중국 공산당들은 푸이를 전쟁포로로 체포하고 심문하였으며 푸이는 긴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1959년 특사로 풀려나와 식물원 정원사로 일했다. 그러다가 1964년 인민정치협상회의(人民政治協商會議) 전국위원(全國委員)이 되었으며, 저서 《나의 전반생(前半生)》을 출판하였다. 이 책 《나의 전반생》은 감독 B.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로 영화화되어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1967년 10월 16일 사망 후 베이징 시내의 팔보산(八寶山) 공동묘지의 인민납골당에 유해가 안치되었다가, 1980년 5월 팔보산 혁명공묘(革命公墓)로 옮겨졌고, 1995년 1월 26일 베이징 남서쪽 허베이성[河北省] 이현[易縣]에 있는 청나라 황릉(皇陵)으로 이장되었다. 이로써 사망한 지 28년 만에 푸이는 청나라 황제로 복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