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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전라북도 옥구군 출생이다. 군산고등보통학교를 4학년 시절에 중퇴하였다. 한국 전쟁으로 인한 전란 시기였던 1952년 일본 조동종의 군산 동국사에 출가하여 중관학 권위자인 중장혜초로부터 일초(一超)라는 법명을 받고 불교 승려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경기도 강화 전등사 등의 사찰에서 참선과 방랑을 거듭하며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1958년 조지훈과 장만영과 서정주의 공동 추천으로 인하여 《현대문학》에 〈폐결핵〉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1960년대 초에 본산 주지, 불교신문사 주필 등을 지냈고,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을 내고 1962년 환속하여 본격적인 시작활동에 몰두하게 되었다.
고은의 문학적 성향은 〈문의 마을에 가서〉를 낸 1974년을 기준으로 크게 둘로 나뉘는데, 그의 전기 시들은 허무의 정서, 생에 대한 절망, 죽음에 대한 심미적인 탐닉이 주를 이루는 반면 후기 시들은 시대상황에 대한 비판과 현실에 대한 투쟁의지를 담고 있다. 그 뒤 '자유실천 문인협의회' 대표로 행동주의 관련 체제 면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1983년에, 14년 연하녀 이상화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와 결혼한 그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자주 거론되고 있는데, 실제로 2005년 이후 여러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 되기도 하였다.
학력
미룡국민학교 졸업
군산고등보통학교 중퇴
2010년 단국대학교 명예문학박사
***시인 고은이 성폭력을 저질렀던 사건. 대한민국의 미투 운동을 통해 수면 위로 떠올랐다.
2. 진행 과정
2.1. 과거의 성추문과 가짜 고은 사건[편집]
고은의 성폭력 의혹은 미투 운동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이미 그가 문단에 등단한 직후부터 고은의 성추문에 대한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60~70년대에 고은이 폭음을 하며 성폭력과 기행을 일삼은 탓에 일부 문인들이 그를 실제로 경찰에 고발하는 등 여러 차례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당시 고은의 성추문은 2018년 미투에서 폭로된 것처럼 단지 성추행이나 성기 노출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훨씬 심각한 수준의 것들이었다.
그는 당사자 여성만 아니라 한 가정과 동료문인까지 파멸시켰다. 시인이자 러시아어, 일본어 번역가 구자운은 환속하여 세상에 나온 고은에게 호의를 베풀어 그를 자기 집에서 먹고 자게 해줬는데 고은은 그 은혜를 구자운의 아내와 간통하는 걸로 갚았다. 구자운의 부인은 자녀들을 버리고 떠나버렸고 본래 다리에 장애가 있었던 구자운은 아들 둘과 남겨진채 폭음으로 고통을 달래다 위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진짜 사이코 스릴러는 이 다음인데 문상객들이 찾아가보니 고은은 자기 때문에 가정이 박살나고 요절한 시인의 시신 옆에서 사발에 막걸리 부어놓고 젓가락으로 두들기며 반야심경을 읊고 있었다고 한다.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13>비운의 시인 구자운 소설가이자 동서문화사 사장인 고정일의 폭로
이 무렵 등장한 것이 당시 문단에서 널리 회자된 가짜 고은 사건이다. 고은은 자신의 기행과 성폭력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극구 부인하며 자신를 사칭한 '가짜 고은'의 짓이라고 말했다. 고은 본인의 기억에 따르면 '가짜 고은'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1년이라고 한다. 이어 1962년 고은이 종단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환속하자 '가짜 고은'도 머리를 기르고 환속한 세속인 차림으로 고은 행세를 하고 다녔다. 고은이 밝힌 환속 이유를 다룬 1963년 경향신문 기사에는 '가짜 고은'이 전국 각지에서 갖가지 범죄를 저지르고 다녀서 수배령이 내려졌으나 체포하지 못하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하나의 전쟁이 사소한 발단으로 시작되듯이 그의 환속도 사소한 데서 고려되었다.
작년과 금년 사이에 가짜 고은이 생겨나서 서울을 중심으로 김천, 여주, 대전, 제주, 수원, 대구 등지를 비롯해서 각 산중사원에서 갖은 비행, 부녀농락, 협박, 사기, 가짜약혼 등을 하면서 명예가 훼손됨으로써 화가 났지만, 중부서에서는 전국적으로 수배하고 있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그 가짜는 정부고관댁을 방문해서 사기행각을 하였다. 이렇게 신변의 인격이 구석구석에서 타락하기 때문에 그는 날마다 우울하였으나 한편 마음대로 해먹으렴 하고 잠자코 있었다.
아무튼 그는 현 종단의 형성내질이나 아직도 봉건적인 운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외부적인 것보다 자신의 비승려성을 발견하고 나서 환속할 것을 홀연히 결심한 것이다.
경향신문 1963년 8월 3일자 3면 《시인 고은은 왜 환속했나》
이렇게 전국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가짜 고은'이 나타나 추행과 기행을 일삼자 '가짜 고은은 홍길동'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생겨났다. 이에 진짜 고은은 '가짜 고은'이 한두 명이 아니라면서 자신의 유명함을 한탄하기도 했다. '가짜 고은'의 악행은 갈수록 대담해져서 서울에서는 모 대학 영문과 졸업반인 여대생과 결혼하고, 제주도에서도 충남대 가정과 출신의 여자와 동거하는가 하면, 계룡산에서는 공주지방의 문학청년들의 추앙을 받으며 금품 수취도 일삼으며, 각종 사기행각을 벌였다. '가짜 고은'의 악행 때문에 진짜 고은이 억울하게 가해자로 몰려 죽도록 얻어맞은 적도 여러 차례라고 한다.
인터넷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가짜 고은'은 신통하게도 진짜 고은의 지방 스케줄을 척척 알아내어 경주, 김천, 충 남 등 각지에서 열린 백일장, 한시대회 등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여 추행과 기행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공교롭게도 '가짜 고은'이 이런 물의를 일으킬 때마다 진짜로 초청받은 '진짜 고은'은 무슨 사정 때문인지 행사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지방 문인들이 고은을 고발하기도 했다. 고은은 이에 대해 '가짜 고은'의 소행이라고 계속 강변하였다. '진짜 고은'은 이런 신출귀몰하던 '가짜 고은'을 붙잡기 위해 기를 썼다고 하지만, 문학 관련 행사장에 수없이 나타난 '가짜 고은'과 좀체로 마주치지 못했다.
고은의 주장에 의하면, 이런 신출귀몰하던 '가짜 고은'이 잡힌 것은 두 차례였다고 한다.
첫 번째는, 제주도에서 지역 유력자의 딸과 사기 결혼한 '가짜 고은'이 검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검거 시점에 대해서는 고은 스스로도 증언이 오락가락한다. 어떤 인터뷰에서는 1963년의 일이라고 하며, 다른 인터뷰에서는 1968년의 일이라고 했다. 체포 정황에 대해서도 본인이 직접 체포했다고 하기도 하고, 붙잡혔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8년에 직접 체포했다는 회고는 후술하는 두 번째의 서울에서의 체포 이야기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개연성이 높은 회고에 의하면, 고은은 잘 알려진 대로 1963년 목포발 제주행 배에서 세 번째 자살 시도를 하려다 실패해서 제주도 산지항에 도착했다. 그의 제주 방문은 이때가 세 번째[1]였는데, 그가 이번에는 제주도에서 눌러 살려고 왔다고 밝히자 제주일보 등 지역 언론에서 '진짜가 나타났다'는 기사를 실으며 이전에 누군가 고은을 사칭해 사기 결혼을 했다가 들통나 붙잡혔다고 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 사기 결혼 이야기와 사칭범 검거 사실은 고은의 주장 외에는 다른 객관적인 자료(언론기사, 사건기록, 관련자 증언 등)로 검증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오히려 고은이 환속하기 이전 아직 승려 신분으로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2] 한 여자와 사실혼 관계까지 치달았다고 주장한다. 사기 결혼 이야기는 이 과거 행적을 둘러대기 위해 꾸며냈다는 것이다. #
두 번째는, 서울에서 활개치던 '가짜 고은'을 종로3가 백궁다방[3]에서 형사와 함께 검거했다는 것이다. 고은은 이 사건에 대해서도 1970년대 중반의 일이라고 했다가, 1968년의 일이라고 하는 등 증언이 오락가락했다. 그래도 이 사건은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1968년에 일어난 사실로 확인되며, 1970년대로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기억 착오로 보인다.
▼ 2일 서울 성동경찰서는 S출판사원 전의섭씨(32, 서울 성북구 삼양동)를 잡아 즉결 심판에 돌렸는데…
▼ 전씨는 시인 고은씨(33)로 행세하면서 주로 바람난 문학소녀들을 꾀어내 농락하고 다녔다 는 것으로…
▼ 이 바람에 진짜 고씨는 난데없이 알지 못하는 여자들로부터 다정한 전화와 편지를 받고 당황하곤 하다가 지난 28일 모 여선생 과 만나기로 돼있던 다방에 형사와 함께 나가 전씨를 붙잡았다고…
▼ 철창 신세가 된 전씨는 자기의 승명이 「고운(高雲)」이라 『고운입니다』하면 여자들이 으레 「고은」인줄 알고 따라다니더라고 극구 변명…
동아일보 1968년 10월 2일자 3면 《휴지통[4]》
고은과 지인들은 이 당시의 정황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한 뒷이야기를 전한 적이 있다. 검거 당시 이 '가짜 고은'은 시인을 사칭한 사기를 노모를 모시는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었으며, 심지어 대학 영문학과 졸업반 여성과 관계를 갖고 결혼까지 한 상태였다. 체포된 '가짜 고은'은 진짜 고은에게 감옥에 가게 되면 어머니와 아내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하고, 사기결혼을 한 그의 아내도 '남편을 새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눈물로 호소하였다고 한다. 고은은 이를 딱하게 여겨 고발장을 찢은 뒤, 술을 사주며 따귀만 두어 대 갈긴 뒤에 용서를 해주었다고 한다. #1 #2 이는 고은의 호방하고 따뜻한 인격을 보여주는 미담으로 회자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동아일보 기사를 자세히 보면 '진짜 고은'이 '가짜 고은'을 잡고서도 용서해줬다는 미담도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우선 실명까지 적시된 이 '가짜 고은' 전씨는 전업 사기꾼이 아니라 직장인(출판사 직원)이었다. 자기 직장이 버젓이 있는데 생계를 위해 전업 사기행각을 벌였을 가능성은 낮다. 또한 기사에는 그가 즉결심판에 처해졌다고 나온다. 이것은 죄질이 경범죄 수준으로 미미했음을 의미한다. 이때 잡힌 '가짜 고은' 전씨가 1960년대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사기, 혼인빙자간음 등으로 이미 수배가 내려진 당사자였다면, '진짜 고은'이 고발장을 찢건 말건 무거운 형사처벌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는 출판계에 종사하던 범인 전씨가 이름이 익은 관련 문인들을 사칭하며 사기 데이트를 벌인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가짜 고은' 이야기가 100% 거짓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당시 고은에 얽힌 수많은 기행 및 범죄행각이 모두 '가짜 고은'의 소행이라고 보기에는 명쾌하게 설명되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 1968년 '가짜 고은'이 검거되었지만 이후에도 수년간 '가짜 고은'의 출몰은 끊이지 않았다. 이문열은 고은을 모델로 한 것으로 유명한 소설 사로잡힌 악령에서 이러한 고은의 해명을 빗대어, "해방 뒤 이 나라에는 가짜 백작사건까지 있었지만 가짜 문인이 있었다는 말은 그의 연보나 자서전 이외에는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거기다 그 소동이 있었다는 60년대 중반만 해도 그의 지명도는 전국적으로 가짜가 돌아다닐만큼 높지도 못했다. 그 전에도 그 뒤에도 그보다 지명도 높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는데 어째서 그들에게는 한 번도 그같은 가짜 소동이 없고 그때만 해도 그리 대중적이지 못하던 그에게만 집중적으로 가짜 소동이 일어난 것일까."고 꼬집었다.
결국 '가짜 고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1960~70년대 초까지 고은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소문이 계속 늘어나자, 당시 고은이 몸 담고 있던 순수 문학계는 점점 그를 배척하였다. 이에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낀 고은은 다시 네 번째 자살시도를 했다. 1970년 무렵 북한산 정릉 계곡에서 수면제 100여 알을 먹고 잠들었으나, 마침 주변에서 훈련하고 있던 예비군들에 의해 발견되어 북한산 입구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져 다음날 30시간만에 깨어났다. 다행히 그의 주머니 속에 다소간의 돈이 들어 있었던 탓에, 이 돈으로 병원비를 지불하고 그를 입원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외진 병원이었지만 어찌 알았는지 최인훈 등 동료 문인들이 병문안을 와서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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